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순
내용 | 이재순(인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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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006.9.12./9.23.
대화: 이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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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순
-본인
1920.12.20(음)
경기도 시흥군 산본리 출생(현 군포시 산본동).
4남1녀중 3남. 전주 이씨 인성군 종가 - 사촌형이 종손
평양 숭인상고졸업-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신앙생활 시작은 고등학교때인지, 은행근무시인지는 잘 모름
당시 숭인상고 교장이 조만식장로님)
남동생이 대학재학중에 예수믿음
목사님이 목회하신 뒤, 형 두분이 다 예수믿고, 조카들이 거의 다 예수믿음
-사모님: 신복순
1922.1.20.(음), 1남 3녀중 차녀, 부산 출생
모친이 예수믿고, 모든 형제, 자매들이 예수믿음,
부산에서 초량교회(이약신 목사 시무)에서 신앙생활
모친과 언니, 형부가 권사, 장로로서 부산 충무동 교회(합동) 창립성도
남동생 장로 피택후 사망
제부- 목사
-결혼과 신앙
부산에서 은행 근무중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시 이재순 목사- 항서교회 교인, 신복순 사모- 초량교회 교인
자녀(4남1녀)
이원용- 1947.5.16.
이범용- 1949. 5.18.(아내:이을순)
이선희- 1951. 12.19. (남편: 정병철)
이의용- 1953. 12.9. (아내: 이은숙)
이덕용- 1955.10.4. (아내: 박진희)
-사모님의 이 노선
백영희 목사님(당시 조사님?)이 삼각산에서 집회하실 때 계속 참석하셔서 은혜받음
심장이 나쁘신 가운데도 계속 집회 참석중에 치유받음.
코피가 멈추지 않아 삼각산 집회에 참석이 힘들었으나, 믿음으로 참석하는 중에 멈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교회를 섬기고, 말씀가운데 살려고 애쓰심
-이재순의 사회활동
일제때 은행근무.
해방후 사촌형들과 함께 대림산업 창설.
풍림산업 창설
일본에서 기술제휴해서 대림요업 창설, 사업확장
대림산업 부사장.
대림산업 퇴사후 사업하시다 부도남
그후 개인사업
-내수동 교회 개척과 가정
내수동 교회 개척의 주동은 당시 외무장관(?) 부인이던 이집사님이었고
모친, 박희복 집사님 등이 주동으로 기억
이미 모든 분들이 백영희 목사님께 은혜를 받고 있었고
모친이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남편의 이해가 있어서 섬기는 일을 많이 감당한 것으로 보임
내수동 교회에서 왜 성은교회로 이동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모친과 박희복집사, 장흥춘 집사등이 백영익 목사님(당시 조사님?)과 함께 사직동에서 성은교회를 개척(1961??)
그뒤 신도범 목사님이 오시고(1965년으로 기억), 교회를 신축 확장하고 교회이름을 사직동교회로 개명
-부부의 목회 출발
개척동기, 목적이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가운데 1974년 파송받음
개척과정, 남해군 서면 서상교회 개척. 1974년
(당시 대림산업에서 교회를 크게 지어주겠다고 해도 거절함. 서상교회에서 교회 공사시 태풍이 불어 기둥하나만 남고 다 무너짐, 철저하게 하나님 의지하면서 하라는 뜻으로 다시 건물을 세움)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봉천교회(권빈리) 개척.-1977년(?)
인천시 인산교회 개척- 1979년
-중학교 시절의 금정산 집회 참석
1966-1968년 일 것
집회 1주전에 어머님이 저희 식구들을 데리고 부산에 오셔서(참고로 어머님의 친정이 부산) 1주간 송도, 일광등 해수욕을 시키시고, 방파제에서 회등을 사주며 기다렸다가, 반찬을 잘 준비해서 금정산에 갔고 아직도 70인 바위등을 기억
기억하는 한가지는
금정산 집회에서 어느 어린아이가 바위에서 떨어져 다쳤는데
목사님께서 예배시간에- 설교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잘 몰라도 일어나라고 하면서
기도하시고 괜찮을 것이라고 한 기억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것을 본 귀한 경험
1968년도에는 집회 마지막날 하산할 때에, 마침 부산에 태풍이 불었고
당시에는 솥, 그릇등을 다 들고 다닐때라, 그런 짐을 다 지고,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경찰들이 놀라서 무슨 큰 사고가 난 줄 알고 물었던 기억
-병원과 신앙
인턴과 레지던트 1년차때에는 병원에서 당직도 많이 서야 하고, 주치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일 문제가 많이 부딪쳤으나
하도 압박도 많고, 말도 많아서 사표 낼 마음을 가지고 목사님께 문의하니까, 사표는 내지 말고,
주일을 지키고, 만일 병원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때 그만 두라고 했고
약 3개월을 사표를 써서 가방안에 넣고 다녔으며
5월 대구집회 다녀온 뒤에 저에게는 주일날 자유를 주기로 결정이 났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제가 맡은 환자들은 중환자라도 상태가 호전되도록 했으며
특히 주일 지나고 월요일 새벽에 출근해 보면, 환자들은 다 좋아졌고
개업과 관련해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면, 잘 될거라고 하셨으며
그 당시 목사님 설교말씀에는 만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대티 고개 만당에 있으면, 그 고개 만당에 큰 길이 날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목사님 생전에는 목회에 소망은 두고 있었지만,
아직 시작한 때라 아니라 구체적인 지도나 언급은 없었으며
저의 어머님에게는 아들중에 목사로 쓰임받을 자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기억이 있고,
사모에게 중매 소개할 때, 앞으로 목사할 사람인데, 지금은 의대 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소개했다고 전해 들었으며
-수련과정 학생들에게 참고할 이야기
의대 공부시에는 주일 문제가 별로 없을 것고
인턴때는 힘들 것
대부분의 기초적인 일들을 인턴이 해야 하는데, 미리 레지던트 선생께 말씀드리고, 함께 하는 인턴 선생에게 부탁도 했으며
인턴이 매달 과가 바뀌기 때문에, 익숙해 질만하면 또 다른 과를 돌아야 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점이 어려웠고
2주즘 지나면 이해하고 지나갔으며
레지던트 때에는 1년차일때, 입원환자 주치의를 맡는데
토요일 늦게까지 환자가 내일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고, 그 대처방안을 일일이 다 order지에 적어놓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하며 생명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같았고 기억으로는 거의 문제가 없었으며
위의 상급자와 교수와의 관계인데
정직하게 이해를 구하고 성실하게 하면 모든 분들이 선후배 관계이기 때문에 잘 될 것 같고
그렇게 연습한 것이 환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밴 것같고, 주일학교 반사를 하면서 어린 학생에게 대화한 것이, 환자와 보호자들 상대해서 설명할 때, 엄청나게 도움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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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학교 제24회 동기회)
원장님 우리 목사님 이의용 200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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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병원은 부산 서구 동대신동 구덕운동장앞에 있는 조용한 주택가에 있다.
이의용 내과의원, 4층짜리 건물에 2층이 병원이고, 1층이 바로 그가 목회하고 있는 서광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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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의 동기들 안부를 주고받다가 이의용에게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목사하고 의사하고 어느게 더 보람이 있냐?"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래도 목사 일이 더 좋아"라고 덤덤하게 대답한다. 의사 일은 가끔 피로감을 느끼지만, 목사 일은 피로한 줄을 모르겠단다.
목사안수를 받은 것은 99년이고,
교회를 직접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해 부터인데,
처음엔 병원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교회 일만 전념하려 했다가
병원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아 아직은 두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병원 일도 바쁠텐데 설교는 언제 준비하냐?"
이의용 목사는 설교를 걸어다니면서 환자보면서 준비한단다.
우리 교회 목사님하고는 영 딴판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설교준비를 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지무지하게 고민도 많이 한다는데.
"고교생 때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을 했어.
대학생때도 마찬가지고,
목사되기 전까지 교회에서도 줄곧 성경일을 해왔기 때문에 설교준비는 비교적 수월하게 하고 있는 편이야.
새벽에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한 후
진료하면서 계속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설교준비는 진료하면서 한다고 봐야지.
또 병원은 많은 동네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고
좋은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해"
게다가 교회신자들 대부분이 동네사람들이고,
병원 찾아오는 환자들이기 때문에 비교적 부담없이 설교준비를 하고 있단다.
"그런데 왜 뒤늦게 목사될 생각을 헀냐?"
얘기가 길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단하다.
신학대학에선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나 궁금해서 부산의 야간신학대학원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단다.
그 학교 생긴 이래 서울의대 출신이 입학한 것은 처음이라고.
그러니 학교에서 그를 가만 놔둘수가 있겠는가?
학교 측의 지대한 관심과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의 적극 권유로 94년부터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92년에 신학공부를 할 겸해서 미국이민을 알아보려고 LA에 갔었는데, 마침 LA폭동이 일어난거야.
또 국내에 계시던 어머님도 편찮으셨고 당시엔 하나님의 뜻이 아니가보다 하고 말았지."
이의용은 아버지,자신,아들 3대가 목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버지는 올해 80세이신데 아직도 인천에서 현역 목사로 계신다.
아들은 현재 부산 고신대 재학중이다.
"아버님이 54세에 목사를 시작하셨고,
내가 48살에 목사를 시작했으니까,
아들은 좀더 이른 나이에 목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교회는 원래 장인이 담임목사로, 본인은 성도로 같이 개척했는데,
그가 목사안수를 받은 뒤 자연스럽게 위임이 되고 장인은 원로목사로 계신다.
동네 부근에 교회가 있었는데, 건물임대료를 아끼기 위해 병원건물 1층을 교회건물로 개조해 이사했다.
교인은 약 60명 정도.
이의용 목사는 나름대로 목회자로서의 비젼을 갖고 있다.
성도들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선교사들을 파송 및 후원하며 가능하면 현재 병원 건물 전헤가 선교사들을 파송 및 재충전하는 선교센타로 쓰임받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돈 나이들이야.곧 나이 60 되면 건강에도 이상들이 생기기 시작할겨야. 얼마 안 남았지. 신앙생활을 하든 안하든 자기인생을 한 번씩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현재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감사한다는 그는 아내가 목사인생의 반려자로서 너무나 좋은 동반자 역할을 해주고 있어 큰 힘이 된단다. 그의 부인은 처음에 우리를 교회로 안내했는데, 어찌나 그 모습이 수수하고 선해 보이던지 모두들 교회에서 일하는 집사님으로만 알았다. 나중에 사진활영을 강권해도 한사코 마다하는 그의 부인의 모습을 통해 새삼 이의용 목사부부의 말없이 실천하는 삶을 느낄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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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림이사 사장, 이재순 (1960~1963)
* 대림건설 사이트 초기화면의 연혁에 '설립자 이재순'이 표시 된 적이 있었음.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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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