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숙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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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숙

내용 말씀과 진실의 종

1.세상생활과 초기신앙


①생애


1919.1.8. 현재 85세,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서 출생


(2004.5.13.11:57 사망)


②가정


부친은 일제 때 수원에서 택시 12대로 운수업을 하는 손꼽는 조선인 사업가였고, 모친은 전형적으로 조용한 성품이며 두 부부사이의 무남독녀 외딸로 성장. 부요한 가정에 모친의 정성이 지극하여 당시로서는 최상의 가정 조건. 밥을 하고 청소를 하는 가사생활도 직접 해 볼 기회가 없어 본인은 평생 부자집에서 곱게 자란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장애 중의 하나라고 회고. 모친( - 1972.7.26.)이 73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서부교회 본당 옆 3층 작은 방 하나에서 교회 직원으로 살고 있는 54세 된 딸을 따라 서부교인으로 신앙생활은 하였으나 식사는 계속 챙기는 정도


아들부부 : 김병욱 최명숙. 손주: 김성룡, 김성숙




③신앙


처녀 때 부친의 친구 소개로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 직원으로 출근하며 서울 생활을 시작. 부모를 떠나 서울에서 살면서 승동교회를 출석하게 되면서 비로소 신앙생활 시작, 찬양대 등 신앙생활에 본격적으로 활동



④결혼


남편과 성격이 맞지 않아 일찍 헤어져 평생 교회 생활로 혼자 살았다고 해야 할 정도. 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육의 자녀를 친 자녀로 돌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평생을 이 복음에 충성. 아들 김병옥은 1946.3.26.생으로 1961년 경남중학교 졸업, 1964년 서울사대부고 졸업하였으나 어머니로서 경제 지원을 할 수 없어 1965년 부산교육대 입학하고 평생 교사로 부산에서 근무하며 서부교회 출석




2.부산 피난 시절


①부산 피난


1950년 6.25전쟁으로 그의 모든 인생은 완전히 전환. 전쟁 이전 일반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믿음의 깊은 세계는 알지 못하고 서울 시내의 유명한 교회에서 주력 여청년이었던 정도, 그러나 전쟁이 다가올수록 알지 못하는 심령의 갈급함을 느껴 말 못할 고통을 느끼던 중, 전쟁이 돌발하고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며, 부산으로 피난.



②고려신학교 시절


피난지 부산에서 그는 서울의 넓은 신앙생활과는 아주 다른 고신교단의 경건한 신앙분위기를 접하게 되고, 고려고등성경학교와 칼빈신학을 졸업하며 고신의 핵심 교인으로 부상. 당시 고신의 유명한 여성도들인 박인순 조수옥 박복달 등과 신학교 기숙사에서 교류하며 진실되고 또 열심이며 타고난 총기로 우수한 학생으로 두각


이 시기 나권사님은 서울에서 그냥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만 하고 또 봉사하고 찬양대를 하는 등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알았다가 부산 피난지에서 접하게 된 고신의 순교 신앙을 통해, 신앙이라는 것은 생과 사를 걸고 옳고 바른 길을 따져야 하고, 교회를 진리로 바로 세우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등 많은 면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함.



③교계적 활동


당시 부산은 전국 피난민이 모여 전국의 축소판이면서, 교계적으로도 전국교회가 피난을 와서 부산 한 곳에 운집하였기 때문에 부산의 당시 지역적 의미는 전국 교계 범위. 전쟁의 참상이 현재 상황으로 계속되면서 교계적으로 의미 있는 두 젊은 지도자에 의하여 ‘전국순교자 유가족 협회’가 발족. 나권사님은 이 협회의 복잡했던 안살림을 책임지고 교계적 활동을 활발하게 펼침


당시 이 협회는 한국교계의 유일한 순교자 유가족 협회였고, 손양원목사님의 전기인 ‘사랑의 원자탄’으로 교계에 이름을 알려진 안용준목사님은 지명도가 있었고, 미국 유학 시절 친구였던 전영창선생님(거창고교 설립자)은 뛰어난 대미 교계 섭외력으로 장기려박사님을 데리고 이미 고신대학병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출발시키고 있었고 또 고신이 자랑하는 SFC를 창립했던 활동력으로 순교자 유가족 협회를 교계 단체로 활성화. 특히 전쟁 기간 부산은 미군의 전시 병참 보급기지였고 동시에 구호물품의 주 하역지였으므로 미군 당국과 직접 섭외가 가능했던 이 협회 지도부의 활동 범위는 최적의 조건을 확보하였으나, 많은 유가족들을 지원하면서 또한 연보 및 보급 물품을 관리하는 협회의 살림은 특별한 신앙과 양심, 그리고 회계실력을 겸비한 인물을 필요로 했고, 일제 때 이미 서울에서 화신백화점의 직원으로 회계와 물품 관리 등을 총기 넘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나권사님은 대단한 적임자로 평가 받게 됨.


이 때 나권사님의 실력과 양심과 신앙을 특별하게 보았던 전선생님은 후일 거창에서 주남선목사님의 큰 아들이 운영하던 거창고등학교를 넘겨받아 기독교 학교로 성장시키면서 학교 살림 전체를 총괄할 적임자로 생각하여 서부교회를 방문하여 백목사님에게 나권사님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목사님은 본인의 신앙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으므로 직접 대화하라 하였으며, 나권사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를 반복.




3.백목사님 신앙노선 출발


①백영희조사님 소식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또 순교자 유가족 협회의 살림을 살던 나권사님은 신학교 기숙사에서 고려파 유명한 선배와 동료들로부터 백영희조사님의 소식을 접함. 백조사님의 집회를 참석했던 사람들의 은혜 이야기로 전부들 이야기 꽃이 피었고 그 집회가 부근에 있을 때는 모두들 술렁대고 있었는데, 몇 번을 참석해 보았으나 왜들 그렇게 은혜롭다고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함.



②신앙의 대전환


그러나 차츰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게 되면서, 지금까지 믿었던 것은 완전히 인본이고 너무 신앙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느껴 신앙의 대 전환. 그때까지는 6.25전란에서 무사히 부산으로 피난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하는 신앙이었으나, 이제 교회를 두고 신앙박해를 피한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신앙실패라는 교훈을 듣지 못함. 나권사님에게 순교자들은 사선을 통과한 초인들이었고 자신은 그들의 유가족을 돕는 인간적이고 동정심 많은 교인일 뿐이었으나, 이제는 주를 위해 죽어야 하고, 주를 위해 매일 순간도 주저할 수 없이 말씀으로 자신을 고쳐가야 한다는 급박함을 느끼게 되자 영도제이교회에서 서부교회로 소속을 변경.


당시는 같은 고신 교단에 소속한 교회들이었고 서열상 이전 교회 담임목회자는 고신의 지도부였기 때문에 나권사님과 같은 핵심 교인들이 백조사님의 서부교회로 움직이게 되자 이후 백조사님에 대한 고신의 견제는 교단 차원에서 극단적으로 진행, 결국 1959년 제명에 이르게 되는데, 나권사님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




4.깨끗한 소망, 진리 깨달음에 특별했던 새 신앙


①진실의 신앙인


나권사님은 김현찬 김효순 권사님의 힘에 넘친 모습과는 완전 대조적인 외모를 가진 분. 깨끗한 천국 소망이 특별했으며 진리에 대한 사모가 특심. 백목사님의 설교가 교리와 주경 위주로 진행되는데 이를 내용적으로 파악하여 살피는 면에서는 단연 최고. 백목사님이 고려신학교를 다니시면서 전국 부흥회를 인도하느라고 강의 출석을 거의 못하였으나 고려신학교를 함께 다녔던 나권사님이 그 필기 정리를 도맡게 되었고 또 강의내용에 대한 백목사님의 여러 가지 평들을 적어 백목사님의 교훈 연구를 가장 가까이에서 수종.


특별히 회계능력, 깨끗한 중심, 칼날 같은 충성 등을 고려하여 마지막 백목사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서부교회의 십일조회계를 맡아 70세가 넘어서도 회계를 책임진 그에게 젊은층에서는 대형교회의 가장 큰 재정인 십일조 회계를 실수 없이 하겠느냐고 백목사님에게 회계담당을 교체 건의한 적이 있었으나, 백목사님은 '상고를 졸업한 은행직원들이 계산을 하면 끝 숫자를 딱딱 맞추어 보고는 잘 하겠지만, 그 장부 가운데 어느 돈이 어떻게 흩어졌는지를 모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바른 중심을 가진 사람이 회계를 보면 나이가 많아 숫자가 틀려지는 경우는 있어도 교회에 바쳐진 연보가 장부 착오로만 남게 되지 실제로는 틀림이 없게 된다.'고 설명하며 나권사님에게 십일조를 계속 맡도록 지시



②연단과 순종


거의 평생 서부교회 제일 핵심 살림을 도맡게 된 것은 이렇게 신앙과 양심 그리고 회계에 대한 실력을 고려 한 것이지만, 또 하나 그 배경되는 일은 백목사님이 초기 중심 교인들에게 극심한 육체 노동이 필요한 일들을 시켰는데 나권사님만은 건강문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


초기 서부교회 핵심 교인들이 사회생활을 고급으로 했거나 아니면 세상 생활 중에서 일반 교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보따리 장사를 시키고 계란이나 참기름을 짜서 팔러 다니는 힘든 장사를 시켜 연단. 유독 나권사님은 그 체격이 혼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약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시킬 수가 없었고 그래서 백목사님은 어느 부자집에 식모살이를 가도록 했는데, 식모를 하겠다고 찾아온 나권사님을 쳐다보던 집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냄. 그 소식을 들은 백목사님은 웃으면서 '중심이 바르고 결심을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니 교회 안에 사무를 보라'고 하셨고 그 이후 백목사님의 여러 종류 원본 노트 정리와 회계를 맡아오게 된 것. 이런 일을 통해 백목사님께 교훈면을 문의할 수 있고 또 여러 개인사를 지도 받으며 신앙이 급성장



③교훈 요약에 특별


나권사님은 백목사님이 마지막 설교하던 1989년, 자신도 이미 70세를 넘고 있었지만 매번 설교가 끝나는 즉시 그날 설교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단 몇 마디로 다시 요약 정리. 보통 백목사님의 설교는 목회자들도 녹음 타자된 원고를 수 차례 정독하지 않고는 그 깊은 내면에 묻어둔 깊은 교훈들을 파악하기 어려운 수준이나, 예배 즉시 구역식구들에게 바로 그날 예배 설교를 요약해 내는 실력은 나권사님 이상이 없었을 것


따라서 맡은 식구들을 대할 때 주로 간단한 말씀 요약들을 통해 진리로 교인을 가르친 구역장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 면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고 평가




5.나권사님의 신앙성향과 구역식구들


백목사님은 구역장들을 구역 식구들에게 목회자 위치를 갖도록 하였으므로, 서부교회는 구역장의 신앙성향과 구역식구들의 신앙성향이 거의 일치. 나권사님 구역은 구역장인 나권사님이 진리에 철저하고 그 신앙중심이 깨끗하였기 때문에 그 식구들도 그런 경향이 뚜렷. 대표적인 경우가 홍순철목사님. 나권사님이 전도하고 백목사님이 길렀던 목회자. 3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백목사님의 소원을 순종으로 다 옮겨놓았던 정도. 만일 계속 생존했더라면 백목사님 후임을 맡았을 인물.


대표적인 여반 구역식구로는 지금도 서부교회 내에서 가장 백목사님 생전 노선을 정확하게 잇고 있는 부산공회(1)에 소속한 조순자집사님. 현재는 백명희사모님의 지도 하에 있으나 그 본래 구역은 나권사님 소속으로 최측근 구역식구였으며 나권사님 후임으로 지명된 분이었으나, 1991년 서목사님이 부임하자 신앙노선 문제로 백명희사모님 소속의 중심역할. 또한 부산공회(3) 소속 목회자들 대부분과 이곳 홈 관련 직원들의 대다수도 나권사님 구역 소속. 따라서 현재 백목사님 사후 부산공회 내의 가장 보수측에 속하는 부산공회(1)과 부산공회(3)은 백목사님 생전 구역별로 분류한다면, 나권사님 구역 소속이 단연 최고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김효순권사님이 정치에 능한 분이면서 공회 내에서는 고신측 신앙경향을 보이는 면이 있어 그 구역 출신들이 대부분 공회 노선 문제를 두고 같은 경향을 보이는 것과 가장 대조



백목사님 생전 각 구역별 특성을 잠깐 참고한다면, 세상적으로 실력있고 경제력과 큰 인물들은 주로 김현찬권사님 구역이었는데 백목사님 사후 그 소속 주력 교인들은 대구공회 측으로 나갔고, 백목사님 생전 김효순권사님 구역은 가장 정치적이었는데 목사님 사후 그 구역은 교권투쟁에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내는 부산공회(2)에 주력이 존재. 이말출권사님 구역은 특별한 색채가 없었고 현재도 그 구역 소속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나권사님 구역은 목사님 생전부터 구역의 숫자나 역량은 4권사님 중에 가장 미약했으나 말씀과 충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 구역 소속은 현재 총공회 내 가장 보수측이고 강경한 부산공회 (1)과 (3)에 주력이 존재.


참고로, 추순덕집사님 구역의 경우는, 나권사님 구역이 갖춘 장점에 실력까지도 함께 갖추었지만, 목사님보다 7년이나 앞서 1983년에 사망하고 그 이후 구역이 흩어졌기 때문에 위의 구역들과는 단순하게 비교하기 곤란.


특히 1982년 백목사님 생전에 출발된 목회연구소에서도 자료관리, 설교록 교정, 교리 교훈 연구 등 연구소 핵심분야 직원들은 거의 나권사님 구역교인들이었던 것은, 비록 구역장은 일반 관리만 맡고 그 직원들이 전부 백목사님께 직접 배우고 자란 이들이지만, 그 구역장인 나권사님의 신앙특성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구역장의 충성은 명목 이상이라고 평가 가능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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