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환
내용 | 고장환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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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6.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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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출생: 1939년
2.가정: 홍현희사모님과 결혼한 4남2녀
고향은 경북예천이나 제천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고 사모님은 제천
목사님은 최기주집사님 댁에서 시작했던 제천교회 시절 신앙과 소속을 동시 출발했고
사모님은 제천동부감리교회를 다니다가 남천교회 개척 후 소속을 옮겨 함께 신앙
결혼은 26세였던 1964년경
자녀는 고재훈, 고은정, 고은진, 고은선, 고재동, 고은미이며
3.목회:
37년간 4개교회 개척, 15개교회 담임
①도리원교회
67.9.5. 고신이던 경북 도리원교회가 환원할 때 잔류하며 공회 목회자 초빙하여 첫 목회
67년 금정산집회 마친 후 하산하다가 백목사님 호출을 받고 올라왔고 70바위 위에서 백목사님과 최기주집사님를 내려가고 있는데 백목사님이 다시 올라 오라해서 올라
합동측 경중노회 호랑이로 유명한 장로님이 배척, 예배당 증축 벽돌 준비 중 화원교회 개척
가니까 백목사님과 최기주집사님 두 분이 파송 대화 중이었으며 도리원 교회 목회 지시
②화전교회
68.10.6. 도리원교회 교인 몇 명과 함께 화전교회 개척, 전성수조사님이 후임이며
③무월교회
68.12.23. 무월교회로 부임했으며, 부임하던 날 김영웅조사님은 위산교회 부임 중이어서 같은 버스를 타고 이동.
④봉산교회
70.1. 봉산교회에 부임했으며, 전임은 정수암조사님
⑤동산교회
72.11.16. 거창 양혜원에 부임하였는데, 전임 추교경목사님이 72.9. 돌아가시고 3개월 정도 공석에서 조사로 부임. 72년 12월 연중행사 준비하며 회계장부 정리 중 십일조가 전혀 없어 사유를 문의하자 회계집사님이 추목사님 부부 생활비가 어려워 십일조 대신 월정을 정하여 십일조보다 더 많은 연보를 확보하고 생활비를 지급했다고 답변. 교회 연보 원칙으로 십일조가 우선이므로 새해부터 월정은 없애고 십일조를 다시 한다고 공고. 이미 6명의 식구였던 사택 형편상 교회가 경제를 맞출 수 없다고 걱정하는 집사님들에게 말씀대로 살자고 권면한 바, 새해 십일조가 시작되자 과거 월정보다 3분의 2나 더 나와서 생활에 지장이 없었고, 2명의 자녀 추가 출생하여 8명의 가족이 됨. 재임 중 이운길 원장님의 공로비를 양혜원 출입구에 건립
⑥수산교회
77.9.13. 수원에서 수산교회를 개척하였고, 후임은 김병춘조사님. 예배당 지을 터를 마련하고 떠났는데, 후임 김조사님이 그 땅을 팔고 옆에 대지를 구입하여 예배당까지 건축
⑦덕수교회
79.12.1 덕수교회 부임하였고, 전임은 송종섭조사님인데 포양교회로 이동
80.3.3. 덕수교회에서 양성원을 졸업하고 3.4.목사 안수
⑧포양교회
82.3.9. 송종섭목사님 후임으로 포양교회 부임하고 송종섭목사님은 덕수교회로 다시 부임했으며, 포양교회에서 신풍교회로 이동할 때 포양교회와 맞교대가 되어 후임은 이진헌목사님
⑨신풍교회
82.12.9. 이진헌목사님 후임으로 신풍교회 부임. 신풍교회 사택이 너무 노후하여 1층 사택과 2층 교육관을 새로 건축.
⑩길천교회
86.3.25. 전임자 최재진목사님을 이어 길천교회 부임, 후임은 이종희목사님으로 기억
⑪청주교회
88.4.28. 송용석목사님의 청주교회 노선 이탈로 공회 소속 청주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만 보았으나. 마호인조사님이 후임으로 예배당 완공.
⑫광안동교회
88.12.20. 광안동교회 부임. 89.8.27. 백목사님 장례식을 맞고 90년에 노선 분립으로 부산공회 교인들이 광남교회로 이민영조사님과 개척하여, 교인이 거의 없어 수영으로 교회를 옮겨 지하예배당에서 교회를 유지하다 봉산교회 시무 김주석조사님이 후임으로 오고 원동으로 이동
⑬원동교회
92.7.18. 전임 최종원목사님의 공회 반발 문제 수습 과정에서 원동교회 부임
유재룡목사님이 후임
⑭후리교회
95.5.16. 부산공회와 대구공회의 1990년 분리로 길천교회에서 대구공회 교인들이 이종희목사님과 함께 후리교회를 개척했고, 이 후리교회에 부임
⑮언양평화
96.10.6. 후리교회 교인들이 서울공회를 지지하게 되자, 대구공회 소속 고장환목사님은 언양평화교회를 개척하고 나오게 되었고, 당시 대구공회 내 공석이 없어 언양에서 대구공회로 첫 예배 후 개척.
이후 길천교회와 후리교회(04년 광명교회로 개칭)가 시골 동리에서 200미터 이내 거리에 있고 후리교회와 언양평화교회는 같은 대구공회이므로, 후리교회에 합동을 제의하고 합동하면 자신은 은퇴하겠다고 약속.
05.1.17. 양교회의 합동 후 1달 정도 지났기 때문에 이날에 은퇴
4.고난과 감사
①목회 자세
은퇴 전에 디스크와 척추관협착증 때문에 한여름에 어깨가 다 벗겨지도록 고생을 하다가 견딜 수 없어 토요일 밤에 입원. MRI 촬영 결과 척추관 협착증으로 즉시 수술과 6개월 치료를 제의. 내일 주일이고 목사여서 설교한다며 진통제만 맞고 나왔는데 월요일에 다시 방문하자 당장 수술하자는 것을 수술할 돈도 없고 또 수술은 하지 않겠다며 나왔는데 현재까지 건강.
②경제 생활
60년대와 70년대 공회 모든 목회자들이 극단적으로 어렵게 살았고 어떤 목회자들은 굶었다 하고, 그 자녀들이 굶어서 죽었다는 말도 나온 경우가 있었는데, 그래도 믿음으로 무조건 순종하고 걸어가니까 동역자들만큼 그렇게 고생한 적은 없음.
③교회 이동
부산 광안동교회 있을 때 양산동기도실을 늘 이용했는데 한번은 백목사님을 마주치자 부르시고 ‘청주에서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광안동교회로 이동이 되었다...’ 고 하셔서 ‘청주교회에 마조사님이 잘 맡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씀드리니까 ‘아니, 고목사가 있었어야 했는데..’ 라는 대화가 있었고, 백목사님 장례 후 정재성목사님이 백목사님 돌아가시기 직전 고목사님을 두고 ‘너무 이동을 많이 시켰어, 아이들도 많은데.’ 하시더라는 전언.
④개척 상황
화전교회 수산교회 청주교회 언양교회를 개척하면서 언제든지 외부 지원은 받아보지 않고 빈손으로 시작했는데 늘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문제가 없었던 것도 감사한 일. 백목사님이 한번은 ‘고목사는 돋나물 같아서, 바위든 어디든 던져만 놓으면 산다.’ 고 하신 기억. 가라하면 무조건 갔고, 간 다음에는 해결.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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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