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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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거제도에서 김영삼 대통령 고향 교회인 고신 교회를 목회하다 - 백 목사님의 제명 시기 서부교회로 잠깐 와서 배우다가 - 서전교회 > > > 산창교회 개척 > 원동교회 > 방배동교회 > 다초교회 > 부산공회 행정실장 교학실장(부산공회 > 부공1 > 부공2)
일시 : 09.12.14.08:30-10:30
장소 : 남해군 상주면 금양리 금양교회
이름 : 이만기
제목 : 송유상의 오동원 노트 비공개에 대하여 이 목사님의 협조를 부탁하면서 오간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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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호적 1920년생 - 실제는 1921년, 백영침 2세 위, 이재순 3세 위. 인산 이재순과는 호적상 동갑
- 집안
2천 년 역사의 경주 이씨에서 내려 온 합천 이씨, 개명 이재순과 8대 조상이 동일. 이재순 할아버지는 그 골짝에서 큰 소리 칠 만한 양반이어서 자존심이 대단한 것. 연안 이씨는 조선에서 9명 대제학을 배출했으나 역사 전체를 통해 우리만 못함
- 공부
6세에서 9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하며 각종 한학서들을 배웠고 위천초교 졸업. 18-19세 쯤 거창농림 졸업
- 공무원
21세에 경남도에 공무원 채용, 양산에서 교육. 경남도에서 거창군에 농기수로 발령 받았는데 진주농고 나온 김봉태가 위천에서 책임자로 있다가 거창군에 책임자로 발령 받으면서 후임으로 이만기 위천 근무
- 김봉태
하동 사람으로 진주 농고 출신이며 거창 곡물 총책임자로 직책이 중요했고, 거창의 곡물 생산량이 많았던 유명 부자집에 결혼
- 신앙 초기
교회를 출발하게 되던 순간 위천면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데 저녁 늦은 시간에 눈이 빠지려 너무 아팠고 그 시간에 믿게 됨. 주남선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집사도 받았는데 주 목사님은 어디를 가도 치리를 하지 않는 분. 세례 문답을 할 때 '이기수, 예수님 믿으니까 좋아?' '예' '됐다, 그러면 되었지.' 하고 끝냈다. 어려서부터 중생은 깨달았다. 점쟁이가 와서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저 아이가 '인동'할 아이, 인동은 나비의 부활. 중생의 그런 기억이었다.
- 위천교회
백영희 조사님 부임하기 전에 90여 명 출석에 집사 1명(남6, 여5). 백 조사님은 부임하자 바로 천당 보고 믿는 사람은 이만기와 여 집사 한 사람 뿐이라며 나머지는 전부 집사 파면. 백 조사님은 시도 때도 없이 기도를 하러 간다고 데려 나가는데 삼봉산으로 자주 갔고 아침 11-12시에 나가면 무월을 경유하여 저녁 해 질 때 도착했고 또 뒤의 금원산 챙이 바위로도 자주 갔는데. 금원산은 이만기 부모 재산이었으나 식민지 초기 지적측량 때에 측량 수수료를 납부하고 등기를 해야 하는데 그 수수료도 많았고 또 별로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여 포기를 해서 도유림이 되어 현재까지 내려옴.
조사님이 5월에 부임했고 부자 교인들이 연보를 하지 않았는데 가을 추수감사절에 이만기 집에서만 200석을 추수하는데 십일조가 20석. 당시 위천에는 정태우 집안이 1천 석이고 신도성도 1천 석 등.
- 남영환
백 목사님을 이단으로 정죄할 때 '기사를 말한다.' '이 시간에 이 말씀을 가지고 찾아 오셨다.'는 것을 말함.
- 교회 위치
당시 예배당 위치는 지금까지 그대로 있고, 사택은 그 예배당에서 나오면서 오른 쪽의 작은 공터에 붙은 첫 집이며, 그 예배당에서 나오면서 바로 오른 쪽 공터 뒤로 15미터 정도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대문은 원래 예배당과 반대 쪽에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당으로 바로 가기 위해 뒤로 샛문을 만들어 사용.
- 천세욱
일제 때 부친이 순사. 6.25 때는 잘 아는 사람들이 빨치산에 가담하여 정보가 있었고
- 전쟁 치하
거창으로 들어 오던 인민군이 무주에서 바로 고제를 통해 들어 오면서 위천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기도 중에 천사가 오지 않는다고 함. 무주에서 고제를 넘어 올 때 인민군이 먼저 척후 2명을 보냈는데 그 2명이 사살을 당하자 방어가 강하다고 판단하여 함양으로 돌아 가는 바람에 위천은 초기 점령을 피함. 위천교회에는 웅양 무월 개명 등에서 온 교인들 때문에 2백여 명 정도의 교인들이 몰려 있었으며, 각처에서 백영희 조사님께로 가야 환란을 이긴다고 몰려 든 것
- 조사님 체포
새벽에 교회를 가는데 인민군 2명이 교회로 향했고 그 날 따라 개가 유달리 짖어 대었고 서로 마주 칠 '누구요?' '믿는 사람이요', 그 2명이 조사님과 이만기를 데리고 나왔는데 우선 사택으로 갔고 그 중에 1명이 조사님과 사택 안으로 들어 갔고 다른 1명은 이만기와 밖에 있었으며, 사택은 방2칸과 부엌 1칸. 그들이 어서 처리하고 가자 했고
- 피할 길
인민군이 올라 간 다음에 한번은 백 조사님이 개죽음은 피해야 한다면서 새벽 2시에 집으로 부르러 왔다. 조사님이 내가 꿈을 꾸었다면서 피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서 불렀고 두 사람이 아무 소리 없이 얼른 빠져 장풍 산에서 위천이 불 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음. 그 언덕에서도 이만기는 힘이 들어 꾸벅 조울고 있었으나 조사님은 바위 위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으며 이후 마리면 진상리로 1주간을 가 있었는데 그 때에 온 마을 주요 건물을 다 불질렀는데 예배당은 휘발유를 부었으나 불타지 않았고, 학교와 면사무소는 다 불에 탔으며, 유차연 부인(?) 4학 년 덕순이가 꿈에 예배당을 불 사르는데 예배당이 청솔가지로 지어 져 있어 불을 지르려 해도 안 되더라고 말.
- 개인 인연
교회를 다닐 때 집안이 양반이며 하인이 3명이 있었는데 당시 관습으로 다 말을 놓는데 이만기는 말을 하수하지 않으니까 온 집안이 난리가 났었는데, 전쟁 중에 면에 공산당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과 가까운 천민들이어서 도와 줘서 살아 남.
- 목사님 가족
목사님 위천 올 때 큰딸이 중학교였고 막내 아들은 위천에서 출산
- 신학 과정
개혁신학교 - 백태영 2년 했고
대한신학교 - 이만기 서영호
- 목사님 사후
백 목사님 사후 백태영 백영침 목사님이 전화가 와서 평생 믿은 것을 헛일하지 않으려면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는데
- 다초교회
1991년 다초교회 부임
1993년 양성원 부임
교학실장은 꿈에 백 목사님이 교학실에 가라 했는데 그 뒤에 이재순 목사님이 부탁
- 교리 언급
전원일치의 성경 근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삼위일체가 의논했다.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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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