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수
내용 | 남해의 공회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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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생
58년 (37년생)
1954년 백 목사님은 고신에서 유엔군 철수문제 예배당 시비 문제 또 서부교회 내부 문제로 남해 망운산에 금식기도를 오셔서 1주일을 지냈는데 정경수 목사님의 노트에서 일자 확인은 가능한데, 기도 마치고 부산으로 가면서 고신에서 어려운 문제, 설교 내용 문제, 교회 내부 문제로 기도한 후 차를 타고 가시면서 도마 부락을 차 안에서 발견
차안에서 이 부락이 무슨 부락이냐고 옆 손님에게 물어보니 "도마"라 하는데 목사님은 도마 제자 이름 때문에 기억하기 쉬웠고 수첩에 적어 두었다 교회 있냐고 물으니 없다 함. 그래서 그 곳에 개척하기로 작정. 서부교회로 돌아 가신 후 도마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남 전도회장이 이동근 집사님이었을 것인데 정재완 집사님을 조사님으로 개척 결정. 목사님 서부교회로 가서 개척한 첫 경우로 기억.
남해의 도마 동네는 그때만 해도 불신 박해가 심해서 5 리 정도 떨어진 이어리로 가서 거기 있는 기존 교인을 붙들고 개척하는 것이 낫지 않냐고 생각. 이어리에 하차해서 교회를 세우려 했으나 허락이 안되고 도마로 다시 밀려 오니 바로 길 옆에 일본 시대 때 여관하던 방을 내어 줌. 김정봉(고현면 도마리) 댁 방 두 칸을 마련하고 서부교회로 돌아 와서 보고하니 허락. 그 지역이 천도교가 심했고 교회는 아예 허락 자체가 안 되던 때. 정재완 조사님이 주인 집에 이 동네 교회 다닐 만한 사람이 없느냐 묻자 정경수 형님 정경로 소개.
정경수는 당시 진주에서 학교 다닐때, 1953.12.19. 겨울 방학에 집에 왔고 정 조사님이 두 형제 있는 데서 예수 믿기로 약속. 그리고 정경수는 다음 날부터 바로 새벽 기도 출발.
정경로는 6.25 양양 전투에서 척추 부상으로 명예 제대. 정경수는 진주에서 학교 다닐 때 정순구 성남교회를 학교 교사를 따라서 몇 번 다녀본 적. 뒤에 황철도 목사님 교회 출석.
정 조사님이 반사를 시켰고, 정 조사님은 부산에 오 가고 정경수를 부산에 소개. 도마교회는 그 때 주교 100명까지. 이듬해 교파적으로 혼란 되어질 때 남해 내산에 백 목사님은 다시 기도 오셨는데 서부교인들 몰래 오셨고, 그 내산은 6.25 승리한 종들이 내산에 있었음. 기도막 두 개가 있어 하나님 종들이 숨어 있었으나 인민군들이 찾으러 와도 못 찾아서 유명해짐. 교회 여반들이 식사 나름. 목사님도 소식 듣고 1 주일 금식 옴. 목사님이 가정 문제로 오해를 많이 받던 때. 1 주일 기도 마치고 북림교회 집회. 북림교회는 김수목 조사님이 개척. 김 목사님은 재건교회에서 승리해서 나온 조사. 도마보다 먼저 교회가 섰고 교회 연결로 소속 가짐. 도마교회보다 2 - 3 개 월 먼저 생활보조를 받고 있었음. 신사참배 가담치 않았음. 첫 날 설교가 눅17장 겨자씨 믿음. 1955년 봄이나 가을 정도. 말씀 앞에 완전히 꺼꾸러 짐. 이미 고신에서는 강단 허락을 않을 때. 김수목 목사님이 고신 지시에 상관 않고 모셨음. 강사는 젊은 분인데 코가 날카로웠고 겨자씨는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연결을 말씀. 뽑고 옮기고 심는 3 가지 말씀함. 제일 좋아하는 성구가 되었음.
이미 듣고 소개도 되었음. 대종가가 되어 정씨가 100호나 되는 데 핍박 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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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1.10.25.
면담: 사모님
- 순천 순남교회
순천으로 갈 때 전임자가 박은석 목사님이고 '순산교회'를 개척하고 계셨는데 교회로 운영이 되기 어려워 가정 집에 교회 간판을 내리고 교회를 치운 상태에서 간 다음, 새로 간판을 달고 그 곳에서 예배를 보고 조금 나아 져서 예배당을 새로 구해야 할 상황에서 남제 어린이집 원장이 예배 처소를 빌려 주겠다 해서 그 곳에서 1년 정도 세를 주고 좀 부흥이 된 상태에서 남문교회 차요한 목사님이 찾아 와서 어디로 개척을 가고 싶다며 인수를 제의했고 백 목사님께 보고. 상당한 돈을 주고 인수한 후 남문교회 예배당으로 들어 가서 두 교회 이름을 합하여 순남교회라 했는데, 남문교회도 교인들이 좀 빠져 나갔는지 운영이 어려웠고 양 교회 교인을 합하여 30 - 40여 명 되고 주일학생은 많은 상태로 5 년 근무하고 교회 기반이 잡힌 상태에서 난곡동교회가 어렵다 하면서 순천에서 양 쪽 교회를 합해서 기반을 잘 잡았기 때문에 난곡동 파송
순천으로 가던 시점은 1966년 생 큰 딸이 순천여중 1학년으로 전학한 것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며(교역자회의록 79.10.29.이동 결정) 난곡동교회로 간 후임 목회자는 문석표 목사님.
- 서울 난곡동교회
난곡동교회는 합정동교회에서 개척 나온 백무창 목사님이 이혼을 하게 되면서 교회가 흩어 져 존립 위기. 자녀들은 순천에 두고 목회자 부부만 일단 이사. 난곡동교회는 합정동에서 나온 교인들이 교회가 운영 될 것인지가 궁금한 정도였고 교회 출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 온 목회자를 살펴 보기 위해 좀 나온 정도.
전임자가 가정 문제로 교회 위기가 있었으므로 후임자에게도 가정 문제를 남 다르게 유심히 보는 느낌. 그런 눈치에 일일이 영향 받아서는 목회와 가정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여 사모님이 소신 있게 처신.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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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