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혜
내용 | 거창 지역의 호주 선교사 - 전은혜 MISS E. W. DUNN |
---|
한국교회사 과제 - 2007.11.28. 3학년 1반, 반기철 (2005210036번)
--------------------------------------------------------------
호주(오스트레일리아)내한 선교사 연구
1. Miss E. M. Ebery(한국명 : 이리사백)
선교사 에버리는 스키너와 함께 1914년 새로운 사역자로 경남 거창에 배치되었다.
에버리는 한국의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부여받고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거창선교부에서 여성전도사역에 전념했다. 그리고 1919년 진주선교부로 전임하여 일 년 간 있었다.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일시적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귀국했으나 그녀는 선교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선교사 에버리가 했던 사역은 거창에서 한국의 여인(어머니)들과 7세 미만의 아이들을 돌보는 매우 특별한 사역이었다. 이러한 사역은 그 당시 한국의 어디에서나 필요한 사역이었다.
2. Miss E. W. Dunn(Dum)(한국명 : 전은혜)
선교사 전은혜는 1923년에 내한하여 부산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동료선교사들로부터 그리고 한국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31년 전은혜 선교사는 거창의 북쪽 경북의 도계에 붙어있는 원기동이라는 마을, 경남 합천 초계까지를 선교관할 지역으로 하여 Macrae(맹호은) 선교사와 함께 복음을 전했다. 그 당시, 1937년 3월, 전은혜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교회가 거창의 봉산교회이다.
일제 말기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전은혜 선교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7년 9월에 miss withers(위대서), miss Leggatt(이혜수)와 함께 돌아온 miss Dunn(전은혜)은 여인들의 집(women`s house)을 다시 열었다.
1950년부터 52년까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에 거하면서 1952년 중반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허락을 받을 때까지 withers(위대서)와 Mcnabb 그리고 watkins(왕영혜) 등과 함께 일본에서 일본 내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선교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전은혜 선교사는 1953년 한국으로 돌아와 1958년 은퇴할 때까지 한국의 시골 곳곳을 순회하면서 성경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가르쳤다.
3. 참고서적
김승태 ·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 서울 :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 1994.
『기독교 대백과사전 4권』. 서울 : 기독교 교문사. 1981.
『기독교 대백과사전 11권』. 서울 : 기독교 교문사. 1984.
내한 호주 선교사 : 영서
4. 인터넷 참고자료
1) 백영희 신앙연구 : http://pkist.net/9-frame-doubldown/frame4-6.html
총공회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는 1909년에 설립된 '원기동교회'이며, 그다음이 원기동에서 개척한 봉산교회로 1937년 3월에 시작되고, 1939년 1월에 개명교회 순서로 개척이 되어 집니다.
총공회의 발원지역인 이 일대는 충청 호남 영남이 덕유산 한곳에서 만나는 남부지역 최악의 오지였고 호주선교부는 관할지역 최북단인 이곳을 위해 진주지부에서 의료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봉산교회의 경우 선교사 전은혜(Miss Dunn)선생님의 도움으로 진주 배돈병원에까지 이송되어 수술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어 이후 교회설립에까지 이르는 등 여러 의료혜택에 접촉이 있었습니다.
2) 중국 선교연구원
http://www.inbora.com/ez2k/ezboard.cgi?action=read&db=board8&dbf=1136
거창의 북쪽 경북의 도계에 붙어있는 원기동이라는 마을, 경남 합천 초계까지를 선교관할 지역으로 활동하던 Australlia 에서 온 (맹호은)Macrae 목사님과 처녀 선교사 전은혜 선생이 전도를 오는 곳이었습니다.
1931년 7월, 여느 때처럼 길을 가며 전도를 하고 있던 정선택의 딸 정봉선과 선교사 전은혜 선생의 눈에는 한없는 인생고에 찌던 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변판원 선생의 집안 고모뻘 되는 와룡 댁이었다.……
선교사 전은혜선생이 와룡마을에 이 가정을 방문하게 되자 병석에 누워 일어날 수 없었던 남편의 형편을 살펴 살릴 길을 찾게 되었다. 천식으로 10월 찬바람 들면 시작되는 고생이 이듬해 3월 봄을 넘어서야 좀 나아지는 정도였는데 그동안은 밤잠을 못자는 정도였고 거기다가 위장병이 위중하여 젊은 사람이 아예 안방에 누워 약은 커녕 먹지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전은혜선생이 차비를 자기 사비로 마련해서 진주 배둔병원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 남편 이남신이 다시 고향을 돌아올 때는 건강한 몸으로 완치가 되어 나타났으니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되었다. 그는 병원에서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할 위 수술까지 받게 되었고 의료진과 선교사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이제 예수도 믿고 머리까지 깎아버리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37년, 봉산에서 원기동으로 걸어 다니는 교인들이 원기동의 원래 교인들보다 더 많아지게 되는 그때쯤, 봉산에 교회를 세우도록 뜻을 모으게 되었고 이미 경제가 든든해진 와룡댁에 예배당을 새로 짓게 되었다. 1937년 3월, 봉산리 472번지 225평의 대지에 14평의 작은 초옥을 짓게 되었으니 예배당은 와룡댁 위채 맞은편 아래채가 되었다. 2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으니 봉산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3) 호주 처녀 전은혜 : http://kosinusa.org/kosin/ 목회 자료실 - 두무산 민들레에서
어릴 때 호주 처녀는 참으로 반가운 손님입니다. 그것은 성탄이 가까워 오면 구제품이 아닌 선물 꾸러미를 들고 와서 무명을 벗기고 뜨개질한 개옷(털)을 입혀주고 손풍금(아코디언)을 들고 와서 노래할 때면 아이들 사이에서 노닥거릴 생각만 하니 가슴이 부푼답니다.…
어릴 때지만… 호주처녀를 통해서 생각나는 것은 풍속과 식성이 다르긴 하지만 선교사들은 빨리 그 지방에 동화되어 동네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았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회 인물사는 |
---|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