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태영
내용 | 약력, 기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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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영 목사 약력
1925년 9월 26일 경남 거창에서 출생
1948년 3월 주남선 목사로부터 세례
1949년 12월 성경학교 수료
1956년 4월 거창읍 교회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에서 전도사 인허>
1957년~1959년 영남 고아원 교회 시무
1960년 부산 서전 교회 개척
1961년~1962년 서울 청량리 교회 시무
1962년 박윤선 목사 개혁신학교 수료
1963년 1월 경남 도평 교회 시무
1963년 3월 대구 달성 교회 시무
1964년 12월 11일 대한신학교 졸업 (제16회)
1965년 10월 12일 목사 안수 (예수교장로회 한국 총공회)
1966년~1978년 2월 대구 달산 교회 개척
대구 원동 교회 개척
영천 구전 교회 개척
1978년 3월 서울 사직동 교회 시무
1978년 9월~1979년 9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 교회 시무
1979년 10월~1980년 9월 서울 사직동 교회 시무
1980년 9월 서울 잠실동 교회 개척
1986년 11월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 교회 개척
1989년 10월 17일 제 20회 임시 총공회에서 총공회장으로 선임
1990년 3월 제21회 총공회에서 총공회장으로 유임
1991년 7월 8일 일본 동경 선교 (호산나 교회 개척)
1992년 12월 3일 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설립, 초대 이사장 취임 (현)
1993년 2월 12일 모스크바 선교 (루블리노 교회 개척)
1993년 2월 28일 인천 선학동 교회 개척
1993년 5월 16일 미국 화운데이션 신학대학 명예 성문학 박사 학위 취득
1993년 6월 23일 알마타 선교 (알마타 교회 개척)
1994년 2월 현재 서울 잠실동 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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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면/총공회/발언/1246번(07.9.17.), 1249번(07.9.19.)/
삼각산 서울지방공회 집회와 백태영목사님
서울 북한산(일명 삼각산)의 자락에 위치한 임마누엘수도원에서 서울지방교회의 소속 교회들이 연합 집회를 연 것은 정확히는 기억못하지만 대략 80년대 중반 쯤이( 83-84년 정도) 아닌 가 기억됩니다.
임마누엘 수도원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위치한 기도원으로서 당시 임대료를 주고 집회를 하였습니다. 임마누엘 기도원은 돌로 된 건물로서 일반 교회들이 주로 임대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기도원 위치는 당시 구기터널 위로 올라가면 있었고 현재도 소재하고 역사가 매우 오래인 서울지방교회의 기도원에서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지방교회의 소속 기도원은 설립 역사가 아주 오래되고 번듯한 기도원이 아니라 그냥 옛날 허름한 민가이고, 개축도 아니한 것이고,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서울 및 수도권에 거주하는 목사님들이 기도 및 평일에 쉬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고, 방은 약 10여개 안밖일 것입니다. 창량리교회는 수년 전에도 매주 이 장소에 와서 교인들이 단체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기도원의 위치는 서울 세검정이고 구기터널 바로 위 쪽인데 지금은 주위가 고급 발라로 주로 개발되어 대지값도 지금 수억에 이를 것입니다. 이 장소를 두고도 이후 분쟁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시 백영희 목사님의 권유인지, 백 태영 목사님의 주도인지는 모르지만 서울지방교회의 소속 교회들이 연합 집회 형식으로 매회 수일간 집회를 하였습니다. 강사는 아무래도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잠실동교회라서 백 태영 목사님 혼자였고 당시는 백 태영 목사님은 추앙을 받던 시절이라 은혜도 있었습니다. 내가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후 하던 고시공부를 주일에 시험보는 데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냐를 설교 후에 북한산의 바위산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겨 중단하자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으니까요. 당시는 백 태영 목사님이라면 백영희 목사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그 분의 백발과 빛나는 눈매만 봐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정도였니까요.
이 집회의 참석 교회는 잠실동교회, 청량리교회, 동문교회 등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청량리 교회 소속이었습니다. 이 집회는 계속되지 않고 일시적이었으으며 대략 1-2년 계속되고 종료되지 않았나 기억됩니다.
당시 백 태영 목사님은 교인이 돈이 없으면 가짜 반지라도 사서 좀 끼고다니라고 웃으면서 하는 말이 지금도 잊혀지 않고 기억납니다. 우리 총공회 교인들이 좀 꾀죄죄하게 다니지말라는 의미를 그렇게 표햔한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습니다. 백 태영 목사님은 이 외에도 당시 공회의 설교 스타일과는 어울리지않는 말을 한 적이 수회나 있는데 나의 기억으로는 "우리 공회는 세상적으로 좀 유명한 사람이 드물다"거나 "교회 내에서 남녀 반사를 분리하여 접촉이 없으니 막상 결혼할 적에는 타진영 교회 신자와 결혼을 해버리는 사례가 있어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 등의 말을 한 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하는 대목입니다.
서울 북한산 집회에 대해서는 서울지방교회 소속 교회들 예컨대 청량리 교회. 동문교회 등에게 문의하면 당시 그 집회에 대한 비용지출 관계 등을 추적하여 충분히 알수 있을 것이고 그 집회에 당시 서울 교인들이 상당히 많은 수가 참석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이후에라도 정확히 아는 것이 있으면 여기에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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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지방교회 소속 교회들 집회는 물론 거창여름집회나 대구봄집회 외에 추가로 치뤄졌고 집회는 아마 가을철에 열린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이 집회 개최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것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긍정적인 분위기 였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당시 저의 개인적 감정으로는 거창집회나 대구집회에 수많은 공회 소속 교회들이 모여서 하는 집회에 익숙한 터라 서울지방교회들만 모여서 한 것이 좀 새로와 보였고 또 장소가 일반기도원이라서 좀 색다르게 보였습니다. 이를 테면 당시 임마누엘기도원의 강대상 뒤의 벽면에는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말라" 등의 표어를 크게 하여 붙혀 놓았는데, 거창이나 대구 집회 장소처럼 무슨 표어 같은 것도 하나도 없이 힌 천으로 강대상 뒤에 친 것만 보다가 이걸 접하니 좀 익숙하지 아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황성옛터에는 월색만 고요하고...... (백태영목사님 소개-관)
당시 그때만 해도 백 태영 목사님은 백 영희 목사님 다음으로 권위가 있었고 설교도 상당히 잘한편이어서 은혜도 많은 교인들이 받았읍니다. 다만 영안이 밝은 분들이나 설교를 평가적으로 듣는 사람들은 그때에도 벌써 아 이 설교는 좀 어딘지 다른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잠실동교회에서는 백 태영 목사님이라면 거의 절대 신임을 받았읍니다. 사실 저도 설교를 평가하고 가려내고 비판하는 능력은 누구 못지 않해서 잠실동교회 예배를 참석할때나 백 태영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볼 때에도 좀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있었고 어느정도는 장래 예측을 전혀 못한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다른 이들 처럼 백 태영 목사님에 대해서 그리 존경심을 가지지는 못햇습니다.
어쨋든 태영 목사님은 잘 생긴 안면에, 엄위한 쉰 목소리, 백발, 빛나는 눈 등의 풍채로 인해 이것만 가지고도 또 무엇보다도 백 영희 목사님의 후광을 입어 많은 교인들이 추종하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순종하던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저만 아는 것은 아니지요. 노공동 집회 장소의 강대상 바로 옆에 태영 목사님의 거소(방)가 있었는데 대구 집회에 가면 태영 목사님의 얼굴 모습만 봐도 좋았습니다. 일부러 가까이 가서 스스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 감정을 갖기도 했지요.
이젠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태영 목사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그 당시 그 팔팔하시던 엄위하시던 카리스마적 모습이 여전하신지, 아니면 뒷골목에 할일 없어 서성이는 나이많은 늙은이의 모습인지, 서산에 지는 해에 스러져가는 황혼의 자태인지. 흐르는 세류속에 함께 흘러갔는지. 듣기로는 잠실동교회 주위의 석촌호수길에서 엣날 교인들이 만나도 인사조차도 하지 않고 못본채 하는 교인도 있다고 하니, 나 역시 지금 태영 목사님을 어디서 만난다면 일부러 다가가서 인사를 드릴 용기가 날까. 그저 서로 모른채하고 지나쳐 가는 것이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슬픈 일이겠지요.
다 이젠 황성옛터가 된 것 같아요. 그 옛날 전성기의 잠실동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부산에서 우리 공회의 대표 교회라면 서부교회라면 서울에서는 잠실동교회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의 잠실동교회는 요새 이 교회의 간판을 보면 요행히도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분당의 샘물교회의 로고체와 비슷하데요.
아 흘러간 추억이여, 추야의 월색이 고요한 황성옛터에는 방초만 푸르르고, 폐허에 서린 회포를 그 누구를 찾아서 풀랴.
필기는 태영 목사님의 설교는 백 영희 목사님의 설교만큼 비중을 차지 하지 않고 있어서 필기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공회 교인들의 관행상 필기는 상당히 했을 것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그러지 정확힌 집회 날짜는 알아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고 이 홈을 찾는 분들중에서도 당시 참석자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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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