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원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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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원

내용 말씀과 목회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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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일시 : 1960년말

인물 : 오동원 목사님 가족 - 앞줄 중앙


설명 : 오동원 목사님이 여수의 애양원 앞에 신풍에서 근무하던 성암교인 전체 사진


1970년 신풍공항이 건설 되기 전 공항 중앙 위치에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 개척한 신풍교회와 애양원에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세운 성암교회가 나란히 있었고, 사진은 성암교회의 모습. 여반 뒤에 선교사 부인 4명이 보이며 교인 구성은, 애양원의 당시 직원들과 그 가족, 애양원에서 퇴원하여 주변에 살던 애양원 출신 교인, 일반 마을의 일반 사람인데

직원들과 일반 교인 중에서 가장 핵심 되는 가정들 30여 명을 오동원 목사님이 백영희 목사님 교훈에서 믿으라 하여 신풍교회로 보내고 자신은 부산에서 개척하여 1천 명 교회를 이룸


사진2


일시 : 1970년경

인물 : 오동원 목사님 부부가 앞의 좌우에 앉고 뒤에는 양가 부친


설명 : 공항 건설로 신풍교회가 공항 앞으로 이전하자 성암교인들이 신풍교회 견제를 위해


신풍교회 바로 옆에 성암교회를 이전했으며 이전 직후의 모습


70년대를 아는 분들은 공회 목회자 중에서 오동원 목사님과 그 개척한 동부교회를 기억할 것입니다. 현재 1천여 명 출석 교회로 성장했고 오 목사님은 개척 후 25년을 시무했습니다. 현재 아들 2명이 다 목회하고 계시며 암 투병 중에도 하나님께 그 치료를 맡겼던 분으로 목숨까지 참으로 주님께 맡겼던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공회 출신 목회자 중에서 가장 큰 부흥을 이룬 분입니다.


- 신상

오동원 목사님은


1924년 생이며 79세 돌아 가시고 생존하셨다면 현 86세로 경북 청도 출신, 어릴 때 마을의 시내 쪽과 산 쪽으로 각각 마을이 하나씩 있었는데 목사님 마을은 다 믿고 다 잘 되고, 안 믿는 마을은 사람들이 일찍 죽는 등 아주 안 되었음. 어릴 때 김삼대 목사님 부흥회에 참석한 후부터는 좀 잘 믿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어린 아이 때 새벽예배를 참석하며 열심. 가정이 다 믿는 가정. 대구에서 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신대 57년 졸업, 박형룡 교장 시절


이상희 사모님은

부산의 사직동이 고향, 25세 결혼하고 현재 76세(1934년생)시며 동래 수완교회에 20세 조금 지나서 출석 첫 신앙. 수완교회와 거리가 멀어서 동네에서 ‘석사교회’로 시작했는데 그 교회가 지금은 사직동제일교회로 개칭하고 예배당도 이전. 아버지 친구가 집사 시절 아버지를 전도했고 이성봉 목사님이 유명할 때 부모 딸 2명뿐인 가정인데 권유를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참석하고 신앙 출발, 부흥회는 야외 온천장 쪽


- 목회

밀양신생원교회, 결혼할 때 강도사였고, 지리산 밑에 덕산(함양, 산청)에 조금 있다가


부산 물금에 왔다가 광양중앙교회로 청빙 받았고, 당시 사택은 산 밑이고 교회는 마을 차 다니는 곳에 2 - 3년 계시고, 여수시 애양원 앞에 있는 성암교회에서 청빙하여 1965년 부임


- 성암교회

성암교회 핵심 교인은 서귀덕 집사님과 애양원 총무과장 차종석 장로님 가정, 장로님은 그냥 무난한 성격, 두 분 다 신앙밖에 몰랐던 분들. 서 집사님은 기도를 하면 굉장했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 비행장 있기 전에 돌 예배당 시절에는 그 옆에 사택이 있었고 마을은 좀 떨어져 있었고, 애양원 옆에는 직원들이 살았고, 당시 공제동에 애양원에서 나온 정착민들이 나와 있어 출석했고 장전에도 정착민들이 나와 살며 자전거를 타고 교회를 왔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이 교인이었고 교회는 주로 애양원 직원들이 주도했는데 직원들이 의사도 있고 전체 교인의 절반이 넘었기 때문이며


서귀덕 집사님이 오 목사님이 잘 믿으려는 분이므로 좋아했고 목사님은 서 집사님을 통해 서 목사님이 소개한 서울 집회를 다녔는데 이병규 목사님의 말씀이 아주 특별해서 목사님이 혹 했고, 서울로 배우러 다닐 때는 목사님 혼자 갔고, 이후에는 이교부 조사님에게도 다녔고, 때 감리교 총회장을 지낸 김용주 목사님과 친구며 서로 성격도 비슷했고 똑 같이 잘 믿어 보려 했고 감리교에서 손꼽는 교회인데 그 분은 따라 다닐 때 머리까지 깎았음. 성암교회에 있을 때 한번은 이교부를 초빙해서 집회도 했고, 따라 다니며 크게 은혜 받는 정도.


서 집사님이 뒤에는 백 목사님을 소개해서 교인들에게 공회를 소개했고 부산으로 오게 된 것. 성암교회 재임 중 장로님들을 설득하여 교회 자체를 총공회로 소속 시키려고 참으로 노력을 많이 했으나 애양원과 특수 관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에 당시 교인 중에 진금자 김순남 집사님 등이 다 대단한 분이었는데 30여 교인들을 옆에 있는 신풍교회로 안내하고 부산으로 이동


- 부산 동부교회 개척

백 목사님께 가까이에서 배우며 한 편으로 이제 정말 말씀대로 바로 된 교회를 개척해 보려고 부산으로 왔으며 개척부터 순수 개척으로 시작했고 공회 소속은 정식으로 하지 않았고 집회는 교인들도 참석. 도중에 교인들이 이단 소속이라고 다 나가기로 했는데 일부만 나갔는데 여전도사님과 장로님 부부 가정과 또 한 장로님 가정이 중심이 되어 뒤로는 다 동의를 했고 그들이 목사님 형제만 남는다 한 정도.


부산 와서 연산동에서 아래 쪽에 있던 교회에 조금 있다가 동래 서동으로 가서 교회를 적게 지었고, 밑의 교회 있을 때 합동 가입, 그리고 위 교회 크게 짓고 은퇴 후 후임이 오셔서 노인학교 하면서 교인이 계속 부흥 되었고


- 공회 단절

당시는 공회 내에 교역자들끼리 이동하는 것이 있었는데 개척한 교회를 끝까지 키워 보기 위해서 이동할 수 없어 공회로 정식 소속하지 못했고


- 평소 신앙

목사님은 설교 준비에 다 투자하는 분, 신풍에 있을 때 하도 설교를 너무 힘들게 해서 내가 대강 좀 해라 했는데 목사님이 야단하며 그 때가 수요일인데 자전거 타고 모두들 대놓고 오는 모습을 말하며, 저 멀리서 저렇게 오는데 사모하고 오는데 힘껏 해야지 라고 함. 설교 준비에만 온 힘. 순진해서 세상일은 전혀 모르고, 동회 일도 모르고 성경연구 말씀연구.


- 공회 교훈

백 목사님께 다니고 부터는 그 말씀 응용 많이 했음. 목사님께서 녹음을 해오면 오 목사님은 오른 팔이 불편하여 사모님이 일차 정서하고 그 것을 목사님이 다시 듣고 고쳤고, 그 노트 적은 것을 동부교인 중에서 서부교회로 간 송유상씨에게 다 건네 줬고, 과거 신풍교회와 연관성 때문에 신풍교회에 일체 복사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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