THE PKIST
백영희 신앙노선의 오늘을 고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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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br/>1. 백 목사님 사후 대구와 부산 공회의 분리 과정<br><br><br>(1) 분리에 이르는 배경<br><br>- 대구 공회의 중심 세력<br><br>대구 공회가 부산 공회와 분리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심 역할을 하며 최종 결정을 했다 할 정도로 책임이 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실명 거론은 곤란하나 당시 어느 정도 아는 분들은 다 알고 계실 것이므로 직접 주변에 물어 보기 바랍니다. 대구 공회라는 이름의 이 노선 이탈 움직임을 하나로 묶고 그들에게 이론과 실무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동력과 법적 제도적 이론을 제공한 분입니다. 백 목사님 생전부터 공회의 교훈은 좋으나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몇 가지를 고쳐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 생전에는 백 목사님 때문에 불가능했으나, 백 목사님 사후 바로 총공회 전체를 상대로 백 목사님 없는 앞날을 위해 행정 체계의 변경 등을 추진했습니다. <br><br><br>- 백 태영 목사님<br><br>보통 백 목사님 사후의 총공회 지도부라고 할 때는 백 태영 백 영익 백 영침 인산의 이 재순 목사님 등을 듭니다만 이 분들 중에 중심은 분명히 백 태영 목사님입니다. 백 태영 목사님은 오래 전부터 경제적으로는 ‘쓸 만큼 쓰는’ 분이어서 일반 교인들이 볼 때는 경제 면에서부터 기타 행정 면에서 넓은 표시가 분명하게 났습니다. 그래도 백 목사님의 동생이라는 점과 목회 실적이 뛰어 난 점 또 매사 강력하게 활동하는 분이어서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백 목사님 다음으로 이끌리는 상태였습니다. 백 태영 목사님은 현재 잠실동 교회의 현황에서 보듯이 눈으로 보이는 부흥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었으나 백 목사님 생전에는 목사님 앞에서 겨우 참고 있었습니다. <br><br>언젠가 백 목사님의 후계를 기다리던 1982년에 백 목사님은 73 세로 중병을 앓았고 거의 돌아 가신다고 생각되던 시점에 다시 건강을 찾고 이후보다 더 건강하고 강하게 공회를 이끌고 나가시며 백 태영 목사님보다 더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더 이상 백 목사님의 사후를 기대할 수 없었던 백 태영 목사님 사후를 기다리지 못하고 84년에 교역자 회의 공석에서 백 목사님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했고 이후 점점 강하게 반발하다가 1988년의 송 용조 목사님의 탈퇴 건 등이 이어지게 되고 공회 전체 목회자 대부분이 술렁거리자 총공회 행정의 전면 개편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br/><br/>이 때에 공회 전체적으로 백 태영 목사님만큼 영향력은 없다 해도 속으로는 치밀하고 매사 지혜로운 백 영익 목사님이 백 태영 목사님 뒤에서 거의 모든 일을 지도하게 되는데, 백 태영 목사님은 성격이 단순하여 영익 목사님께 충동 받은 대로 공회 전면에 나섰던 것입니다. 심지어 백 목사님 면전에서 고성이 터져 나와 폐회 기도를 하지도 못하고 교역자 회의를 흩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백 태영 목사님의 이의에 심적으로 동조하고 있었고 일부 이 노선을 찬성하는 분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과거 총공회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쪽이어서 언제 그런 주장이 뒤집힐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백 목사님께 직접 공격이 쏟아졌고 백 목사님은 곧 가실 때를 알았기 때문에 직접 야단을 쳐서 본 자리에 돌려 놓던 예전과 달리 백 목사님 없는 상태를 백 목사님 생전에 미리 만들어 살 자들은 살고 노선을 떠날 사람들은 자기 길로 가게 했습니다. 백 목사님으로서는 기를 만큼 다 길러 놓았기 때문에 앞날은 각자와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br/><br/>이런 상태에서 백 목사님이 갑자기 돌아 가시니까 대구 공회의 변경을 설계한 분이 총공회 전체의 개혁 개편의 방향을 가르치고 구체적 단계를 밟도록 끌었으며, 총공회 전체 목회자와 지교회 대부분에게 백 목사님 사후 제일의 위치로 나타나고 있던 백 태영 목사님은 백 목사님 생전에 이루지 못한 모든 뜻을 다 이룰 수 있다고 보고 그런 길을 만들도록 백 장로님의 탁월한 식견과 힘이 필요했고 공회는 그 방향으로 힘 있게 나가고 있었습니다. <br/><br/><br/>- 공회 전체 분위기<br/><br/>아다시피 목회자가 조용히 끌고 나가면 일반적으로는 교회가 전부 목회자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목회자들의 입장으로 말하면, 백 목사님 생전에 매월 교회의 출석 보고로 충성을 점검 받는 것으로부터 매월 기도실 생활 몇 회까지 그리고 교인들에게 과도히 대접을 받거나 사례를 받는 것까지 또 외부 교단에 세미나를 가고 싶어도 다 막아 버리는 것에 목회자들은 다 답답함을 느꼈고, 찬송가나 남녀 분리 등 일반 교회와 달리 재미 있게 목회를 해서 부흥을 시킬 수 있는 모든 종류를 다 막고 오직 기도 전도 심방 말씀으로만 충성하고 부흥을 시키도록 하니까 목회자들이 외부 교단을 늘 마음 속에 두고 마음이 콩 밭에 있는 꿩처럼 되었습니다. <br/><br/>더러는 교인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다 책망도 받고 더러는 같은 지방 목회자들끼리 제주도로 놀러 가려다가 목사님께 집단 책망도 받는 모습도 보였는데, 마치 어릴 때는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던 주일 학생 시절의 아이들이 십대를 거쳐 20대쯤 되어 지면 매사 반발기가 있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이 노선 이 복음에 은혜 받은 초창기는 모든 목회자들이 천하가 우습고 오직 이 노선밖에 없었다가 수십 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 노선에 대한 새로운 맛은 많이 없어지고 그냥 이 노선은 굉장하다는 추상적 가치만 알고 그 대신 매일의 새로운 새 맛이 없으므로 외부 교계의 여러 프로그램이나 외부 교회들의 부흥 모습에 계속 시선이 돌아 가고 있었습니다. <br/><br/>그래서 공회 출발 20여 년쯤 되던 70년대까지는 공회 목회자 전체가 수도승처럼 경건하고 또 선교 일선의 사역자들처럼 충성에 불이 탔었는데 1980년대가 되니까 자녀로 말하면 20대에서 30대로 진행되는 나이처럼 되어 목회자들이 머리 굵은 자녀가 나이 많은 부모에게 슬슬 대들듯이 하는 모습들이 나왔습니다. 김 철수 정 의진 정 풍섭 송 용조 송 용석 등의 탈퇴는 그런 분위기 중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간 분들이 문제가 아니고 안에 있다 해도 나갈 자신이 없거나 의리 때문에 머뭇 거리는 분들 또는 신중하게 앞날을 계산하는 분들이 대부분임을 알고 목사님께서 이 노선이냐 일반 노선이냐를 두고 빨리 결정을 해야 양심이며 그렇지 않고 머뭇거리면 밥줄에 걸려 눈치 보는 밥통 목사라고 말씀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시기였습니다. <br/><br/><br/>- 신학자들의 역할<br/><br/>이런 상황에 또 하나 힘을 더한 것은 서 영호 송 용조 목사님이라는 해외 박사들입니다. 한국 내 해외 그런 신학 박사 학위가 수천 개에 이르고 있으나 공회로서는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되어 마치 그 두 목사님들이 한국 교계에 무슨 권위자나 되고 세계적으로도 알아 주는 줄 알고 그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그 분들이 원래 미국으로 갈 때도 목사님께서 반대하는데 본인들이 학벌이 필요하다 해서 갔고 돌아 올 때는 완전히 일반 노선화 되어 양성원에서 거침 없이 이 노선 외에도 다들 나름대로 잘 믿는다, 이 노선도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는 민주주의다… 쏟아 내고 있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젊은 목회자들, 지금은 다 중진이 되어 있는데, 이런 분들이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교수들 말에 그대로 피동을 받고, 그들에게 ‘목회를 어떻게 해야 잘 하는지’를 묻는 코메디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송 목사님은 목회로도 실력이 있으나 서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교인을 떨어 뜨린 분인데 목사님께서 해외 박사들을 챙기느라고 큰 교회로만 목회하게 했습니다. <br/><br/><br/>- 총공회 보수 문제<br/><br/>홍 순철 목사님에 이어 전 성수 목사님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서 영준 목사님까지 1987년에 돌아 가시자 백 목사님은 이 노선을 지킬 인재를 전부 다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 이유를 살피게 됩니다.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속화되지 않을 정도였고, 대신 앞에 예를 든 홍 순철 서 영준 목사님, 그리고 1983년에 돌아 가신 추 순덕 집사님과 같은 분은 서부 교회와 공회 전체를 장악하여 공회를 통솔 할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br/><br/>백 목사님은 순교가 다가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고 심지어 1988년부터는 구체적으로 순교할 시기를 손을 꼽아 가며 계산하고 계셨는데 뒤에 보니 실제 그러했었습니다. 그래서 공회의 원래 원칙을 좀 더 강하게 가르치고 가셨습니다. 그냥 가면 남은 몇 사람들까지도 전부 백 태영 목사님을 앞세운 공회 변혁 세력의 손에 뿌리를 뽑힐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부 교회 내에는 중간반사들을 중심으로 후임이 와도 사직을 시킬 수 없도록 문서까지 만들어 놓으셨고, 연구소는 공회와 서부 교회에 전혀 관계 없이 순수하게 노선만 연구하고 설교록을 출간하게 했고, 그리고 총공회적으로는 과거 사람을 기르기 위해 지방 책임자도 세우고 권한도 좀 강화시키고 했는데 백 목사님 사후에는 그런 조직이 오히려 이 노선을 지키려는 소수의 사람들을 말살할 것이므로 공회의 원래 원칙인 개교회주의를 철저히 시행시켰습니다. 그리고 1989년이 되자 신년행사가 마지막이라 하시고 몇 달 이상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이 홈의 경우는 시골 교회로 보냈습니다. 교단 중심에 있으면 싸움만 하다가 연구 자체를 하지 못할까 하여 연구를 위해 필요한 교회와 위치를 주셨던 것입니다. <br/><br/><br/><br/><br/>(2) 부산과 대구 공회의 분리<br/><br/>- 갑작스런 장례 <br/><br/>백 목사님의 순교는 신사참배와 6.25를 거치면서 주변 아는 사람들이 죽지 못한 순교자라고 다 알고 있었는데 전쟁 후에도 수시로 목사님의 생명 위협은 여러 차원에서 시도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신경 과민이라고 비웃는 내부가 있었으나 1989년에 막상 순교 장면을 보고서야 말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공회의 외형 체제로 볼 때는 있어서 안 되는 일이 벌어 졌고 그 때서야 과거 망령 된 말을 한 사람들은 '아! 정말이구나!' 이런 말 한 마디만 뱉고 말았습니다. 이런 언행과 이후 벌어 지는 공회의 붕괴를 연결 지어 본다면 진작 위험했던 시기에 방심하고 비웃던 바로 그들이 사후에는 들어서는 안 되는 거짓과 모략에 너무 쉽게 동조했고 공회는 마저 끝나는 듯한 모습으로 치닫습니다. <br/><br/>어쨌건 백 목사님은 1988년부터 순교의 순간을 재고 있었고 1989년부터는 그 해의 어느 한 순간을 준비하는 조처를 했고 그리고 8월에 들어 서자 대량으로 유언과 사후 처리를 남겼고 하루 전에는 마지막으로 처리할 일들을 끝마칩니다. 8월 26일 토 요일에 연락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다음 날 새벽의 순교 순간에 바로 어제 일을 떠 올렸고 함께 모여 맞추었습니다. 목사님은 8월 26일에 하루 뒤의 순교를 읽고 계셨으며, 그리고 8월 27일 새벽 예배를 인도하러 내려 갈 때는 평소 사용하던 비누의 위치까지 변경 시키면서 이제 다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기록으로 확인이 되는 일들입니다. <br/><br/>공회 노선을 보수하는 쪽에서는 이런 흐름과 상황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사후를 목사님께 평소 많이 질문을 했고, 목사님은 교권처럼 세상 방법이 아니라 그가 없는 사후에 그가 걸어 간 평생처럼 사후에도 인도하실 주님과 말씀으로 걸어 가야 하는 원리만 가르쳤을 뿐입니다. <br/><br/><br/>- 총공회 보수를 위하여 <br/><br/>백 목사님 생전 최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주일 학교 총무 장 조사님, 중간반 김 춘도 조사님, 백 명희 부장님, 연구소장 이 민영 조사님, 중간반의 변화 과정을 수 년간 맡았던 특수반 이 치영 조사님 등 5 명은 서부 교회와 총공회를 지키기 위해 결연히 모이고 움직이게 됩니다. 이미 백 목사님 생전 오래 전부터 공회 내에서 공회 수정 움직임과 탈퇴가 반역 차원에서 있었던 것은 자타가 다 아는 일이나, 막상 목사님의 장례가 눈 앞에 닥치니까 일단 교권과 교회와 교인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대구 공회는 자신들이 과거 노선을 진정으로 지킬 것이며 부산 공회를 향해 노선에서 삐뚤어 질 것이며 이름조차 바꿀 것이라고 전면전을 펼치게 됩니다. <br/><br/>당시 세상 역사나 상식이나 교계의 통계를 좀 아는 분들은 그냥 작전상 그런 줄로 알 수 있을 정도인데 공회는 워낙 세상이나 교계 소식과 역사와 상식에 무지하고 심지어 목회자들조차 대부분 그런 분들이어서 수단과 방법과 훗날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대구 공회는 실제 실력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부산 공회는 비록 현장 통제가 깔끔하게 다 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지도부에 의하여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살피고 훗날 역사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 실력 이하로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br/><br/>대구 공회는 당시 답변자를 부산 공회의 최종 핵심으로 지목했고 양성원 교수와 교회 담임에서 제명하면서, 답변자가 백 목사님을 제거하고 서부 교회 담임을 맡기 위해 살인범을 보냈다며 교역자들이 팀을 짜서 전국을 돌기까지 하는 정도였습니다. <br/><br/><br/>- 서부 교회 담임 목사님 임명이 핵심이었는데<br/><br/>1989년 9월 1일 금 요일 저녁 예배를 마친 후 5층에서는 서부 교회의 후임을 결정하는 부산 공회의 핵심 회의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없는 서부 교회의 급박한 상황에서 서부 교회의 전체 성향을 볼 때 최대한 재독으로 임시 기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설교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진 분들이 아니라 스스로 설교를 할 줄 모른다고 인정하고 누가 봐도 그렇게 인정할 수 있는 분 중에서 서부 교회 핵심들과 대화가 되는 분을 모셔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고 참석자 전체는 이심전심으로 함께 할 때였기 때문에 이 원칙은 즉각 받아 졌습니다. 원칙이 정해 지자 설교가 거의 되지 않으면서 비교적 대화는 가능했던 인천의 이 재순 목사님 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설명했고 이 문제 역시 전혀 다른 대안 없이 바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 교회 전체의 결정으로 이를 확정 짓는 순서와 방법 역시 바로 분담 되어 져서 1989년 9월 4일 월 요일 저녁에 2층 행정실에서 향후 남정 교회로 나갈 모든 장로님들과 향후 서 영호 목사님을 지지할 권사님들까지 전원일치로 5층 회의 결과를 추인했습니다. 한 분이 잠정안을 제안하고 한 분이 다른 분의 이름을 거명한 적은 있었으나 잠시 개인의 생각을 말해 본 것일 뿐이라는 정도였고 전체 설명에 이어 바로 확정 되었습니다. <br/><br/><br/>- 실은 <br/><br/>이 결정은 재독으로 당분간 서부 교회가 그 동안 배운 것을 다지고 살피고 이제 이후로 닥쳐 오는 현실을 어떻게 대처할지 전체 교인이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생각하면 서부 교회는 가장 공회적인 길을 찾아 저절로 나가게 되어 있었고 적어도 이 순간까지는 그러했는데, 만일 서부 교회가 그대로 간다면 공회 중심이 흔들림이 없을 것이므로 공회 전체적으로 수정 노선을 가는 대구 공회로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대구 공회는 재독을 깨지 않고는 공회의 노선 수정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재독 정죄 건을 가지고 나옵니다. <br/><br/>재독이 죄인가? 천부당 만부당인 줄 대구 공회가 더 잘 알지만 평양의 1백만 대중이 모여 사회자를 따라 한 목소리를 내다 보면 어느 덧 그 구호에 자신들이 빠져 버리는 효과처럼 갑자기 여호와 증인의 세뇌 교육처럼 우상의 죄라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지도부의 정치와 작전과 기술에 장악 된 교역자들과 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공회의 노선을 변경 시키자는 핵심과 그들의 선동에 빠져 정신을 잃은 대구 공회의 교역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서부 교회와 공회는 나뉠 수밖에 없었습니다. <br/><br/><br/>- 분리<br/><br/>많은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얽히고 섥혀 있는 상태이므로 당연히 양쪽에서 이런 저런 실수나 잘못은 허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쪽은 과거 걸어 온 길을 흔들림 없이 가고자 했고 한 쪽은 일부든 전부든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바꾸어 현상 타파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꾸려는 측은 '수정'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지키려는 쪽은 '보수'라고 이름을 붙여야 했는데 그 이름을 붙이는 순간 작전상 불리해 지기 때문에 이름을 가지고 끝 없는 투쟁을 다시 해야 했으므로 양쪽의 주도세력이 있는 지방 이름을 붙였습니다. 서울은 반반이지만 부산은 서부 교회 때문에 그리고 대구는 거의 전부였기 때문에 대구 공회와 부산 공회라는 이름을 과거 총공회가 하나일 때 관리 편의를 위해 지역으로 나눈 것과 달리 이 번에는 보수와 수정의 양쪽을 어느 지역이 주도하고 있는지를 따라 붙여 보았습니다. <br/><br/>리브가 뱃속에 두 생명 두 사람 두 신앙 노선이 들어 앉아 있는 이상 두 개로 나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수 노선이 옳지만 백 목사님도 생전에 다 고치지 못하고 간 수정 노선을 백 목사님 대신 버릇을 잡고 움켜 쥐려 한다면 잘못이었고 또한 대구 공회는 수정을 원하는 이들만 나가면 되는데 교회 수를 기준으로 자신들이 많다 하여 수정하기 싫은 측까지 강제로 수정을 시키려 했습니다. 분리 과정에서 일어 난 모든 일은 각자 개인적으로 돌아 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2개의 신앙 노선은 누구의 어떤 행동이나 말에 충격을 받았니 말았니 할 것 없이 그냥 본색 본질 본성 본 바탕 그대로 흘러 갔습니다. <br/><br/><br/><br/>(3) 부산과 대구 공회의 내적 분리<br/><br/>- 대구 공회와 서울 공회<br/><br/>백 목사님 사후에 이 노선 수정을 시도한 대구 공회 내에는 본질적으로 좀 다른 색채의 두 종류가 섞여 있었습니다. 현재 대구 공회 노선으로 나가는 분들은 외부 교계를 보며 다소간에 좀 바꾸기를 원한 정도였고 현재 서울 공회 노선으로 나가는 분들은 돈이 된다면 장사가 못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교회의 덩치가 좋아 질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었습니다. 결론은 서울 공회 측은 이름부터 흔적까지 다 없애고 바꾸자는 쪽이고 대구 공회는 그래도 노선은 이 것이 좋으니까 본질은 붙들고 작전상 부분적으로만 손을 보자는 쪽이었습니다. <br/><br/>원래 목사님 사후 대구 공회와 상대할 때 세상 정치적으로 상대하려 했다면 대구 공회 내에는 두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 두 세력 간에 싸움을 붙이기 위해 약간 완화 된 제안을 하게 되면 대구 공회는 처음부터 싸울 힘조차 모으지 못했을 것이나 이 노선을 지키는 것은 그 방법까지 이 노선이어야 하기 때문에 부산 공회로서는 할 일만 하고 다른 길은 몇 가지 더 방법이 있었지만 그냥 두고 있었습니다. 부산 공회를 떼어 내자 말자 대구 공회는 완전한 수정과 부분 수정을 두고 바로 교권 싸움을 벌이고 둘로 나뉘게 됩니다. <br/><br/>이 과정에서 얼마나 싸움조차 서툰지, 현재 대구 공회의 핵심이 된 분들이 백 태영 목사님의 서울 공회를 향해 '교학실 이 재순 목사님을 교체한 것은 신앙 노선 변경'이라고 투쟁했습니다. 문건으로까지 남아 있는 이런 표현이 공회의 모든 종류의 투쟁에서 발견 됩니다. 그냥 안 맞으면 각자 갈 길을 가면 되는데 혼자 가면 외롭고 무서운 이런 사상은 세상에서도 제대로 된 길을 갈 수가 없을 터인데.<br/><br/><br/>- 부산 공회의 내부 분리<br/><br/>부산 공회는 신앙의 보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서부 교회 출신들이 서부 교회를 떠나서는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직 생각조차 못할 때에 서부 교회가 대구 공회와 투쟁에서 부산 공회에 서게 되자 서부 교회 이름을 보고 부산 공회에 소속한 이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인물로서는 서 영호 목사님의 학벌과 인품에 감격하는 이들이며 인맥으로는 김 효순이라는 서부 교회 내의 가장 극단적 좌파 성향을 가진 구역에 관련이 되어 있었는데, 이들과 원래 이 노선 보수를 위해 싸운 이들이 부산 공회 내에 있다가 서 목사님이 서부 교회에 부임을 하게 되자 부산 공회 내에는 부공1과 부공2라는 두 공회가 분립 됩니다. 부공2는 성향상 원래 대구 공회와 하나가 되어야 할 분들입니다. 마치 대구 공회가 서울 공회 사람들에게 속아서 나왔다가 다시 나뉘었듯이 부공2 사람들은 대구 공회 성향인데도 서부 교회와 서 영호 목사님이라는 이름 때문에 부산 공회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대구 공회와 부공2는 분명히 합해야 할 공회들인데 세월 속에 굳어 진 점과 합동을 하게 될 때 생길 자리 싸움 때문에 어중간하게 각각 별도 분립하고 있는 중입니다. <br/><br/>이런 부공2를 두고 부공1 내에서는 부공2가 본질적으로 부산 공회가 아니므로 어떻게 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부공2는 수정 노선이므로 이 노선을 위해서는 그들을 제한 없이 공격할 수 있다는 곳이 부공1을 그대로 지키고 있고, 아무리 상대방이 어떤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할 수 없는 선도 있다는 쪽도 있었으니 후자가 바로 이 홈을 운영하고 있는 부공3입니다. 부공1은 예배당 소송에서부터 각목을 들고 목회자를 폭행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고 부공3은 그렇게까지 한다면 그런 행위 자체가 이 노선을 이탈하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게 됩니다. <br/><br/><br/><br/><br/>2. 답변자에 대하여서는<br/><br/>이미 이 홈의 몇 곳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으므로 죄송하나 직접 찾아 보셨으면 합니다. 이 홈은 그 누구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이 노선을 냉정하게 역사를 두고 훗날 하나님 심판을 두고 조용하게 살피는 곳인데 이 홈의 운영자 개인 이야기가 많아지면 이 홈의 더 중요한 연구들이 흐려 질까 하여 조심하고 있는 편입니다. <br/><br/>집회 때에 나오는 그 이름은 답변자의 이름이 맞습니다만 가끔 연구소의 당시 소장이셨던 분이 이 민영 목사님이고 그 분은 이 진헌 목사님의 첫 아들인데 답변자와는 전혀 집안 관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름과 키와 맡은 일이 흡사하여 보통 혼동을 많이 합니다. <br/><br/>서 영준 목사님을 모시고 공회의 교리를 조직하라고 1987년 봄에 조직 신학을 맡기셨고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 되던 시기에 돌아 가셨고 그래서 이 홈도 조직 신학 정리도 아쉽게 되었고 서부 교회와 총공회의 외형 유지와 발전에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br/><br/><br/><br/><br/>(시간이 있을 때 계속 잇겠습니다.)<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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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03.10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03.10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03.10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03.10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03.10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03.10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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