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순덕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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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순덕

내용 백목사님이 가장 아낀 최 측근 교인 (3.15. 내용 보충)

일시: 1994. 12. 19. 10:00

대화: 추은덕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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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관련 인물


추교경: 거창 동산교회 목사님으로 1970년대 임종

추순덕: 서부교회 구역장으로 백목사님의 최측근 교인


추은덕: 사직동교회 장로님으로 송목사님 탈퇴건 때 교회를 공회로 유지


1.일제 점령기, 조부 때에 온 가족이 거창에서 만주로 이주


조부 추윤엽(允燁, 경남 거창군 거창읍 동동 943번지, 조모 이연이)은 거창에서 평범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 기골이 장대하였고, 그 자녀들도 기골이 굵직하다고 평을 들을 정도. 주남선목사님을 따라 거창교회를 설립한 교인으로, 일제 때 일본인들과 반목으로 간도지방으로 갔다가 만주 길림성 동풍현 사평가에 거주. 한족들 밭에 친구가 파를 뽑았다는 말 때문에 시비가 있었는데, 친구 대신 무고를 주장하며 가내에 무장 수비대를 두고 있던 지주와 언쟁하다가 사살됨. 그 동생 추명엽은 독립군으로 항일투쟁 중 일군에 사살되었고 현재 조선독립군으로 확인 인정되어 중국 정부에서 관리되고 있음


자녀로는 5남매가 있었고 추교경목사님이 장남이고 합동측 목사님으로 있었던 추국원목사님이 막내이며 지금도 자녀 중 외순과 일순은 중국에 거주. 만주에서 모든 가족이 신앙생활을 했으며 추교경은 독학으로 한학.


2.해방 후 부친 추교경의 귀국


1906-7년생으로 일제하 식민지 배급제도에서 길림성 해룡현 산성진에서 해동상점(잡화상)과 양복점도 했기 때문에 정부 판매 대행기관으로 지정받아 경제 형편 좋았고, 산성진 교회 (담임: 김석찬목사님)에서 추교경은 회계집사. 따라서 해방 후에도 만주에서 그대로 거주했으나 1946년 10월초 공산정권에서 기독교 탄압을 시작하면서 부친은 자본가로 분류가 되어 생명 부지를 위해 귀국.


3월말 만주에서 출발하여 중국 통화, 북한 만포진, 평양, 사리원, 신막(조포나루) 토성, 개성을 통하여 귀향. 1946년 7월 거창을 들어가는 길목에서 경남과 경북의 경계가 되는 우두렁재에 호열자 전염을 막기 위해 통행금지. 다음날 달구지로 거창에 들어올 수 있었고, 웅양에서 조일(朝日) 일제 자동차로 거창 안착


3.부친 추교경의 목회


귀향한 추교경은 5촌이 있던 송정리로 갔고, 만주에서 가지고 나온 돈으로 트럭을 구입 대구로 나무장사. 사업에는 실패. 추순덕집사님은 거창읍사무소, 또 동생 추점덕사모님은 삼화서점 직원. 1948년 주남선 목사님 부탁으로 거창읍교회 조사님으로 고려신학을 시작. 사택이 교회 내에 있었는데 1950년 전쟁 나던 해 마리면 진산교회를 시무하게 되었고, 전시에 인민군에게 붙들려 안의 지서에 주남선목사님과 같이 구금 사선을 겨우 넘김.


1951년 초, 함양 수동면 사근교회(고신 졸업), 그후 합천군 초계면 초계교회, 충북 영동군 황간교회, 1958년에는 경북 경산군 자인읍 자인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는데 당시 추교경의 모친과 부인이 사망. 1964년에는 당뇨병과 정신착란이 일시 오게 되어, 입원 두달에 몇 년간 고생하던 중, 계속해서 백목사님을 찾음. 백목사님이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성동역 건너편 집으로 신도범목사님(청량리교회)과 함께 방문하고 예배. 빨리 쾌유하고 목회자의 길을 나가야 한다는 권면. 동생 추국원목사님은 추교경목사님의 막내 동생으로, 중국서 중학을 졸업하고, 거창읍사무소 정식 직원이었으며,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유복한 가운데 생활,


추교경목사님은 그후 병이 쾌유되자 백목사님은 이순엽씨와 재혼토록 하여 청량리교회에서 주례하고, 다음날 월천 창북교회로 파송. 고제 개명교회를 거쳐 양혜원교회로 부임하였다가 임종. 1970년대 중반 사망.


자녀로는 장녀 추순덕(1929년), 점덕(1931년) 은덕(1933년) 은석(1935) 은창(1946) 은도(1949)


4.추순덕집사님 (1929-1983)


1929년생으로 만주에서 출생하였고, 봉천에서 제4여자중학교(4년제)를 1944년에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여, 1945년 해방 직후 산성진 강대방둔(姜大芳芚) 황도(橫道)보통학교에서 9월 학기부터 교사. 당시 17세. 부친을 따라 귀향하여 1946년에 거창읍사무소 직원.


백목사님 봉산집회에 당시 거창에 있던 교인들과 학생들도 참석하였고 21세에 여전도사로 함양군 휴천면 휴천교회를 개척하고 담임교역자로 시작. 휴천면의 정면장 집을 전도하고 그 집에서 시작하였으며 고려신학에 입학. 이후 고령읍교회 목회 전도사로 부임하였으며 박장관집사님의 부인 윤정숙집사님이 그때 교인으로 서부교회까지 함께 함.


고령교회에서 동성로 이인재목사님 교회 전도부인으로 부임. 이인재목사님이 백목사님을 반대하게 되자 우장로님과 함께 이인재목사님을 반대하였고 이후 서부교회 교인으로 새 출발(註 1965년). 고려신학교 3학년 하다가 백목사님과 고신의 갈등으로 졸업 포기. 서부교회 생활,


서부교회 구역장으로서 모든 면에서 가장 백목사님의 신임을 받았던 분이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깨끗하게 임종하였으며, 1982-1983년 백목사님 최악의 병환 시기에 사망. 서영준목사님이 서부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고 추집사님이 교인으로 생존했다면, 서부교회의 모습은 오늘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가 되었을 것. 서부교회에서 청년과 반사와 목회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구역장. 김병춘 배종일 장영목 목사님 등을 기른 분으로 평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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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기관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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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추영희 사모를 그리며-박수권 목사


먼저 무한하시고, 위대하신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 사랑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을 아버지의 자녀로 삼으사, 이 땅 나그네길에서도 함께


하시며 인도하셔서 은혜 안에 거하게 하셨다가 요단강 건너 본향,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하


나님나라에 이르도록 복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평생 건강하셨던 추영희 사모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 지금 하관예배에 임하여 조사


를 하려고 나와, 그저 우리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엄숙히 숙연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


다.


우연히 또는 어떤 특별한 섭리로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던 딸, 신앙의 동지, 추영희 사

모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저희 외가 거창 가천리 추씨문중으로 가까운 외가 인척이십니다. 저와 사모님과


의 만남은 변화 많고, 파란 많던 이 땅에 815해방과 더불어 1945년 만주에서 온가족이 귀국


하셔서 부친이신 추교경 목사님이 그 당시 전도사님으로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님 밑에 부교


역자로 동역 하실 때부터 소천 하시기까지 58년이나 됩니다.


저는 지금 충성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종과 동역하신 사모님의 삶

의 발자취를 기억 나는대로 되새겨보며 깊은 연민의 정과 사랑의 마음을 표하고자합니다.


사모님은 만주 길림성 동풍현에서 출생하시어 9세부터 시작한 새벽기도를 병석에 눕기까지


지속하신 굳센 의지의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유난히 지혜롭고 총명한 사모님은 찬송가 가사를 거의 다 외우셨고, 신약성경도 거의 다 외


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모님! 1949년 7월 29일 거창시찰 도제직회 주최 ‘지정성경 17장 암송대회’에서 우리 같

이 수상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열심과 집념이 당할 자 없지요.


그 후 부산지역 여전도연합회 암송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하셨지요.


일신여학교보육과 출신 탓일까 그 유연한 율동솜씨는 대단했습니다. 1949년 거창 지방 성탄


절에 30가지나 되는 율동순서를 혼자서 다 진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시무 하시는 교회의 성도들은 물론 각 가정의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다 기억하셨


고, 또 전화번호도 많이 외우셔서 목사님 목회에 보탬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70이 넘도록 차를 운행하심으로 내조하셨습니다.

거창신우회 월례회에서 평상시는 물론 그 아프신 중에도 내색 않고 율동솜씨를 보여 주시


며 우리에게 기쁨을 더하며 의연하셨습니다.


해운대 원로목사회 목사님 내외분들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할말을 잊고 있습니다.


먼저 해운대 오셔서 살기 좋다고 와서 같이들 살자고 하시더니 홀연히 먼저 부르심을 받으


시다니 웬일입니까?


토요일마다 목욕하던 일이며, 회식하던 생각이며, 일찍이 어려움을 당했던 우리를 위로하셨


는데 투병 중에도 목사님 염려하시며 두시간마다 넣으시는 안약을 챙기시던 사모님의 자리


를 어떻게 채우며 우리가 목사님을 어떻게 위로할까 가슴이 아픕니다.


차라리 아프시다고, 힘드시다고 얼굴을 찡그리시기라도 하셨더라면 같이 붙들고 울며 기도

라도 하였겠건만 너무나도 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전혀 내색 않고, 표


현 안 하신 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 아쉽게 하고, 섭섭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모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잘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신 한 평


생, 복음을 위하여 주의종 정 목사님을 그야말로 모범된 헌신적인 아내로, 열녀같이 내조하


신 52년의 세월, 그 상이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클줄 믿습니다.


사모님을 아는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사신 귀한, 훌륭한 사모님으로 기억되며 추

모될 것입니다. 사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정교회 목사님과 성도들 그리고 보좌우편에


서서 사모님의 영혼을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장차 우리들도 거기서 만날 것


을 믿는 소망이 있기에 이제 아쉬움과 눈물과 슬픔을 넘어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


리면서 조사를 마칩니다.




박수권 목사

·신흥교회 원로목사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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