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차연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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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연

내용 만덕의 목회자

대담 : 류차연 김석순 목사님 부부

일시 : 1994.9.13. 10:00-18:40


장소 : 만덕교회 사택


1. 가정


*인물

류차연: 1935년 2월 15일(음)


김석순: 1935년 10월 5일 (음)


1녀: 류애경 : 김경수 (봉산, 소사동네 개척)


1남: 류재룡 : 남정교회 전도사


2남: 류혜경 : 이광목 (제주도 목회)


2녀: 류미경 : 박경신 (부대 상대, 오클로호마 주립대 유학중)


3남: 류재덕 : 고신대 신학과


3녀: 류은경 : 부산외대 영문과 2년


2. 김석순

1935.10.5. (음) 생. 가북태생, 1945년 국민학교 2학년 위천으로 이사, 해방에 한해 쉬고 47년 3학생으로 다시 공부 시작 50년 6.25 나던 해는 6학년이었음. 50년 1월 국기배례 환란에 중심적 학생. 어머니 강덕이는 신사참배거부로 10손가락이 뒤틀려 지는 고초를 겪은 신앙인. 손가락 마디마디에 나무꼬챙이 같은 것을 넣고 비틀어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고초를 가지심. 어머니 때문에 일찍 교회 다님.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가 나던 당시까지는 어머니만 교회를 다니고 석순은 교회 불 출석. 당시 가북교회는 문조사님( 후에 제3영도 교회 문 목사님) 신사참배 반대, 하셨음. 1956년 동갑 류차연,김석순 배수윤(웅양교회)주례로 결혼,


3. 류차연

1958(56-59년사이)정도에 총회측과 분리되었던 고신소속의 가조 신천교회 부임, 전임자 전판수, 백목사님을 초빙해 집회를 가졌음.


4. 일반 목회생활


*가조교회

가조신천교회는 김석순의 언니 김덕순이 총회측 가조교회를 다니다가 당시 위천에 계시던 백목사님이 동생되는 김석순을 언니가 있는 가조로 보내서 며칠을 유하게 하며 언니를 고신으로 끌어내도록 지도. 김석순이 언니가 고신으로 나오지 않으면 형제도 끊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울면서 졸라 신호주집사님 집에서 고신측이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리로 합류함. 가조신천교회가 구장터, 용산교회가 용산에 있었는데 당시 고신측에서 약한 교회들의 통합분위기가 있어 그 두 교회가 하나로 합침.)


목사님은 당시에 제명 직전에 몰릴 때로 몰려 있었다. 내적으로는 고독했고 노회별로는 백영희 강사 초청 금지가 계속 결의 되었었다. 신천교회 집회 강사로 모시는 것을 당회장 최의구목사님(거창읍교회)이 안 좋게 생각했지만 그대로 진행.


* 최의구목사님은

이후 목사님이 해운대 노회에서 제명결의 될 때에 거창지역 교역자로서 그 지역의 문제점 등을 증언하기 위해서 진주노회 소속인데도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양혜원이 넘어간 것, 계명,봉산 교회 등 넘어간 문제등을 지적하며 처신이 잘못된 것을 발언


*신천교회집회:

교인들이 굉장히 많이 왔음. 집회날짜가 1월 13일이었음(월) 믿음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있었음. 다윗도 성공한 다음 실패했음을 교훈. 목사님의 분위기가 제명 직전이었는 이유였는지 무거웠고 차분했음. 가조너머 성산에서도 왔고 김만술집사님이 와서 2만원 연보하고 가셨음. 백태영,영침목사님이 막 목회나왔다면서 인사를 왔고 백태영목사는 거창 주일학교 연합회에서 연보해서 남산에 개척을 했었는데 목사님께서 뭐라하면서 연합회에서 사례 많이 준다고 그리 갔었느냐고 야단. 그 뒤 부산으로 불러서 서전교회를 개척케 함.


*화명교회

류차연은 병적문제가 있었는데 쫓기는 입장이 되어 부산 화명교회에 담임. (60년대)


부산에 내려오니까 고려고등성경학교 2학년인데 백목사님 이단이라는 말을 듣고 김석순이 서부교회를 찾아갔음. 목사님께서 화명에 목회나와 있다고 하니까 당시 서부교회 연경회를 시작했다면서 류차연도 등록하라 하심. 그러나 시작했던 성경학교를 끊을 수 없어서 계속하다가 병역문제로 덕이 되지 않는다해서 사면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대한신학교에 들어감. 5.16 때 군 입대하게 되어져서 제대후 위천으로 돌아간 다음 4년간 농사짓고 있었음. 사람이 먼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음. 이후 위산교회 첫 분리에 김응도 신용인.김삼암 등으로 순회 예배를 인도케 하심. 가정에서 예배를 보다가 교회로 시작함. 이후 정식 교역자로는 전성수조사님이 첫 교역자로 부임을 했던 바 류차연목사님이 이전 가북 용산교회 출신인 전목사님의 사모님과 인연 등으로 전목사님에게는 목회 선배였음. 류차연 가조 목회시절 전목사님이 결혼. 그러나 위천에서는 교역자로서 절대 순종하고 교인노릇하다가 백목사님이 농사짓지 말고 학장교회를 맡으라고 해서 학장으로 1년 후 내려옴


*학장교회 (1969)

신용인목사님이 당시 창동에서 목사님 말씀 순종을 적극 권유


학장교회에서 1969년 9월 12일 - 75년 12월 25일, 첫예배 16명, 80여평 정도 예배당을 지어려고 터를 180여평 준비. 부흥이 되어 교회 건축을 하는데 싸게 한다고 목수를 약한 사람을 쓰고 2층 스라브 올리다가 무너져 내림. 학장에서 터를 사서 팔고 사고 해서 돈을 만들어 건축했는데 공로자라고 청량리를 보내심.


*청량리교회

부임할 때 목사님의 당부, 개척은 일군이 없어서 교역자가 주동이 되어야 하지만 기성교회는 깨우쳐는 주되 교인들이 주동되어 하도록 해야 원만하게 됨을 주의. 모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아는 것같이 느껴지도록 알릴 것. 교회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교인이 주일에 이사를 했음. 이사예배를 부탁하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목사님께서 들으시고 유목사 언간이 강하다. 나온지 얼마 안된 사람이 복받겠다고 그러면 해주지 학장 후임에 이동화,


*만덕교회

75년 12월 25일 성탄예배 드린 후 만덕에 개척을 위해 전도나감 12명으로 출발


*양성원시절

만덕개척시절 자전거로 양성원을 다니며 고생이 많고 영양이 결핍되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님. 양성원에서 성경을 계속 읽어야 되는데 기력이 없어 누워서 읽고 있으니까 이재순목사님이 천원을 주면서 할매집에 개장국 한그릇 먹고 오라고 했음. 먹고 나니까 기력이 났었는데 뒤에 목사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전 교역자들 개를 잡아 개장국을 먹게 하심. 목사님께서 개인적으로 불러 영양이 많이 부족할 때는 시장에 가서 고기 대가리 사다가 가족별로 한 대가리씩 국을 끓여 먹이라 하심.


*청량리교회

이동화 후임으로 갔음. 이동화 목사님 문제가 좀 있었음. 노인집사가 술집 여자를 가까이 해서 집사를 떼고 성찬 금지를 시켰는데 너무 깊이 간섭하지 말라고 하심.


5. 위천교회 사건

*학교


55명 정도의 2학급으로 한 학년이 됨. 일제 때는 일본인 교장이었고 50년 당시의 교장은 김재만(거창읍 죽전 주남선 목사님 사택 부근에 살았던 사람) 해방 직후 일제 군국교육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따라서 매일 아침 운동장 조례후 줄맞추어 입실, 공부하던 때(사관학교식) 매일 아침 조례 때 일본식의 의례가 있었고, 국기에 대한 경례가 문제화, 교사 중에는 천세욱, 진학일 두 교사가 교인으로서 재직 중


*위천교회

1) 이전 :


조사님 담임. 인본, 인화적인 인물, 당시 40여명의 교인, 사람은 좋았으나 교회가 어려워 사모님은 시장에 가서 멸치장사를 했음. 일제말부터 12년 계셨는데 일제말에 배급서기도 하고 연설을 잘 한다고 위천에서 뽑혀 서울까지 대회도 나감.


2) 백조사님 부임후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한 주간 했으며 성령의 역사가 굉장히 뜨거웠음. 주일학교 예배에서조차 뜨거운 은혜 역사가 넘쳤음.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기전 거창 합천 함양 3군 강습 연합회가 거창읍교회에서 개최. 예배식으로 진행. 암송도 하고 했음. 하기 학교 강습회에서 동화 순서가 계속되어 왔는데 백목사님이 주장을 하셔서 성화(성경위인전)로 바꾸도록


신유은사:


밤에 산기도 갔다가 귀신 들어간 이만기 목사님 사모님이 기도로 치유됨. 기타 신유역사가 많았음


가정생활:


며칠씩 산기도를 많이 가셨는데 사모님과 늘 같이 가셨고 (호랑이 굴로 자주 가셨음) 집에서 도 늘 같이 지내심. 아무리 친한 사람이 와도 한방 생활, 일하는 아이로 신원남(서울, 고신 사모, 남편은 남서울교회 박종순목사 부목으로 있다가 서울에서 현재 개척. 함양출신, 성경학교 회장)이 신원남이 도충 도진등 사택 아이들을 엎어서 길렀음. 사택에 밭이 작은 것 있었다. 가물어서 온 고을에 흉년이 들어도 물을 어찌나 열심히 주고 알뜰하게 기르는지 농사가 얼마나 잘 됨. 화목한 가정


(가정사는 전기에서 자세히 기술할 예정)


목회생활:


위천이 유급 첫 목회지. 위천에 부임하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 하셨음. 신학교를 금요일 마치면 집회 인도 (금야-월새) 때문에 본교 주일예배를 자주 빠지셨음. 주일을 집회 때문에 못오시는 경우는 천세욱선생이 설교를 맡았음. 처음 위천으로 오실 때 개인 재산을 완전 정리하고 오셨기 때문에 처음에 와서는 양식도 없어 고생 했음. 한번은 강석이 집사가 사택에 들렀다가 쌀통을 열어보니 빈통이고 살펴보니 호박죽으로 살고 있었음. 그래서 집에 쌀을 퍼다가 드리기 시작했음. 심방을 가실 때 혹시 점심시간이 걸리든가 하면 심방 가는 집에 식사 부담 주지 않으려고 고추밭에서 고추를 하나씩 따먹고가자 하심. 점심 막 먹고 왔다 할 수 있다시며. . . . . . .


백목사님은 늘 기도 대장이었다. 주일 오후에 가까운데 심방을 다니셨고 기도에 평소 많은 치중이 있었음. 부산에서 신학교 갔던 김에 집회를 많이 하셨는데 따라서 본 교회는 많이 비웠음. 또 집회인도로 출타하시면 사모님도 설교를 시켰고, 설교를 은혜있게 잘 하셨음. 여반도 나이 많은 분도 두루 설교를 시켰는데 누가 서든지 은혜가 넘쳤다. 목회자의


배후의 기도 역사로 그렇게 됨은 누구든지 느낄 수가 있었고 설교자들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저 눈물이 쏟아졌다. 자연히 본문을 읽지도 못해서 본문을 외워나가서 설교하는 문맹자들도 있었다.


목사님은 아가서 본문의 설교를 많이 하셨고 그 본문에 특별한 은혜가 넘쳤다. 게달의 장막, 솔로몬의 휘장 등의 설교를 김석순 지금도 기억하고 있음. 새벽설교가 보통 2시간씩이나 되어 해가 돋도록까지 했고,


기도는 사모님과 호랑이 굴 등으로 3일씩 가는 경우가 많았음. 위천에서는 근처 함양등지로 집회를 다녔는데 백영익목사님이 그런 때는 철야 인도를 많이 하셨고 철야 때는 새김질도 하고 찬송하면서 박수치며 진동, 원영술장로님이 지휘봉 막대기로 강단을 뚜드려 강단이 부셔지는 경우가 많았음. 위천교회로 박인순, 이인재목사님이 집회를 오셨음. 이인재목사님은 백목사님과 12번 교환집회를


에피소드:


목사님 부임후 강덕일집사 가정에는 많은 축복이 넘쳤다. 당시 4-5개 열리던 옥수수 한대에 7-8개씩이 열리며 강냉이 나무 높이가 기와 지붕까지 뻗어 올라감. 목사님 부임으로 시간마다 뜨거운 은혜도 넘치고 가정에 복도 넘침. 강집사는 매사에 목사님 섬김,수발에 전적 집회 인도 등 며칠씩 출타했다 돌아오실 때는 강덕일 집사 집에 들어 와서 밥 좀 달라 해서 잡숫고 가시기도 함. 당시 강덕일집사의 집은 장터 버스 정류장 근처였음. 예배당에서 철야기도할 때에 여름으로는 당시도 모기가 많았는데 철야하다 잠이 든 사람 등을 밤새 살피시면서 손 분무기로 모기약을 쳐 주시며 돌보심.


유차연이 한번은 성경을 들고 가는데 지하운동하던 빨치산 (그들은 적색별이 하나 있는 모자를 씀) 소위가 성경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 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제 목사부터 다 죽일 것이라고 내뱉음. 그러나 전혀 겁나지 않았고 백목사님 설교에 마음속으로 나오는 담대와 기쁨이 충만했음.

목사님께서 개명에서 위천으로 오시기 전 기도중에 위천교회를 보았다. 무덤 밖에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해골들만 있는 교회에 가는구나. 오셔서 보니까 권집사(조정숙집사의 모친, 후에 서부교회로 따라 왔다가 동일교회로 나감)이 주동 집사로서 성찬에 사용하는 떡을 집에서 제사드리던 떡으로 사용했음. 그러나 전임 서조사님은 그런 것을 별로 구별하지 않았고 인화적이었음. 백목사님은 제사를 폐하지 못하거나 기타 우상종류를 섬기던 사람들은 전부 집사를 뗐음. 결국 석순모, 정길선 (김유복집사님 모친, 장터에서 목욕탕 하신분, 한 자녀가 사직동 김시원장로 목수) 두 사람만이 집사로 남았음.


집회를 다니시고 신학교를 가시고 할 때는 천세욱,진학일,유차연 등이 아버지를 배웅하듯 그런 심정으로 멀리까지 배웅하곤 했음 6.25가 지나고 목사님은 부산으로 가게 되셨음. 목사님이 가신다는 말씀에 눈물바다가 되고 김석순이 하도 울고 섰으니까 너도 곧 부산 내려 올 것이니까 울지 말라고 하심. 배웅이사가던 날 학교 교장이 한참이나 나와서 학교 교문쪽에서 목사님 가는 모습을 보며 배웅.


* 백계순집사님

학장에서 기도로 소경눈을 띄웠음.


위천 교인:

신덕범: 서부교회 사찰로 있었고 뒤에 서부교회 내부 시험 때문인지 서부교회를 떠났고 현재 고신 목사로 있음


조종석: 어머니가 교회 주동집사. 대구 기독교 방송국 총무. 이만기 목사님 연배


정인대: 목사님 당시 전도사로 내보냄


박기천: 가북에서 목회하다 개평갔다가 거기서 순교, 산업계장으로서 이만기 목사의 직상이었고 한번은 이만기집사가 경제문제에 잘못이 있어 회개한다고 간증한 적이 있음. 가조교회 집회에서 은혜받고 바로 목회를 나왔다가 가북교회가 임영수라는 분 후임으로 부임. 유복자 아들 박래한 구포 성도학교 교목으로 있다가 재단이 불교로 넘어가면서 성도교회를 개척 현재 목사로 재직.


이만기:


이종옥: 아들


이종희: 이만기 조카


천세욱:


김주오:


진학일:


류차연:


- 후시대 : 신민범 신두범 신길범


김석순:

임용자: 이형장로 부인


신인식:


전우인:(전우남)


신춘자: 불신가정


황필희:


강덕이: 천세욱을 전도


3) 백조사님 후

백목사님 이임후 고신 본과생으로 있던 김진섭전도사가 담임. 그 뒤 진학일선생이 교육전도사로 잠깐 시무


6. 국기배례환란


1) 시작:

전국적 발단사(손양원,주남선 참고) 국기배례를 금하는 가르침을 받은 주일학생들이 학교 조례시간에 계속해서 배례 거부. 교장이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쳐도 계속 거부.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70여명은 한 명도 낙오없이 거부. 교장이 우리는 일주일을 가르 쳤는데 하루를 가르친 교회말을 듣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펄펄 뜀.


2) 환란:

류차연학생이 5학년 1학기에서 6학년 2학기로 월반하여 올라가서 1950년 졸업을 할 때, 졸업식 국민의례에서 국기배례 문제가 돌출 되어 문제가 되었다. (졸업식의 내빈 학부모 등의 분위기 때문에 크게 터지지는 않았지만 교장은 다음 졸업식, 아니 이제부터는 국기 배례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처리토록 했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끝나고 나자 이 교사들에게도 또 학생들에게도 주지 시켰다. 물론 위협, 협박 폭행 등등 . . 해방직후의 사회 분위기, 시골의 학교내 교사와 학생관계 등에서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학생들은 한 학생도 그기 굴하지 않았다. 결국 교장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 반에서교사들이 처리하지 못한 학생들은 교장실로 호출을 해서 직접 때렸다. ) ( 학생들의 교장실 구타사건과 3.1절 시차확인: 신소남이 1학년으로도 교장에게 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귀를 맞아서 귀에서 물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새학년이 시작되던 1950년 봄은 늘상 그러하듯 3.1절 행사로 시작 되었다. 일제 해방후 5년째 되던 분위기. 36년 억눌렸던 일제에서 나라를 찾았으니 우익 과격 분위기가 충천할 때이며, 과거 친일측에 선 인사들도 어느덧 애국인사가 되어 오히려 더 그런측 몰려가는 전국 분위기였다. 여기에 더하여 정부수립이 불과 1년막 넘어 선 때였고 북쪽과 사상전, 대결 경쟁에 제일 초창기 전의 가 충천할 때고 북쪽의 남로당 공작으로 사상대결이 극심할 때이며 지리산 덕유산의 내륙 깊숙한 빨갱이 사상에 대립한 최전선인 이 산골, 여순반란사건 공비 토벌이 덕유산에서 끝난 바로 그 밑에서 태극기에 대한 배례 거부는 태극기 반대 곧 남한 정부반대의 지하 적색분자들의 원격 조정되는 끄나풀적인 면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국가 존립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푼다면 절대권을 지녔던 국가 공권력의 압박은 시골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바로 6.25 직전의 음산한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


해방민으로서의 생생한 감동도 채 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 수립 후 두번째 맞는 3.1절, 감격스런 행사였다. 이런 행사에 국기 배례 거부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교장은 위천면 지서에 연락을 했다. 지서장인 주임이 조순경을 데리고 왔다. 일제 때의 순사. 마구 잡아가고 때리고 죽여도 되는 일반 사람이 제일 피부로 느끼는 무서운 존재,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경찰 그 면에서 유일하게 무서운 존재가 바로 경찰이었다.

3.1절 행사가 학교에서 행해지며 두 경관이 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국기배례 호령에 이를 무시한 사람은 앞에 있던 원래 진학일선생도 국기배례문제로 문제가 되어졌지만 그날은 출타하여 없었고 이날은 천세욱선생만 있었다. 교사기 때문에 앞줄에 있었다. 앞에서 교사가 있어 든든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일 무서운 순경들이 잡아 간다며 나와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경우가 다르다. 3.1절 축하절기 순서는 의례껏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이 된다. 모두들 거부했다. 식이 끝나자 지서 주임이 국기 배례 거부한 학생들을 모두 불러냈다. 그리고 국기배례를 끝까지 거부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다시 앞으로 할 사람은 들어가라고 하자 남은 학생이 12명. 6학년으로 김석순이 앞장을 서고 그를 따라 아래학년 학생들이 남았다.


백 목사님 큰 아들 백도광은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에 다닐 때였다. 집에 내려 왔다가 학교문제를 듣고 교장을 만나러 가서 헌법 12 조로 따졌다.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조문이었다. 국기배례문제는 학생이 양심에 따라 할 수도 있지만 안 할 수 도 있는 것을 학교에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따짐. 이때 옆에 있던 교감 허쌍춘선생이 얼마든지 강요할 수 있다고 하면서 큰 소리가 나고 이어 두 사람은 감정이 격해졌다. 밖에 나가서 일대일로 한번 싸워보자고 까지 진행이 되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침. 아들이 교장에게 따지고 교감과는 주먹다짐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었다는 말을 듣고 목사님이 학교로 교장을 찾아 싸우고 따질 것이 아니라며 잘 부탁한다고 말씀


3.1. 박해 이후:

그후 6.25가 발생했고 3달의 점령치하를 거쳐 수복이 되었을 때 당시 양성봉 경남도지사가 위천국민학교를 방문했다. 그의 아버지는 초량교회 장로였으며 그 자신 신앙있는 사람으로서 경남의 벽지 거거창군, 12개 면중에 하필 위천면에 방문을 했다. 면민에 대한 전시 위로의 뜻이었는데 3.1 국기 배례 환란으로 큰 문제가 된 이 학교에 도지사가 와서 연설을 하면서 국민의례 순서에 국기에 대한 경례 순서를 빼버렸다.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었다. 박해하던 학교에 대해서는 공연한 박해였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주일학생들에게는 어린 신앙들에게는 박해 뒤의 큰 위로가 된 것이었다. 그때 도지사는 백두산 곡대기에 깃발이 꽃을 때까지 단결해서 나가자고 함. 6.25를 거치면서 적군에 협조한 적색문제로 주민 사살문제가 많았던 등의 문제가 표면적 방문 이유였으나 위천국민학교 박해문제에 대한 위로 답방이었음.


당시의 주일학생:

류차연: 월반 조기졸업으로 졸업식때 박해가 있었고 3.1절 박해 때는 졸업했었음. 현 만덕교회담임목사


김석순: 강덕일 주동집사 딸. 3.1절박해의 주동학생.


정신자:


정난주: (// 집안)


정종은: (// 집안)


박봉순: 6학년, 박춘만의 누이


신말주: 원래 신앙생활을 아주 잘 했으나 3.1박해에 실패한 뒤로는 신앙이 시들해짐


신민범: 목사


정00 : 박영태장로부인


정채남: 이병준목사 전처


정순련: 김희준 모친


신소남: 뺨맞고 코피, 귀에 물이 나도록 당했던 학생, 그 후 부모와 가정 사방 박해로 신앙생활 못하고 현재 위천 다리 곁에서 가계


7. 6.25환란

목사님께서는 6.25 점령 중에는 어디로 출타를 하시든지 잠깐 다니러 가실 때는 반드시 행선지를 밝히셨음. 그리고 인민군이 찾으러 오면 꼭 알려 주라고 말하고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음. 1-2개 월간 . 어느날 마지막 말씀이라면서 설교를 하시는데 인민군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고 이만기집사가 연락하려 앞으로 나옴. 목사님은 설교 마치고 간다고 계속 설교. 예배가 끝나자 모두 겁이 나서 달아 나는 사람이 있었고 목사님은 잡혀갔다 오 면서 책임자가 자기도 장로 아들이라면서 보내서 왔다 하심. 그때 인민군은 질이 좋았음. 민간 피해없고, 공산주의 되면 잘 살게 되고 김일성대학까지 다닐 수 있다고 설득하고 다녔음.


8 . 그 이후

목사님이 부산서부교회로 가신 다음. 1년후 부산에 김석순은 내려 왔음. 주일학교 회계를 맡겨서 한동희주일학교 부장에게 사례를 드림. 부산으로 백목사님이 내려 가신 뒤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만덕교회 교인 한 사람이 나왔다가 주위 고신측에서 백목사님이 7계를 범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시험받고 다른 곳으로 가버림.


진학일: 54년 유차연과 같이 부산 내려와서 있다가 진학일 사모가 서부교회 문제를 잘못보고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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