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순
내용 | 백목사님이 개명에서 목회로 출발시킨 교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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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순 목사님 약력 - 가족 작성의 묘비
1945년 4월 : 수세 (주남선 목사님)
1946년 9월 : 개명교회 집사
1950년 2월 : 전도사 임명
1951년 4월 : 고려신학 입학
1952년 12월 : 개명교회
1953년 9월 : 전도사 고시 합격
1954년 6월 : 학장교회
1955년 4월 : 개명교회
1962년 10월 : 중앙교회(현, 창동교회)
1965년 3월 : 청량리교회
1965년 10월 : 대한신학교 졸업
1966년 5월 : 목사장립(한국총공회)
1966년 6월 : 동문교회
1975년 2월 : 신풍교회
1976년 4월 : 양성원 연구과 입학
1977년 10월 : 사직동 교회
1978년 11월 : 남천교회
1980년 6월 : 장생골 기도원 공사책임자
1980년 11월 : 학장교회
1981년 8월 : 동성로교회
1982년 3월 : 양성원 연구과 졸업
1983년 7월 : 창동교회
1985년 3월 : 안산교회
1987년 10월 : 교학실장 및 시찰장위임
1988년 12월 : 제2대 양성원장
1991년 2월 : 성광교회
1992년 11월 : 안산교회
1993년 4월 : 제5대 양성원장
1999년 11월 : 소천
(공회 내 활동하는 가족 사항)
1. 부부 : 이재순 성정순
2 여동생 : 이재분 (개명 > 창동 > 서부교회)
하영신
하순희
하영식
하영숙 이복연
하점자 신철식
3 막내 동생 : 이분순 이덕조 (개명 > 창동 > 동문교회)
이은숙
이도찬
이영찬
이경찬
* 이종출 이덕임 목사님 부부는 이재순 목사님과 개명의 같은 집안
1.소개
백목사님 예수 믿었던 초기 개명역사에서, 특히 사생활이라 할 수 있는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로, 비교적 늦게 믿고 조심이 많은 성격 때문에 비슷한 형편의 다른 목회자들에 비해 평생의 목회활동이 대조가 될 정도로 미미. 그러나 평소 성격대로 천천히 그러나 오랫동안 유지되는 장점으로 마지막 노년에 이르면서 가파르게 은혜생활을 하게 되었고, 목회활동에 현저하게 앞섰던 다른 분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두드러지게 신앙쇠퇴와 은혜감퇴로 그 빛을 잃는 가운데 뚜렷하게 밝은 빛을 가져 극명히 대비. 그의 마지막 수년이 그의 평생을 전부 의롭게 은혜롭게 깨끗하게 마무리
2.개인소개
1919년생으로서 1943년경 예수를 믿었고 아직까지 백목사님이 아직 농산교회 집사직을 유지하고 있던 때. 해방 후 농산에서 주남선목사님에게 세례. 백목사님이 가을에 결혼, 그해 겨울 처음 양조장 허가 제도 시행. 골짜기마다 허가가 나오게 되었고 결혼후 보통 가게 되어있는 신행도 안가고, 일을 추진하여 이듬해 봄에 허가. 신행은 남자가 반드시 여자 쪽으로 가는 것이며 약식으로 하면 당일 가던지 3일만. 그러나 여유있는 사람은 가을에는 봄까지, 봄에는 가을까지 신행. 대개 그동안 신랑은 오고감. 술독아 집이 이재순 붙이는 논. 보리도 심고 하던 논인데 보리 추수 일찍하고 농사 손해를 보면서 술독아 준비완료. 개명에 오신 목사님은 남의 집 아랫방에서 접방살이로 개명생활 시작. 동네 이름이 동네로 넘어오기 위해 건너야되는 개울 때문에 수유(水踰)라고 했고, 우리말로 물넘는 '무니미 동네'가 됨.
3.백조사님 위천이동과 이재순 전도사 인허
백조사님이 전도사 임명을 받고도 개명교회를 자비량으로 유지, 동시에 원기 봉산 웅양교회까지를 함께 맡은 4처 교역자로 충성. 위천교회에서 집회 초청이 있었고, 위천 교인들의 청빙. 백조사님은 “내가 여기 올 일이야 있겠나! 이런 곳을 왜 오나?” 하는 마음. 그러나 딸의 사고로 유급전도사로 위천으로 부임. 그동안 맡고 있던 4처 후임 교역자 문제가 대두. 당시 개명교회는 유급전도사를 전담하기 어려운 형편에서 교회 내 이재순의 가정경제가 좋았고 따라서 교역일이 부과. 이재순은 이 문제가 자신에게 아직까지 신앙적으로 벅찬 일이었기 때문에 주저했고, 백조사님의 위천 이동.
1950년 음력 정초, 백조사님이 웅양교회 집회. 당시 농촌교회는 농한기에 주로 집회. 주남선 목사님이 당회장으로 연중 행사 겸 웅양교회 방문. 주목사님과 백조사님이 의논하여 결정해 놓고는 이재순을 불러 통고. 그동안 마음 준비도 했지만, 우선 신앙에서도 “전도사”이름을 갖는 것이 본인에게는 벅찬 일. 이름만이라도 그렇게 해놓는 정도에서 집회 중에 이재순을 백조사님 후임 개명교회 교역자로 임명.
4.박순명 영수 교회
개명 위에는 동네가 넷. 동쪽에 둘, 서쪽에 둘. 1989년 백목사님이 개명 마지막 방문시 자주 기도하던 곳을 가리킨 곳. 물안실(下水內) 즉 아랫 물안실이고 그 위가 상수내이며 그곳에 1903년 정도 거창읍교회 보다 1년 먼저 교회가 설립. 장종범의 외조부가 영수. 그때 교인으로서는 거창읍교회 원영봉 삼촌. 이곳 교회가 유지되지 못하고. 그다음 백목사님이 무니미에 기도실로 시작. 먼저 있던 물안실 교히는 실은 선교사가 시작. 코쟁이 구경간다고 마을 아이들이 다닌 정도. 박영수 집이 위에 있었고 교회는 그 아랫쪽. 봉산교회 원기동교회를 돌보던 전은혜 선생이 교회 막바지에 다녔었고, 해방후에 다시 나왔을 때에는 그의 교리가 넓다고 이미 주목사님과 갈등. 이곳 교회의 중심인 박영수 노인은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아니했고 또 술을 먹는 정도. 결국 박영수가 신앙생활을 그만두면서 그 교회 없어짐. 경남노회 1924년 기록에 개명교회와 박순명 영수 자료가 남아 있음(박순명, 1924년 -> 13.4.22.추가)
5.개명교회
백목사님이 농산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사시는 무니미 동네에 헌 집을 사서 예배를 보다가 교인이 없는 무니미보다는 교인이 나오는 상개명에 건축을 하자고 해서 상개명에 교회를 세움. 교회가 서면서 박영수도 다시 교회를 다니다가 임종. 장례식은 황보조사님이 와서 믿는 식을 했고 집안에서는 안믿는 식이 진행되어 초상이 혼란. 이재순은 믿지 않을 때였고 하관식을 하던 기억 정도.
개명교회 출발의 첫교인은 어쨌던 바로 이 박영수 집안 박봉선. 주일학생 때부터 교회 출입을 하던 사람. 교회가 시작되면서도 곧 바로 출석. 그다음 정갑용, 이선희, 우희숙 등이 첫교인.
6.황보유안
목사님은 처음 믿을 때부터 철저했고 교리문제에 특별. 교리논쟁이 빈번. 한번씩 황보유안 조사님이 개명에 들러면 꼭 많은 논쟁. 인사만 하고 가다가 악수하면서 잡은 손에서 인사말에 목사님은 꼬투리를 잡고 그것이 교리문제로 논쟁. 다시 잡은 손을 서로 잡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밤을 세우고 다음날 가는 경우도 있음.
7.개명교회의 신앙박해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목사님이 박해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차라리 해야할 정도. 특히 여름날들이 문제. 어두운 때 시작한 새벽예배가 날이 아무리 훤히 틔여도 설교가 계속. 안 믿는 남자들이 아침 먹기 전에 일을 해놓고 부터 해놓고 또 나가야 될 것인데, 밥해 줄 여자들이 새벽에 간 교회에서 예배를 본다고 돌아오지를 않았고 난리가 날 만.
목사님의 설교는 그때도 원고 없이 계속. 강단에서 본문을 잡고 바로 설교가 시작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음. 혹 강단에 메모 몇 자 적어서 올라가는 정도. 그러나 모든 설교는 십자가의 도를 가르쳤고 교인들은 교회 다니는 처음부터 십자가부터 배움.
이재순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때에도 백목사님의 집을 거쳐야 자기 논들로 나가기 때문에 하루 한번은 백목사님의 집을 거치는데 늘 주재소에서 나온 순사가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곤 함. 그때는 무슨 말인지를 모를 때. 목사님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조심을 했으나 마주치면 말이 많음.
8.출옥성도 박인순선생
고제초등학교에 강익구(익부 -> 익구, 13.4.22.수정)선생이 처음에는 부인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핍박. 해방 후에는 그도 교회를 다녔는데 그 부인이 밀양 사람이며 박인순 선생과 아는 사이. 해방후 박인순선생을 백목사님에게 소개, 개명교회와 백조사님의 신앙이 전해짐.
9.나환자와 백목사님
애양원에서 일본인 원장 밑에서 못 견디고 흩어져 다니던 나환자들 중에서 개명을 지나면서 다리 밑에 있게 되고 방앗간을 하시던 목사님은 그 사람들이 환대. 환자들은 자기들끼리 신앙으로 연결되는 줄이 있었고 이것이 전국에 나환자들에게 백목사님이 알려지는 계기. 지나가는 나환자들은 이곳을 빼지 않고 다 들어왔고 예배시간도 참석. 예배 시간에 독창도 있었으며 나중에 거창읍 외곽에 양혜원 설립으로 이어지고 또 여수 애양원과 전국 나환자 마을에 부흥집회 초빙이 빈번. 거창읍 북쪽 외곽에는 움막이 있었고 백목사님이 거창으로 가는 때는 꼭 그곳을 들러 예배를 보고 그렇게 친밀.
15.원래 건립된 예배당
예배당은 4칸 2줄 구조. 그 예배당에서 2-3년 예배를 드리다가 일본사람들이 일어 학습당으로 징발. 교회를 일본어학습당으로 협조를 요청. “예배당은 교회 전용이다.” “평일에 비어 놓아 봐야 뭐하겠느냐” “주일날은 예배 보고 그러면 평일만 그렇게 하자” “못한다” “ 그러면 우리가 점령하면 어떻게 할래” “힘이 없어 쫓겨나면 쫓겨나지 빌려 줄 수는 없다”예배당 옆집이 정갑용집사님 마당이었고 해방 때까지 계속. 이재순 교회 출석은 이곳에서부터였고, 그 일본말 선생이 해방후에는 한글을 가르침. 그리고 이어 개명초등학교가 됨. 4학년까지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5, 6학년 졸업은 면에 있는 학교로 통학. 해방으로 되찾은 예배당은 6.25 전쟁에 빨갱이들이 소각.
16.전쟁과 그 이후 목회
1950년에 전도사 임명이 되고 바로 6.25사변 발생. 주남선목사님 모신 여름 수양회를 거창읍 죽전에 있는 명덕학교 2층집. 교역자수양회가 월요일에서 다음 월요일까지 계속. 이 수양회가 다 마치기도 채 전에 이틀 저녁을 계속 거창시내 북쪽에 있는 도평에서 거창읍으로 후퇴하는 차량들의 헤드라이트가 계속되었고, 거창 시내 남쪽인 남상쪽으로 후퇴하는 군차량으로 온 밤이 밝아짐. 이런 광경을 2층에서 멀리보며 교역자회를 종료. 북쪽인 고제면으로 가는 교역자들은 진군하여 내려오는 인민군들을 마주 대하며 교회로 향함. 벌써 남쪽으로 내려가던 교역자들은 피난까지 가다가 고령 낙동강의 영덕다리가 파괴되어 돌아오는 정도. 추국원조사님은 가다가 돌아오고, 다른 조사님이 물로 건너다가 폭격에 죽는 사건. 국군이 수복한 다음에야 거창읍에 내려올 수 있었고 시내는 전파가 되다시피 하여 예배당 탑만 보이는 정도. 예배당 지붕은 총에 맞아 벌집. 주목사님 사택 역시 무사.
개명교회는 6.25때 새벽예배 보고 낮에는 12시에 종치고 예배. 백목사님이 지도했던 위천교회, 봉산교회도 마찬가지. 낮 12시 종치고 예배보는 생활 계속. 수, 금, 주일에는 3차례 예배. 백영침은 봉산에서 붙들렸다가 개명쪽으로 살아왔고, 갔다 온 사람들의 입에서 살인명단 1위가 면장 형. 2위가 이재순.
전쟁 후 학장 개척으로 1년, 다시 개명으로 왔다가 10년 목회. 창동교회의 옛이름인 거창 중앙교회에 송용조조사님 후임으로 3년, 그다음 청량리교회로 이동.
고려신학교는 개명에서 다니다가 고신과 분리된 후 중단. 거창중앙교회에서 서울로 신학 계속. 청량리교회, 신풍교회(자녀 기억, 75년 9-10월 부임 78년 이동), 사직동교회(78년 백태영 도미 후임. 1979.9) 학장교회(학장 기록, 1980.3.-81.3. 제 9대 이재순 목사님), 동성로교회, 창동교회(83.7.-84.7.), 동문교회, 1987년 총공회 행정실장, 1990년 성광교회, 마지막 안산교회에서 평생에 가장 깊은 목회를 하고 2000년 사망.
가족으로는
부부 : 이재순 성정순
자녀 : 이영애 김무웅, 이천애 배종일, 이성찬 박은순(신풍교회 박노원 민정자 女), 이성욱 이은주(서부교회 이춘영 강성금 女)
안산교회 김무웅장로님 부부, 배종일목사님 부부가 두 딸 가정, 이성찬, 이성욱 집사님 부부가 두 아들 가정. 이재순목사님은 백목사님의 처조카
김무웅 딸 부부가 김신희 이진권(이은주 동생 : 이진석 이은주 이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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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0 14:21
이재순 - 가족 회고
11.6.9. 둘째 따님 이천애 사모님
이재순 목사님 이동
1952년, 출생
1958년. 7세에 개명초등학교 입학
1962년, 개명초교 5학년 초에 거창읍의 거창초교 5학년으로 전학, 중앙교회 시절
1965년, 4월경 거창여중 2학년에서 청량리교회로 부임
1966년, 동문교회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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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9. 큰 아들 이성찬 집사님
중앙교회 시절 부임하여 그 곳에서 청량리교회로 부임했고
사택은 절 부근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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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