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준
내용 | 이 노선 제자로 독자 노선 개척 |
---|
1.소개:
김석준목사님은 1960년대 말 수년 간 공회에 소속했던 분입니다. 공회를 떠난 직후 서울 경기 경북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교회들은 5-60개가 됩니다. 김목사님은 공회를 떠난 다른 분들과 달리 신앙교육에 어느정도의 세상교육 상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분이었고 이런 면에 소신이 있어 공회를 떠나게 되었고 그 떠나는 과정도 이해를 할 만하였고 또 떠난 후에도 항상 공회를 가까이 했던 분입니다.
원래 경북이 합동측에서 주로 신앙생활을 했던 분이었으나 그 신앙이 경건하고 참을 찾는 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회로 소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계적으로 실력과 활동을 나름대로 인정받는 분으로 이진헌 김석준 두 분 목사님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현재도 공회 내에는 김석준목사님 계통에서 소개를 받고 넘어온 분들이 더러 있고 또 김목사님 계통 교회들은 공회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사모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약력
1930년, 경북 영일군
대구신학교 졸업
총신대 전신인 남산총회신학교 10회 졸업
대동교회 설립 (14년간)
=========================================================================
전언: 김석준목사님의 형인 합동측 김영광목사님
---------------------------------------
저서:체계적 신앙신학(상하)
김석준강의
이의섭편저
에스라목회연구원
1991년 6월 15일
강의 김석준목사
편저 이의섭목사
발행 이재영목사
인쇄 도서출판 외길
등록 1990년 6월 8일 제11호
421-013 경기도 부천시 중구 심곡3동 334-9
---------------------------------------
1.소개
동생 김석준은 1930년생, 형 김영광은 1928년생. 김석준은 서울에서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을 알게 되어 따랐고 그로 인해 이병규 이인재 백영희목사님을 알게 됨. 형은 의정부에서 개척. 목사 안수는 대구. 김석준은 신학교를 하면서 부산광안교회 집사로 있었으며, 영국 장교식당에서 요리사로 근무하며 다른 사람 월급 3배를 받고 있었음. 그때 한 사람 월급으로 먹고 살 때인데 부산 광안교회를 짓고 충성할 수 있었음. 형은 UN군 소속으로 제대했고 김석준은 전쟁에서 부상. 강원도에서 진영까지 후퇴, 수류탄에 부상을 당해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상이군인으로 쉬는 날은 작대기 짚고 아이들 데리고 극장을 가는 형편.
동생을 서울로 오게 하여 4월 중순에 왔고 다음날 아침 남산에 있는 사당동 총신의 전신인 남산신학교에 방청을 허락 받고 공부. 한 학기 공부 후 성적이 좋게 나오자 정식 입학 허락. 다음 학기에는 사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옴. 목회는 산중 골짝으로 다니며 고생했고 충성하였으며 후에 대구시내 불로동교회를 담임.
김석준은 소속을 두고 있지 않았고 백목사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으며, 계획적으로 김목사님을 집회에 보내려고 어느 교회 갈 일이 있다고 목사님이 갈 집회를 대신 보냈다. 김목사님에게는 소속된 누구보다 낫게 상관했고 소속감으로는 가지지 않았음.
2.백목사님 접촉
①우이동 교역자집회
김석준은 1930년생이고 1959년에 백목사님을 만나고 김영광은 1960년 5.16당시 서울 집회에서 백목사님을 만나게 됨. 5.17.금요일 새벽에 집회 마치고 이병규 이인재 우명규 안길용(합동) 안길용(통합) 목사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다가 간첩인가 하여 혁명 군경의 검문이 있었음. 당시 교역자집회는 교단에 상관없이 모임.
②금정산 집회 교역자회
이후 1963년경? 금정산 집회 도중 교역자회의가 있었고 백목사님이 소속을 권면하였으나 소속은 거절하는 대신 방청만 허락을 받았는데, 이진헌목사님은 서울에서 부산 수정동성결교회로 부임을 했고 백목사님이 공회 가입을 권하여 가입. 김영광목사님이 볼 때 금정산 집회는 서울 도봉산 집회와 달리 타교단 교역자가 적고 직계 교역자가 많았는데 그때는 이미 노회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공회가 노회 성격이라면 나는 교단 소속이 분명하여 교단을 바꿀 마음은 없다고 말씀드린 것
당시 교역자회의에서 이인재목사님이 시무하던 동성로교회의 장로 피택 문제가 의논됨. 장로 안수 문제에 대한 장로교의 일반 절차를 문의 받게 됨. 김영광목사님은 1960.2.21.안수를 받았고 6년간 병목교회 담임했던 당시.
그때만 해도 공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했고, 장로를 택하는 문제는 이런 교역자회의에서 할 수 없는 것이 장로교법이라고 말씀드림. 장로는 교회 대표요 목사는 노회 소속이므로, 장로를 세우려면 여기 교역자회가 노회를 대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각 교회에서 장로를 청하고 이곳에서 청원을 허락하면 본 교회에서 투표를 하고 그 투표에 2/3 이상을 얻게 되면 피택이 되고, 다시 노회가 상회로서 시취를 한 다음 개교회에서 장로를 세울 때에는 지방교회에서 순서를 맡고 안수하는 것이라고 조언
3.백목사님을 만나던 당시 교계 형편
①통합과 합동의 분리 과정
1959년 합동과 통합이 분리될 때 마지막 노회 설교를 김석준이 맡게 됨. 분리는 그 해였지만 이념적 분리는 이미 3년 전에 이루어졌고, 이후는 총회 차원의 공식적 분리를 향해서 양측은 총력. 총회대의원 확보를 위해 극도로 신경을 쓰게 되는데, 이미 서울의 3개 노회가 문제가 발생. 통합측은 대단한 정치가 수단가였고 합동측은 그들에 비하면 순진한 편.
통합측이 적은 지방 노회는 그 안에 있는 통합측 인물들이 이의 제기를 하게 하여 노회를 분리개최하고 대의원을 따로 총회에 파송하게 만든 후, 총회에서는 해당 노회 전체를 사고 노회로 분류하여 양측을 함께 거부하여 반대측 노회를 무력화.
당시 합동측은 대전에서 총회 개최를 추진하였고, 통합측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해 버렸으며, 합동은 서울로 따라 올라가서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다시 개최. 당시 숫자는 연동교회 통합측이 많았는데, 양측이 새문안교회에서 다시 모여 통합을 하고 과거를 잊자고 하자 합동측은 순진하여 가게 됨. 당시 교회 자립도가 미약했던 충청 강원도 등에는 통합측 선교사들이 보조금을 들고 교세를 모아주는 형편이었고, 교회의 자립도가 튼튼했던 대구 부산 등은 비교적 교회를 지킬 수가 있었음. 부산 대구에서도 교세가 약한 쪽은 통합측으로 많이 넘어가게 됨. 결론적으로 대형교회는 합동측이 많았고, 교세가 약해도 교회숫자로는 통합측이 많게 됨. 이후 합동측은 1만교회 운동으로 교회 숫자 만회에 주력하게 됨.
②백목사님의 위치
이인재목사님이 백목사님을 따랐지만 이인재목사님은 행정이나 정치면이 약하였고, 고신의 소송문제를 반대하게 되고 전도사로서 노회에서 옳은 주장을 했으나 발언권이 없는 전도사가 왜 발언을 하느냐고 하여 원천 봉쇄를 당함.
③공회 관계
백목사님을 따르는 교역자들이 백목사님을 모시고 만나는 자리가 공회. 대구달산교회 백태영목사님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 이동 명령 체제에서도 백태영목사님은 거부한 기억. 대구에서 김영광목사님이 신학교 교장을 할 때 백목사님을 신학생들에게 많이 소개.
이후 경북 영양에서 목회할 때 충북 제천으로 이사가는 교인을 남천교회 김삼암목사님에게 소개를 했는데, 설교가 어렵다며 다른 교회로 오가게 되고 2개월 후 교인 쟁탈문제가 되면서 노회에서는 이단교회로 교인을 추천했다는 책임추궁이 있었음.
④당시 교계의 경건했던 분들
이인재목사님은 강직하고 단순한 설교로 이지적이지만 생각이 깊지 않고
이병규목사님은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것이 강점
김현봉목사님은 생각은 깊은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아주 단순한 것 같고
백영희목사님은 조직적으로 따지면 조리 있게 잘함
김현봉목사님이 84세에 돌아갔을 때 정연발목사님이 김현봉 사모님을 모시고 한 갈래, 기존 전도사님이 한 갈래, 이병규목사님이 추천한 자기 동생 이용규목사님이 한 갈래로 일단 3갈래 나뉨.
이병규목사님이 합동신학교를 세워 김현봉목사님을 강사로 2-3번 청했고 우이동교역자회에는 모시지 않았고 삼각산에서는 모셨으며 주암산에서 모일 때는 주암산기도원 설립을 추천.
김현봉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고 뿌리 깊은 신앙으로 생각이 많은 분. 결혼도 친구가 결혼 하라니까 취미 없다고 하는 정도. 사모님이 세브란스 병원 간호과장을 했던 분으로 인물이 못나고 40세가 넘었던 분인데 결혼 못한다고 하여 구제하는 정도로 결혼. 자녀를 낳지 않고 잠자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후 결혼. 사모님 연세가 훨씬 많았음.
서울서 개척할 때 가정에서 혼자 예배드렸고 다른 사람이 오니까 하나 더 보게 되고 또 오니까 많아졌고 독 안에 연보를 넣어 두고 있었던 정도. 5.16후 화폐교환시 주일에 신고를 받았는데 이를 거부했다가 다음날 마다리 푸대에 돈을 담고 리어카로 싣고 갔는데 안된다고 하니까 그냥 돌아가겠지만 그대신 우리 교회에서 누구 정권 때 돈을 바꾸어주지 않았다고 적어 놓겠다고 하자 담당자가 그 자리에서 돈을 바꾸어 주었다. 그는 속세를 떠나 살았던 분.
5.이단 정죄
이인재목사님은 교리적인 면에서 따지고 들어가면 당신의 주장이 없는 분. 백목사님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되는 당시 형편은, 한종희조사님이 먼저 부추겨서 되어진 일. 이인재목사님이 박윤선목사님에게 중생문제를 문의하였고 박윤선목사님은 공동서신을 출판하면서 초판 이판 나오던 주석 중에서 우선 초판에서는 하나님 사람들은 생명은 죽지 않는다며 완전한 생명을 말했는데, 한종희조사님이 와서 이인재목사님 교회에다 자기 생각을 전하고 이인재목사님은 한종희조사님 주장을 반박할 말을 못함. 박윤선목사님이 개입되었고 후에 이단문제로 언급
6.김석준목사님의 마지막
김석준목사님의 장남이 합동신학교 김성봉교수님. 현재는 안양대학교 교수인데, 독일에 가 있을 때, 김목사님이 매제 되는 사람에게 대동교회를 맡김. 신학을 위해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했고, 수석 졸업한 후 총신대를 2등으로 입학, 합동신학교의 신복윤교수가 애정.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한철화교수의 조교수로 있으면서 독일 박사과정 추천받고 유학.
대동교회도 오랫동안 장로를 안 세웠음. 아들 4명, 사위 4명 등 8명이 다 목사님. 김석준목사님의 평소 일상 생활은 전형적인 기도원식. 자녀들이 2년만에 양부모를 다 잃었으나 아버지 밑에서 기도원식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사회 접촉면이 없어 전세 처리 하나를 제대로 못하는 정도. 거룩을 지키는 방법으로 산중에 살았데, 이제 도시 안에서 살아가려니까 적응이 곤란. 김석준목사님 자신은 사회생활을 거쳐 본 사람이나 자녀들은 학교 집 교회 외에는 세상을 모르고 산 속에 살았음. 명절에도 명절 집회를 하였으니 세상에서 나가서 광야로 도망 나간 모습.
---------------------------------------------------------------------------
2010학년도 박사학위논문
개혁신학 관점에서 본 이근영의 “아들의 생명”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Being of the Son”
by Keun Young Le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formed Theology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조직신학 전공
주권욱
2) 김석준 목사
김석준 목사는 1930년 경북 영일군에서 출생하여 대구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총신대 전신인 남산 총회신학교 10회 졸업생이다. 그는 졸업반일 때 백영희 목사를 알게 되었고, 대구에서 동 교회를 15년간 목회하였으며, 서울로 이전하여 대동 교회에서 15년간 목회하시다가 198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 총공회에 잠깐 소속했고, 소속을 달리한 후에도 백영희 목사에 대한 존경과 애착이 많았던 분이었다. 그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크지는 않지만 한 교단을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백영희 목사의 노선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호의적이었으며 백영희 신앙노선에 대한 입장이 한결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주요 교리를 그대로 따라 살기도 하였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어 백영희는 김석준 목사와 그의 교단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친밀감을 가졌다.
한편 김석준 목사는 독립교회 원조인 김현봉 목사와 이병규 목사도 스승으로 인정하여 신앙적으로 교류하면서 많은 교훈을 배웠다. 총공회 소속은 아니지만 평소에 백영희 목사를 존경하면서 그분의 교훈을 사모하여 그의 설교를 연구하면서 남산 총회신학교시절 박형룡 박사를 통하여 배운 벌코프 조직신학의 기초위에 체계적 신앙신학(조직신학)을 집필하였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은 성도의 행위구원에 중점을 두었다고 본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수수관계적인 면에서 세워진 것이 체계적 신앙신학이다. 당시 설교는 제목중심 설교가 대부분이었는데 백영희 목사는 성경 주해 설교식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강해식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를 본받은 사람들 중에 김석준 목사가 대표적이다. 이분도 성화구원을 강하게 강조한다. 그리고 신학을 세분하였고 세분하여 분류한 그것을 논리적인 면에서 더 많이 강조하지만, 실제 삶에 적용하는 부분에는 약한 단점이 있다. 그 단적인 면이 영적인 부분은 인정하나 육적인 부분은 일부 둥한시 하는 면이 있다. 신학을 세분한 단면의 예가 기본구원을 17단계로 나눈 것이다. 김석준 목사는 1988년도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교훈을 받은 제자들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전하고 있다. 그들 중에 대표적 목사가 궁극교회 담임인 김경형 목사, 말씀과 기도교회 담임인 남양우 목사, 에스라 성경연구원의 원장이신 이용근 목사가 있다. 김석준 목사는 4남 5녀를 두셨는데 장남인 김성봉 박사는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신반포 중앙교회의 담임으로 목회에 열중하고 계시며, 4남 김성욱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원 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이다.
공회 인물사는 |
---|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