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원
내용 | 백 목사님 임종 행정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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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1996.11.12. 10:00-12:50
장소 : 대신동 목회연구소 2층
이름 : 이탁원
1. 신상
생년 : 1950.10.30. 경남 거창군 주상면 남산리
부모 : 父 이종선(합천), 母 신범임(거창신씨)
성장 : 1952년 부친이 공비 토벌 도중 전사, 지리산 쪽 작전 중
2. 신앙 초기
- 남산교회
주상면의 남산교회에 거창읍교회가 개척하여 여 전도사님이 있다가 백태영 조사님이 왔고, 백태영 목사님 후임의 여 전도사님 시기에 고신과 분리로 인해 신앙이 맞지 않아서 거창으로 나와서 공회의 중앙교회 출석. 1960년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마치고 왔을 때 현재의 창동교회는 중앙교회로 건물이 서 있었음. 남산교회에서 가정이 먼저 나온 다음 현재 창북교회 계신 이환봉 장로님이 나오고 이후 남산교회는 오래 동안 없어 지게 됨
- 창동교회
중앙교회 시절에 거창에 왔고 신 집사님 집에서 방 한 칸에 살고 교인이 몇 안 되던 시기.
거창초등학교 6년 졸업하고, 거창중학교 16회, 거창고등학교 16회.
창동교회 목회자는 한종희 이재순 송용조 이재순 신도범 백영익 신용인 순서였고
창동교회를 다니던 고교 1학년부터 반사, 당시 김영철 부장 선생님과 반사로는 김관옥(김형만 여동생, 정영덕 사모님), 김영훈(김영철 동생) 등이었으며, 반사를 제일 잘하던 사람은 이영애 선생님. 공과는 총회 공과를 사용했던 것 같고, 서부교회로 오니까 백 목사님게서 불러주는 공과
3. 서부교회
- 목사님 인연
1969.1.13. 고교 졸업하고 15일에 부산, 백 목사님과 특별한 인연은 무월교회에 백 목사님이 중학교 때인데 집회를 왔고, 고등학교 때 금정산 집회를 갔는데 1967년 고2 정도의 여름 방학 때 신용인 조사님을 따라 갔고, 당시 공회 교역자들은 조사님들이 모두 설교 노트 받아 적은 것을 위주로 설교하던 시절, 금정산 갈 때 조사님 부부와 이탁원과 모친, 이진상 등. 당시 집회 장소로 쓰던 장소가 비좁을 만큼이었는데 그후 거창 집회가 늘 비좁았던 것만큼 그렇게 회집. 1969년에 서부교회로 와서도 삼봉산 집회를 간 기억은 확실하고, 그 다음에는 확실히 도평으로 간 것 같음.
- 서부교회 건축
1969년 1월 서부교회로 왔을 때 예배당 신축 때문에 봄부터 자갈과 모래를 모으기 시작. 옛날 예배당을 뜯은 것은 그 해, 자갈 모래를 좋은 것으로 사용하려고 하동사나 언양사로 모아서 도로 옆 하수구 뚜껑을 막아 놓고 합판을 대 놓고 쌓았는데 배종부 선생님과 같이 올려대기 시작, 오래 모았으며 대로에서부터 화랑국민학교 돌아가는 데까지 모아댔음. 재료는 진짜 좋은 것만 구함. 재료를 구해놓고 공사 시작,
목수는 이기철 목수였고 설계 감독은 민금주 씨 남편인 황 설계사, 국재숙 집사님 아들이 설계사인데, 기억으로는 황 기사가 설계 감독, 그 아들이 주일학교 반 학생, 건축기사들을 외부 맡기고 잡부도 교인 외부 섞였고, 건축을 위한 큰 연보는 오기 이전이었을 것같고. 겨울을 넘기면서 공사했던 것 같으나 자세한 기억 없고, 건축이 계속 되는 동안의 임시 예배는 김선희 집사님의 부용동 집 밑에 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 김선희 집사님은 남편이 박덕보 씨로서 괴정 가는 곳에 화원. 그 당시 화원은 큰집 지을 때 정원 꾸미고 돈 벌었음. 이말출 구역거기서 계속 보다가 2층 슬라브 올라 간 후 1층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 보기 시작함. 이종희 조사님이 어디 목회를 갔다 다시 들어 오셨고 건축 공사에 인부와 인원을 관리 출석 표시.
건축이 완전히 끝난 뒤에는 밀양 천왕산으로.
- 예배당과 사택
교회 건축은 1층 2층 3층까지 먼저 완공했고, 4층은 강당까지 건축했으나, 양성원 때문에 4층을 증축한 것은 75년경. 교회 짓기 전에 교회 바로 옆에 기와집 하나 사택으로 한옥, 후에 교회 건축에 포함, 지금 사용하는 사택도 예배당 건축 직전에 심이섭 씨 집을 사서 가족들의 사택으로 사용하고 그 사택이 목사님 가실 때까지의 마지막 사택
대티고개에 목사님 쓰시는 기도실(살림할 수 있고) 산 위쪽에도 기도실 하나 따로 있음. 백을순이 대티 기도실 지키고 수발은 박정자, 그리고 구미순은 교회 옆 건축 전 사택에서 살펴드림.
- 교회 청년방
서부교회 내려 오니까 정재성 목사님이 당시 수위실에서 있다가 사찰로 그 다음 대티고개 올라간 지 직후였고, 후임이 없어서 청년들을 수위실 1층 입구에 다다미 방에 갖다 놓았는데 배정부 염춘명 김병춘 세 명. 그 방에 들어가서 4 명이 함께 있었고,
염춘명은 충청도 출신으로 학교에서 레슬링 선수 출신이며 뒤에 고향 갔음. 요절을 1년치 다 외우는 분, 기인 기질. 학교 앞에 설탕똥과자 장사 했고, 나머지는 노동을 했고.
김병춘 목사님은 시골에서 이미 결혼은 했고 먼저 부산에 왔고 가족은 뒤에 왔으며 염춘명 외에는 모두 추순덕 집사님 구역
배정부는 군대 제대후 거창서 바로 내려왔고 결혼 전이었고 좋은 분이었으며 일을 잘하는 청년. 구미숙 선생님이 먼저 좋아서 결혼을 신청. 원래 목사님은 구 선생님을 홍순철에게 말했으나 여자 쪽에서 홍 선생님은 버겁고 배 선생님을 신앙에 자유가 있겠다고 생각하여 선택. 구미순 선생님은 1969년 경 목사님 방 부근에 있었고 편지 읽어드리고 잔심부름을 많이 했음. 결혼은 교회 공사 완전 끝난 뒤. 구미순 후임으로 박정자. 배정부 구미순 부부는 서부교회에서 유명한 분들, 추집사님은 두 분의 결혼을 적극 반대.
- 대티고개 청년방
교회 건축이 끝나고 백무인 씨가 천왕산에서 내려 와서 터를 사고 그 집을 지었고, 한 칸은 살림을 살고 2칸은 청년방으로 썼다. 자기 집으로 지었고, 교회에서 세를 주고 2칸을 썼을 것으로 기억. 예배당을 건축할 때 지교회에서 온 청년들이 있었는데 공사가 끝나고 거처 때문에 마련했을 것으로 생각. 초기 청년들로는 안선일(안호일 집안?), 이 중사,변철장 등 청년들, 그 청년방을 뒤에 박혜영이 사고 별세 후에는 관리가 되지 않아서 동네 누가 들고 감.
- 목사님 지도
이탁원은 목사님께서 땅콩장사를 시킴.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부산에 오니까 대학을 가지 말라는 쪽으로 말씀하고 자존심을 꺽기 위해 땅콩 장사를 시킨 것같음. 장사를 동아대학교 앞에 가서 하라고 하심, 땅콩 장사 다음에는 빵 떼다 파는 장사를 시킴, 손수레를 짜서 행상도 시킴. 땅콩 다음 빵 장수 시켜나가는 것이 순서였음. 그 때 길거리에 땅콩, 빵, 해물 파는 사람들이 많았고 일반적으로 간식으로 많았음.
- 서부교회 형편
1969년 서부교회가 4 - 5백 명, 남반이 1백에서 1백 50명, 청년들은 2 - 30여 명.
주일학교는 예배당 짓고 나서 박장관 부장 다음이 장렬 부장.
주일학교 전체가 40여 반이었고 이탁원은 2반, 서부교회 처음 왔을 때 박장관 집사님이 주일학교 설교하던 기억. 이성옥 집사님이 늘 1등, 50세나 되는 나이, 남반은 이재명 선생님이 자주 1등을 했으나 굴곡이 심했고, 이경애 선생님이 그 뒤고, 안효일 선생님은 처음에 학생이 많지 않았고, 조금 지나면서 이경애 반이 커졌는데, 이경애 선생님은 거고 17회, 천왕산을 갔다 온 뒤에는 2반에서 4반이 되었고 이경애 반이 5반.
주교 공과는 오후 예배 마치고 4층으로 올라 가시기 전에 불러 주셨고
뒤에 성탄 새벽송을 하다 중단 시켰고
일반 예배 때 한 번씩 구역 순위 발표.
- 교인의 연고 관리
서부교인들의 출신은 거창과 이북 그다음 남해 순서인데 처음 목사님이 성씨를 물어서 합천 이씨라고 하니까 합천 이씨끼리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서 오가지 못하게 하심, 아마 이동근 목사님을 생각한 듯. 반사회 때도 이런 지역이나 혈연 쪽을 강하게 책망,
- 목사님 일정
1969년 왔을 때 목사님은 주로 대태고개에 계셨고 교회는 일이 있을 때 내려 오시는 정도. 대티고개에 버스가 다닐 때. 사택에는 사모님과 백도광 장로님 등 자녀들이 있었고 장로님 첫 딸 출생까지는 기억, 이후 천왕산에 낙농 사업을 할 때 사택에서 그 쪽으로 일을 다님,
4. 서부교회 행정실장
- 부임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83년 4월 7일 행정실장으로 부임, 실장 직책 통보를 직접 전화가 와서 권찰회 때 광고했다 하시면서 들어 와야 한다고 하셨는데 1 주일 여유를 달라고 부탁 드림. 그러나 집회가 있어 3 일 정도로 바로 들어 왔고, 들어 올 마음은 당시 절반, 당시 서대신4동 동사무소의 주사보로 올라가는 승진이 6월, 월급 30만원에 보너스 600%와 수당까지 해서 월 공식적으로 50만 원을 받는데, 교회는 22-25만 원. 이미 벌어 놓은 돈이 있어 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음. 당시 행정실장이 많았고 그 다음 장영목 총무, 이민영 순일 것.
- 경제 지도
부임 첫 마디에 카드를 없애라, 당시의 가계수표가 있었는데 그 것을 말함. 어음 취급 말아라. 끝자리 잔돈 다 주라. 이런 경제 부탁.
교회의 회계 결재할 일은 장부를 두 부를 두고 격주간으로 맞추어 봐야 함. 격주로 적혀 있어 맞출 때는 두 권을 함께 비교해야 함.
- 인장 사용
까만 뿔 도장 : 결재에는 '영희'라고 되어 있는 것을 사용하시고
목도장 : 올 때부터 하나만 있었고
인감: 까만데 약간 작고 '백영희'
- 일반 직장 시절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의 주신 것은, 부정은 하지 말고 법적으로 정확히 해주고 될 것을 거절하거나 안 되는 것을 해주지는 말아야 할 것 주의.
- 교회 연혁
행정실장 초기 때 외부에서 주일학교 때문에 계속 방문이 이어 지는데 오는 분들이 교회 연혁을 물어 보기 때문에 연혁을 만들자고 말씀을 드렸는데 필요 없다 하심, 목사님 자신도 부임 연도를 잘 모르고 계셨고 그 대신 서부교회 연혁은 고신교회 연혁을 살피면 있을 것이라 하심.
- 5층 소나무
백익인 집사님 이 반장, 이탁원 등이 밤에만 와야 하는 5층 소나무를 옮기느라고 많은 고생
- 인물 평가
권사님들 중에서는 이말출을 가장 신임하는 듯했고 돈 문제 등을 의논했고 장로님 중에서는 처음에 이상원을 많이 불러 심부름 시켰고 신임으로는 박영태 장로님인 것 같음
- 행정실 관리
원래 행정실의 남녀반을 따로 분리해 놓았는데 8월 집회 갔다운 직후 남녀반 분리한 벽을 턴다는 말이 있었는데 휴가를 갔다 오니까 공사를 해놓았다. 교회의 회계 관계 사적으로 돈 돌리던 것을 모두 정리 시켰고
- 분교 처리 건
주일학교의 지역 별 분교를 두고 누가 교회 직원들이 자기들 것을 만드려고 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장림분교는 이민영 그리고 건축 중인 감전동분교는 이탁원이라는 식의 말이었다. 새벽 2시에 5층에 불려 갔고, 팔아서 분교 별 공평 분배.
5. 노년의 목사님
- 신앙
신앙의 노쇠 현상은 느끼지 못했으나 설교의 중복이 많고, 새 것이 별로 나오지 않았고,
교회 행정은 신경 쓰지 않고 거의 공회 쪽에 신경 쓴 것 같고
연세가 많으니까 사람을 못 믿는다는 것을 느낌.
기도 생활은 늘 경건 그대로였고, 하나님과 연결 관계 이런 면에는 노쇠없이 계속 새로움.
- 생활
기상 시간은 5층을 맡은 이탁원 모친 신 집사님이 현재 67세신데 임종까지 모셨고, 82년도부터 5층 근무 시작, 요즘은 양산동에 계속 있고,
- 주일
월 요일 새벽에 권찰회, 식사 후에 양산동 가면 그 곳서 생활, 양산동 사택을 이탁원 행정실 들어 올 즘에 구입 그 후는 양산동 생활이 거의 고정,
- 자가용
1983년 행정실 들어올 때 포니, 그 다음 스텔라, 프린스, 소나타 순서였고, 기사는 1983년 들어올 때부터 백익인,
- 연보 봉투
목사님 연보봉투 번호는 '1번'
6. 백 목사님의 사후 준비 조처
- 교회 공로자 예우
4 명 권사 : 의료와 장례, 임종까지 의료 책임지고 장례는 교회장' 장정애 표함 5명
강행수 부부 : 목회 나가면 끝나고, 안 나가면 방 2칸 전세 얻어 주는것, 현 주거 기준
최봉석 김춘화 : 마지막 월급에 14개월치를 퇴직금 처리
상기 내용을 서부교회 대표 백영희, 장로 몇명, 권사 몇 명, 전도사 이탁원 이민영 명의로
- 중간반
1989년 중간반 등용 반사를 임명할 때는 평생직 조건으로 개인 별 서류
-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의 가족 대우
이경순 사모님 생활비
이경순 구역장 활동비
주택 관리 비용(세금, 집수선), 공과금(전화, 전기, 의료보험, 수도)
담임 목사에 준한 정도로 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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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2021-02-19 18:18
이길영 - 이은혜 사모님 (이탁원 부부) 부친
이탁원 목사님의 장인은 서부교회 이길영 집사님이며, 손 꼽는 3 대 독립운동가인데도 교회 내에서는 표시를 내지 않아 아무도 모르다가 임종 때 언론에 대규모 보도가 되어 알려 졌으며, 사회적 역사적 명사라 해도 교회 내에서는 신앙으로만 사는 하나의 사례로 여기 참고 제시.
출처: /pkist.net/소식/07.11.13.
[부공2] 서부교회 이길영집사님 장례
올해 82세로 서부교회 오래 된 내부 교인. 1남 4녀 자녀 전부 서부교회 핵심 교인이며 교회 결혼으로 이어졌고 1983년 이래 24년간 서부교회 행정실장을 맡고 있는 이탁원목사님이 1녀 부부, 유주성집사님 부부도 딸 가족.
일제 때 독립운동 경력으로 대전국립묘지 애국자역 5평으로 안장. 부친도 독립운동에 평생 헌신한 독립군의 알려진 간부급 출신. 현지 장례식의 일체 행사는 국가에서 주관했고
행사 후 하관 설교는 강행수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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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이길영 집사님의 조부 이규풍 부친 이민호 등은 이순신 장군의 직계 후손으로 이순신의 고향인 충남 아산 출신이며 독립운동에 친족 7 명이 죽고 3 대를 걸쳐 유명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독립운동 명문가 중의 하나. 동생 이규갑은 김좌진의 동료로 김두한이 공산주의자로 빠지는 것을 막아 우익으로 돌려 세우는 등 해방 전후 한국정치사에도 많은 활동. 이규갑 씨는 개인적으로 감리교 목사님이었고 1960년대에 공회의 중심 지역인 거창을 자주 방문했으며 그 때마다 공회 교인 가정에 유숙하였으므로 공회 신앙을 접촉할 수 있었던 상황.
3대에 걸친 나라사랑 - 애국지사 이길영 선생
조진희 글 (기사입력: 2007/03/29 14:21)
◀ 조부 이규풍(애국장), 부친 이민호(애족장) 선생과 함께 서훈
◀ 3대가 함께 독립운동, 1945년 광복군 입대 후 해방 맞아
2007년 3월, 우리고장 부산의 하늘을 연 것은 3.1절 부산 시내를 흔든 만세함성이었다. 그리고 3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구포에서는 1919년 3월 29일 일어난 구포장터 만세운동을 기리는 재현행사가 펼쳐져 부산을 다시금 독립운동의 불길로 뒤덮는다.
이런 시기에 우리 고장의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관련 현충시설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 할 것이다. 특히 3대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생존애국지사 이길영 선생(부산 영도구 거주) 같은 분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길영 선생의 조부는 이규풍 선생이며 부친은 이민호 선생이다.
이규풍 선생(1865.11.2-1932.6.1)은 1909년 안중근, 이범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용군을 조직하여 회령과 경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 4월에는 양기탁, 고활신 등과 더불어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중국 길림성, 러시아에서 항일투쟁 도중 사망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이민호 선생(1895.4.7-1944.5.29)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청년들을 모아 독립만세 운동 계획을 추진, 지휘하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다. 출옥 후 1922년 가족들과 함께 노령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민부 부원으로 활동하던 중 부친 이규풍 선생이 사망하자 북경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했다. 그러나 장처명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했으나 광복을 1년여 남짓 앞두고 끝내 별세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런 조부와 부친의 영향을 받은 이길영 선생(1928.4.4 ~ )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945년 3월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동남아전쟁에서 미군 통역병으로 투입되기 직전 광복을 맞이했으며 그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3대에 걸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다.
그러나 이길영 지사는 “그 당시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들에 비하면 내가 한 일은 자랑할 일도 못된다 ”며 손사래를 치고는“모쪼록 독립운동 관련행사에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하여 뜨거웠던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께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노(老) 애국지사의 작은 바램이었다.
부산지역에는 3월 들어서만 두 분의 애국지사가 작고하셨으며(신수명, 이광우지사) 이길영 지사를 비롯해 15명의 애국지사가 부산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애국지사 이길영 선생 별세
'3대 독립투사'로 이름난 애국지사 이길영 선생이 지난 10일 오전 7시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이 선생은 의용군과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애국장을 받은 할아버지 이규풍(1865~1932), 노령과 만주에서 구국운동을 펼쳐 애족장을 받은 아버지 이민호(1895~1944)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해 지난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이 선생은 광복군에 입대해 제3지대 제1구대원으로 활동했고 동남아 전쟁에서는 미군 통역병으로 투입되기 직전 광복을 맞았다.
빈소는 동아대병원 장례식장 특실 3호이며 발인은 13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황원희씨와 5녀가 있다. 051-256-7070. 임성원기자 forest@busanilbo.com
/ 입력시간: 2007. 11.12. 10:24
덕수 이씨 종친회 독립운동가
세대 휘 (諱) 자(字) 호(號) 父諱 활동사항 및 훈장 구분 소파(小派)
22대 규풍(奎豊) 락서 우풍 도희 의병장, 석두하 순국, 1977년 건국포장 충무공 손
22대 규현(奎顯) 명오 광암 준희 독립운동가, 1993년 애국장 충무공 손
22대 규갑(奎甲) 원서 운호 도희 독립운동가, 1962년 독립장 충무공 손
22대 이애일라 - 심숙 춘식 독립운동가, 1962년 독립장 운호공 配(이규갑 부인)
22대 규창(奎昌) - - - 독립운동가, 1977년 독립유공표창 -
23대 민호(敏浩) - - 규풍 독립 군의관, 순국, 1977년 건국포장 충무공 손
23대 민소(敏韶) 순구 - 규진 독립군 중대장, 순국, 1963년 독립장 충무공 손
23대 민효(敏孝) 원백 성화 창신 의병장, 순국 , 2000년 독립장 우계공 손
24대 춘영(春永) 우삼 괴은 민화 의병장, 순국, 1963년 독립장 문정공 손
24대 준영(峻永) - 운계 민학 보병 참위, 순국, 1982년 독립장 율리공 손
24대 세영(世永) 좌현 고광 민철 독립운동가 1963년 독립장 충무공 손
24대 일영(鎰永) 공익 송강 민승 제주병사구 사령관 1968년 독립장 충무공 손
24대 근영(根永) - - - 독립운동가, 순국, 건국포장 -
24대 길영(吉永) 김학규 장군 지휘의 광복군, 미군 통역병, 1996년 애족장
25대 종혁(種赫) 마덕창 - 근영 독립운동가, 1980년 독립장 문혜공 손
26대 정열(定烈) 만위 춘호 종현 독립운동가, 1963년 독립장 판서공 손
독립기념관과 함께 하는 독립유공자 시리즈 ④ 이규갑·이애라 부부 (이규풍 동생 부부)
[중앙일보] 입력 2011.05.17 03:30 / 수정 2011.05.17 03:30 전국 13도 대표 중 한명,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한 주역충무공의 후예 가운데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쟁쟁한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다. 의병전쟁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고광 이세영을 비롯, 이규풍·이민호 등은 모두 아산출신으로 나라를 찾는 일에 헌신한 분들이다. 이 가운데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한 이규갑·이애라 선생이 있다.
김정규 기자
도움말=김도형 한국독입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어머니의 뜻으로 시작하다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에 있는 이규갑 선생의 가족묘역에서 후손인 이종흔씨가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운호(雲湖) 이규갑(李奎甲, 1888~1970·사진)은 충무공 9대 손이며 아산에서 출생했다.
한성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전도사가 됐다. 한말 의병운동에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규갑이 의병활동을 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밀양박씨(박안라), 황해도 한미한 집안의 딸로 한문에 조예가 깊어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예학에도 밝아 이규갑 형제는 서당에 가지 않고 집에서 그녀로부터 글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규갑의 어머니는 “사내들이 국난에 집에만 있어야 되겠느냐”고 매일같이 호통을 치시며, 빨리 나가서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어머니 말씀에 그의 형인 이규풍(李奎豊)은 서울로 갔고, 이규갑에게도 밤낮없이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심지어 아들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하며 회초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규갑은 할 수 없이 그의 나이 21세 되던 1908년에 의병에 참가하게 됐다.
‘할 수 없이’시작한 의병활동이지만 그의 행보는 역사를 바꿨다.
한성임시정부 평정관 맡아
‘한성임시정부’는 3·1만세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다. 국민대회의 절차를 밟아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은 3월초부터 홍면희(일명 홍진)·한남수·김사국 등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됐고, 4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 국민에게 공포했다.
이를 위해 이규갑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회의에 전국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으로 선출됐다. 인천에서 열린 회의는 4월 23일 열릴 국민대회 개최 준비회의이자 국회의 임무를 대행한 자리였다.
이규갑은 4월 2일 아침 권혁채·홍면희·안덕상과 함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역에 도착한 그는 일경의 불심검문을 받았으나 홍면희가 “이 사람은 약장사 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일행”이라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했다. 오후 3시 각 단체 대표들이 모였는데, 천도교대표로는 안상덕, 기독교대표로는 박용희·장붕·이규갑·홍면희·권혁채·김규 등 10여 명 남짓 참석했다. 13도 대표자들은 앞서 제정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기구 및 각원명단, 국민대회취지서 등을 통과시켰다.
한성정부를 선포한 후 이규갑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첫째 한성정부를 조직하였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의병활동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그는 한성임시정부 조각명단과 국민대회취지서 등을 갖고 4월 중순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북 용천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규갑은 안동현을 지나 1919년 4월 20일경 상해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이미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돼 있었다.
그는 상해정부의 대표격인 도산 안창호와 머리를 맞대고 두 정부의 통합에 골몰했다. 이규갑은 상해정부가 한성정부보다 먼저 조직됐기 때문에 한성정부가 상해정부에 합류돼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상해정부가 쟁쟁한 독립지사들이 만든 조직이라 하더라도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이니 상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고 했다.
1963년 김좌진 장군 추모식에 참석한 이규갑(왼쪽에서 세번째)선생이 김두한 등과 기념촬영했다. [중앙포토]
이규갑은 “특히 밝혀둘 것은 필경 우리는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그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뜻을 모아 이규갑은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대표가 돼 명실공히 통합정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킨 것이다.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은 ‘한성정부’에 두고 있다. ‘한성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이규갑이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재무부장직을 맡았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을 지내는 등 국가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59년 대한기독교 반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부인 이애라의 일대기
독립운동, 애국부인회 결성 … 20대에 숨을 거두다
운호 이규갑 선생의 장례식 모습. [중앙포토]
부인 이애라(사진) 또한 독립운동가다. 그녀는 1894년 1월 서울에서 이춘식의 셋째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가인 이규갑을 만나 20세에 결혼했다. 남편 이규갑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로 전근하면서 이규갑도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가 됐다.
1919년 1월 독립운동 동지들의 연락을 받았다. 이규갑과 이애라는 1남 2녀 중 젖먹이인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왔다. 이규갑은 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후 그 후사를 맡아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남편 동지들과 합류했던 이애라는 3·1운동의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충청지방과 수원지방을 전전하다 남편을 찾기 위해 상경했다. 하지만 남편을 찾지 못하고 서울 아현동 친정으로 가던 중 일본 헌병에게 어린 딸을 빼앗겼다. 당시 일본 헌병은 백일이 갓 지난 아기를 빼앗아 길에 내 동댕이쳐서 즉사케 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이애라는 아기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일경에 잡혀갔고, 이 때 뒤에 물러 서 있던 유득신 권사가 아기를 안았으나 아기는 이미 목숨을 거뒀다.
이애라는 감옥을 나온 이후 수원과 공주, 아산 등의 지방교회를 다니면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그러다가 공주에서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경의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 아산에서 잠시 몸을 추스린 뒤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시숙인 이규풍이 거주하는 러시아행을 결행했다. 1921년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선로를 이용해 함경북도 웅기항에 다다랐으나 배에서 내리자마자 검문하는 일경에 다시 붙잡혔다. 그녀는 경찰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의사의 도움을 받아 두 아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하였다.
이규갑은 아내와 아들이 형님댁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형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규갑은 피골이 상접한 아내 이애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년 만에 남편을 만난 이애라는 겨우 며칠을 함께 지낸 후 이역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애라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남편을 만 난지 수일 만에 “이제는 어디 가지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규갑 선생이 남긴 글과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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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은 『신동아』 1969년 4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글속에서 그의 삶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첫째 나는 죄인이다.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제 영토를 영유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동지들을 내 손으로 무고하게 희생시켰으니 그런 불충이 없다. 나는 나라에 죄인이다.
둘째 나는 문중의 죄인이다. 나로 인하여 내 처가 죽고 자식이 죽고 친족 7명이 죽었다. 나 때문에 문중에서 왜적에게 죽은 사람만도 9명이나 되니 선영에 그런 작죄(作罪)가 있겠는가.
셋째 나는 내 신체에 대한 조인이다. 부에게서 받은 소중한 내 몸을 나는 무수히 학대했다. 왜적에게 잡혀 감옥행을 한 것만도 33회나 된다. 끔찍한 고문도 많이 당하고 매도 많이 맞아서 지금의 내 노구(老軀)는 성한 데라고는 없다. 이 또한 불효요 불경이니 나는 내 몸에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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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복현
공회 목회자가 되시는 순간 공회 차원에서는 이미 '공적인 인물'이 됩니다. 사생활이 없게 된다는 점을 양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회인들은 면담이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이 홈은 최선을 다하나 이 홈의 손이 닿지 않을 때는 간접 자료로 보충합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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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1 - 09.3.9.)
출처: 소식/1271번-09.3.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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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백복현 목사님은 거창고등학교 교사로 계시다가 거창 지방에 있는 부공1교회의 교회에서 부표받아 동문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시다가 부공2에서 2004년도쯤에 동문교회주관으로
부공2 공회에서 목사안수 받으셨습니다.
(소개2 - 백복현 목사 간략소개 다시 알아보세요, 2010-08-06)
신천교회에서 부표났고 송목사님이 중도지만 부산1쪽에 더 가깝게 계실때 이재순 목사님쪽에 있다가 송목사님이 동문교회 전도사로 영입했다가 양성원 문제와 이재순 목사님과의 문제로 양성원을 부산2로하게 해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더 알고 있으나 논쟁이 별의미가 없으므로 이만
참고로 신천교회는 어느 목회자가 가드라도 부표 냈습니다
(소개3 - 행정실, 2010.7.8.)
- 50대
- 인산교회 이재순목사님의 지시에 따라 부공1의 핵심 목회자로 출발했다가
- 인산교회 시무투표 이후 나타난 분란과정에서 현재 부공2로 소속
- 백목사님 사후 출발 목회자여서 이 홈이 잘 알지 못함
- 인천교회 > 번동교회
(소개4 - 부공2 소속인, 2013-07-17)
인산교회 시무투표가 약간의 영향은 주었을지 모르나, 실상은 서영호목사님측과 이재순 목사님측을 비교 하여 어떤것이 향후 개인의 목회에 효과 적일지를 측정후 선택하였다고 보며
그 이유로는
1) 전도사 시절 시무하는 교회에서의 거듭되는 부표로 더이상 청빙하는 교회가 없어 갈곳
이 없는 형편 이었으나 송종관 목사님께서 동문교회의 전도사로 영입.
☆ 당시의 송종관목사님, 송종섭목사님, 김응도 목사님은 부산공회의 중도파로 서영호,
이재순 목사님의 어느쪽에도 속해 있지 않았든 시기임.
2) 양성원을 해야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심적 압박이 심하였을때 백복현
목사님의 단독 결정은 어려워 송종관 목사님께서 부산공회2에서 양성원을 하도록 지시
하고, 송목사님 형제분들도 부산공회2에 소속을 정하셨음.
이는 백복현 목사님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송종섭 목사님 아들인 송지영 목사님도
양성원 문제가 걸려 있었든 관계가 있었으며, 송종섭 목사님의 양성원 교수문제와도
연관이 있으며, 당시에 이재순 목사님쪽에서는 송목사님 형제의 양성원 교수를 원치 않
았든 문제도 있고, 공회비 분담금 관련하여 송종관, 송종섭 목사님 교회에서 보내는 것
을 돌려 보냈든것으로 알고 있음.
동문교회에서는 백복현 목사님 외에도 한분의 전도사가 양성원을 시작 하는 시기 였으
며, 두분의 전도사뿐 아니라 당시 동문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한 분들이 2분이
더 계셨으나 목회는 거진 미미하였기 때문에 송종관 목사님은 개인적인 성향은 이재순
목사님 측이었으나 후진 양성을 볼때에는 부산공회2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든 시절임.
3) 겉으로 알려진것은 인산교회 시무투표로 알려졌을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개인의 선택
보다는 송종관 목사님이 거두지 않았으면, 더이상의 목회가 어렵기 때문에 필택으로 봐
야 하며, 이는 백복현 목사님의 목회 성향도 보수적이어서 부산1과 맞으며, 도리어 너
무도 보수적 이라는 이유가 교인들과의 소통에 실패한 원인이기도 하였다고 봄.
(소개5 - 소개가 이상합니다. 님이 쓰신 내용, 2010-07-08)
위에 소개가 너무 자기 편의적 간략소개인 것 같고
좀 내용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
백 복현 목사님은 본디 수원 수산교회 출신으로
송 종관 목사님이 수산교회 시무하실 때 수산교회 출석했기에 송 목사님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목회를 출발하기 전에는 목사님 내외가 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그리고 거창 신천교회에서 목회를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다 송 종관 목사님이 동문교회로 이동하셨을 때 (신천교회 투표와 상관없이) 부 교역자로 동문교회로 이동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울산 길천교회, 인천 인천교회, 서울 번동교회로 이동을 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 부표 받으셨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백 복현 목사님 노선 선택에 대한 백 개인적인 판단은 제가 알 수 없으니
가타부타 말할 수는 없지만
위에 소개한 내용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인산교회와 인천교회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인산교회 남은 성도가 '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서 작성한 것 같습니다.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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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