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역사 > 총공회 목회연구소(준비)

총공회 역사      

1. 출발의 배경

공회는 장로교 ‘고신’ 교단 소속이었으나, 진리 중심의 교단이 교권 중심으로 바뀌자 백영희 주도로 이를 반대하다가 1959년 6월에 제명 당합니다. 교계는, 차례로 출회 당한 출옥 성도 이 인재와 신학자 박 윤선 그리고 앞서 독자 노선을 걷던 김 현봉과 하나라고 보았고, 공회는 7 년간 노선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됩니다.

행정에서 ‘교권 중심‘ 교단을 ‘개교회 중심’으로 개혁하고, 교리로는 칼빈이 확립한 중생 교리 이후 미개척 분야였던 성화 교리에 집중합니다. 3 명의 동지들은 한국 교계의 신학과 정통성과 경건 면에서 각각 대표적 인물들이며 신앙 노선의 차이로 차례로 공회를 떠나지만 훗날 오해로 밝혀집니다.



2. 성장의 형태

공회는 1966년 5월 26일 제1회 공회를 개최했고, 장로교 내에서 별도 노선을 걷습니다. 교리는 전통을 발전시키고, 행정으로는 개교회 주의 노선으로 교회를 개혁하게 됩니다. 세계 최대 주일 학교라고 알려 지는 부산 서부교회를 맡은 백영희가 주도했고, 그는 교인들을 길러 소속 교회들을 개척하고 지도했습니다.

1965년 공회 출발 당시 18개 교회, 70년 27개, 75년 40개, 80년 62개, 그리고 90년 100개, 99년 미주 7 개 교회를 포함하여 166개, 2000년대에는 200 개 교회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1976년에 신학교인 양성원을 설립하여 공회 노선 내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고 57년부터 계속 된 매년 2 회의 전국 단위 산중 집회는 89년까지 국내 최대 규모였으며, 이후 여러 공회로 분산 개최되고 있습니다. 공회는 교세 성장에서 폭발적 요소를 많이 가졌으나 교세 발전과 신앙이 함께 갈 수 없으면 교세 발전을 포기했고 또 목회자에게 매2년 시무 투표 등 많은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여 공회에 직접 소속하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회의 신앙과 교훈을 가지고 한국 교회에 산재한 분들에 의하여 이 노선은 한국 교회에 널리 전해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오늘 공회는 교단 소속 범위보다 외부에서 이 신앙과 교훈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회는 교단적으로는 소규모로 유지되나, 보수 성향의 교회에 성경과 교리와 신앙 노선 면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형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3. 교계적 주목

1979년, 교계의 일반 활동에 초연했던 이 노선은 그 중심 교회인 서부교회가 세상 일간지의 우연한 특종 보도로 ‘세계 최대 주일 학교’로 조사 소개 되고 80년대 10 년을 교계 언론에 줄곧 보도 되자 전국 교회의 방문이 잇따르게 되어 교계적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보 한 장 출간하지 않고 앞 길만 걷던 공회는 한국 교계에게 오늘의 초대 교회 모습을 보여 주며 한국 교회가 전진할 다음 세대의 성장 모습을 함께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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