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수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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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수

내용 1960년대 목회 준비하던 청년들의 형편 중 하나

강행수목사님


(자료: 008.6.5.) 


일시: 1996.10.12: 15:00-18:00

장소: 목회연구소 2층


1.신상


이름: 康行秀

생년: 33.8.12.(음)


본적: 제주도 성산읍 수산 1리 383번지,


부인: 이숙희집사님


자녀 중 백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어린 주일학생으로 많이 언급한 것은


강영숙, 1968년 출생. 동대 정외과,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과 졸업하고 현재 교사


2.성장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가정이었으며, 성산 서국의 수산초등학교 졸업. 제주 4.3.사태를 뚜렷하게 기억. 동네 청년사람들을 공비들이 와서 죽이고 약탈, 철장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많았고, 또 폭도가 되었다 살아난 사람도 있었으나 그 마을에 살지도 못하고 타처로 감.


3.군생활


1954.12.19. 제주도 제1훈련소 군번 9843451으로 입대. 안덕초등학교 제주 보충대에서 2-3일 있다가 제일훈련소로 입소했고, 교육이 96일이었으나 그 날 교육이 중간에 정지되면 그날 것은 무효처리. 54.12.19. 입대 했으나 55.5.18일 훈련 수료. 보충대로 와서 LST를 타고 맹호부대인 수도사단 보충대로 전입. 사단의장대에 뽑혀 3년 고생했으나, 의장대에서 장기를 지원. 수도사단 하사관교육대로 가서 2-3년 근무하다가 5군단 하사관학교 기간요원으로 계속. 구대 선임하사.


4.환란

1962.10. 부산 병기사령부 중사로서 안전하사관으로 발령. 본부중대 근무. 1954년 12월 결혼했으나 8일만에 부인이 병사. 그곳에서 갑자기 폐결핵 검사를 했는데 이상 발견. 마산 36병원으로 후송되어 가는 날 밤 마지막으로 막걸리를 실컷 먹고 다시는 안 먹는다고 결심. 술이 독약이라는 말을듣고, 인생으로는 이제 죽는 길이니 술을 끊겠다는 생각. 담배는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음. 이때 상사.


마산 병원에서 며칠 입원을 하고 있는데 5군단 소속 젊은 하사가 입원을 하게 되면서 교회를 권유. 그래서 군교회를 갔다왔고, 또 그가 인생 반성을 하자 따라갔다가, 동산이나 어디나 가면 인생이 불쌍하다 해서 눈물. 참 하나님을 알려 달라고 기도. 참 신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거나 고귀한 귀신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진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기도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병실로 전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기독교가 진짜인가 의심을 하고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면 전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없었음. 그래서 기독교가 진짜인가? 라는 생각을 가졌음.


5.신앙출발


당시 육군 소위가 환자로서 군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신출 교인인데 그의 증거에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고 ‘아, 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와 있구나’ 느낌. 그때부터 실제로 믿게 됨. 그다음부터 교회를 출석, 그 근처 부근 교회 부흥회를 갔는데 방언들이 있었으나 자기만 하지 못해서 다음에는 다른 교회로 다니고 했었는데, 그렇게 다니는 것을 소위가 붙들고 병원에서 할 일을 합시다고 권유를 해서 붙잡혀 3일 금식기도하고 거기서 일을 했는데 하다보니 부흥회를 안간 만큼 마음에 십자가도 나타나고 그만한 은혜가 있어서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었음.


한편 부대 교회에 스웨덴 선교사가 외국인(오성만선교사인듯) 우리말로 설교를 하면서 앞으로 목회자 될 사람 나오시오 라고 했었고 나는 듣지 못했으나 5-6여명이 앞으로 나가서 기도를 받고 있기에 나는 왜 못가냐는 마음으로 나갔고 기도를 받고 나니까 방언. 나만 그곳에서 방언이 터짐. 그래서 아, 방언집회를 안가도 대신 해주는구나 라고 느낌. 그때 부대 안에서도 방언하는 사람이 하나씩 있었음. 그런데 그때부터 뒤에 앉은 사람이 수군거리기를 저 사람은 교역자할 사람이라 해서 부끄러움. 원대복귀를 기도 했고 1966. 6. 중순 부산 원대 복귀하고 이제 군인 교회 가서 방언을 보임. 일반 사병들이 어찌된 일입니까 라고 묻길래 너희들이 날 위해서 기도해서 그래 됐다고 했는데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함.


6.제일 좋은 교회 찾기


복귀 후 첫 주에는 군인 교회에서 예배. 그러나 병원에서는 부산으로 돌아가면 이 나라에서 제일 좋은 교회로 인도해서 말씀을 제일 잘 가르치는 교회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었는데, 병기부대 군교회가 제일인가 했으나 별로였음. 한 주간 예배 보고 나니까 군인교회가 강상사 때문에 부흥과 큰 기대를 갖는다고 말했는데, 사병들이 하나씩 나하고 민간교회 가보겠습니까 하면서 교회를 권유했는데 교회 이름을 들어보니 시시. 또 다른 사람 하나가 우리 교회는 고신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말하는 그 사람이 좀 부끄럽게 말을 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곳인갑다 라고 생각. 한번은 여군 김하사가 부용성결교회도 권하고, 마지막에 권한 것은 음악을 잘하고 점잖고 거무틱틱하고 지긋한 나이에 있는 사람이 ‘인사계님 나하고 갈랍니까’ 권유를 해서 따라 갔는데 서면쪽이었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아님. 서면부전교회였는데 가보니까 찬양대고 모든 것이 웅장. 그러나 설교가 웅웅 거리기만 하지 들리지를 않았음. 하나님이 보내는 교회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음.


이때 누가 권하는데, 어느 교파냐 물으니까, ‘상관있습니까? 장로교면 안됩니까? 오후 2시에 예배를 봅니다. 가볼랍니까?’ 이상했다. 오후 2시에 예배 보는 데가 있다는 말에 솔깃했고 마음이 끌렸으며, 권하는 사람이 ‘밥을 굶어야합니다.’ 주일에 사먹을 수 없는 신앙이었기 때문. 이응부라는 사람. 교회 옆은 전도관이었고 박수를 치고 난리, ‘이일병, 저 교회가 열심있고 좋네’ ‘이단입니다’ ‘이단이 뭐고’ ‘안 좋은 겁니다.’ 지금 물 먹는 곳 뒤쪽이 문이었으므로 삥 돌아 들어가야 했는데 옆으로 미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니까 우리 부대 군인 3-4명이 보였음. 내 집에 온 기분이었고 순간적으로 마음에 인도의 섭리가 보인 듯. 찬양대 지휘부장 김대웅이라는 사람이 거기 있었는데, 우리 부대에서 3년 전 미리 제대한 사람 행정사병. 나 없는 데서 우리 부대 강상사 저 자식 기합대장 왔다고 구슬렁거린다는 말. 그래도 재미있게 들렸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청년방에 들어가니까 배수윤목사님에게 소개, 인사. 식사 하기 전에 나는 이응부일병에게 점심을 안 먹고 들어갈 수 있나 해서, 도나츠를 밖에서 실컷 사 먹고 배불리 들어왔는데, 배목사님이 식사를 하라고 권하는데, 우리는 사 먹고 왔습니다 하니까, 주일날 사 먹으면 안된다고 가르쳤음. 그래서 ‘아, 이곳이 좋은 곳이다. 가르치는 곳이다. 한 발자국 한발자국 죄를 가르친다.’ 생각이 들었음. ‘옳습니다. 주일날 사 먹으면 안됩니다. 그렇지요, 능히 주님이 먹일 것을 인간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7.백목사님 대면과 서부교회 청년들


식사를 먹고 들어왔으니 우리는 먹지 않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백목사님에게 인사를 갑시다.’ 하면서 저 안쪽 목사님 방으로 인도. 나를 만나는 목사님은 나를 힘있게 손을 잡아 줄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아주 손을 살짝 잡고 ‘감사합니다. 예, 예’ 하는데 어찌 감탄이 되는지 속으로 ‘주여 주여’ 소리가 나옴. 좀 더 말씀을 듣고 싶은데 소개하던 배목사님이 목사님 설교 해야 되니 피곤하니까 나가자 하고 데려 나옴.


오후예배를 하는데 아가서 4장 설교였고, 레바논에서 나와 함께 하고 나와 함께 가자, 꼭대기에서 하자는 설교. 그때 다른 교회에서는 노트를 한다는데 1주일 필기해야 2페이지도 안되는데 백목사님 설교는 좋아서 다 받아 적고 싶어 적다 보니까 한 예배에 한 10여페이지는 적었을 것. 배수윤목사님이 우리 군인 친구를 소개해준다며 점심 먹을 때 홍순철일병을 아느냐고 묻는데 당시는 몰랐으나 내일 부대 가면 알 수 있다고 했음. 어쨌든 배목사님께는 부대로 복귀하면 본대 인사계니까 새벽기도까지 나가도록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예배 마치고 나서 안경을 낀 홍일병을 만남. 그때 홍일병은 대기병으로 있다가 행정처 인사과 사병계로 대기 발령이 나있었음. 그때 막 하루 정도 차이로 배치됨. 그대부터 홍일병은 무조건 교회를 자유로 나가라고 해서 새벽기도부터 다 내보냄. 밤예배 주일예배는 100% 내보내면서 위병소에다가 누가 뭐라 해도 통과시켜서 보내라고 명령. 원체 자유스워서 별명이 통뼈였음. 사령관이 비상을 걸어도 인사계하고 홍일병은 교회 가는데 자유. 본부 사령이 악질인데 자기가 오히려 살살 피하면서 교회를 가게 해 주었고, 제대할 때는 고생많았다고 오히려 인사.


당시 그 부대에 정풍섭(훗날 목사된 후 파직)이 병장, 염춘명은 일병. 그렇지만 온 부대를 다 뒤져도 사병 중에 신자는 홍일병으로만 인정을 하는 정도. 교회 출석도 정풍섭이 조금 먼저 나왔는데 대기병으로 있던 홍순철일병이 전도. 그때 조기는 금옥돔이었는데, 교회에서 굴비로 구워서 군인들을 대접 했고, 고정적으로 7-8명씩 출석. 그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보급창으로 통합, 이후 보급창담당.


예배시간만 되면 홍순철일병이 심방. 충성스럽게 오는 이유는 내가 혹 안 갈까봐. 한번 시험이 들 뻔 한 적. 백목사님 말씀이 좋아서 늘 듣다 보니 ‘너무 말씀으로만 치우친것 아닌가’해서 박수호병장이라는 사람의 말을 들었음. 다른 교회에서 제법 잘 믿는 사람인데 홍일병이 서부교회로 데리고 왔었는데 한번은 나하고 박병장하고 둘만 가게 될 때, 내가 그에게 ‘우리 교회는 말씀으로만 너무 치우친 것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그 말을 한 뒤 그는 서부교회를 그만 다님. 나도 치우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일에는 교회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홍일병이 또 데리러 옴. ‘갑시다’ 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따라오면서 시험이 없어짐. 그 뒤로는 시험이 없었음. 치우침이 어디있는가, 말씀은 쌓일수록 좋은 것이 말씀이지, 이런 생각이 들고 내가 박병장을 죽였구나 생각이 들어 회개. 다시는 시험 없음.


한번은 새벽기도를 보고 있는데, 홍일병이 ‘강상사님, 오늘 염춘명상병이 월남 가는데 꼭 찾아 가보십시오.’ 홍병장이었다. 주일 염려가 없는가 물으니까 자기 염려는 말라고 손을 흔듦. 내 생각에 저것이 교만이다 지나친 것 같다 라고 생각. 내 속으로 ‘자기는 무제한 자유인가? 위험한데 겸손해야지, 내가 염려하는데 염려를 말라고 하는가? 오히려 염춘명한테 가라고 나한테 말을 해?’ 그러나, 그는 염춘명이 월남 가기 전이라서 주일을 못나올까 했는데, 그때 교회를 가지 못했고 월남 행.


염춘명은 마른 체형에 조금 못자란 듯 보였고 정재성(목사님) 다음으로 교회 사찰. 당시 서부교회 예배당을 새로 지어 아직 미완성되었을 때 공백기간이었는데 염춘명으로 예배당 관리, 사찰. 어항에 물고기 넣어 팔러 나기기도 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않았고 어려웠으나 말은 지나쳤음.


백목사님이 서부교회 일곱 미치광이라고 할 때, 정연한 이재명 정풍섭 강행수 염춘명 정재성 안호일 윤홍. 그 중에서 이재명 안호일 정재성 윤홍은 남해 출신


한번은 동대신동에서 방언을 하고 있는데 무당들이 방언 때문에 귀신이 안 온다고 난리, 방언을 그치면 귀신이 살짝 나오니까 옆에 사람들이 저 무당들 가짜라고 했었는데, 백목사님이 방언을 하느냐고 묻길래 아닙니다 그게 무슨 방언입니까 라고 말함.


홍일병 주특기가 인사행정 700이었고, 그때 백목사님 설교는 일등교인이 되라는 설교가 많았음. 교리적인 설교가 많았고 교역자 회의 때 세밀. 제대하기 전에 상사로 교역자회를 참석. 홍일병도 교역자회 참석. 홍일병이 교역자회 참석하러 간다고 해서 ‘나도 가면 안돼’ 했는데, ‘갑시다.’ 해서 같이 참석. 고참들이 투덜거렸으나 잘 봐 줘라 해서 넘김.


나는 병원에 가기 전과 간 후가 완전히 달라졌음. 가기 전에는 불신자였고 악질 강상사였고 갔다 와서는 사과하고 회개하고 바로 살았음. 소용없는 기합도 없애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사람이 됐다고 난리. 전방에서는 구타를 많이 했고 후방에서는 주로 기합. 김대홍찬양대장이 무슨 기합을 받았길래 내 뒤에서 나를 그렇게 욕을 했을까? 그는 뚱뚱해서 털렁털렁 못 뛰면 뒤에 가서 고함지르고 엉덩이 걷어차고 했는데, 그래도 기합을 줘도 피동이 되지 않고 능글능글했는데 김대용이 때문에 후방 기합이 장난으로 바뀜


8.서부교회 사찰


제대하고 서부교회 교인으로 출발. 처음 올 때는 수위가 없었고 사찰방이 있었고, 옛 건물에는 정재성, 염춘명 거주. 1970년 예배당지어 완성될 무렵, 염춘명은 새끼다 바치고 세멘트 물이 흐를 때, 아직 공사 중일 때, 예배당 아래층 정문 쪽 끝부분 사찰방으로 이사, 1980년까지 있던 자리에서 생활. 현 사찰 자리에서 솜 공장 사건 나기 직전 수위실이 생겼고 수위가 되고 곧 이어 솜공장 사건. 대문 지키는 수위로는 첫 사람이었고, 딸을 낳고 42세부터는 수위실에서 밤낮 생활. 목사님은 밤 10시 이후는 누구도 예배당에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 한번은 너무 피곤한데 밤 11시가 좀 지났고 30분이나 지난 상태에서 누가 노크를 하는데 목사님 명령 때문에 열어주지 않고 누었음. 서영호목사님이 교역자회로 왔다가 예배당 안에 자고 있다가 밖에 좀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참이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30분을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음. 다시 보니 서영호목사님이어서 열어드림.


백목사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충성하려고 스스로 부부관계 단절. 부부사찰로 있다가 1976년 남권찰로 등용. 수위실에서 도적질하는 아이들, 예배당 물건 훔치는 아이들을 잡아서 지하실에서 살살 이야기 해보면 동네방네 훔친 것을 다 불게 해서 어떤 중학생은 42번 도적질한 것을 밝히고 학교 교목이나 훈육과에 연락해서 처리했고, 또 성경 훔치는 이성옥구역 학생을 잡아서 학교 훈육에게 연락해서 반성문을 쓰도록 하고 확인 처리를 했었는데, 백목사님이 좋아해서 수위였는데 다음날 아침 광고에 남권찰로 임명.


초기 남반 권찰로 이동근 배수윤 서천석 이덕성 강행수 5명. 그전에는 이동근 배수윤 김용호집사님이 하다가 그는 원양배로 나감. 김용호집사님은 김수복목사님 동서로서 부인이 박정자집사님이며 목사님이 일찍부터 교역자로 등용하려 했음.


(2부 계속)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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