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임함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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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임함

내용 FRANK WILLIAM CUNNINGHAM


/연구실/일반자료/'권임함'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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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님의 첫 신앙에서 성경과 경건과 신앙의 큰 가르침과 모범을 보여 평생에 회고했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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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도 진주교회 초기성도 (맨오른쪽 권임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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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고신대학교 교수)


권임함 선교사는 내한했던 호주 선교사 중에서 가장 특출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지도력과 행정력이 뛰어났고, 매사를 신중하고 사려깊게 처리하는 분이었다. 특히 그는 학자적 능력과 언어의 재능이 탁월하였는데, 그는 내한 선교사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능통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입수한 그가 한국에서 공부했던 한국어 공부 교재를 보면 한국어 만이 아니라 한문에도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전도자로, 그리고 성경교사로, 성경개역위원으로 한국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그는 외모도 호남형의 장신으로서 영국 신사다움을 지닌 분이었다. 비록 그는 호주 선교사이지만 영국여권으로 내한했고 영 연방 국 인물이었음으로 그를 영국신사라고 불러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는 1913년 내한하여 진주, 마산, 부산에서 사역하였고, 1941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기까지 28년간 일했다. 해방 후 1947년 다시 내한하여 한국전쟁으로 한국을 떠나기까지 다시 3년간 사역하였다. 그래서 그가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31년간에 걸친 기간이었다.

송창근 박사는 권임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당시 어체를 그대로 옮김).


선생이 일즉이 이 나라에 오서 이래 春風秋雨 수십년을 두고 하로갓치 충성을 다하는 중 그를 알고 그를 다르는 사람마다 지극한 존경과 애모의 정으로써 놉히는 동시에 또한 부모갓치 형제갓치 앳기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품성이 아야 스승으로써의 격을 일우웠을뿐 아니라 일거수 일투족이나 일언일구의 언사가 ?? 師父의 덕을 가추신 노라나우신 어른입니다. 필자 일즉이 평양잇을 때에 여(余)의 존경하는 南宮박사께서 “권임함목사는 큰 학자야 놀나우신 선생이야” 하시든 말씀을 무심히 드러왓다가 최근에 성경개혁위원의 일원으로서 선생의 번역한 개역을 읽는 깃붐이 잇섯습니다. 여기서 나는 선생의 인격적 놉흠만 아니라 그의 학적 역량의 위대함을 다시 께닷고 멀니서도 늘마다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금번 놀라운 개역이 나오게 되는 일에 듯노라면 선생의 공력이 더욱 크다하시니 선생의 지방선교사업이나 성경학원 경영이나 기타 무슨 일에 보다 이 개역 사업만은 천추에 빗나는 선생의 기념탑을 싸으신 것입니다.1)

1) 송창근, “권임함선생의 업적,”?? 제1권 3호(1937.6), 10.


권임함 선교사에 대한 송창근의 평은 과장이 아니었다. 권임함은 훌륭한 인품의 신앙인이자 탁월한 학자였고, 신실한 선교사였다.


1. 출생과 교육


한국 이름 권임함(權任咸)으로 알려진 프란시스 커닝햄(Frank William Cunningham, 1887-1981)은 1887년 12월 19일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리차드 커닝햄(William Richard Cunningham)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빅토리아주 킬모어(Kilmore)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도 감리교 목사의 딸이었다. 필자는 권임함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중 12남매의 정확한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들과 그 배우자는 지금은 다 세상을 떠나고 고인이 되었다. 2)

2) 모든 자료는 소실되기 쉽고 사람의 기억이란 한계가 있으므로 여기 12남매의 이름을 기록해둔다. 이것이 후대의 연구자에게 필요한 자료가 되길 바란다(숫자는 출생순이다). 1. Frank William (권임함, 1887. 12. 19), 2. Kenneth Steuart (1890, 2. 3), 3. Constance Jean(1892. 8. 29), 4. Amy Kathleen(1894. 8. 19), 5. Arthur Lynden(1896. 9. 4), 6. Selwyn Bruce(1898. 5. 20), 7. Marie(1900. 12. 1), 8. Frieda Lauise (1902. 6. 3), 9. Hilda Margaret(1903) 12. 5), 10. Andrew Keith(1906. 1. 11), 11. John Campbell( 1908. 5. 21), 12. Allan(1915. 4. 22).


권임함의 아버지는 감리교목사였으나 후일 장로교로 이적하여 장로교목사가 되었다.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졌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관심만큼이나 12남매들의 머리가 명석했고 학교 성적도 우수하였다. 장남인 권임함은 후일 훌륭한 한국선교사가 되었지만, 차남인 케네스 스츄어트는 후일 철학박사(PhD) 학위를 얻은 호주에서 저명한 교육학자가 되었는데, 멜보른대학에서 가르쳤고, 호주교육연구소(ACER: Australian Council of ducational Research)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권임함은 초등, 중등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등학교를 마치고 곧 멜보른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는 이 학교에서 문과(Art)에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전공하고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에도 그의 예리한 지성과 학문적인 안목은 여러 교수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고전학(Classics) 분야의 문학석사(MA) 학위를 마치고 1908년 4월 4일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3)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3) 그의 생애에 대한 중요한 일자는 Allan F. Steuart에 의해 적성된 Memorial Minute, 권임함 선교사 본인이 거창유치원 설립허가를 얻기 위해 경남도 교육부에 제출한 이력서에 의거함.


그리고는 장로교회의 신학교육기관인 오르몬드 대학(Ormond College)에 입학하였다. 오르몬드 대학은 1866년 멜보른대학에 인접한 기숙관에서 시작된 장로교회의 신학교육 기관인데 이 당시 장로교 다른 지역에서나 다른 교파로부터 부러움을 살 정도로 좋은 교육시설과 교수진을 갖춘 학교였다. 이 학교는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Free church)의 전통을 계승하고 에딘버러 출신의 신학교수들이 주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당대 호주의 저명한 학자들이었다.

권임함이 대학에서도 고전학을 전공한 것은 목사가 되기 위한 준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공부한 고전어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학교육기관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였고 모든 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이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후일 한국 선교사로 함께 내한하엿고, 일정기간 함께 진주에서 사역하였던 알렌(A. W. Allen, 안란애)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권임함과 알렌은 신학교 마지막 해에 동급생으로 공부하였다.

오르몬드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그는 25세 때인 1912년 9월 15일 졸업하였고 곧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미 빅토리아장로교회가 한국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에서 사역하기를 원했다. 특히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한구에서의 선교사역이 상당한 성과가 잇었고 호주 지방이 관할하는 부산, 경남지방 인구는 당시 150만이었는데 이들에 대해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선교사와 물적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한국선교를 위한 전진운동(Forward movement)을 펼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그는 한국선교를 자원하였다.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권임함의 선교사 지원을 승인하고 그를 한구에 파송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교회와 성도들의 환송을 받고 1913년 초 호주를 떠나 1월 16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2. 내한과 한국에서의 활동


1913년 내한한 권임함은 진주지부로 배속되었다. 진주지부는 호주선교부가 부산에 이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부였는데 이곳에서 우선 그는 언어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는 3월 13일 구입한 스톡스(M. B. Stokes)선교사가 쓴 [한국어문법](Korean by Clause-Method)을 교재로 공부하였다. 이미 언급했지만 그는 언어 능력이 탁월하였는데, 한국어 습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익혀가기 시작하였다. 당시로는 국한문이 혼용되고 있었으므로 한국어 공부는 한자공부를 겸해야 했다. 이것이 선교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으나 권임함은 어려운 한자공부와 한국공부에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내한한 선교사 중에 한국어 실력이 가장 뛰어나 선교사라고 했다. 4)

4) Edith A. Kerr, George Anderson, The APM in Korea, 1889-1941 (APBM, 1970), 103.


그는 내한할 당시 미혼이었으나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 중이던 미국인 감리교 여성 트레이쯔만(Catherine Treischman)을 알게 되어 1917년 11월 16일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5) 그녀는 독일에서 미국 아이오와(Iowa)로 이민해 온 감리교도의 딸로서 일본 선교사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일본에서 구지아마 산을 등산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5) Edith A. Kerr, George Anderson, The APM in Korea, 1889-1941 (APBM, 1970), 103.

권임함 목사는 내한 후 3년이 지난 때부터 진주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교수능력도 겸비했던 6) 그는 이때부터 가르치기를 시작하여 20년간 진주의 경남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경남성경학교는 1911년 호주 선교부의 결정에 의해 진주의 광림학교 건물에서 개원한 신학교에 준하는 교역자와 평신도의 신학과 성경 교육기관이었다. 호주선교부는 성경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각 지부별로 성경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나 그 결정이 실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진주와 부산지부에서는 남자 혹은 여자들을 위한 성경학교나 성경반(Bible Class)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진주에서 성경학교를 시작하였고 독립된 건물이 없었으므로 진주 광림(光林)학교 건물을 이용하였다. 당시로는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시킬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또 한국인 사역자들이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남성경학교는 적절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에 평양에 장로교 유일의 신학교육 기관 곧 평양신학교가 있었으나 경남지방의 사역자들이 그곳에 가서 정규과정을 이수하기는 거리상 쉽지 않앗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로 진학하여 목사가 되었음으로 진주의 성경학교는 부산 경남지역의 인사들에게 중간교육적 의미가 있었다. 이 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다수의 인사들이 후일 목사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권임함은 이 학교 교장으로 부산, 경남지역 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The Rev F. W. Cunningham", The Messenger (Aug. 15, 1941), 82. 참고.


권임함 목사는 성경학교 교육을 담당하면서도 지역교회를 관할하고 순회하였고, 또 당회장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1913년 내한한 이래로 진주지역 교회를 순회하였다. 특히 그는 1920년에서 1932년까지는 진주지방의 첫 교회인 진주교회의 당회장으로 일했다. 거창지부는 1913년에 설치되었으나 여전히 선교사가 부족하였으므로 진주지부의 선교사들이 거창지역을 순회하기도 했는데, 권임함은 1922년 7월부터 1925년 말까지 거창 함양지방을 순회하였다. 그가 관할했던 교회로는 거창군 남하면 대세리에 위치한 가천(加川)교회,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에 위치한 위천(渭川)교회, 함양군 석복면 백연리에 위치한 함양(咸陽)교회,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에 위치한 초계(草溪)교회, 그리고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에 있는 구원(舊源)교회 등이다. 7) 따라서 진주와 거창지역의 여러 교회들이 그의 사역의 힘을 입었다.

7) 이상규, [거창교회와 주남선 목사](거창교회 출판부, 2009), 142ff.


1908년에 설립된 함양교회도 앞서 언급한 바대로 권임함이 사역했던 교회인데, 그는 1922년 7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함양교회 당회장으로 일했고, 그 후는 한국인 박영숙(朴榮淑)목사에게 물려주었다. 8) 박영숙 목사는 권임함과 같이 사역한 바 있고, 함양만이 아니라 거창, 합천 지역을 순회한 첫 순회목사였다. 권임함은 1936년 전후에는 의령지역을 맡아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의 서암교회 등이 그의 관할 하에 있었다.

8) 이상규, [거창교회와 주남선 목사](거창교회 출판부, 2009), 223.


권임함의 한국에서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한 일이다. 호주선교사 중에서 한국어 성경번역 혹은 개역사업에 동참한 첫 인물은 왕길지(G. Engel)였다. 그는 1920년 미국 북장로교의 베어드(W. Baird)와 함께 구약성경 개역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해외선교부에 이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베어드는 개역위원으로 가담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어드만(W. C. Eerdman)이 참가하였다. 결국 1920년 구약개역작업은 게일(회장), 케이블, 레이놀즈, 어드만과 함께 왕길지가 참가하였던 것이다. 그 후 권임함이 1926년 구약개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9) 또 그 해에 권임함은 남감리교 선교사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스톡스(M. K. Stokes), 북장로교 선교사로 선천에 주재하던 로스(C. Ross), 남장로교 선교사로 전주에 주재하고 있던 윈(D. Winn)과 함께 신약개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0) 그러나 권임함은 구약보다는 신약개역위원으로 보다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1) 권임함은 1932년 다시 신약개역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그는 다른 위원인 크레인, 남궁억과 다른 한국인 조사 2명과 함께 그해 3월 지리산에 기숙하면서 마태복음을 개역하였다. 그해 8월에는 원산의 스톡스 집에 함께 기거하면서 사도행전을 개역하였다. 권임함, 크레인, 남궁억 등 3인조 개역팀은 1933년 요한복음, 누가복음, 빌립보서를 재 개역하였다. 이러한 성경번역과정에서 권임함은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에디 커(E. Kerr)와 앤더슨(Anderson)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바울의 옥중서신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12) 여기서도 그의 어학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05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제2대 총무가 된 후 거의 30여년 간 한글성경개역과 편찬, 반포사업을 주도했던 밀러(H. Miller, 閔休)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호주 장로교회의 커닝햄(권임함)목사는 7월에 휴가를 떠나 14개월간 부재할 예정입니다. 그는 한국의 신약개역에서 최고의 사람으로 우리는 그를 그리워 할 것입니다. 나는 그가 돌아오면 그의 선교회가 개역작업을 그의 주된 사역으로 만들어서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주기를 희망합니다. 13)


9) 대한성서공회 간, [대한성서공회사 II](대한성성공회, 1994), 148.

10) 대한성서공회 간, [대한성서공회사 II](대한성성공회, 1994), 161.

11) 대한성서공회 간, [대한성서공회사 II](대한성성공회, 1994), 163, 각주 11참고

12) Kerr, 104.

13 H. Miller's Letter to E. W. Smith, March 27, 1933; [대한성서공회사 II], 167, 주 31에서 중인


안식년에서 돌아온 권임함은 선교회 일을 잠시 중단하고 개역작업에 몰두하였고, 1936년 개역작업을 1차적으로 완성하였다. 복음서 통일작업, 미진한 부분에 대한 재개역 등 모든 작업이 1937년 봄 모두 완료되었다. 1906년 공인본, [신약젼셔]가 나온 지 30여 년 만이었고, 개역작업이 시작된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권임함은 성경번역위원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호주 장로교회의 기관지였던 [메신저](Messenger)에서는 권임함의 사역과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가운데의 “성경개역위원회의 신약분과 위원으로서 그의 사역은 대한성서공회 총무와 위원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고 기록하였다.14) 이런 평가는 과장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봉사 때문에 그는 신임을 얻고 있었고, 1940년 조선성서공회 정관을 채택할 때 윤치호, 이형직, 김우현 목사 등이 새로운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권임함은 케이블(Cable), 피터즈(Peters), 이원모, 스톡스(Stockes), 윈(Winn), 베어드(Baird), 크레인(Crain), 변홍규 등과 함께 개역위원으로 다시 임명되었던 것이다. 15)

14) The Messenger (Aug. 15, 1941), 82

15) 대한성서공회 간, [대한성서공회사 I] (서울, 1993), 431


권임함은 탁월한 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분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왕길지 선교사의 후임으로 평양의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로 일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고 보았다. 호주선교사로서 평양의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로 일했던 왕길지 선교사는 1935년을 끝으로 한국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곧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신학교는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3년 동안 교수의 충원이 어렵게 되었다. 이런 일로 권임함은 비록 교수로 일하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성경개역작업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만일 신사참배 문제와 같은 방해적 요소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로서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13년 내한한 이래 26년간 한국에서 봉사한 권임함은 1939년 10월 선교부 회의에 참석한 후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안식년이 끝났으나 다시 내한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41년 6월 30일자로 선교사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 그리고 링우드 크로이돈(Ringwood-Croydon) 지역 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제 목회자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약 6년이 지난 후 다시 내한할 수 잇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1945년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한국의 친구들은 그의 조속한 귀환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이사장 함태영과 교장 송창근목사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에 권임함선교사를 교수선교사로 파송하여 달라는 간곡한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 때 보낸 서신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원문 그대로를 옮김).


장로교회 호주선교단에 청원하는 말씀


1. 배레사박사와 고언목사께서 우리 신학교를 위하여 임이 많이 수고하심을 감사하는 바입니다. 우리 신학교는 장로교회 총회의 직영신학교가 되었사온바 우에 말씀드린 두 분 목사님께서 임이 수고하시는 중에 게시지만은 아즉도 교수가 많이 부족함으로 귀선교회로서 전임교수 한분을 파견하여 주시기를 교수회와 리사회는 일치가결하고 귀선교단에 청원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만일 가능하시다면 권임함 박사를 파송하여 주시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2. 우리 신학교에서는 지금 문교부에 학교 허가를 청원하였사온바 도서광니 없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또한 교수들의 연구와 학생들의 교양에 중대한 관계가 있서서 도서관 완성을 게획하는 중이온데 귀선교단에서 전적으로 협력하야 주시기를 교수회와 리사회는 일치가결하고 이에 청원하옵는 바입니다. 귀선교사단과 신학교와의 협력은 금후 조선 교회 지도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줄 아오니 신중히 고려하여 주심을 바라옵니다.


일천구백사십육년 십일월 오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조선신학교 리사회 대표 리사장 함태영

조선신학교 교수회 대표 조선신학교장 송창근


장로교회 호주선교단 귀중 16)

16) 이 문서는 호주 멜보른의 연합교회 고문서관(UCAV)에 보관되어 있음.


권임함은 조선신학교로부터 교수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이 초청에 응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래도 그는 194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재건과 새로운 시작을 돕기 위해 내한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새로운 사역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6.25동란의 발발로 부로가 3년만인 1950년 다시 한국을 떠났다. 그는 선교사로서 격량의 세월 속에 살았다. 호주로 돌아간 그는 브란스홈(Branxholme)에서 은퇴시까지 목회자로 일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복스 힐(Box Hill)에 거주하면서 발윈 하이트 교회(Balwyn Heights Parish) 설립을 위해 동사하였고, 한국 선교사로 내한한지 68년 후인 1981년 8월 18일 성 안드레병원(St. Andrew's hospital)에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

17) 알란 스츄어트(Alan F. Steuart)가 작성한 Memorial Minute에 근거함

권임함 선교사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 말콤(Malcolm John)은 21살 EO 사망했고, 둘째인 제임tm 리차드(James Richard, 1923. 12. 21-1991. 1. 7)는 멜보른의 왕립멜보른공과대학(RMIT)에서 미케니칼 엔지니어링을 전공하였고, 기술자로 성공적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52년 12월 20일 멜본대학에서 식물학과 지리학을 공부한 진(Gwenneth Jean, 1923. 12. 7)과 결혼하였다. 제임스는 1989년 한국을 방문하여 설악산 등을 관광하기도 했는데 뇌종양으로 1991년 사망했다. 석뇨사 후손인 제임스 부부는 역시 선교사 가족인 마라연의 딸 라헬과 해방 후 선교사였던 알란 스튜어트(Allan Steuart, 서도아)목사와 가깝게 지냈다. 제임스와 진이 결혼할 때 알란 스튜어트는 제이슴의 들러리였고, 라헬은 진의 들러리였다. 제임스는 두 딸, 에스더와 캐더린을 두었다.


뒤돌아 보면 권임함 선교사는 내한했던 호주선교사 중에서 왕길지, 마라연, 메켄지 등과 더불어 탁월한 교사이자 학자엿고 전도자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는 흔치 않다. 그러나 부산의 성빈학사(聖貧學舍)가 발행한 [성빈]제1권 3호(1937년 6월)에는 그의 설교 한편이 게재되어 있다. 이 설교는 1937년 5월 19일 마산에서 개최된 노회석상에서 한 설교로서 “성찬”이란 제목의 설교였다.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한다.


성찬


1. 떡을 떼는 성찬

성찬예식은 떡을 떼는 예식입니다. 즉 한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가족적 예식임을 의미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 한 가족적 고귀한 의식을 가지고 이에 참여함이 합당한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러한 계급도 없고 어떠한 차별대우도 없습니다. 서로 하나 되고 한 단체로서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지위도 다르고 민족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고 혹 성경해석도 다르지만 다 우리는 한 주님 한 하나님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귀한 일인 것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2. 기념하는 예식

주님의 분부하신 말씀대로 이 예식은 예수를 기념하는 식이올시다. 그러나 결코 이천년전에 나셨던 오래된 역사적 인물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요 또한 그 놀라운 도리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요 그 예수 자체, 곧 우리를 위하야 나를 위하야 육신으로 영으로 할 수 없는 고난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야 죽으실뿐만 아니라 무덤을 헤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사 살아계신 예수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3. 사례(謝禮)하는 예식

우리는 어떠환 때든지 그러하여야 하겠지만 특별히 이와같은 예식에 나오올 때마다 주님께 감사와 감격의 지정(至情)으로서 사례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야 이 엉냑을 새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예식에는 언약의 뜻이 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섹크라멘트라는 뜻은 새언약의 뜻이 있나니 가장 귀한 뜻인줄 압니다. 이 시간이 곧 우리의 새로운 언약을 맺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예수로 신앙의 양식을 삼는 예식

예수는 우리의 신앙의 양식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시간의 주님께 더 가가히 나아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을 삼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다려 당신의께 점점 더 갓가히 나아오라 하시엇습니다. 나무 가지가 그 등거리에 단단히 붓지 못하면 귀한 열매맺을 수 없음을 아는 우리는 주님께 갓가히 니아가서 새 언약을 맺는 동시에 더욱 친근하야 사모하고 사랑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가 한 주님 한 하나님을 아바지라 부르는 우리는 한 형제로서 내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지정으로서 이 예식참여하시기를 바라나이다. (끝)


영문본: Rev. Cunningham's sermon titled, "Communion," preached on 19, May, 1937 in Masan, Korea. (Source, Sung Bin, June, 1937).


Bread Breakiong Communion

The Communion Ceremony is the breaking of the bread. Thus it signifies one loving, peaceful family ceremony. Therefore we should participate in this ceremony, placing high significance on One family. We have no class distinction and/or discrimination. We should participate to become one and as one body. Within our church, we all have different position/status, different race, different history and even a differen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However, we have One Lord, One God and in no words can describe the necessity and importance of this event.


Memeroial Communion

As the Lord had commanded, this ceremony is to commemorate Jesus. However, it is not only commemorating one historical person's birth two thousand years ago nor is it commemorating His wondrous ways, but the Lord Jesus alone. It is commemorating the love of Jesus that stood the pain that flesh nor spirit can endure. Not only did He die for me, but we are commemorating the resurrected Jesus, the one who had rose from the grave and won authority over the dead.


Thanksgiving Ceremony

We should do this whenever, but especially during this ceremony, we should come before the Lord with great inspiration and thanksgiving. Therefore, we should renew this promise. The Lord had said that this is a ceremony with great meaning of promise. From the ancient times, the meaning of 'Sacrement' was the meaning of 'New Promise'. During this time, we should make new promises to the Lord.


The Ceremony of Jesus as the food of Faith

Jesus is our food of faith. Therefore we should go closer to the Lord and to allow the Lord to become our food of Faith. The Lord is saying to us to come closer to the Lord. As the branch not attached itself to the tree bears no fruit, through this ceremony, as one brother, we should designate our body and heart to the Lord, growing closer to the Lord, making new promises with greater adoration and love to One Lord, One God and One Father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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