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철
내용 | 평생에 공회 신앙노선에 일관되었던 80년대 행정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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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신현자 사모님 별세 (총공회/소식11495)
박윤철
1.소개
성결교 장로님 출신으로 서부교회 백목사님을 따르게 되었고 은행에서 은퇴하고 목회를 나왔으며 1980년대 양성원 교학실장으로 가장 오래 계셨고, 특히 그 기간동안에는 백목사님 이후 총공회 신앙노선이 여러가지로 분화될 사안들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 각 공회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계실 분. 부부가 함께 평생 백목사님 신앙노선에서 한번도 이탈되지 않고 나왔던 분으로는 거의 유일한 경우.
백목사님의 '서기'였던 박혜영집사님이 세 살 아래 동생이며 1984. 12. 4. 66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만 40년간 백목사님 말씀을 노트에 기록했던 분. 이화여대 중퇴하고, 복음 때문에 미혼으로 평생. 함께 했던 분으로는 추순덕, 장정애집사님과 함께 세 분.
2.본래의 신앙 생활
1916. 1. 14. 평남 강서군 적송면 삼부리 516번지 출생, 조부가 1906년경 복음을 받고 제사를 완전 폐했으며, 건너 마을 적근리에 소재했던 감리교회. 모친도 소학교에서 교직을 가졌고 신앙이 깊었음. 부친이 3.1 만세운동 때문에 만주로 먼저 이주. 만주 영구 전장터가 개간되고, 한인들의 이주로 밭농사 밖에 모르던 곳에 벼농사로 정착되자, 9세 되던 1924년, 모친과 누이 박혜영 등 세 식구도 만주로 이주하여 정착. 영구에 있던 일본인 심상 소학교 6년 졸업, 장춘 상업학교를 졸업하고1935년 만주 철도회사가 경영하는 '무순 탄광'에 취직. 학교다닐 때 럭비와 스케이트가 특출했고 좋은 인상이 심겨 일반 경리 보직 대신에 이주민 주거지역을 담당하는 토지계를 맡게 됨. 혼하 강변 신택지 조성공사로 몇 천 호가 이주되는 일을 주관하게 된 이 부서에서 채탄용 부지 관련 보상금 책정, 지급, 기타 용지의 사용, 임대, 경작 등을 맡으면서 1945년까지 근무. 1940년 스피드 스케이팅 만주대표선수로 일본 한국 만주를 포함하는 전 일본 선수권대회에서 1위, 삿뽀르 동계 올림픽 대표선수로 훈련을 받는 도중 세계 제2차대전 발발로 중단. 회사 럭비팀을 창설하여 만주대표가 되는 등 운동에는 만능.
1940. 5. 16일 결혼. 평북 양시마을 양시성결교회 목사님의 모태 신앙이었던 부인은 신현자였고 일본 도요하시에서 여학교. 고향에서 감리교 교회, 만주에서는 성결교회를 출석. 당시 무순에는 봉천(심양)합동신학교가 있었고 박윤선, 박형룡박사가 신학강의. 해방 후 고신의 송상석목사님 청빙으로 박형룡박사가 남하하여 고려신학교가 출발됨. 무순 성결교회에서 주교 부장, 집사로 있었고 조선에서 나왔다가 이곳을 들렀던 김창인, 박리현 두 사람의 열렬한 기도와 신앙을 보며 국내 신사참배 상황을 느낌.
해방 후 2년 반이 지나면서도 계속 회사에 근무. 팔로군, 소련군이 무순탄광 기계 자재들을 계속 징발하게 되고 길 가다가 차고 있던 만년필을 그냥 빼기는 정도의 분위기. 자전거까지 압수 당했고 4급 소련 통역을 할 수 있어 찾아올 수 있었고 소련군의 회사 시찰시 통역.
만주철도회사 내 어학검정시험에서 1등. 1948. 5. 회사 근무 중, 팔로군과 소련군의 군정으로 이어지며 공산치하가 확립 되어가는 도중에 장개석의 국부군이 진출. 대도시는 국부군, 농촌은 공산군이 잠입하던 때였고 일단 국부군은 전투 없이 도심 점령. 국부군은 군으로서 이미 부패되었고 공산군은 준비된 상태. 1948년 공산화가 완료될 직전, 시 외곽들이 공산군에 의하여 차단되어 봉천에서 북경까지 비행기로 이동하고 한국 교민회가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와 중국의 장개석 정부 협조로 8차에 걸친 철수작전이 있었고 3차 철수의 일본 연락선으로 인천 피난민 수용소 생활 3주. 전주 성결교회를 맡고 있던 장인이 명단을 확인하고 전주로 가족이 합류. 전주 상업은행에 취직. 전주 지점장이 부산 지점장으로 이동되면서 동행케 되고 부산생활이 시작.
이어진 6.25전쟁, 그 피난 때문에 은행직원이었던 이 가정에 55명이 거처를 정하는 정도. 용두산 아래 있던 동광성결교회를 다녔다. 1953년 36세에 성결교 장로가 되었고 그 안수식은 일제말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며 일본까지 가서 '미소이 바라이'를 했던 서울신학교 교장 이명직목사님이 주관.
피난처 부산에 몰려든 피난민 중 교인들의 회개운동과 기도운동은 뜨거웠고 많은 교회들이 생겨지며 부흥회가 많았음. 백영희조사님의 집회 포스타를 보게 되었고 부근에 있는 부민교회와 동시에 집회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같은 교회를 다니던 동생 박혜영, 이복순집사님과 함께 출석. 지금까지와는 믿어온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신앙생활을 시작. 이미 두 사람은 서부교회로 출석을 했고, 본인은 밤예배를 계속해서 다니며 말씀에 끌렸고, 1954년 서부교회로 정식 출석. 아들 3명, 딸 2명이며 사위 두분이 김명재목사님과 마호군집사님.
3.다시 시작한 신앙생활
중생교리에 대한 교리가 성결교회는 특별. 성결교 중생교리는, 중생이 될 때 그 증거는 떨림이나 환상 등을 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성결의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때는 원죄까지 완전히 뿌리가 뽑혀 버리고 자기가 중생한 날이 생일같이 확실하게 되며 이제는 죄질 생각까지 없어져서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요점. 그러나 성결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도 그 후 죄짓는 것은 마찬가지. 백목사님은 요3:3, 바람부는 것이 알게 되는 것이며 중생 이후는“자라간다”는 말씀이었고 점점 교훈에 확신.
백목사님은 전국 사경회 때문에 강단은 집사님들이 주로 설교. 아직까지 주일 밤예배가 있었고, 오후 2시는 김현봉목사님께 영향을 받은 것. 본사 감정과로 1959년 전근되어 서울생활. 기술조사과장으로 1971년 1월 만 55세 정년퇴직.
1974. 3. 24. 화전교회 교역자로 첫 부임.
1977. 11. 10. 청도읍교회 부임
1979. 11. 22. 도평교회 부임. 1980. 3. 4. 목사안수
1980. 12. 9. 교학실 근무
1987. 10. 29. 동문교회 부임
1988. 12. 13. 창북교회 부임
1994. 3. 25. 묘창교회
현재 무임목회자. 가정에서 설교록 원고 교정 등에 수년간 주력. 현재 건강 문제 등으로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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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공회/소식 게시판 - 134 '2002-03-30'
김명재 목사님
서부교회 반사와 집사를 거쳐 1978년 김병춘 이상규 목사님과 함께 3명이 전도사 인허를 받고 목회 출발, 밀양시산교회 서울상남교회 대구구미교회 다시 서울상남교회를 담임. 교학실장을 했던 박윤철목사님의 큰 사위. 담임하는 곳마다 큰 부흥을 이루었고 설교의 호평으로 현재 공회 내에서 부흥회를 가장 많이 초빙받는 분, 대구공회 출발 당시 소장파 목사님들의 무게 중심을 잡고 대구공회를 출발시켜 작은 백영익목사님으로 불렸고. 배종일 김병춘 김명재목사님과 함께 백목사님 생전 마지막 때 젊은 목회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였으며 당시 주장이 현재 대구공회의 주노선.
/총공회/소식 게시판 - 2004.4.8.
대구공회 주소록
은퇴목사 박윤철, 경남 거창읍 중앙리 70-15 (1층) yc2002@chol.com, (055)943-1279, 018-785-9990
/총공회/소식 게시판 - 2006.6.4.1.
박윤철 목사님, 거창 중앙리에서 정장리로 사택 이사
/총공회/소식 게시판 - 2006.7.15.
박윤철목사님
현재 91세이며
이번 7월 4일 대구동산병원에서 심장박동기 교체 수술을 한 후 감염으로 며칠 고생하셨고 이어 신장 악화로 현재 생사의 아주 위험한 고비에 서 계신 상태이며 현재 고비를 잘 넘겨 퇴원하게 된다면 100세를 거뜬하게 넘길 정도지만 지금 상태로는 고비를 넘길 수 없을 정도
2006.7.21. - 장례식 약력 소개
1916년 1월 14일 평남 강서군 출생
1925년 만주로 이주
1945년 귀국
1950년 부산동광교회 장로장립
1974년 목회출발(총공회)
1980년 목사안수
2006년 7.17. 오전10시 소천
3남2녀. 사위 2명은 목사로 목회 중
2007.3.3.
07년 3월 중에
신현자사모님은 창동교회 예배당 바로 옆 중앙리로 이사 확정
2012.10.2.
박윤철 목사님의 기증 물품 중 백 목사님 설교 자료 기록입니다.
2010.2.11. 미공개 테이프 47 개를 조건 없이 기증 받았습니다.
2010.2.12. 박윤철 목사님이 기증하신 미공개 135 개 작업이 끝났습니다.
2009.12.31. 미공개 93 개가 기증 되어 내용 확인 완료 되었습니다.
1957년 3개
1974년 11개
1976년 1개
1977년 22개
1978년 4개
1979년 7개
미확인 4개
기타 41개
이 외에도 공회의 녹음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의 '권찰회' '교역자회의' '반사회' '개인 심방예배' '개인 지도 권면' 등을 기록한 테이프를 많이 기증했습니다.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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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