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사에서 본 백영희' - 감사와 부탁 (추가)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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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00:00
감사
짧은 글이지만 '개혁신학사적 입장에서 본 백영희'라는 평가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곳곳에 주옥 같으면서도 예리하게 짚어 내신 명 평가로 읽었습니다.
칭찬을 아까지 않으면서 과제를 주셨고 사랑의 권면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노선에 대해서는 감명 받은 이들은 맹목적이다 시피 추종하는 편입니다.
이 노선을 오해하는 분들의 입에서는 이단과 사이비를 예사로 표출했습니다.
이 노선의 교회사적 가치를 참 아는 분들은 대개 표현과 평을 아끼셨습니다.
12806번에 주신 글을
'개혁신학사에서 본 백영희 신앙노선'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본명을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고 'graita' 표시만은 사용하게 해 주셨으면.
이 정도의 평을 주셨다면 신학사에서 본 백영희 노선에 대한 전문가이며
전문가에 해당 될 경력이 없으시다면 세상의 기준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례 설명에서도 안내 드렸지만 이 노선은 내용과 실질적인 면에 주력합니다.
이 번 글은 이 홈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빌려 안내할 때 자주 사용하고자 합니다.
양해해 주신다면 연구소 홈 관리부의 업무 회의에 다음 위치를 건의하고 싶습니다.
글의 위치
pkist.net/초기화면/총공회/소개 게시판의 '1. 교단적 모습' '2. 교리적 방향'이라는 글의 제일 밑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백영희 신앙(by gratia, 독자)'
>> gratia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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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일들로 바쁘실텐데 자세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학으로 어떤 신앙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이곳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표현하다보니 신학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시대마다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의 견해를 살펴보아서 합당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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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신학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어거스틴과 개혁자들 그 이후에는 커다란 신앙적 진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진보라기보다는, 르네상스적인 부활, 즉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감과 재발견이었고, 그 중심엔 어거스틴이 있었고 칼빈이나 낙스와 같은 인물의 역할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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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이란 의미가 신앙에서도 세상의 기준처럼 가치있는가는 생각해보아야겠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무한함에 비추어 생각할 때 시대에 따라 선배들의 신앙노선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진리가 밝히 들어나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영희 목사님과 개혁자들의 견해를 비교해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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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백목사님의 가르침은 수백년을 먼저간 신앙적 진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사람들은 뉴턴의 물리 법칙에 머물러있고 그것에 기초한 사고를 하고 있는데, 백목사님은 그런 시대에서 양자역학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화에 대한 이해와 백목사님의 건설구원 하나를 놓고 보아도, 그 차이나 진보는 정통신학적 입장에서는 위험해보일만큼 확실해보입니다. 그럼에도 쓰임받는 시대적 특성이 있고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할지라도 한계는 있으니 그런 점을 살피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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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백년 후에도 이렇게 쓰임받는 신앙인이 나올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부분에서는 보수적인 색채안에서 개혁신앙과 같은 선을 달리지만, 엄밀하게는 개혁신앙과 구분되는 점에서 의미있게 생각하고, 또 분명한 연결점을 신학으로 이어서 다른 이들에게도 소개시켜주기는 어려워서, 그런 신학이라는 도구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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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인이라서 사정을 잘몰랐는데 목사님의 분명한 답변덕분에 차이점과 공통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입장을 고려함보다는, 총공회의 입장에서 서스름없이 답변해주시면 자세히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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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ilee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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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양해문
: : 공회는 바르게 해 보려고 타 교회로부터 오해 받을 조처를 많이 했습니다. 그 과정에 정죄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타 교회와 다른 점을 설명할 때는 마치 선의의 질문자께 마치 결투를 하듯 답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도 공회 제도가 타 교회 제도에 대해 도발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이를 설명하고 변호를 하다 보면 듣는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편으로, 이 노선 내부의 안내를 솔직하게 접하고 싶은 분들께는 정서하지 않은 글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곳은 실명 없이 대화를 하는 곳이므로 답변자가 듣는 분을 특정하지 않고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하시고 이 노선의 내면만 살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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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매주'나 '자주' 시행함에 대해서
: : * 성례의 은혜
: : 그 누구든 아이를 출산하며 겪은 고통은 따로 배우고 말하지 않아도 공유하는 사안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운영이 된다면 성례의 은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눈 빛 하나로 서로 공감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기록이나 개혁가들의 성례 기록을 읽을 때는 동감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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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횟수와 준비
: : 횟수를 두고 백 목사님은 개혁가들의 가르침과 아주 다른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매주나 자주 갖도록 권고한 개혁가들에 비하여 백 목사님은 1 년 1 회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사를 제대로 공부한 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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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목사님 역시 성례의 은혜와 중요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횟수에 대해서는 당연히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며 성경이 가르친 대로 모일 때마다 가져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분은 어떤 경우에도 타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성례의 횟수가 연례행사처럼 1 년 1 회가 되었는가? 이 것은 성례의 준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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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가들이 살던 시대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배는 고팠지만 성례를 준비하는 교인들의 눈을 더럽히는 광고와 귀를 더럽히는 음담패설이라는 것은 말을 타고 먼 곳에 있는 도심을 찾아 가지 않으면 접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의 책가방의 그림, 집 안에 달력, TV 광고, 학교나 직장을 가려고 집을 나서는 순간 앞에 옆에 고대의 술집 여자보다 극심한 유혹의 물결들, 예전 공부와 달리 진도를 맞춰 줏어 담아야 하는 학습과 반신앙적 정보의 홍수, 땅을 파는 노동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정신 노동과 대인 접촉... 이런 면을 생각할 때 과연 매주 성례가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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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대표적 교인을 장로라고 치고, 장로님들의 사회적 위상과 업무적으로 만나야 하는 한 주간의 생활을 일반적으로 두고 볼 때 과연 성례에 참예 할 정도일까? 그 분들이 성례의 기준에 깨끗하게 준비했다고 말하는 것이 그들 스스로는 그렇지만 현대 생활의 각종 더러움이 하나의 평상적이며 자연스런 생활이 되어 죄악에 대한 느낌과 경각심이 둔감해 진 것이 아닐까? 이 노선의 기준에서는 그렇게 봅니다. 과연 저런 한 주간의 생활 끝에 다음 주일 성찬을 수찬한다고 하는데 그 교회와 그 장로님의 성찬 참예를 위한 깨끗과 회개와 준비의 기준은 공회 교회로 본다면 너무 심각한 미달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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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례 준비의 기준
: : 백 목사님의 성례 준비는 적어도 한 달 동안 전체 교인들이 타 교단에서 생각하는 목회자처럼, 수도자처럼, 기도원에서 숙식하며 생활하는 사람처럼 조심합니다. 답변자의 경우는 어떤 때는 3개 월 전부터 모든 생활을 조심합니다. 공회 목사가 시골에 살며 온 동네와 교인들이 다 지켜 보며 사는데 무엇을 끊을 것이 있고 무엇을 조심할 것이 있을까? 술담배가 아니라 노름이나 주먹 다짐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로서는 더 충성하고 더 조심하되 주님의 그 피와 그 살의 고난과 함께 그 피와 살이 다른 사람 구원을 위해 얼마나 더 사용 되었는지 그런 충성적 집중력을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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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조심하다 보면 주변의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공회의 성례 준비는 교인이 한 달 정도, 목회자는 그 이상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타 교회의 매주 성례와 공회 교회의 연중 1 회 성례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내심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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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성례의 횟수가 갖는 또 다른 면
: : 손을 들어 따로 축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기도 내용에 그 축도의 정성과 소망을 담는다면 축도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목사가 손을 들어 축도하면 교인들은 어린 신앙이어서 도움을 받습니다. 기도 받는 교인들이 더 조심하며 집중하게 됨으로 축도의 내용이 잘 전달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머리에 손을 얹으면 더 좋습니다. 이 것도 자주 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좀 문제 있는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을 때 교인이 강하게 느끼도록 꽉 눌러 버립니다. 사이비 정도가 될 지경이 되면 머리를 쳐서 넘어 지게 합니다. 교인 입장에서는 은혜를 말하는데 객관적인 은혜인가, 아니면 사람의 주관이며 기술이며 착각인가? 구체적으로 짚어 말하기는 죄송하나 이런 상황은 개혁가들의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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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당의 건축이 발달하고, 목사의 가운과 예배의 순서가 많아 지고 복잡해 지며 화려해 지다가 천주교는 이를 정형화 제도화 형식화 했고 그 체계가 정도를 넘게 되자 서양 불교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 든 생명은 그 제도 때문에 질식해서 죽었고 형체만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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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례는 너무 특수한 은혜며 너무 소중한 복이기 때문에 다른 것처럼 그렇게 철폐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례의 모습이 최근 성례들의 성찬기의 화려함과 잔의 예술화를 볼 때 개혁적 신앙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분들이 없을 것이나 횟수를 두고는 아직 횟수 속에 들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경우를 답변자로서는 접해 본 적이 없습니다. 횟수가 적다고 오히려 지적을 받아 왔습니다. 그 때마다 '횟수'가 만일 '모일 때마다'라면 새벽예배까지 한 주간에 11 회 예배를 드리는 공회 교회들은 11 회의 성례를 가져야 하는데 성례의 횟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균 교인들의 신앙 수준으로 볼 때 준비가 문제이며, 1 주에 1 회라고 한다면 이 노선의 교인들의 성례에 대한 조심과 준비를 기준으로 보면 너무 부담이 된다는 것이 목회적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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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 교회에 대한 비판을 조심하다 보니 글이 자꾸 겉돕니다. 우리 나라에서 개혁가 노선에 철저하여 첫 손을 꼽는 어느 교회, 그 분들과 함께 하며 우리 신학계에서 개혁주의 청교도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듯한 목사님들과 그 교회 주력 교인들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이 없을 때는 그럴 기회는 없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눈에 들어 오게 됩니다. 이 분들이 '개혁주의' '근본주의' '청교도' '경건주의'에 대해 교회사적으로 감동적이며 또한 신앙적으로 너무 당연한 운동이니 그렇게 앞 장 서서 외치지만 그 분들의 생활 속에 모습을 볼 때 그들이 주창한 개혁주의에는 근방에도 가지 못했다고 보이고, 근본주의나 청교도의 제대로 된 경건주의에도 가지 못했다고 보이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그런 기준에서 횟수를 가지고 이 노선의 성례 횟수와 수평 비교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이 노선을 소개하는 답변자의 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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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질문 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안내 드린다면
: : : 백목사님께서는 이런 견해에 비하여 성례의 외적인 횟수를 줄이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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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횟수에 대한 문제는 명확합니다. 1 년 1 회를 경우 맞추셨습니다. 어떤 때는 준비하다가 교회에 조금 문제가 있으면 다시 1 년을 미룬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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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예배에 있어서도 물론 성례를 귀중하게 생각하셨겠지만,
: : : 실제적으로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지향하셨다고 생각하면 될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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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습니다. 백 목사님은 목사의 중요성을 그 어떤 교단보다 강조하지만 한 편으로 목사답지 않은 목사와 목사다운 교인이 있다면 교회의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실제를 따라 갔지 목사라는 이름에 걸려 처리를 변경하는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었습니다. 주일학교에 집사도 아닌 교인이 주일학교 전체의 적임자라고 생각하자 바로 총 책임자로 지명을 했는데 그 선생님 밑에 장로님들이 배치 되어 지시를 받고 지도를 받되 마치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제도의 최소화와 실질적 은혜의 최대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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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례에 대해서는 백 목사님이 가장 조심했고 그 형식과 제도를 엄하게 지켜 왔으나 역시 성례에서도 성례 자체의 제도보다는 성례적 은혜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 평생에 외부 의식에 단 하나 지킨 것은 성례 하나뿐이었다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 성례 역시 성례의 내용과 실질적 은혜에 주력했습니다. 성례를 위한 성례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횟수 자체도 제도의 일부라고 한다면 백 목사님은 성례의 횟수라는 제도를 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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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례뿐 아니라 신앙 전반에 있어서 백 목사님의 보수적이고 전통 고수적인 입장은 한국 교회에서 첫째 간다 할 것입니다. 한국교계가 20년마다 바꾼 찬송을 공회는 입에 익었으니 바꾸지 않겠다며 일제 때 찬송가를 중심으로 사용합니다. 한국교회가 전도사로 바꾼 명칭을 일제 때 '조사'라는 명칭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어야 할 필요를 확실하게 느끼면 주교 제도처럼 또는 장로교의 노회 당회 체계처럼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다 바꾸어 종교개혁처럼 조처했습니다. 성례에 대해서 만일 성례의 모습과 형식이 성례에 담아 주신 은혜를 중대하게 막고 나선다면 그 모습도 바꾼 분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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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단 기준은 호주 선교부들이 일제 때 부산 경남 지역을 가르쳤고, 백 목사님은 그 때 믿은 분으로서 그 때 보고 들은 것은 오늘까지 거의 다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만 바꾸었습니다. 성례의 모습은 부산 경남의 옛 교회들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례의 횟수 역시 선교 초기의 호주 선교부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또 은혜 위주로 집행해 온 것을 그대로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외형은 최대한 유지하되 내용에 주력하다 보니까 현재 모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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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만 자주 행하지않아도 온전히 준비하여 참여한다면 1년에 한번이라도 충분한 은혜를
: : : 받는다고 가르치셨다고 말이죠. 그리고 개혁주의의 일반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성찬에
: : : 임하는 각 사람들의 자세와 준비를 강조하셨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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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요약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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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gratia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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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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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 스스로 조금 정리하고 싶어서 쓰자면, 개혁자들은 말씀과 더불어 성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의 죄를 위하여 살이 찢기시고 피흘리셨음을 성찬을 통해 눈으로도 다시 확인하고, 합당하게 참여한 자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려올려져 그분을 먹고 마시는 은혜를 누리는 실제적인 은혜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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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따라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성찬의 참여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강화하는 수단이 되기에 (할 수만 있다면) 매주 시행하는 것을 권장했습니다. 물론 매주 시행하는 것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하되 그럼에도 '자주 시행할 것'을 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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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전11:27절 말씀에 따라 성례에 부정하게 참여하는 것을 막기위해, 목사는 심방을 하고 사전교육을 철저히하는 동시에 성도 각자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게 했습니다. 문제는 성례의 효력인데, 시행자나 참여자인 인간의 철저한 준비와 노력은 필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완전히 성결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성례의 효력이 인간에게 있지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자주 시행하며 참여할 수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예배시간의 비중면에서도 말씀설교와 성례를 둘다 균형있게 유지하고자 했었던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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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목사님께서는 이런 견해에 비하여 성례의 외적인 횟수를 줄이셨고, 예배에 있어서도 물론 성례를 귀중하게 생각하셨겠지만, 실제적으로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지향하셨다고 생각하면 될른지요? 다만 자주 행하지않아도 온전히 준비하여 참여한다면 1년에 한번이라도 충분한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셨다고 말이죠. 그리고 개혁주의의 일반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성찬에 임하는 각 사람들의 자세와 준비를 강조하셨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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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yilee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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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말씀 속에 들어 온 성례
: : : : 신약은 기본적으로 형식보다 실질을, 외형보다 내용을, 절차보다 은혜를 치중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례는 주님의 부탁이 특별하여 천주교를 개혁할 때 수 없는 것을 폐지하면서도 성례는 그 모습까지 조심하고 살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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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백 목사님은 성례 시행은 직접 접해 본 교인들로서는 1 년에 1 회 정도 이상하기 어렵다 할 만큼 많은 준비와 조심, 그리고 성례의 은혜가 한 해를 계속하거나 어떤 이들에게는 평생을 붙들고 갈 만큼 굉장했습니다. 바로 이런 은혜 면 때문에 길은 정통 개혁주의에 섰으나 교인의 충성도나 순종성 등을 두고는 사이비로 오해를 받을 만큼 되었습니다. 사실 신앙의 은혜가 제대로 잘 전해 지면 갈4:15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 주고 싶은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례의 은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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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백 목사님의 성례는 장로교의 전통 모습을 조금 단순화하되 기본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성례를 준비하는 과정의 조심 때문에 성령의 객관적 은혜가 컸다고 느껴 지고, 특히 성례를 집전하며 전하는 말씀은 참예하는 이들에게 죄와 싸우되 십자가에서 죽는 고통을 각오하고 싸울 결심과 변화를 불러 일으켰고, 부활의 주님께 붙들려 신앙의 바른 생활을 실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평소 목회와 교회 운영과 모든 것이 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 말씀 속에 다 녹아져 있었는데 성례는 그 성례 형식이 더해지면서 평소 예배의 말씀과는 아주 차원이 달랐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 전 교인의 준비와 목사님 자신의 준비에 들어 가는 기간과 노력이 많았기 때문에 1 년 1 회가 겨우 시행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1 개월에 몇 번의 시행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순회하는 타 교회를 포함한 것이지 한 교회 내의 성례는 1 년 1 회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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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2. 참고로
: : : : 답변자는 여러 특별한 기회에 미국의 정통 성례식을 포함하여 한 번씩 타 교회 성례를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참석했던 그 성례는 역사와 전통에 손 꼽는 청교도적인 교회였고 또 참예했던 분들이 목회자나 신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준비하고 그 정도로 성례를 참예한다면 공회 목회자나 교인들은 매일 성례를 해도 그보다는 나을 듯했습니다. 당시 참예했던 분들은 세계적으로도 정평 있게 개혁주의 정통 신앙에 자부심을 가졌고 개혁주의 성례론에 전문가들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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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백 목사님의 성례에는 고전 11장 27절에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가 되지 않도록 평소 주의를 시켰는데 말하자면 그 기준이 마치 평생에 한 번뿐이 세례를 위해 준비하듯이 매년의 성례 참석의 자세와 준비는 그러했습니다. 바른 준비로 참예하면 한 해에 필요한 은혜를 다 받는다 할 만하지만, 만일 회개하지 않고 함부로 성례에 참석했다가 실제 죽거나 장애자가 되어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거나 기타 알고 모르는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보통 교인들의 인식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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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gratia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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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안녕하세요, 총공회인은 아니지만 이곳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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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 : : : : 정통신학에서는 은혜의 통상적인 수단으로 예배에 있어서 말씀설교와 성례를 중요시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미신적인 성례중심의 예배로 나아갔고, 그것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일으켰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에 있어서 말씀설교 중심의 예배로 회복시켜 놓았다고 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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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정통신학의 입장에서보면, 말씀설교와 성례모두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혁해서 탄생하고 이어져온 오늘날의 개신교회들의 예배 현장을 보면, 로마 카콜릭의 반동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씀설교는 강조되는데, 성례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모습들을 봅니다. 특히, 예배시에 성찬은 더욱 그러합니다. 의례 행하는 종교행사나 의식정도로 지나치는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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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총공회도 종교개혁자들이 닦아놓은 길 이후에, 백영희 목사님의 가르침을 중심하여 모여서 형성된 교회인데, 백영희목사님께서는 말씀설교만큼 성례를 강조하셨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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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백영희목사님께서는 말씀설교와 성례의 균형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셨는지, 무엇을 더 나아가서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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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그리고 백목사님께서 계실 때 실제로 예배가운데 성찬을 매주 시행하셨는지, 한달에 한번 하셨는지, 세례시에는 어떻게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총공회교인이 아니다보니, 총공회소속이라면 자연스럽게 알게될 것들을, 저는 그 사정을 잘아시는 분께 들어야알 수 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