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
내용 | 이인재 |
---|
* 대구 성남 교회(현 성동 교회)에서 개척한 대구 동일 교회의 홈 페이지에서 인용
우리 동일교회를 개척한 성남교회(지금의 성동교회)의 당시 목사님이 이인재 목사님이다.
그의 홈페이지를 찾아 소개한다. (아들들이 잘 정리해 놓았다.)
http://injaelee.org/k_chronology.html
1906년 1월 4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79번지에서 출생
1926년. 밀양농잠학교 졸업
1926년 3월~1938년 1월, 면서기로 13년간 공무원 생활
1930년 12월 4일, 마산리교회의 초대 선출직 집사로 피택
당시 이름은 집에서 부르던 리쥬원(이주원)으로 기록되어 있음
(마산교회 제1회 당회록, 1936년 12월 4일)
1938년 4월, 평양 신학교 입학,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
1940년, 평양 이노리 교회 전도사로 봉직
1940년 5월 13일,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
평양경찰서 유치장과 평양형무소 수감. (예심종결문)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만 5년 4개월 옥고치룸). (사진)
1945년 10월, 밀양마산교회 전도사(제12대 담임 교역자).
1946년~1947년, 창원교회 전도사(창원교회 제17대 교역자로 부임).
1947년 6월 7일, 조수환, 황철도와 함께 고려신학교 제1회로 졸업 (사진)
1948년~1950년 8월, 전도사로 서울 성산교회를 개척해서 설립했지만
6.25참변으로 몸바쳤던 교회가 분해되는 역사적 고통을 겪음.
1950년 9월~1952년 5월, 거제도 장승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1951년 3월 6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제54회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날 목사로 장립을 받은 사람은 이인재, 배수윤, 김희수, 김장원,
정해동, 손명복, 박성근 모두 7명이었다.
1952년 7월~1960년 12월 6일, 대구 성남교회 시무
1961년~1963년, 대구 동성로 교회 시무
1965년~1967년 10월, 서울 의정부중앙교회 시무 (사진)
1967년 11월~1971년, 서울 성광교회 시무
1971년~1974년, 대구 달성교회 시무
1974년 6월 29일, 도미(渡美) (사진)
1976년~1978년, 시카고 미현 교회 창립(후에 「조명교회」로 이름을 바꿈)
1978년~1979년, 뉴저지 허드슨 장로 교회 창립, 시무
1978년 2월 8일, 미주 합동측 예수교장로회 총회 창설, 초대 총회장 역임 (총회록)
1979년~1981년, 펜실베니아주 이리 (Erie) 장로교회 창립, 시무
1980년 8월 12일, 미국 시민권 취득 (사진)
1981년 5월~1984년, 필라델피아 새한 장로 교회 창립, 시무
1984년 12월 11일, 미주 필라델피아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됨
1987년 8월~1889년, 콜로라도 덴버 성산교회 창립, 시무
1992년 4월 8일, 필라델피아 새한 장로 교회 원로목사 추대 (사진)
2000년 4월 30일, 새벽 1시 50분, 소천. (묘지사진)
저서: 『넘쳐 흐르는 생명강』(서울: 소망사), 1982. 6. 30
『하늘에서 온 방문객』 (부산: 제일문화사), 1988. 10.1
『성령충만을 받는 비결』(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4. 7. 25.
이인재 목사 소개 책자: 『이인재 목사의 생애와 설교』(영문), 심군식1996. 10. 5
가족사항: 이인재
신상이 - 이정희 이정빈 이수옥 이정신
문상문 - 이정윤 이정수
-----------------------------------------------------------------------------------
* 이 인재 목사님의 모교인 밀양 마산 교회 출간
제목 : 신앙의 투사 - 이 인재 목사
저자 : 박 시영 목사님 - 밀양 마산 교회
발간 : 2006년
인쇄 : 도서출판 영문사
편찬 :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전략)
3. 고려신학교제1회로 졸업
1947년 6월 7일, 이인재전도사는 고려신학교 제1회생으로 졸업하였다. 제1회 졸업생은 이인재, 조수환, 황철도. 세명뿐이었다. 졸업후 이인재 전도사는 서울 신당동에서 성산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그러나 6.25사변 때 전쟁의 참사로 성산교회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1951년 3월 6일, 이인재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제54회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날 목사로 장립을 받은 사람은 이인재, 배수윤, 김희수, 김장원, 정해동, 손명복, 박성근 이렇게 모두 7명이었다. 이인재 목사의 고려신학교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자수성가해서 모아놓은 밀양의 상남면 마산리의 전답 중 일부를 정리해서 보따리신학교로 불리우던 고려신학교의 부지매입과 교사(校舍) 건립에 이상근 목사와 함께 헌금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인도한 집회의 강사 사례비를 고스란히 신학교로 보내었다.
4. 거제 장승포 교회에서 대구 성남 교회로
1950년대의 이인재 목사의 목회사역은 참으로 힘들었다. 서울 성산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생활을 하던 중에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겪게 되었다. 난리 가운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이인재 전도사는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서 섬기는 직분은 달라졌지만 전쟁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힘든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이 시절 힘들지 않게 산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특히 이인재 목사의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1952년 5월까지 거제 장승포 교회를 담임하던 이인재는 1952년 7월, 대구 성남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구 성남교회는 지금의 대구 성동교회이다. 성남교회는 대구지방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된 교회이다. 고려신학교를 독자적으로 운영한다고 하여 총회측에서 출옥성도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총회는 전권위원회를 만들어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에 계속적인 압력을 가했다. 여기에 반대하는 교인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우선 기존의 교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면서 고려신학교 후원에 가담하였다. 경북에서는 여러곳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났다. 대구 성남교회도 그러한 형편에서 개척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존교회를 벗어나 새로이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을 진리운동이라 하였다.
1951년 1월, 대구제일교회에서 고경희권사, 임장실권사, 조신명권사, 송은경집사 등 9명이 함께 나와 1951년 첫주부터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신일 이발관 2층에 모여서 오종덕 목사의 인도로 주일마다 모여 예배하였다.1952년 4월, 대구시 중구 동성로 91번지에 대지 100평을 구입하여 30평 건물을 지었다. 이곳에서 성남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창립예배후 성남교회는 서울 성산교회에서 사역하던 출옥성도 이인재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목회는 순탄하지가 않았다. 이인재 목사는 자신과 苦樂(고락)을 함께하던 사랑하는 아내 신상이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분쟁으로 나누이게 되는 아픔도 겪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신상이 사모는 둘째 아들 이정신을 출산하고 몸이 몹시도 불편한 상태에 있었다. 약간의 뇌출혈로 경미하지만 중풍을 앓게되어 擧動(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오랜 시일동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남편 뒷바라지 하랴, 6.25 전쟁 때문에 피난 다니랴, 또 이 교회 저교회로 시무지를 이동할 때마다 겪은 어려움이 누적되어 급격하게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잘 버텨왔었는데 1952년 12월 17일, 만 44세의 나이로 갑자기 쓰러지게된 것이다. 사실 이날 신상이 사모가 뇌출혈로 쓰러졌을때 이인재 목사는 거창교회 집회인도차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몇일간의 부흥집회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이인재 목사는 큰아들 이정빈에게 뒷일을 부탁만 한 채 집을 나서 버렸다. 당시 큰아들 이정빈은 연세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6.25전쟁으로 인해서 연세대학교는 부산에서 임시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이소식을 접한 이정빈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집회인도가 약속되어 있어 그일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찌 쓰러진 아내를 뒤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못내 아버지의 무심한 태도가 못 마땅했다. 결혼해서 출가한 누나 이정희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러나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채 신상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일밖에 모르는 일 중독자처럼 보였다. 그러기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 큰 아들 이정빈에게는 이 일이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으로 마음한 켠에 자리잡게 되었다. 재혼. 첫부인을 잃은 이인재는 자신의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성남교회를 섬기면서 그때의 의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인재 목사의 주위에서는 그의 재혼 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당시 박윤선 목사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1954년 3월 18일 부인 김애련 사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그후 6개월, 박윤선 목사는 부산 남교회 전도사로 지낸 적이 있던 李和主(이화주)양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인재 목사 주변에서도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는 아내가 꼭 필요하다며 그의 재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아내와의 사별 후 3년, 이인재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권사, 임두연 사모로부터 문상문이라는 처녀를 소개받게 되었다. 문상문이라는 처녀는 당시 삼일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이 좋은 노처녀였다. 이인재 목사는 주남선 목사가 목회하는 거창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집회를 가졌는데 문상문이라는 처녀도 거창교회에서 유치원 교사로 봉사했던 경력이 있고 해서 서로간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박윤선 목사와 이인재 목사가 동갑내기요, 또한 박윤선 목사의 아내가 된 이화주 사모와 이인재 목사와 곧 결혼할 문상문이라는 처녀 역시 동갑내기였다. 그러니 주변에서도 천생연분이라며 그들의 결혼을 재촉하게 된 것이다.1954년 초여름, 부산 삼일교회당에서 오종덕 목사의주례로 이인재 목사는 문상문씨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다윗과 요나단
이인재 목사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일찍이 고향교회인 밀양마산교회에서 차재선이라는 좋은 선생이자 친구를 두었었다. 그러나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늘 아쉬움 속에서 함께했던 세월들을 추억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인재는 손양원 목사와도 가까운 관계였다. 손양원 목사가 순교했을때 여수 애양원 교회가 후임목회자로 그를 주목할만큼 그와 손양원 목사의 친분은 두터웠다. 이인재 목사는 옥중동지이자 좋은 신앙의 선배였던 주남선 목사를 존경하였다. 그런 주남선 목사 곁에 백영희라는 좋은 신학생이 있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1910년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칠 남매중에 차남으로 태어나서, 이웃 웅양면에 있는 웅양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리고 수준급의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농촌에서 자랐고, 사회적 진출을 위하여 16세에 일본에 건너가서 3년동안 여러 직장에서 다양한 생활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생활에 미련을 두지않고 고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양조장이었다. 백영희 전도사는25세 때에 스스로 전도인을 초청하여 구원의 도리를 배우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그후 자신의 기호품이었던 술과 담배를 끊으며, 양조장까지 신앙적 장애가 된다고 하여 처분하였다. 또한 많은 채권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성서공회에 기증하였다.
그는 웅양교회의 집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28세 때 고제면과 웅양면의 웅양, 봉산, 운기 그리고 개명을 동시에 맡아 무급교역자로 헌신을 하였다. 당시 백영희 전도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인재 목사와 비슷하여서 두사람 사이의 친분은 남달랐다. 그의 탁월한 성경해석과 기도 생활은 감히 다른 이들이 흉내내기 힘들 정도였다. 몇 살 年下(연하)이지만 이와같은 백영희 전도사였기에 이인재 목사가 친구처럼 가까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호주 선교부에서 경영하는 진주 경남 성경학원을 졸업하고,1950년 6월 2일, 고려신학교에 입학해서 1954년 6월 17일 제8회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1952년 7월 27일, 서울 충현교회로 사역을 옮긴 김창인 목사의 후임으로 부산서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57년, 고신측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제1회 거창 집회를 시작으로 해서 1968년까지 부흥사로 크게 활동하였다. 또한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오종덕 목사도 그를 좋아해서 신학교 강의 시간에 특강을 맡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남다른 총명과 탁월한 기도생활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 외에는 다른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서 당시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인재 목사는 이러한 백영희 전도사를 끝까지 옹호하였고 주변에서 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둘을 다윗과 요나단 사이라고 일컬었다. 백영희 전도사의 私(사)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말들이 이인재 목사에게 건네졌다. 그럴 때마다 이인재 목사는 백영희 전도사로부터 그 일에 대한 사실을 확인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과 다른 점들에 대해 알려 주곤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성남교회는 중앙로에 자리를 잡고 3~4년이 지났을 무렵 교회분립이라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때도 이인재 목사는 백영희 전도사를 옹호하고 지지하여 함께 뜻을 같이 하던이들과 동성로 교회를 창립해서 새롭게 목회를 시작하였다.
1959년 4월에 고신측에서 백영희 강도사의 강도사직을 해임하고, 그해 9월에 백영희를 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합동교단에서도 1968년 대구 달성교회에서 열린 경북노회를 통해 백영희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을 경북노회가 받아들여 결국 백영희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길을 걷게 된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이인재 목사는 백영희 목사의 초창기 모습, 특히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 그의 탁월한 성경해석, 남다른 기도생활등에 함께 뜻을 같이 했을뿐 그의 신학사상이나 성경 해석관까지 같이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백영희 전도사가 주석도 보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면서 이인재 목사는 주석을 참고할 것을 권면했으며 직접 기도를 통한 주관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경고도 했었다.
한번은 이인재 목사가 백영희 전도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너도 무식한 사람이고 나도 무식한 사람이다. 네가 해석한 성경 말씀을 선배 학자들에게 한번쯤 물어보고 설교로 선포해야지 내가 느낀 그 느낌이 최고다라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하지만 백영희 전도사는 이러한 이인재 목사의 조언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석해 주신다. 나는 기도해서 깨달은 것만 믿는다”.그의 주장을 꺽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백영희 전도사는“중생한 영혼은 죄를 짓지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인재 목사도 도무지 이와 같은 생각까지는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다윗과 요나단 같은 친구사이였지만 그와의 결별을 선언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5.합동교단에 머무르게 되어
1960년 12월 13일, 고신은 승동측과 합동이 되어 소위 합동교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고시측은1963년 합동측으로 분리하여 환원하였다. 그러나 이인재 목사는 환원하지 않은 채 합동측에 머물러 있었다. 왜 이인재 목사는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대다수 출옥 성도들이 함께 하고 있는 고신측에 몸담지 않고 그가 합동교단에 머무르게 되었을까? 본인이 직접 그 대답을 전해주지 않아서 이유를 알기가 어렵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추축을 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백영희 목사와의 관련성이다. 그가 섬겼던 교회들은 한결같이 백영희 목사를 추종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교회들이다. 동성로교회와 뒤에 살펴볼 대구 달성 교회도 백영희 목사와의 관련성에서 쉽게 연관 지워 볼 수 있는 교회이다. 그리고 그가 비록 백영희 목사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진듯 보이나 도미후, 여러차례 한국 방문시에 가졌던 집회들 중 많은 경우 백영희 목사와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교회에서 열린 것들이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정암 박윤선 목사와 이인재 목사의 친밀성이다. 이인재 목사는 193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박윤선 목사과 친분이 두터웠다. 동갑내기지만 사제지간으로 서로 존중하고 아꼈던 사이였다. 심지어 무덤에서 같이 묻히기를 소망했을 정도였다. 1960년 7월 하반기, 어느 주일 아침에 박윤선 목사가 부득불 한 선교사의 마중을 나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주일성수 문제로 대두되면서 결국 박윤선 목사는 고려신학교 교수직을 사면하게 되었고 이어 고신교단을 떠나 합동교단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도 이인재 목사가 합동교단에 머무르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에게는 박윤선 목사와의 우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재 목사의 고신교단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가 합동측에 머무르면서도 설교를 통해서든지, 또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그는 항상 고신정신을 강조했다.
동성로 교회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1965년, 이인재 목사는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의정부에 있는 새롭게 의정부중앙교회를 맡아 다시금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의정부중앙교회는 1953년, 의정부 제일교회에서 최수산나 집사외 5명의 성도가 분립해서 나와서 김수경 전도사와 함께 천막교회로부터 시작된 개척교회였다. 아직도 제대로 된 교회당이 없었기에 이인재 목사는 먼저 교회당 짓는 일을 시작했다. 새롭게 지을 교회당은 그저 비가 올때 비가 새지 않으면 되고, 바람이 불때 바람을 막아줄 정도이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뜻을 같이한 한 성도들과 함께 34평의 교회당을 예쁜 기왓집으로 지었다. 1967년 10월, 이인재 목사는 서울 의정부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 성광교회에 부임했다. 그러나 1971년초, 대구 달성교회는 서울에서 생활하던 이인재 목사를 다시 대구 달성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게 되었다. 당시 달성교회는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전임자였던 백영친 목사는 백영희 목사의 동생이었는데 그가 자신을 따르던 많은 교인들과 함께 달성교회 인근에 새롭게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이 일로 달성교회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시점에 달성교회는 이인재 목사를 청빙했고 어려움에 처한 교회 재건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인재 목사는 달성교회로 부임했고 교회는 정상화하는 것뿐만 아리라 새롭게 교회당 건축도 하게 되었다.
제5부 마지막 인생여정
제19장 마지막 인생여정
1.渡美(도미)
1974년 6월 29일, 이인재 목사는 68세의 젊지 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가 있던 동생 이명재 목사의 초청이 있었고, 또한 이인재 목사에게도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명을 다하는 전도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송별회 때 이인재 목사는“나도 이제는 바울같이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고 여러 동료 목사들앞에서 선포하였다. 그는 시카고 등(Chicago, Jersey City, Philadelphia, Erie, Denver, Boston, Greensboro, San Jose, L. A, Vancouver) 미국내 10여개 이상의 도시와 8개 주 이상의 여러 지역에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다. 渡美(도미)해서 그가 처음으로 거주했던 곳이 시카고 였는데 자신이 살던 집앞에 한 야간대학교(Truman Community College)가 새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민병철씨가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인재 목사는 그 학교에 등록을 하고 영어공부를 시작하였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약 30년 전에 공부하고는 잊고 지냈던 영어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일에 열중했다.
2.미국에서의 이민목회
미국에 처음 정착할 때는 동생 이명재 목사가 개척한 시카고 개척교회를 도우며 인근의 한인교회의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1976년, 자신이 거주하던 시카고에 미현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68세에 건너온 미국이지만 이목사가 해야할 일들은 산재해 있었다. 부인인 문상문 사모는 미국에 오자마자 시카고의 한 냉동 음식 제조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이민자들의 정신적 피폐와 신앙적 고갈 상황을 절감해 “이곳이야 말로 바른목회, 말씀위에 바로 선 교회, 건전한 사회가치관 정립이 필요한 곳이구나”는 생각으로 이인재 목사의 목회를 도왔다. 1978년에는 김병도 목사를 도와서 뉴저지 허드슨 장로 교회에서 설교 봉사를 했으며(1978년-1979년), 1979년에는 펜실베니아주 이리(Erie)장로교회(1979년~1981년), 1981년에는 필라델피아 새한 장로교회(1981년5월~1984년), 1986년에는 콜로라도 덴버 성산교회를 섬겼다(1986년~1989년). 특히 1981년 5월에 필라 새한장로교회 창립목사로 청빙을 받아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창욱 장로, 진원진장로, 정경복집사, 김사윤집사등과 함께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자신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교회 기틀만 잡아놓고 물러날 것을 생각하면서 교회개척이라는 힘든 일을 맡아서 감당하였던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목회를 하였다면 이미 1976년에는 정년 은퇴를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인재 목사는 그가 한국을 떠날 때 동료 목사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백세가 되어도 나를 원하는 교회가 있으면 달려가 조건없이 설교하고 기도하겠다”.그는 1989년 마지막 사역지를 끝으로 보스톤에 사는 아들네(이정윤씨집) 근처의 한 노인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지내다가 필라델피아로 이주하게 되었고 1992년 3월 8일, 새한 장로교회의 명예원로 목사로 추대를 받게 되었다.
3.점진적 개혁주의자
그가 여든 한 살이었던 1989년 10월, 미주대한신보에서 인터뷰를 청했을 때의 일이다. 기자가 이인재 목사댁을 찾아갔다. 팔순 고령으로도 인생을 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원로목사인 그를 만나 얘기를 건네던 중 그가 힘주어 했던 말이 있다.“누가 나더러 보수주의자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점진적 개혁주의자라고 해야 옳아요. 현재의 나나 내가 지닌 사상, 그 행위가 성경에 비추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개선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그는 81세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탄력있고 또렷한 어조로 힘주어 말하였다. “팔순 노인이 늦게 목회를 시작하고 이렇게 오래살 수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요.”얘기를 하다말고 손때가 절은 자신의 성경을 들추며, “잠언10장 27절을 보면,‘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로마서 8장 13절에는‘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이처럼 주님이 내안에 계셔서 언제나 성령이 가득하니 늘 기쁘고 감사해서 늙을 시간이 없어요...” 이인재 목사가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였지만 그의 눈빛은 이 말이 진실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복음이 좋아서 복음을 어떻게 전파할까 자나 깨나 그 생각 뿐이라는 그는 성경 66권 속에 감추어진 무궁무진한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가슴에 불이 붙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귀한 보배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 줘야하겠다는 일념 때문에 팔순을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노스케롤라이나, 아틀란타,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하와이까지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그의 노구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불타 있었다. 90년대초, 총신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했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평생 목양일념으로 이젯껏 살아온 자신이 이제와서 무슨 명예박사학위가 필요하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4.나그네인생길
이인재는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야곱(Jacob)으로 지명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 인물 중 야곱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리고 그 또한 야곱처럼 험난한 삶을 살면서 신앙을 지켰다. 야곱이 말년에 바로 왕 앞에 서서 말하기를“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우리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고 말한 것처럼 이인재 목사도 그의 삶에 많은풍난풍파를 경험하였으나 오직 하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단순한 신앙으로 험란한 순간들을 이겨냈었다. 야곱이 그의 인생말로에 애굽왕 바로를 축복했듯이 그도 비록 자신이 渡美(도미)해서 어려운 삶 가운데 처하였지만 자신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였다. 1988년, 덴버에서 목회할때의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얼마나 피로하였던지 갑자기 왼손바닥에 대상포진(shingles)이라는 신경통 계통의 고약한 피부병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나을 수 없는 병으로 어느 정도 호전된 후에도 평생동안 후유증을 앓는 병이었다. 통증이 너무 심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을 생각하며, 그 주님의 고난에 자신도 동참한다는 생각으로 그 고통을 견디어 내었다.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고린도후서4장10절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5.그의눈물
198년5월, 시카고에 거주했던 둘째아들 이정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인재는 아들의 소천 소식을 듣고 보스톤에서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온 동생 이명재 목사와 그의 아내 박영순 사모를 보자 못내 참아 왔던 울음을 목놓아 터뜨리게 되었다. 사실 첫 번째 아내인 신상이 사모를 잃고서도 거창교회에 부흥집회를 인도해야 했던 그였기에 눈물 한방울 흘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속에 이젠 아들의 죽음 앞에서 나그네 세월을 실감하며 그동안 많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던 것이다.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았던 그가 무던히도 잘 참아왔던 눈물이었다.
6.날마다 죽는 삶
이인재 목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삶에 있어서 무척 엄격했었다. 라듸오 청취나 T. V 시청을 하나의 세속주의의 도구로 생각하여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이것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유주의도 신학등장과 교단분열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올바른 교리와 바른신학 정립의 문제에 깊이 몰두하였다. 하지만 1974년 미국이민 이후부터는 교리적인 문제보다는 성령강림, 또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히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을 행하게 되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시간을 이용해 오전 내내 가진 성경 묵상에서 깨닭은 진리를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일을 좋아하였다. 특히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작별기도에 많은 관심을 두고 연구하였다. 요한복음 14장 20절,“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하는 말씀을 혼자 반복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인재 목사가 한번은 막내 아들인 이정수를 불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정수야, 나의 목회의 비결은 로마서 15장 3절 말씀이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그리고 내가 즐겨 읽는 성경구절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이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인재 목사는 가족들에게나 교우들에게 자주“하나님의 사람들의 영광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는 생활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영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또 그러한 생활을 자신이 친히 실천하며 살아갈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인재 목사는 출옥 성도로서 지난 세월 옥중에서 당한 고난에 대해 가족들에게조차 얘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오히려 자신의 치룬 옥고를 가볍게 평가하면서“때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용감히 생명을 내어던지는 순교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영광은 날마다 죽는 생활이다.”는 말을 종종 하였다. 신사참배반대운동과 순교에 대한 각오를 고난의 때를 살아가는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으레히 당하여야만 했던 능욕과 핍박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옥고나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고난의 업적을 결코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인재 목사는 자신을 ‘殉敎(순교)의 失格者(실격자)라며 謙讓(겸양)하였다.
1996년 2월 22일, 자신이 원로목사로 있는 새한 장로교회가 주관하고, 필라델피아 노회가 후원한 자신의 90회 생신 축하연에서 그는 이런 간증을 하였다.“난 언제나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았고, 성령님께서 하자는대로 이끌려 살았어. 그래서 기뻐. 미국 와서만 주님의 몸된 교회를 5개나 세웠고 지금도 말씀 공부만하면 시간가는 줄 몰라. 아내와 함께 피아노로 찬양하면 5시간도 좋고 6시간도 좋아. 바로 이것이 주님이 인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인거야. 난 지금 구십인데 앞으로 10년은 더 넉넉히 살 것같아. 백살까지 살면서 나를 기다리는 교회에 가서 말씀 증거할거야”. 그러면서 9순 잔치가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며 그저 영광은 주님이 받아야 할 것이라 오직 주께만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였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때에 시편43편을 즐겨 읽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이여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3:4~5)
7.어린양과 같이 순한사람
뭔가 메모를 하고 있는 모습. 이인재 목사의 오른쪽 눈은 이미 오래 전부터 거의 실명된 상태였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면서 영양부족에 기인한 것이었다. 왼쪽눈의 시력으로만 삶을 지탱하면서도 그는 무척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의 독서열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시력이 너무 많이 감퇴되어 글씨가 잘 안보일 때도 커다란 돋보기로 책을 더듬어면서 글을 읽을 정도였다. 그가 작고하기 약2년 전 어느 날 아침, 이인재 목사가 침실에서 일어나면서 외쳤다.“내가 이젠 이삭과 같이 됐다”그가 시력을 완전히 잃어 버린 것이었다.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하였다. 담당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왼쪽 눈동자 뒤의 잔 핏줄이 터져 시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이었다. 이후로 이인재 목사는 그가 평소에 즐겨 읽던 성경과 설교 집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되었고, 즐겨하던 산책도 중단해야만 했다. 온종일 하루를 침상에서 지내야 되는 안타까운 생활을 맞게 된 것이다. 그가 작고하기 몇 주 전부터는 문상문 사모가 그의 곁에서 찬송가 364장을 늘 불러 드렸다.“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그때마다 그는 다른 구절은 따라서 하지 못해도 맨끝소절“원합니다”를 흐릿한 목소리지만 꼭 따라 불렀다. 한때 출옥성도로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같이 치루었던 안이숙 여사는 이인재 목사를“어린양과 같이 순한 분”이라고 그의 자서전[죽으면죽으리라]에서 표현하였다. 정말 이인재 목사는 이삭과 같이 인자하고 온유한 분이셨다.“인자한재상”이라는 이름의뜻 그대로 이인재 목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까지 모든 고통과 불편을 순전한 재물로 드려진 어린양과 같이 잘 견디어내었다.2000년4월30일, 필라델피아의 벚꽃이 주루룩 떨어지는 주일 새벽1시50분경, 가냘픈 봄바람과 같은 숨을 마지막으로 내몰아쉬며 그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94세의 일기로 조용히 하나님 품으로 떠나갔다.
7.그의장례식
2000년 5월 2일.오후8시, 필라델피아 근처의 벅스카운티 교회에서 입관예배로 고별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5월4일. 오전9시, 그의 영결식이 호샴에 소재한 영생장로교회에서 치러졌다. 이날 영결식장에는 평소 고인을 따르던 많은 목회자와 교인, 친지 300여명이 참석하여 마지막 그의 가는 길을 지켜봤다. 오전9시부터 진행된 발인예배에 이어 화이터 머쉬 묘지에서 하관예배가 드려졌다. 당시 이 장례식은 미주한인예수교장로교회(합동측) 총회장(葬(장))으로 거행되었다. 미주 합동측 총회는1978년에 조직되었는데 이인재 목사가 초대 총회장을 역임했었다. 그는 총회장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합리적 성품과 일처리로 미주 총회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입관예배를 드린 필라델피아의 카운티 교회는 김풍운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당시 필라델피아 한인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가진 교회였다. 평소 이인재 목사는 교회당이란 그저 비가 안새고 바람불 때 안 날라갈 정도면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대다수 교회당에서는 총회장으로 장례를 치루기가 부적합하였다. 그래서 입관예배를 카운티 교회당에서, 장례식을 영생 장로교회에서 가졌던 것이다.
‘이인재 목사님 천국환송예배’로 命名(명명)된 발인예배의 예식집례는 김재창 목사가 맡았다. 하관예배는 류도일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뉴욕 성화교회의 조의호 목사는 이날 弔詩(조시)에서“P. C.도 인터넷도 아득하던 날에 가슴속에만 성경을 정독하며 옥중일기를 몰래 새기시며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중략>...,제1계명부터 성령의 권능으로 자못 투명히 지키고져 신사참배와 선한 싸움을 싸워온 명실공히 출옥성도이건만 순교 실격자로만 스스로 증언해 오신 당신의 겸손 앞에 아전인수 덫에 걸리던 내 양심 부끄럽습니다”라고 고인의 생전 품성과 참 성직자됨을 되새겼다. 그의 시신은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 신학생들에 의해 운구되어 펜실베니아의 엠블러(Ambler)에 위치한 화이트 머쉬 공원묘지(Whitermash Memorial Park Cemetery)에 안치되었다. 이것은 하나 성도가 자신의 부친을 위해 사두었던 것인데 그가 딴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이인재 목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한 평생을 자신의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나누며 살았던 그였기에 우리 하나님께서 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그의 묘지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이인재 목사가 생전에 못내 아쉬워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신앙의 동지였던 박윤선 목사와 한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인재 목사와 박윤선 목사의 인연은 평양신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에서는 사제지간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인재 목사는90회 생신을 맞아 미주동아일보와 가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박윤선 목사는 나보다 불과 20일 먼저 출생한 동지인데 내가 그 밑에서 배웠으니 내 스승이지. 박윤선 목사는 이인재를 너무 좋아하니까 미국간다니까 송별회에서 ‘인재 목사가 나를 버리고 가서는 내가 미국 간다니까 송별회에서 ‘인재목사가 나를 버리고 가서 함께 못 묻혀 한이 되겠다’고 했었지. 마음만 같으면 나도 거기 가서 (수원의합동신학원묘소)묻히고 싶지만 우리들은 어차피 한 곳에서 만날 거니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이인재.
그는 손양원 목사와 친 형제처럼 지냈다. 손양원 목사가 순교하자 한때 그는 여수 애양원 교회 손양원 목사의 후임 담임목사로 갈려고 생각했을만큼 두 사람의 友愛(우애)는 두터웠다.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던 차재선 전도사를 먼저 떠나보내고 후일에 그가 쓴[참 승리자인 차재선 전도사]라는 글에서 그는 이런말을 하고 있다.[서울에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한영교회 김경래 장로의 부인 차은희 권사이다. 차은희 권사에게는 아버지가 세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은 친 아버지인 차재선 전도사요, 또 한 사람은 사랑의 사도로 불리우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요, 또 한 사람은 사랑의 사도로 불리우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요, 또 한 사람은 나 이인재 목사이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시기에 함께 특별하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와 신의를 가지고 사랑했으므로 차재선 전도사의 유일한 혈육인 차은희 권사를 평생에 친딸같이 여기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차재선 전도사를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떠나 보내고서“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그가 병들었을때 내가 티끌만한 거짓도 없는 소원으로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 설교 석상에서 고백할만큼 그는 사랑의 정이 남다른 따뜻한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평소 그를 잘아는 어떤 목사는 그런 사랑의 정이 넘치고 평소 온유한 성격의 사람이 신사참배에 관한 한 어찌 그리 단호할 수 있을까 하며 투사로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인재 목사에 대해 얘기한다. ‘인자한 재상=仁宰(인재)’이라는 그 이름의 뜻을 알만하다. 안이숙 여사가 그를‘어린양과같이 순한 분’이라 할만큼 그는 유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관한 한 단호하게‘아니오’했던 사람이요, 어떤 거짓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용감한 신앙의 투사였던 것이다. 그러기에[태양신과싸운이들]저자 안용준씨는 그를‘신앙의투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참으로 힘든 시기에 태어나서 한 평생을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고백대로 살기 위해 애를 썼던 용기있는 한 인물을 조명해보며 나 자신도 오늘이라 일컫는 이 한날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재 목사의 막내아들, 이정수의 메일 저희 아버님께서는1974년 6월 29일, 68세의 나이로 미국에 이민을 오셨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송별회 때“나도 이제는 바울과 같이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고 여러 동료 목사님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아버님께서는 Chicago, Jersey City, Philadephia, Erie, Denver, Boston, Greensboro, San Jose, LA, Vancouver등 10여개 이상의 도시와 8개주 이상의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쉬지 않고 전하셨습니다. 처음에 미국에 오셔서 Chicago에 거주하실 때, 저희 집 앞에 한 야간대학교(Truman Community College)가 세로 설립되었썼고 민병철씨가 거기서 영어회화반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자명을 야곱으로 지으시고 과거 옥중생활때 성경구독이 허락되지 않아 선택했던 영어공부를 이제 약 30년 후 다시 실시하게 되어 그 공부에 열중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야곱을 좋아하셨고 또한 야곱처럼 험난한 삶을 사시면서 신앙을 지키셨습니다. 야곱이 말년에 바로 왕 앞에 서서 말하기를:“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아버님도 야곱과 같이 그의 삶에 많은 풍난풍파를 경험하셨으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단순한 신앙으로 자신의 험란한 순간들을 이겨내셨습니다. 야곱이 말로에 바로를 축복했듯이 아버님도 어려운 삶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셨습니다.
1988년 Denver에서 목회하실 때에 San Francisco에서 부흥회를 마치시고 돌아오셔서, 무척 피로하셨든지 갑자기 왼손바닥에 대상포진(shingles)이라는 고약한 신경통 관계의 피부병에 걸리게 되셨습니다. 이 병은 완전히 나을 수 없는 병으로 어느 정도 나은 후에도 평생동안 후유증을 앓는 병입니다. 한참 고통이 심하실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을 생각하시며 그 고통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견디어 내신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우리가 항사아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후4:10)그 다음해 1989년 5월 Chicago에 거주했던 둘째아들(정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Boston에서 Chicago로 오시면서 공항에 도착후 마중 나온 작은 아버님 이명재 목사님과 박영숙 권사님을 보며 터뜨리셨던 울음소리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어서1990년초 과거에 매우 사랑하셨든 친구 차재선 전도사님의 사모되시는 백영희 권사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셨을 때도 무한한 애통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1960년대의 아버님은 무척 엄격하신 분이였던 것같습니다. 라디오나 TV를 하나의 세속주의의 도구로 생각하시고 그런 것들을 엄히 막으셨습니다. 그 외에도 신신학이나 교단분열 및 올바른 교리 성립등의 문제에 많은 열중을 보이셨읍니다. 그러나 미국이민 이후부터는 교리적인 문제보다는 성령강림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삶에 대한 교훈을 많이 연구하시며 가르치셨읍니다. 점심식사시간에 그 날아침연구에서 깨닭은 진리를 종종 저희식구들과 함께 나누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작별기도에 많은 관심을 두고 연구하셨던 것이 기억남니다. 요한복음에14: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하는 말씀을 혼자 반복하시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시길, 로마서15:3“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는 말씀을 한 젊은 목사님께 목회의 비결이라고 가르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외 또 아버님께서 즐기시던 성경구절은 고후3:18입니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임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하나님의 사람들의 영광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는 생활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 설교(넘쳐흐르는생명수,“날마다죽는생활”)에서 말씀하셨던 것 같이, 날마다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영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기독인의 가장 큰 과제와 영광으로 생각하시며 그것을 가르치시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의해 치르신 어려운 옥고는 저희 가족들이나 그 외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위에 언급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옥고를 가볍게 평가했습니다:“때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용감히 생명을 내어던져 순교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영광은 날마다 죽는 생활이다.”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순교의 각오는 그때 당시 기독인으로써는 누구나 으레히 했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셨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옥고나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의 오른쪽 눈은 이미 수년전부터 거의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아마 옥중에서 영양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신것 같읍니다. 그 이후 왼쪽눈으로만 시력을 지탱하시며 독서에 열중하셨습니다. 그러나 작고하시기 약2년 전 어느 날 아침 침실에서 기립하시면서“내가 이젠 이삭과 같이 됐다”고 하시면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시게 되셨습니다. 의사 설명에 의하면 왼쪽 눈동자 뒤의 잔 핏줄이 터져 시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즐겨 읽으시던 성경과 설교집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되시며, 평상시 즐기시던 산책도 중단해야만 하시게 되셨습니다. 온종일 하루를 침상에서 거의 지내셔야만 했던 안타까운 생활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옥고를 한때 같이 치럿던 안이숙 여사께서 아버님을 가리켜“어린양과 같이 순한 분”라고 그의 자서전(죽으면죽으리라)에서 표현하셨던것 같이 저희아버님은 이삭과 같이 인자하고 온유한 분이셨습니다.“인자한재상”이라는 자명의 뜻 그대로 아버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까지 모든 고통과 불편을 한 양과 같이 순진하게 견디어 내셨습니다. 2000년4월30일 필라델피아의 벚꽃이 주루럭 떨어지는 한 주일(부활절 이후 첫주일)새벽1시50분경에 가냘픈 봄바람과 같은 숨을 마지막으로 쉬시며 그는 아내의목격하에 조용히 하나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막내 아들 이정수 Chungsoo J. Lee160Clearview Ave. Huntingdon Valley, PA19006 215-947-4312 215-939-5831(cell)chungsoolee ⓐyahoo. com www. eeoinc. com www. maxpages. com/korean 남영환 역,[일제수난성도의 발자취]도서출판 영문,1951년[일제수난성도의발자취]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투쟁했던21명의 출옥성도들에 대한 일본검사의 未決(미결)된 起訴狀(기소장)을 담아놓은 책이다.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될 중대한 사실을 본인들의 간증이나 그들을 지켜보던 동지의 증언이 아닌그들을 정죄한 일본정부의사건 담당 검사의 기소장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은 그들이 검속되고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힘겨운 옥고를 치루어야했다. 그들이 출옥되었을 때 이와같은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혹시나 자랑이 될까 봐 입을 봉하였다. 또한 정확한 증언을 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비록 가해자들의 손을 통해서 이지만 옥중 성도들의 진실된 자백을 기록에 담아서 오늘 우리앞에 공개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가 없다. 필자는 일본 검사의 기소장인 출옥성도 예심 종결서 중 이인재 목사에 관한 기소 내용이 담긴 부분만 공개하고자 한다. 출옥성도의 豫審(예심)종결문 (제 十六(십육)피고 구니모도아까하루(國本朱元(국본주원)-李仁宰(이인재))는 본적지에서 출생. 어릴때 8년간서당에서 공부하다가17세 되던 때 밀양군 예림사립강습소에 입학하여19세 때 졸업과 동시에 밀양공립농잠학교에 입학20세 되던 때 위 학교를 중퇴하고 거주지 상남면 사무소 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17세 때부터 장로파 기독교에 입교하여19세 되던 때에 거주지 마산리 교회 집사가 되어 봉사하다가 1938년3월33세가 되던 때에 면서기를 사면함과 동시에 평양으로 가서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그 해7월 그 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쇄됨으로 해서 1939년5월부터 주거지 마산리 교회 전도사가 되었으나 그해9월 이를 사면하고 성경의 연구를 위하여 평양에 이사하여 있던 자로서 평소에 그의 품고 있었던 주의와 사상은 제-의 서두에 기재된 피고인 이기선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그의 독선적인 해석에 기초한 성경관으로부터 신궁이나 신사를 여호와 이외의 다른신즉, 거짓 신이라고 하여이에 참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妄信(망신)도....
--------------------------------------------------------------------------------
이 명재
고려 신학교 졸업
고신 경남 노회 안수
신 마산 교회
밀양 삼문 교회
서울 원남 교회
시카고 개혁 교회 원로 목사
저서
구름 기둥 불 기둥을 따라서, 쿰란 출판사, 9,000 원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쿰란 출판사, 3,600 원
공회 인물사는 |
---|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