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익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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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익

내용 백영익

출처: 백 영익 목사님 자료 제공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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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영익 목사님 약력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1918.12.20.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출생

1933(16세) 예수 믿고

1934(17세) 세례 받음(이자익목사)

1935(18세) 농촌 전도 강연과 나환자 모인 곳을 찾아 예배 인도

1936(19세) 일생을 전도로 마치기로 결심하고 집을 떠남

1938(21세) 신사참배 거부로 거창 경찰서 수감 중 밤 2시 고문

주남선 목사, 유흥춘 장로님 등 각각 정한 감방에서

1952(35세) 주의 종으로 부름 받아 42 년간 목회

1) 고제 지방 공비 침몰 하 4 개 교회를 5 년간 순회(개명, 봉산, 원기, 신촌)

2) 서울 내수동 교회 3 년

3) 서울 사직동 교회 6 년

4) 거창 창동 교회 1 년

5) 서울 합정동 교회 27 년 (1967.4.12.-1994.12.8.)

* 남정교회 1990-1992.

* 호산나교회, 2007.11.4.-2008.8.31.



[신학 졸업과 목사 안수]


1963.12.10. 대한 신학교 졸업

1965.12.12. 부산 서부 교회에서 목사 안수




[개척 교회 : 8 개소]


1) 서울 사직동 교회

2) 서울 합정동 교회

3) 서울 난곡 교회

4) 서울 서정 교회

5) 서울 성천 교회(신일 교회)

6) 구미 금오 교회

7) 구미 공단 교회

8) 천안 성정동 교회




[성경 공부 인도]


* 교역자 월요 공부(10 년 간)

* 경성 신학교 교수

* 로고스 신학교 강사

* 대구 양성원 강사

*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초대 교장 역임

* 예수교 장로회 신학 연구원 교수로 현재 재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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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4.백영익목사님 지난날 회상 녹화


글번호: 28 글쓴이: 백영익목사소식 조회: 6 스크랩: 0 날짜: 2008.10.05

http://cafe.daum.net/HapjungdongChurch/1BK3R/1/1/28/28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예수교장로회 합정동교회의 개척목회자시며, 1대 담임목사셨고, 원로목사이신 백영익목사님의 지난날에 대한 질문과 답변 및 기억들 진술하신 것을 소형 비디오카메라로 녹화하였습니다..




-예수 믿게 된 계기는?


약 75년전쯤, 백계순 누님이 거창 이백원씨에게 시집가서 예수 믿고 난 후, 내게 성경책을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고, 손에 들어보니 책이 상당히 무게가 있어(당시 성경책은 요즘 성경책처럼 종이가 얇지 않았음) 하나님 말씀이라 책이 무거운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곧 믿었다.


이백원집사는 당시 성자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사람이 좋았다.


-농산교회에 나가셨고 세례를 그 교회에서 받으셨나요?


농산교회에 나갔었다.(농산교회 세례명부에 목사님 성함기록)


-부산(서부교회 백영희)목사님 술도가하실 때, 심부름을 가다가 호랑이 같은 짐승을 만나셨다고 했지요?


개명에서 심부름 가다가 밤에 큰 짐승과 마주쳤는데, 길을 비켜줘서 심부름을 갔다가 오던 길에도 또 마주쳤는데, 길을 비켜줘서 돌아오다가 00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당시에는 호랑이가 있던 때였다.


-예수 믿고 난 후, 전도하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고도열선교사를 만나 다시 돌아오셨다고 했지요?


집을 떠나 상당히 여러날 전도하려고 다녔는데, 미국인 고도열선교사가 지프차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나를 만나서 왜 이곳에 있느냐면서 차에 타라고 해서 탔더니 시동을 걸어 차를 몰아 거창으로 데리고 왔다.


-신사참배 거부로 거창주재소에 잡혀가셨다고 했는데, 누구와 함께 였습니까?


거창경찰서였지. 사험씨라는 분과 함께 잡혀갔고, 풀려 난 후, 그분은 서울에 와서 이명직목사님을 만나고 거창으로 돌아왔었다. 그후에 서울로 이사갔었고,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 그분을 한번 만났던 적이 있었다.


-조사(전도사)로 맡아 일하신 교회가 어디인가요?


봉산, 개명, 원기, 신촌. 4교회를 한꺼번에 맡았다.


-서울 내수동교회로 올라오실 때 상황은?


서울 내수동교회에 계시던 전임 김승곤전도사님의 아이가 숨이 깔딱깔딱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서 주일에 병원에 데리고 갔다고 해서 여러 교인들이 정죄하여 사임하도록 했다.


당시에 봉산교회쪽에 살면서 봉산교회, 개명교회, 기교회, 신촌교회 4교회를 돌아보고 있었는데, 1일 동안에 부산 (서부교회 백영희)목사님 전보가 3통 연달아 왔다.


내용은 왜 한번 가보지도 않고 못 가겠다고 하느냐 한번 올라갔다 와라.


그리고 얼마후에 조사님 서울로 모셔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하면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장렬(후에 목사됨)과 김승규, 2청년이 김천에서 봉산교회까지 걸어서 들어왔다.


그래서 김천까지 와서 기차를 타고서 서울로 처음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가서 설교를 잘 하면 붙잡히고, 봉산교회를 떠나야 할 모양이라서 일부러 설교준비도 안하고 올라왔다.


당시 장관부인이었던 집사님이 준비한 깨끗하고 좋은 속옷을 목욕후 갈아입고,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본문은 에스겔 중에서 택했는데, 은혜가 쏟아지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래서 내수동교회의 담임전도사로 부임하게 됐다.


당시 이선애권사의 딸인 숙자가 주일학생이었는데, 열심이 있었다.


-내수동교회를 떠나게 된 상황은?


내수동교회에서 3년동안 있었는데, 송00 여집사가 꿈에 뱀이 조사(전도사)님 속으로 들어갔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당시 장관부인 중에 1사람이 동조하여, 당시 당회장이었던 이학인목사에게 보고됐고, 당회장 이목사님은 삼각산에 가서 40일 기도후에 내려오라고 하였다.


당회장 이목사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삼각산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잘 살고, 귀부인 대접받는 사람과 몇명이 매일 닭1마리씩 삶아서 버스종점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기도하는 곳까지 가져와서 매일 먹었다.


기도하는 40일 동안에 벌써 일이 다 꾸며졌고, 당회장 이목사님이 교회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당회장 이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강단에 대신 세웠더니, 나를 위하는 기도를 자꾸하니까 그만 두게 하고서 천안쪽에 있었던 홍근섭목사님을 후임으로 세웠다. - 2분 모두 이북 출신


그 때, 내수동교회 교인들이 갈라졌는데, 권00집사(후에 목사됨)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갈라져 나온 교회를 맡는 것이 아니라면서 거부했다.


-성은교회(현재 사직동교회)의 시작


그리고 내수동교회를 떠났고, 아현동 아현교회 뒷편 산동네의 허름한 월세집에서 지내면서 공동우물에 쭉길게 늘어서서 겨우 물 2 두레박 길어오는 형편에서 얼마동안 살았다.

당시 막내아들 젖먹던 때인데, (서남진)사모가 한번은 온다간다 말없이 집을 나섰다.

형편이 어렵고, 식구는 많으니 생계를 걱정하다가 신문에 유모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서 을지로쪽의 잘 사는 집으로 찾아가니 목욕하라고 한 후, 설렁탕 1그릇을 사줘서 먹고서 사모가 그 집아이 젖을 먹이다가 집에 두고 온 젖먹이 아들을 생각하니 서러워서 펑펑 울었단다.

집주인이 유모가 젖먹이다가 서럽게 우니 이유를 물으니, 사모는 이 집아이 젖먹이고 나면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젖을 못 먹게되는 것이 마음아파서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주인이 당시 500환을 주면서 얼른 집에 가라고 하여 돌아왔었다.

얼마후에 산에 등산왔던 박희복집사의 남편이 나를 만났고, 박희복집사와 남편이 상의하여 성은교회(현재 사직동교회) 자리 땅을 샀고 교회가 시작되었다.


-고신측의 성경학교 과정을 마치셨나요?



했다고 해야 약했지




-박윤선목사님이 신학공부를 권유하신 때는 언제였습니까?



내수동교회 있을 때였다.

박윤선목사님이 몇번 찾아 오셔서 '너 신학공부 하라'고 하셨다. 나같은 사람이 신학할 수 있나 못하겠다, 조사(전도사)로 계속 교회 돌보겠다며 거부했다. 박목사님 '네가 교회를 돌보며, 십수년 동안 스스로 성경연구 했던 것이 신학공부를 통해서 배우는 것과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쾌감은 굉장히 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공부는 성은교회(현재 사직동교회) 있을 때, 했었다.


문공부에서 정식인가받지 않은 학교들 폐쇄령이 내리고 나니, 당시 도광이가 행정적 문제는 자기가 처리를 할테니까 신학교를 계속하시라 했고, 다른 목사님들도 계속 신학교를 유지하시라고 권했지만, 박윤선목사님은 나는 모체가 그리워 가겠다면서 총회신학교(현재 총신대학교)로 가시고 개혁신학교는 사라졌다.

신학공부할 때,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지만, 나는 한번도 재시험을 친 적이 없었다.

당시 부산 (서부교회 백영희)목사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었던 권00씨(김치선박사 사위)가 소개하여 대한신학교(김치선박사)에서 부산목사님이 특강을 자주 맡으셨었다.


그런 이유로 거기서 공부하라고 부산 목사님이 말씀하셔서 나와 태영(당시 청량리교회 전도사-현재 잠실동교회 원로목사)조사는 대한신학교로 갔고, 김병도조사는 이쪽도 저쪽도 가지 않았다.

대한신학교를 졸업했다.


-거창 창동교회는 어떻게 가시게 됐나요?


성은교회(현재 사직동교회)에서 6년간 있으면서 예배당 건축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이헌영장로의 결혼 주례를 하기로 했는데, 부산 목사님이 너는 신학공부를 마쳤고, 신도범조사는 신학공부를 시켜야 하니 창동교회로 가라고 하셨다.

'결혼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 주례를 하고 창동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하니, '가는게 좋을 껄' 하시기에 순종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그대로 내려 갔다.

당시 3째딸과 2째아들은 서울에 남겨두고 내려갔다.




-망원동교회라고 발족예배를 드렸다고 하셨지요?



성은교회에 있을 때, 거창 창동교회로 가기 전에 안국주유소 뒷골목, 은혜교회 자리 근처에 땅을 70평을 사고, 홍장로와 박00집사(거창 농산교회 출신) 등 몇사람과 발족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거창 창동교회로 가게 되어 성은교회 후임으로 온 신도범조사에게 잘 맡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얼마 안되어 팔아서 딴 곳(구로동쪽)에 땅을 샀고, 개발이 오래동안 안되는 지역인지 묶여있었다.

20여년만에 부산(서부교회)에서 이제는 와도 괜찮다는 말 듣고, 부산(서부교회)에 갔더니 운영위원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돈이 한 뭉텅이 있었고, 부산 목사님은 누워서 회의를 참석하셨는데, 이 무슨 돈이냐고 아무도 몰라 어리둥절할 때, 형님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내가 설명할까요? 하니 해보라고 하셔서 이 돈이 망원동교회 땅을 팔아서 구로동에 땅 샀던 것 그 땅 처분해서 나온 돈입니다. 하고 답했고, 그 돈이 부산 서부교회 근처의 양성원짓는데, 들어갔다.




-거창 창동교회에서 서울로 오신 상황은?



창동교회에서 1년간 있었는데, 교회할 준비가 되있다고 서울로 올라가라고 부산에서 이동 명령.

창동교회에는 봉산교회 출신 교인들이 여럿 있었고, 조사님 어디로 또 떠날 모양이니 우리가 못 떠나게 지키자면서 김00집사 같은 이는 밤새 지키다가 새벽예배 마치고 식구들 아침준비로 집에 간 동안에 이사를 나왔다.

막내 아들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두고 서울로 왔었다.

이00(후에 목사)에게 이삿짐을 부탁했더니 김천까지 가는 동안에 짐이 흩어져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울로 왔더니, 교회 준비 된 것이 없었다. 망원동교회 땅은 벌써 맡긴 이가 팔았고. 갈 곳이 없었다.

할수없이 당시 서울에 동생과 남아 있었던 3째딸이 홍제동 화장터 부근에서 양을 몇마리 길렀는데, 그곳에서 함께 생활했다.

당시, 남해에서 교회를 맡았던 이근영조사(후에 목사됨)도 너무 살기 어려워 아기까지 3식구 와있었지, 1째 아들도 군대 제대 후에 돌아와 양젖 짠 것 배달다니고 지냈다.




-합정동교회 개척 당시의 상황은?



홍제동에서 자전거로 서교동 이쪽까지 돌아보면서 돌산(현재 성산중학교) 옆에 있는 땅을 교회 자리로 계약했는데, 잔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계약금을 때일 형편에 박희복집사에게 도움을 청하니, '목사님 갈현동쪽에 땅이 100평 있는데, 그 땅 팔아 쓰고, 서울에 100평을 사주세요' 라고 말했다.

살 사람이 없었던 땅이 작자가 나서서 팔아서 합정동교회 땅 잔금을 치르고, 모래 벽돌을 찍는데, 3째 딸이 당시 언덕 아래쪽 (현재 도로쯤 위치) 우물에서 1일 65회나 물지게를 져서 물을 길어 날랐다.

여러번 말했기 때문에 기억이 정확하다.

교회를 건축하고 난 후, 성산중학교 아래쪽의 땅 100평 사서 합정동교회 개척 당시 빌린 것을 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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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근황)



중국의 백수신선생과 고준보선생(이장로 장례 주관자)에게 e-메일편지발신

글번호: 1 글쓴이: 진흙탕길 조회: 9 스크랩: 0 날짜: 2007.09.30


http://cafe.daum.net/HapjungdongChurch/1BK3R/11/1/1/1




제목 | father Baik Young-ik did a Good Job.


보낸날짜 | 2007년 8월 25일 토요일, 오전 09시 03분 58초 +0900


보낸이 | "진흙뻘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받는이 |



합정동모임터의 기름받은 긴장 늙을로 손덕칠 씨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제(23일) 오전 11시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에서의 입관식 모임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고


어제(24일) 오전 9시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에서의 출상 모임에서도 말씀,


오전 11시 45분 경기도 용인시 용인공원묘지에서의 하관식 모임에서도 말씀 하셨습니다.


엄마와 참석, 할아버지는 상주 손덕칠씨가 천안산의 댁까지 모셔다 드렸어요.



합정동모임터에서 신임투표에 떨어지고 난 후


다른 모임터에 잘 정착하지 못하여


장례 집례를 부탁할만한 모임터가 없었는데


제게 전화를 걸어서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려달라고 하여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공휴일에 천안에 인사하러 내려갔을 때,


중국에서 걸려온 삼촌의 전화에 할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셔서 목소리 크게 전화받으시는 것 보니 좋았어요.


1주일에 1회라도 전화로 안부전화를 좀 해드리세요.


대구 삼촌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고 말씀하셨어요.


앞으로 이 hapjungdong@hanmail.net 이 메일주소로 연락을 주고 받아요.



내내 아버지, 아들, 그 영의 인도와 역사가


삼촌과 숙모, 미국의 향목, 미향, 예향과 함께 하시기를 바랄게요.








제목 | [RE]감사- 할아버지 건강하심에 감사


보낸날짜 | 2007년 8월 27일 월요일, 오후 14시 14분 33초 +0900


보낸이 | "진흙탕-미나리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받는이 | "oneway" 추가 주소추가



할아버지 소식이나 말씀을 게시하는 카페를 개설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지난 아버지 장례식 상황, 손덕칠 부친 장례식 상황에 대한 소식과 관련 게시물을 올려 놓겠습니다.


cafe 주소 : http://cafe.daum.net/HapjungdongChurch

블로그 주소 : http://blog.daum.net/hapjungdong



아이디 : hapjungdong @hanmail.net


비밀번호 : 할아버지 출생년도 + 모임터 있는 동네의 영문소문자 약자 3글자 + 합정동모임터 개척년도


연속해서 11자 입니다.


아직까지는 가입 승인 카페, 비공개 블로그로 해 두었습니다.




치질 수술 후 이젠 대변눌 때, 고통스럽지 않지만, 처음에는 배변 후, 항문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아프고 불쾌했어요.


수술 후, 5일만에 운전을 하느라고, 통증도 심하고, 피도 나고 해서 기저귀를 차고, 거즈를 수시로 갈고


시간만 나면 눕는 것이 고통이 덜하여, 은향엄마가 버스에 함께 타고 다니며, 수발을 들어주었습니다.


아직까지 분비물이 약간씩 나오고 있습니다.


앉는 것도 항문 때문에 불편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분께서 적절한 시기(학원의 방학 8월 1일~3일)에 수술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신 것이 감사합니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공휴일, 저희들이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는 산비탈 배수로 근처의 블거진 부분을 삽으로 깍는 일을 하고 계셨어요.




항상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면서 무더운 여름철 건강 조심하시길 바랄게요.




---------[ 받은 메일 내용 ]----------

제목 : 감사

날짜 : 2007년 8월 27일 월요일, 오전 00시 21분 41초 +0900

보낸이 : "oneway"

받는이 : "진흙뻘밭"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좋은 조언도 감사합니다

아픔은 좀 나아졌는지...

금요일에는 한림대학 교수들이 이곳에 세미나 왔다가

교통사고로 여러 사람이 다치고

한분은 운명을 달리하셨답니다

저희병원에서 치료해 드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운전 조심하시고 너무 피곤치 마세요

즐겁게 기쁨으로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세밀하게 간섭하시는 그분을

친하게 가깝게 느끼면서 운전하세요


중국에서










제목 | father Baik's news- Today at 11:00 AM


보낸날짜 | 2007년 8월 30일 목요일, 오전 09시 50분 04초 +0900


보낸이 | "진흙탕-미나리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받는이 | "백수신" 추가 주소추가



천안에는 계속해서 비가 많이 왔다고 합니다.


어제 천안집을 정리하려고 내려가 있었던 양계곤(희영 남편)이 할아버지와 엄마를 모시고 와 서교동에서 주무셨습니다.


오늘 호스피스 사역을 함께하던 전도인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 미아리쪽에 영어학원을 개원하게 되는데


오전 11시 개원모임의 격려말씀을 할아버지께 요청하였다고 하여,


현재시간 09:30 망원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엄마와 함께 가고 계십니다.


저는 은향엄마가 허벅지, 종아리의 하지정맥류를 치료하기 위한 주사요법(2회차)을 받는데


주사 후, 압박붕대로 동여매어 거동이 불편하고 버스에 올라타거나 내리기 불편하므로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올 준비를 하느라 아쉽게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천안 산에서 홀로 계시면서 이 일 저 일 일거리를 만들어 육체적으로 고단할만한 상황인데


그 분께서 일거리를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엄마가 동행하여 보살피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찌는 듯한 더위도 한풀 꺾여, 비가 내리고 흐린 가운데, 바람이 불면서 가을로 접어드는 상황입니다.



삼촌과, 숙모, 향목, 미향, 예향, 항상 건강하게 생활하시기를 바랄게요.





제목 | [RE][RE]father Baik's news- Today at 11:00 AM


보낸날짜 | 2007년 8월 31일 금요일, 오전 01시 04분 43초 +0900


보낸이 | "진흙탕-미나리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받는이 | "oneway" 추가 주소추가



엄마께서 노인 임종 사역을 하는 여전도인을 통해 알게 된


여성 청지기께서 영어학원을 개원하게 되어 감사모임을 가졌습니다.


여전도인께서 할아버지를 지난 주간에 찾아 뵙고 모임 격려말씀을 부탁드렸고,


90세 노령의 노인으로서 젊은 사람 못지않은 담대함과 확신으로


학 1:5~11 으로


1. 학생들을 正診(정진 - 정확히 진단)하여


2. 완치시키고


3. 인간의 노력과 생각은 포기하라.


믿는 사람으로서 그 분의 본성 - 진리, 본질 - 사랑에 근거한 신행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엄마, 저, 여전도인, 권하는 청지기와 원장님, 원장님의 언니부부, 남동생, 올케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격려말씀을 하실 때 힘 있게 당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분께서 노인 청지기을 통해서 하실 일들을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실 때는 제가 아내를 태워 주느라 할아버지, 엄마, 여전도인께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여 가셨고,


아내가 혼자 올 수 있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뒤 늦게 승용차로 가서 11시 50분경 도착하였을 때,


한창 당부하시는 중이었는데, 45분 이상 자세히 진지한 모습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 녹음분량 50분


돌아오는 길에 여전도인이 임종사역하는 노인전문 병원에 들러 할아버지께 위로를 부탁드렸으나,


의식이 없는 환자의 아들(약 60대 중반)이 화를 내면서 노인이 불교신자라고 거절하여,


또 다른 이는 화장실에 가 있어서


천안으로 가실 것을 재촉하셔서, 신도림역에 두 분을 내려드렸습니다. 오후 3시 5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떡(저녁식사)을 챙겨 주차장으로 가서 학원차 운행을 이상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할아버지께서 건강하신 것도,


엄마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생활하는 것도,


방학기간 중에 수술을 하여 버스를 이용하여 주차장에 가서


학원차 가까스로 운행을 마치고 주차한 후 다시 버스로 귀가하게 되고,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진 후에 .


방학기간이 끝나


지난 주간 손덕칠씨 상가 입관모임과, 출상모임, 묘지의 하관모임에 이어


학원개원 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오후 4시부터 학원 차를 움직이게 시간이 맞춰 지게 된 것도


우연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진흙탕-미나리밭 -이란 닉네임 설명


40년전 합정동 모임터 주변이 진흙탕이어서,


비가 오면 장화가 없이는 다니기 힘든 정도였고,


미나리밭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생각나서 정했습니다.




---------[ 받은 메일 내용 ]----------

제목 : [RE]father Baik's news- Today at 11:00 AM

날짜 : 2007년 8월 30일 목요일, 오후 20시 06분 57초 +0900

보낸이 : "oneway"

받는이 : "진흙탕-미나리밭"



바쁜 가운데서도 자세한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마치 비디오 영상을 보는듯한 자세한 내용이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아내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위한

당신의 그윽한 사랑도 그려집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그 분의 세밀한 음성에 우리는 귀기울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행하고 있는 아름다움도 그 분은 웃으시면서 바라보고

계실 것 입니다

좋은 영향력을 흘러 보내는 당신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네요

가족에게 안부 전해 주시고요

그럼~

중국 섬김이


추신:작년에 숙모가 향목이가 수술을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서(2006년 7월)

많은 조카들을 만나보고 이야기 나누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계속해서 못하고 있네요






제목 | sister KyoungSook's life in Korea.

보낸날짜 | 2007년 9월 09일 일요일, 오후 22시 58분 45초 +0900

보낸이 | "진흙탕-미나리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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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까지 계속 비가 오다가 날씨가 맑아진 어제


엄마와 아내, 아들 성원이와 함께


강원도 평창에서 펜션(민박)을 하는 큰동서네 다녀왔습니다.


장례식 후 오랫만에 먼거리 왕복 약 400Km 정도의 거리였지요.


아침 9시20분에 출발, 도착하니 약 1시40분, 2시간 정도 쉬다가 3시50분 출발, 서울 도착 9시 30분


추석을 앞두고 성묘, 벌초, 산행 하는 차량들로 도로에서 차들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지요.


점심은 영동고속도로 하행 여주 휴게소에서 은향엄마가 싸간 김밥으로 먹고


저녁식사는 상향 여주휴게소에서 5시반경에 , 엄마가 사주셨어요.



엄마는 요즘 하루 2시간 정도 주무신다고 하시네요.


경동시장 한약재상가 한약방에서 진맥을 하더니 심장에 화기가 있다면서


한약 55봉을 10만원에 구입해 복용하고 계시다네요.


다리에 맥이 풀어져 힘이 없어서 침을 맞고 점점 나아가고 있다고 하시고요.


예전보다 걸어다니는 시간이 늘어서 다리도 좀 나아지고 있다시네요.


이젠 밤으로 쌀쌀해지고, 낮에는 햇볕은 뜨거워도 그늘에 피하면 선선한 가을로 가는 날씨입니다.


저도 이젠 분비물도 적어지고 맑아져 갑니다.


배변시에도 시간을 5분이내로 마치고 있습니다.


이영선(최동욱 어머니) 님은 한양대 병원에 9월 1일경 입원하여 - 갈비뼈에 암에 퍼졌다고 함.


어제(9월 8일) 항암치료제를 맞았는데 부작용이 없는 신약을 투여했다고 합니다. - 식사 밥 잘 드신다고 함.


2003년에 암을 선고받고 3개월밖에 못산다고 했는데 - 임파선 절제, 폐암 부위 절제


지금까지 오래 살았다고 막내 최순봉씨가 전화통화에서 말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환자진료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제목 | brother MooShin's Health


보낸날짜 | 2007년 9월 12일 수요일, 오후 12시 21분 00초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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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9월11일) 오후 6시15분에 무신 삼촌이 전화를 걸어서


삼성서울병원(강남구 일원동)에 와 있는데,


입원해서 심장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입원 수속서류상 보증인이 필요하다면서


입원비는 자기가 낼 것이지만, 형식상으로 보증인 인적사항을 기록해야 한다면서


주민번호와 주소를 묻기에 피해가 없는 것인가 하고 재차 묻고는 알려주었습니다.


연락할 만한 데가 저 밖에 없더라고 하더군요.


목소리도 평상시와 다름없었습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통화해 보시라고 했고 - 삼촌과 외숙모(형욱 엄마)가 같이 있었던 듯


엄마도 그냥 간단한 검사정도로 답변을 들었습니다.


밤 10시50분에 과천의 삼촌댁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외숙모(성순정-형욱 엄마)가 전화를 받으셨고, 삼촌이 왜 병원에 입원하느냐, 몸이 많이 안좋으냐고 물었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심근경색이라고 하면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형님(엄마)과 통화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신경이 예민해 있다고 하더군요.



오늘 아침(9월 12일)


10시 40분


삼성서울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무신 삼촌의 입원실을 문의하니


병실이 없어서 응급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 과천 집에는 전화해도 부재중



엄마께 전화를 걸어서 내일 또는 모레쯤 가보자고 말씀드리고 난 후,


11시경,


무신 삼촌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을 때,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면서 어디냐고 물으니까, 은행 업무 볼 일이 있어서 도망나왔다고 했습니다.


어디가 안좋은 것이냐고 물으니 심근경색이라면서 년초에도 약간 안좋았는데,


지난 금요일(9월7일) 가슴이 안좋아서 동네의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삼성병원에 입원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11시 50분경,


무신삼촌이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도 협심증이 아니고 심근경색이 아니었느냐며


자신은 심장 관상동맥 경화라고 하더군요.


엄마와 문병을 가겠다고 했더니 오지 말라고 하면서


형욱이는 고려대, 한양대 등 3곳에 2학기 수시 원서를 썼다고 하며


어제는 응급실에서 밤을 샜고, 그저께는 형욱이 자기 소개서 등을 써 주느라고 밤을 샜다고 합니다.



- 아버지 상중 문상(7월 26일)을 삼촌과 왔을 때,


당시에 본 모습은 사람이 너무 지쳐서 넉이 빠진 듯한 피곤한 모습이었습니다.


접객실 한쪽에서 외숙모가 은향엄마와 나눈 이야기에 따르면


외숙모(형욱 엄마)는 그간 건강보험공단을 퇴직하고서 구로공단(구로디지털단지) 인근의 의류상가 식당가에


분식점을 내고 몇달간 장사를 하느라 애를 쓰다가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고 해도


무신 삼촌이 그만두면 안된다고 성화를 해서 유지하다가


외숙모의 언니가 이러다 동생 죽겠다면서 자기가 말해 줄테니 그만두라고 했다고 합니다.



11시 50분 무신 삼촌이 걸어 온 전화 통화에서 여전히 외숙모는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마누라가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낸다고 하더군요.


남편이 돈을 못 벌면 기가 죽는 것이라고 말하자, 돈을 벌어야 될텐데라고 말하더군요.


외숙모의 연락처를 가르켜 달라고 했더니 전화통화할 사이 없다면서 나중에 가르켜 준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버지 빈소에 조문왔을 때, 잠실동모임터 백광진회장 부부와, 백명옥여청지기 부부 등이 왔었다고 했더니


잠실동모임터 식당에서 일요일에 밥을 팔더라면서 비난하기에


모임터도 1년에 몇번 안나가는 사람이 그런 비난을 하느냐고 말하니까.


나 이제 매주 과천에 있는 모임터에 나간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하늘의 도우심을 바랄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연세많으신 아버지보다 젊은 아들이 건강이 안좋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제목 | 태풍-위파-이 중국쪽으로 상해쪽으로 상륙할 것!


보낸날짜 | 2007년 9월 18일 화요일, 오후 13시 47분 11초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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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제주도에는 제11호 태풍 '나리'의 영향으로


하루에 최대 563.5mm(5~6개월간의 강수량) 폭우가 내리면서


제주도의 모든 하천이 범람하고


감귤농장, 감자밭, 시장, 주택이 침수되고 20명 이상 사망, 실종되는 재난을 당했습니다.


남해안 지방에서도 여러 지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12호 태풍 위파는 중국 동해안을 따라서 북상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영향으로 새벽부터 계속 비가 내립니다.


이곳 서울 경기 등 중부지방에는 목요일까지 계속해서 비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추수를 앞두고 남부지방에 이어서 중부지방에 호우가 계속되어 농작물 피해와 각종 재난이 염려됩니다.


이 태풍의 영향으로 그곳에서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그저께 통화에서 목소리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무신 삼촌의 심장질환 처치도 잘 되어 다행입니다.


늘 강건케 하시며, 인도하시기를 바라며








제목 | 오늘 아침 아버지 산소에 잡초를 제거하고 왔어요.


보낸날짜 | 2007년 9월 22일 토요일, 오후 16시 21분 22초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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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밤 답장한 메일을 이제 열어보았습니다.


이 hapjungdong@hanmail.net에서 삼촌과 주고 받은 서신은 까페를 개설하거나


ID와 password를 공유하여 우리 외가 친족들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portal site 검색창에 할아버지 성함을 입력하고 검색된 중에서


부산모임에서 80년대에 가르침을 받았던 56년생 추정,


이영인 지도자가 관리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부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가 표현된 부분에서


부산 할아버지의 표현을 빌면, 자만하고, 교역자가 잘못해서


내수동모임을 뺏겼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실은 부산 할아버지의 돌출된 행동으로 인해 그 세력의 서울 중앙 근거지를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모임 대표(형식상)의 지시를 거역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9월 20일 오후 5시경, 과천의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몸이 괜찮느냐, 약을 먹느냐?'고 물으니, '괜찮다,


약을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혈전용해제같은 것이겠지 뭐' 하면서 통화를 했습니다.


어제 저녁 엄마가 저희집에 오셔서 아내와 성원이와 함께 송편을 빗었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7시 반경, 아내와 성원이와 제차로, 엄마와 희영이와 계곤이가 그집 승용차(아버지 타시던 차)로


아버지 산소에 가서 잡초를 제거하고, 비석의 흙을 닦아냈습니다.


이곳 서울 지역의 날씨는 태풍 위파의 영향으로 며칠간 계속된 비가 어제 오전까지 온 후여서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면서 서늘한 하루였습니다.


이글을 쓰기 전 3시 40분경에 할아버지께 산소에 다녀왔다는 전화를 하였을 때,


그곳에는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보내는 우리나라의 명절, 추석


건강하시고, 기회가 닿는대로 반가이 대하며,


지난 일들 이야기하며 서로 격려하는 만남의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늘 우리를 위해 염려하시고 도우시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시기를...






제목 | 2달전에 아버지장례절차에 협조하심. 감사드려요!


보낸날짜 | 2007년 9월 22일 토요일, 오후 23시 22분 46초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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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통화에서 반가운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지난 2달전, 아버지께서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엄마가 사망신고절차 등을 처리하느라 애썼다는 얘기를 엄마와 동생들, 삼촌에게 들었습니다.


뒤늦게나마,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민이 엄마도, 1달간의 중국 방문 때, 숙소를 제공하며, 마치 딸처럼 아버지를 섬겨 주었다는 말씀도 엄마께 들었습니다.


모임이 있는 날 낮에 세상을 떠나셔서 더욱 분주하고 정신없이 바쁘셨겠지요?


민이엄마와 어린 딸아이엄마께서 아버지의 시신을 4층에서 업고내려오느라 고생하며 수고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데, 중국사람들은 특히나 죽음을 싫어하여, 돈을 얼마든지 더 준다고 하여도


시신을 만지기 꺼려한다는데, 그와 같은 수고를 기꺼이 솔선수범의 자세로 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화장장에서의 입관모임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시며,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셨던 것, 감사합니다.


외국에서 돌아가셔서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제 아내가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서 여권있는 사람이


비행기표를 사서 목적지 공항에서 도착비자를 받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큰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중국에 들어가 엄마와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라고 부탁했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여동생이 중국에 가겠다고 하여, 그나마 홀로 외국에서 아버지의 임종과 시신 운반과정을 감당했던 엄마에게 큰 위안이 되게 하신 분의 준비성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다행스러운 것은 아들들이 임종도 못하고, 시신도 못 본 상태에서 화장을 하였지만,


중국의 화장제도가 우리나라와 달라서 관에 넣지도 않고, 유골도 빻은 것이 아닌 조각조각의 모습으로 되어있어 그나마


그 조각들을 보면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시신을 보지 못한 가족과 친척들에게 아버지의 유골함을 열어서 치아가 빠진 입주변 뼈조각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식과 조카들(아버지의 손주들)에게도 할아버지의 유골을 보여 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유골이 도착하기 전에, 전화연락과 빈소를 준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문상객을 맞는 빈소의 위치도 서울에서 잘 알려진 위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유골 도착 후, 고인의 장인이신 합정동모임의 백영익 지도자께서 장례의 발인식과 안장식의 모임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족들과 모임 식구들, 친척들이 위로를 받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날씨도 장마철임에도 흐리고 구름이 해를 가려 뜨겁지 않은 정도였습니다.




엄마는 요즘 노인 임종 때, 하늘을 바라보게 권하는 여성전도인과 함께 노인전문병원에 찾아다니며, 바쁘게 지내십니다.


친척들은 곁에서 46년을 함께 살아 온 삶의 동무를 잃고 받았을 충격을 염려들 하지만, 잘 극복하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 묘에 가서 잡초를 제거하고 양옆


왼쪽(아버지의 조부모) 묘, 오른쪽(아버지의 부모) 묘의 비석과 묘 주변 석곽 표면의 흙을 씻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앞으로 1, 2년 정도 계획을 세워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 어린 딸아이 가족과 민이네 가족 모두 만나 볼 생각을 가집니다.


항상 늘 조심하며, 하늘의 도우심으로 모임이 날로 활기를 띠어가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복된 가정되시기를 바랍니다. - 민이네도 안부 전해주세요.


민이 엄마 무서움증 생겨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린 딸아이 가정에서 머물렀다는 소식을 엄마에게서 들었습니다.


민이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하여 죽음을 알릴 수 없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첨부화일에 중국과 한국에서의 몇장의 사진을 올립니다.







제목 | [RE]문안


보낸날짜 | 2007년 9월 28일 금요일, 오후 15시 02분 52초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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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이렇게 컴퓨터로 서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게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키신 그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화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중국에서의 장례절차에 고선생님께서


많은 수고를 하셨음을 엄마와 두 여동생들을 통해서 듣고


또 찍어 온 사진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중국을 향한 그분의 일을 할 후손이 있을 것이라는


축복과 권면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엄마는 지난 21일과 24일 제 집에 오셔서 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송편을 빗으시고,


25일 추석명절에는 제 집에서 아침을 드셨습니다.


약 140Km 떨어진 곳에 사는 2 여동생 위의 남동생과 3명의 조카들도 와서


사촌간에 농구 연습과 대화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2006년 9월 30일에 추석명절을 앞두고


아버지의 조부모(제 증조부모)와 부모(제 조부모) 묘소를


아버지와 엄마, 저와 제 아들이 함께 잡초를 제거하며, 청소했었는데


10개월 만에 아버지께서 증조부모 묘와 조부모 묘 사이 그곳에 안장될 줄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를 지으시고,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장하시는 그분의 정하신 때,


아버지께서 그분 계신 그곳, 하늘에 부르심을 받아 가셨다고 확신합니다.



어제는 40년 전에 월남國에 군인으로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정착하였던 아버지 2째 동생,


숙부께서 9월 22일 소천, 중국에 갔었던 숙부와 사촌이 월남에 가서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로 들여와


조부모 묘 옆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안장했습니다.


아버지보다 10년 젊은 숙부는 40년이상 담배를 피워왔고


그로 인해 폐암으로 한국에 들어와 인천의 인하대병원에서 수술을 하려고 가슴을 갈랐을 때


이곳저곳으로 암세포가 퍼져 수술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 다시 꿰맨 후,


살던 곳 월남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기까지 남은 기간 동안 기도와 예배로 시간을 보내


그 나라들어갈 준비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결혼한 월남人 숙모가 한국어도 못하지만,


그 친정식구 약 50여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믿음의 장례절차를 진행하는데 모두 협조하고


화장장에는 현지 월남人 70~80여명과 한국교민 15명 정도가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월남國 현지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장례절차에 어려움도 있었는데,


숙부께서 생전에 죽은 시신의 염을 수십건 해주었던 것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었기에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화장장에 함께 가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의 부모 밑에서 자라 22세에 타국에 나가 살았지만 담배와 술을 늘 즐겼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불쌍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어


죽음의 순간에 함께 믿는 이들의 방식으로 장례를 진행하게 된 것에 친척들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분께서 부르시는 때 그곳에 가서


제 아버지와 믿음을 가지고 먼저 가신 이들을 만날 때가 있겠지요.




앞으로도 서로 문안하며, 서로을 위해 기도로 돕는 고선생님과 지선생님, 민이엄마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른 시일 내 서로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서울에서 이부영




첨부한 파일


20070922 중에서




묘(조부모)의 잡초를 뽑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사람이 저 이부영이며,


함께 한 사람은 막내여동생 이희영의 남편,


앉아서 청소하는 이는 엄마이고,

다른 묘(증조부모)의 밑을 청소하는 이가 제 아내이며, 그 곁에서 움직이는 이가 막내여동생 이희영


그리고 사진은 제 아들(12세)이 찍었습니다.




20060930 은


작년에 성묘가서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조부모 묘 주변을 청소하는 모습과,


제가 아버지의 부모 묘(저의 조부모) 묘의 잡초를 뽑는 모습을 제 아들이 찍은 것입니다.



---------[ 받은 메일 내용 ]----------


제목 : 문안


날짜 : 2007년 9월 26일 수요일, 오전 00시 17분 26초 +0900


보낸이 : "amosyoel"


받는이 : "진흙탕-미나리밭"


함께받는이 : "진흙탕-미나리밭"


안녕하십니까!!! 저는 고준보입니다. 메일을 잘받아 보았습니다,




초석명절은 잘지내 지요 ! 우리여기서도 잘지냄니다.


어머니한테도 고준보가 문안인사 한다고 알려주세요.


사진도 잘받아보았습니다. 사진보니 어머니의 건강은 좋은것 같은대요. 하나님이 위로하여 주실것입니다.


인생은 (생.로 .병. 사 . 生老病死)가 누구에게나 다 닥쳐옵니다. 아침안개같은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 장로님은 영원한곳 예수님이 있는데갔구요. 우리도 앞으로 예수믿고 천국 가면 다만나게되지요.


장로님은 중국에오셔서 우리에게 많은 신앙의 도전을 주셨서요. 외할아버지 목사님도 중국에오셔 복음 전했구요,


그행한것 수고한것은 하나님이 자자손손 축복합니다.


장로님은 아마 한알의 믿알로 중국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앞으로 이사건으로 인해 장로님의 후손 혹은 또후손이 중국에와서 선교 할줄로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도와준것은 너무 적습니다. 주의종 립장에서 한것뿐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앞으로 기회되면 한국에 가서 저도 사모님(어머니)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어머니와 온집 식구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온가족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간건한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에 또 연락합시다.







제목 | 추석을 잘 지냈습니다.


보낸날짜 | 2007년 9월 28일 금요일, 오후 15시 25분 19초 +0900


보낸이 | "진흙탕-미나리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받는이 | "백수신" 추가 주소추가



어제 비가 온 후로 기온이 떨어져 선선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중국에서의 장례 일정을 진행하였던 고선생님과 지난 토요일에 엄마와 함께 통화를 한 후,


메일주소를 받아서 소식을 띄웠더니 답장이 왔습니다.


답장을 달아 보내는 것을 삼촌께도 보냅니다.


첨부한 동영상 파일에 대한 설명은


압축한 문안 파일 안에 있습니다. - 암호 - 할아버지 생신


이제 오후 학원 운행을 하러 가야 해서 이만 줄입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의료사업에 실수가 없기를,



사촌들도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곳에서 안전히 생활하기를 바라며 서울에서 부영






제목 | 오늘 날씨가 여름 지나고 처음 무척 쌀쌀합니다.


보낸날짜 | 2007년 9월 29일 토요일, 오전 09시 12분 21초 +0900


보낸이 | "진흙탕-미나리밭" 메일 쓰기 이름으로 검색


받는이 | "oneway" 추가 주소추가



올 가을들어서 오늘 가장 쌀살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9월 23일 일요일 김명선씨가 전화를 걸어와 통화를 하였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희영이와 통화를 하면서 산소에 가셔서 통화가 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명절에 2시간 거리의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가야하느라 전화연결이 어려울지 몰라서


9월22일 토요일 오전, 저희들이 산소에 가서 잡초를 뽑고 주변청소를 하러


엄마와 저와 아내와 아들, 희영, 양서방이 간 시간동안에 서교동으로 전화를 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시신을 옮기고 장례절차를 진행하면서


무서움증이 들어서 집에서 생활할 수가 없어서


고준보선생, 지혜선선생 부부의 가정에서 지냈다고 장례를 치른 당시에 엄마와의 통화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50일쯤 지나니까 이젠 괜찮아졌다고 하면서 아직 딸아이 민이에게는 충격을 받을까봐


집에 혼자두고 일보러 다니는 때가 많은데, 딸이 자신보다 더 심약하기에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면 그집에 못 살 것이라면서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이야기해 두었답니다.


고준보선생이 아버지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아버지의 후손 중에 중국에서 일할 사람이 있게 될 것이란 축복의 말을 해 준 것이 감동됩니다.


늘 그분의 돌보심으로 인해 마음에 평강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서울에서 부영






---------[ 받은 메일 내용 ]----------

제목 : [RE]추석을 잘 지냈습니다.

날짜 : 2007년 9월 29일 토요일, 오전 01시 30분 25초 +0900

보낸이 : "oneway"

받는이 : "진흙탕-미나리밭"




이곳에서도 심양에 계시는 김명선씨와 얼마전에 통화했습니다

이곳의 추석은 모두가 정상 근무입니다

10월 1일부터가 국경절로 연휴가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글구, 불행히도 보내주신 동영상 파일은 이곳 컴사정으로 열지를 못했습니다

수리되는데로 다시 시도하겠습니다

카페에는 가입했구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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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마포구합정동에 있는 예수교장로회 합정동교회의 개척목회자, 1대 담임목사셨고, 원로목사이신 백영익목사님의 19891221일 합정동교회 사택에서의 가족모임 식사 사진.

아기는 3째아들네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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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2021-02-20 14:45

백영익 - [사진], 주권욱의 논문에서 본 소개 (첨부파일)





2010학년도 박사학위논문


개혁신학 관점에서 본 이근영의 “아들의 생명”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Being of the Son”

by Keun Young Le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formed Theology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조직신학 전공

주권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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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신학의 계승자

백영희 목사의 사후에 그가 생전에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던 교리와 그의 신학은 어떻게 되었으며 그 신학을 이어가는 계승자가 있는가? 그리고 백영희 목사가 주장하는 교훈에 대해 학문적으로 나타난 논문은 몇 편 정도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백영희 신학을 계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총공회 교단 내부에서는 주로 백영희 목사가 교훈한 교리를 현재 그대로 이어가고 있으며, 목사 중에서 학문적으로 백영희 목사의 신학을 교계와 신학계에 알리는 차원에서 교단 밖의 신학교에서 졸업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외에 총공회 밖에서 백영희 목사 생전에 그의 교훈을 사모하고 따르던 목회자 가운데서 그의 교훈과 신학에서 영향 받은 내용들을 후학들에게 전수하신 분들이 계시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합정동 교회 백영익 목사, 대동교회 김석준 목사 그리고 잠시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서정교회 이근영 목사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백영희 목사의 교훈과 신학을 계속적으로 연구하므로 새로운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신학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받게 되었으며, 신학의 새로운 분야를 주장하게 된 분들이다.


1) 백영익 목사

백영희 목사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1917년 12월 20일에 거창에서 출생하였으며, 대한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합정동에서 백영희 목사보다 먼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다. 원로목사가 되기까지 합정동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자기 형님의 교훈을 외부에 나타나지 않게 인정하며 따랐다. 백영익 목사의 신앙사상은 백영희 목사에게 받은 영향이 크게 미쳐 신앙 도덕적 삶에 초점을 두고 실천방안으로 인간관계와 모든 관계에서 말씀이 기준이 되도록 발전 시켜 나아가는 그 면에 역점을 두었다. 백영희 목사의 기본 구원과 건설구원을 기본구원과 성화구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백영희 목사가 교리에 대한 논리를 세우는 면에 중점을 두었다면 백영익 목사는 같은 사상을 견지하면서 세워진 논리를 성도의 실제의 삶에 전력을 기우리는 성화구원에 중점을 두어 발전된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백영익 목사의 신앙사상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서 실제적인 삶에 적용하는 경건생활의 강조이다. 본인 스스로가 일평생 경건생활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교역자 월요공부를 원로목사가 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계속해 오면서 서울지역에 거주하는 독립교회 목회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때 모인 교역자의 숫자가 70-80여명에 이르렀다. 93세인 현재도 중국에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선교하고 계신다.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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