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형
내용 | 이 노선 초기 목격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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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994.11.2.
장소: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이름: 이경형 집사님
1. 집안
- 부모
부친 : 이백원(白元), 1911.12.7.
모친 : 백계순, 1913년, 백영희 목사님 여동생
본적: 위천면 모동리 무월리 220번지
부친 이백원은 경주 이씨 집안으로 위천초등학교 1회 졸업. 원래 댕기머리로 한문 서당을 다니다가 머리를 자르고 학교 입학. 가정 경제는 보통이며 20세에 결혼.
모친 백계순은 1913년생으로 친정이 살기 곤란하였고 오빠 백영희는 결혼하고 개명으로 처가살이 이주. 동생이 백상순 1916년, 밑으로 백영익 1919년, 백태영 1925년.
- 부모 신앙
모친이 위천면 모동리로 시집 왔을 때는 집안에 귀신이 많았고 결혼 전에는 불신앙.
고도열 선교사에게 전도받은 것으로 기억. 위천에는 교회가 일찍 섰으나 모동까지 넘어 전도 다닐 분은 당시에 없었을 것. 백영침 목사님의 장모 되는 완수대 댁과 같이 보름재를 넘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 10리 산길을 넘어 위천교회 출석. 백계순이 먼저 출석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남편 시부모 시할머니까지 다 모시고 출석. 아이 두 명을 실패하고 출생한 아들이 1934년생 이경형. 주일 예배 보러 가다가 산기가 있어 못 가고 주일 출산.
- 농산교회
이후 고제면 농산리로 이사. 농산교회는 원래 한옥으로 있던 첫 예배당을 이백원이 두 번째 예배당 건축. 농산으로 이사는 왔으나 신앙생활은 아직 특별한 정도는 아님.
- 봉산교회
봉산교회에 교회 맡을 사람이 없다 해서 이사. 살림 집에서 살림을 살면서 예배를 보는 평신도 목회 시작. 5 세 정도로 추론. 노모는 무월에서 봉산의 와랑촌으로 자주 와서 계심.
- 선교사
호주의 처녀 선교사 전은혜 선생님은 슬라이드 보여 주며 전도.
진주 출신으로 동정의 전도인 김기화
대구 출신 김복주 전도사님은 이백원 조사님 아들의 이름을 이요셉이라고 지었고 봉산까지 순회.
2. 학업
景炯(경형), 요셉은 아명. 1934년생.
고제국교 13회, 백순희 외사촌은 계명 간이학교 2년제를 마치고 3학년부터 고제초교로 다니면서 1 년 선배, 개명에서 큰골 학교로 3학년 전학이며 졸업 13회. 높은 다리 에서 계명을 가는 것은 재를 넘어 가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봉산으로 가기는 수월하여 날씨 문제가 있으면 봉산으로 와서 자고 학교를 갔음. 1947년 국교 졸업. 거창중학교 3회.
사촌 형의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로 백을순 이모가 함께 올라 오게 되어 함께 방을 얻어 이모님이 살림. 이경형은 용산학교에 진행할 입학금 3만원을 농 안에 두었으나 8.15 행사 구경하느라 집을 비웠고 도둑. 학교 포기, 하향 후 사변
서울 수복했으나 부민동 도지사 관사에 대통령이 있었는데 부민교회 내에 고려고등성경학교가 있었고 3기 입학. 당시 같이 공부한 사람이 대구 성산교회 이창섭(배수윤 첫 아들) 성경학교 교장 서부교회 당회장이 오종덕. 1학기 수료하고 거창고교 3회로 입학
3. 공회 초기
- 부모님이 봉산교회 와랑촌에 갈 때는 경제가 어려웠으나 봉산에서 물레방아를 두 대를 놓아서 괜찮아 짐. 용호동 들어 가는 곳에 수차 1대, 개섭(본교회 가는데) 1대가 있어서 형편이 좋았음. 가루가 드물 때이나 물레방아를 했기 때문에 예배 후 교인들에게 수제비 국수 먹일 정도.
- 6.25 사변
전쟁이 터지자 그 날부터 온 교인이 교회에서 예배 후 늘 교회에서 철야. 이백원이 제직들에게 인민군 정부에는 절대 가담 말라 가르침. 짐승 표를 받는 것이라고 교훈. 이것을 그 때 분지서 치안대 사람들이 듣고 이백원 잡으러 옴. 고제 분지서로 이백원 백계순 잡혀 갔는데 그들이 믿지 말라고 협박하나 굴하지 않고 결국 보내 줘서 일단 나왔고, 그 다음 이백원은 주상으로 피신하여 조카와 함께 도평 뒷산으로 숨고 밤에는 이모 집에서 먹고 다시 산으로 올라 가고 했음.
- 전시 환란
변판원을 비롯 모든 교인들이 휴전 때까지 교회에서 기도. 교회 사택을 인민군들이 완전히 불태움. 한 번은 집에 있었는데 구덤재 넘어로 6명 정도 빨치산들이 닥쳐서 총을 들어 대고 꼼짝도 못하게 했는데 세이코사의 일제 시계가 교회에 있었고 그들이 교회 가자 하더니만 그 시계를 내려서 사택으로 다시 들어섰고 앞에 서라 하는데 가다 죽으나 붙들려 죽으나 한 가지라고 생각하여 신을 신는 척하면서 교회 뒤로 담 넘어 도망. 와랑촌 동네 앞에 도랑 있는데 그 옆 소 집기똥에 숨어 있었고 그 때는 가을. 집에 들어 가니까 모두 사람을 찾아서 야단. 김봉선 집사님이 그 동안 야단 난 형편을 이야기. 그들은 삼봉산 쪽으로 사라졌고 고제 지서 신고하러 가니까 전투대가 올라오는 중. 죽을 고비. 변판원 순교 후 임시로 농사에 와 있었고 황보유안 조사님이 당시 계심
- 변판원 순교
소구루마를 끄는 사람인데 순교 그 날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음. 거창 장날을 가기 위해 전 날에는 구루마를 손 보고 짐을 미리 실어야 한다. 나무를 팔았으니 나무를 실으려고. 봉산 삼거리로 나가니까 빨치산이 안믿는 사람 하나를 붙들고 구덤재에서 예수 믿는다고 대검으로 쑤셔서 살해. 변판원은 칼에 찔려 생대변이 나온 정도. 그 집이 바로 교회 앞에 있었는데 밥만 먹으면 매일 사택에 왔고, 복음성가를 많이 불렀으며 점심 먹고 풀 한 짐 지고 또 오고 그렇게 신앙이 좋았을 수가 없었으며
교회의 주일학생들, 이영대하고 전부 뭉쳐 가지고 산에 기도하러 가고 그랬는데 변판원 죽고 나서 도저히 못견뎌서 농산으로 왔다가 주상으로 내려옴.
- 월천교회
주남선 목사님 계실 때 월천을 개척하게 되었고 파송 받아 월천교회 첫 교역자로 부임.
그 때 출석 시작한 사람이 김병춘 목사님의 부친. 박신찬 김철수 목사님 등이 주일학생. 월천에서 2년 정도.
- 봉산교회
첫 예배당은 가정 집이었고
평신도 목회자로 부임한 이백원이 목사였고 둔터 강 집사님도 반 목사 이홍길도 목수였으므로 봉산교회 건축
- 백계순
성격은 백영희 목사님과 비슷. 세상 떠고 나서 부산 목사님께서 '기도 왕이 세상 떳다'고 광고. 성경을 매 년 10 회독. 무월에서도 첫 신앙이 열심이었고 봉산에 와서 특별 은혜 생활. 1934년 아들 요셉 출생 후 35년 백 목사님 신앙 출발. 주일 아침에 출생했다고 들었고
- 4 형제 물방앗간
성가막골 들어가는 물방앗간을 백영익 동생이 하게 되어 4 형제가 방앗간.
해방 전 믿고 나서 백 목사님이 물방앗간 했고
이백원 동생 부부가 봉산에서 수차
백 목사님의 둘째 딸이 수차 샤프터가 2자 정도 인데 치마를 입고 놀다가 제분기 낮은 샤프터에 감겨 돌면서 땅에 반복적으로 휘감아 치는 사고로 대퇴부가 엉망. 이백원이 합천해인사 초등학교 목수로도 갔고 당시 고제학교 2칸 짓고 계명국교 2칸 증축을 도급 띄었고 학교 일하다가 소식을 듣고 자전거에 송판을 대서 싣고 거창읍의 성국도라는 유도하는 사람(아들이 비원 교회 장로 성기용)에게 가서 뼈를 맞춤. 백 목사님이 교역 일 출발 동기.
그 이전에 계명교회 가지고는 교역자를 따로 모시기 어려움
- 봉산교회 집회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교회. 웅양교회 등 4 개 처를 맡아서 백 목사님이 전도사로서 출발하고 위천 부임은 그 후. 1948년 경 전도사로서 봉산교회 집회를 처음 인도. 거창읍교회 등 많은 분들이 오는데 예배당 뒷부분에 다락을 매어 달았고. 대구 내당동 서부교회 창설한 정종윤 장로님 참석. 그 때 성신 받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떨고 원영욱(동생 원영술 목사님, 사촌이 원영봉 장로님) 윤학순, 서봉월, 묘산 관터에서는 김만술, 대구에서도 거창으로 경남여객이 다녔는데 적하 앞 우두령에서 내려 적하 넘어 계명을 오는데 몸이 무거워서 앞뒤에서 밀고 당겨서 집회 참석. 기독공보에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성신이 임했다고 보도 된 정도. 봉산교회 백영희 전도사 집회에 내렸다는 전면 2단 기사 기억. 당시 유일의 기독교 신문
- 기도
성신 받았다고 뛰고 굴리는데 너무 과하면 어머니 백계순이 안수 기도하면 조용해 지며 또 훗날 이 목사님이 되는 그 사모님이 정신 이상이 심하게 왔었는데 와랑촌에 두 달 와 있었고 백계순 집사님 기도로 나음. 백계순은 한 번도 집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고, 1 주간씩 물까지 금하고 삼봉산 백일막에 기도. 아들이 보따리 매고 가면 눈이 내려 잘못 디디면 사람이 빠질 만큼도 되어도 기도는 계속.
일반적으로 밤으로 기도가면 중간에 가다보면 큰 바위들이 있었다. 밤 되면 호랑이가 빛을 비추어주어 길을 비추어 기도 장소에 가고 기도 장소에 도착하면 사라짐. 남자들은 이운길 변판원 이요셉 당골 못가서 옛날 물레방아 있던 곳으로 기도하고 오곤 했음.
기타 교인으로 강 집사님 부부, 김종삼 부친, 변을문 부부, 기도와 심방에 전력
- 목회
1953년도 교역자로 계명교회에 3년 정도 -> 봉산교회 -> 월천교회 -> 부산 학장교회 첫 개척 -> 개명교회.
교역일 중단한 후 부산, 개명을 거쳐 1968년 달산교회 있다가, 울산 목장에 갔다가 구포에서 목장 거기서 편찬하여 심장병으로 1975.6.30. 돌아 가심. 부산으로 구역장 시키려고 했었는데 김해묘지 앞 좌쪽. 부친은 1976년 대구 올라 왔다가 우사 낙상으로 돌아 가심.
- 백 목사님
위천교회에서 별과로 신학. 전도사는 3년 졸업. 전도사들이 돌아가면서 다님. 백 전도사는 공부하면서 한상동 등의 지도부가 부흥회 나가도록 해서 공부할 시간 없었고
주일 예배는 한 달에 한 번씩 다니고 그 밑에 집사들이 설교
주남선 목사님이 거창읍교회 맡으라고 모자와 성경을 백영희에게 주고, 중국어 성경은 이백원에게 줌.
4. 자녀
- 신수: 54년. 대한공항 정비사업공장 정비 품질팀 과장, 경항공기 제작사 이노비젼 대표
- 정희: 58년
- 영희: 61년
- 미희: 64년
- 은희: 66년
- 성수: 69년, 구미 오리온 전기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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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