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준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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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준

내용 백목사님의 유일한 후계 인물

*안내문


서목사님에 대한 소개는 백목사님 다음으로 많은 양이 필요할 인물입니다. 백목사님 전기 등을 먼저 끝내고 작업하겠으나 이곳 홈에서 몇 가지 관련 자료가 있어 우선 간단하게라도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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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면/총공회/내부문답/ '88번' 자료 (중간반 부장선생님에 대한 질문)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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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공회 인물 중, 신앙기준으로 말한다면 백목사님의 제1 제자입니다.


1.자녀로서가 아니고 제자로서, 백명희사모님은 백목사님의 현존 제자 중 제1의 제자입니다.


백목사님의 4남 3녀 중 마지막 자녀로 1954년 출생이시고, 1976년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셨으며, 그해 서영준목사님과 결혼하여 3남의 자녀를 가지셨으며 오늘까지 교회 직원 또는 목회자로서만 계속 생활하고 계십니다.


백목사님의 다른 자녀분들은 사회생활을 주로 하셨고 또 목회를 나오신 큰딸과 막내아들의 경우는 중년이나 장년에 목회를 시작하셨지만, 막내인 백사모님은 한번도 세상을 거치지 않으시고 백목사님 지도를 받는 직계 직원 또는 목회자로만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백목사님에 대한 면을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며 또 본인 스스로도 자녀이기 이전에 백목사님의 제자입니다. 현존하는 공회 내의 교역자와 교인을 전부 포함하여, 신앙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그분은 백목사님 제1의 제자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 서부교회 교인으로서 백사모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그분과 맞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곳은 일단 공회 신앙의 본류에서 벗어난 분으로 내심 단정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 분들은 먼 훗날이 불행스러울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그분과 달리 나가고 있는 것은 그분의 신앙지도에 맞서거나 그분 신앙보다 나은 다른 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곳이 주로 맡고 있는 임무가 다를 뿐입니다. 굳이 다른 면이 하나 있다면 현재 공회 내부 투쟁에 대한 방법론일 뿐입니다.


2.서목사님과 서부교회 중간반, 청주교회 목회, 광안동교회 개척 등을 수고한 분입니다.


부인 : 백명희사모님

첫째子: 서동진 구은애


둘째子: 서동신


세째子: 서동화


서목사님의 약력을 간단하게 소개드리면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학교 시절 불신가정에서 믿기 시작, 서울법대 졸업

1971년, 서울대학교 법대 행정학과 졸업


1876년, 총공회 초대 교학실장 및 양성원 사회과학교수 1987년 1학기까지 강의


1978년, 서부교회 중간반 초대부장으로 주일오전 출석 2천명까지 성장


한편으로는 1982년 11월에서 1983년 2월까지의 백목사님 중환 시기


일체의 설교와 행정을 담당했는데 이때가 서부교회 설립 후 제일 어려


운 시기였고 백목사님을 대신하여 이 고비를 수고하고 넘긴 공로는


백목사님이 그 마지막까지 특별히 강조했던 부분


1980년, 서부교회 임직(묘비기록)


1983년, 인사이동에 따라 청주교회로 이동, 1년 5개월 기간 중 예배당 건축


1985년, 4월 부산시 광안동에 사모님과 3아들만으로 평소부터 품어 오시던


개척교회 설립. 1년 5개월만에 100평 예배당과 새 사택으로 옮기고


1987년 돌아가실 때 출석 기준 장년반 170명, 중간반 30명, 주일학생 7백명


백명희사모님은 이런 서목사님의 수고와 사역에 있어, '사모님'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수고와 위치와 처신과 함께 그 목회 결과를 위해 노력한 동역의 공로가 함께 인정되는 분입니다. 서영준목사님은 백목사님께서 그 평생에 단 한번, 유일하게 서부교회 후임으로 발표를 했던 분입니다. 그 사모님의 신앙과 실력과 사모님 자리에서 서목사님께 힘이 되는 면을 고려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곳은, 1987년 서목사님 장례는 단순히 실력있는 어느 목회자 한분의 장례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서목사님은 백목사님 사후 총공회와 서부교회가 공회 신앙노선을 외부적으로까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장례식은 총공회와 서부교회가 함께 장례되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당시 장례 진행을 총괄했던 답변자는 이런 의미 때문에 서목사님 장례는 '총공회장'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백영익목사님이 교계 장례의 일반례를 들어 반대했고 백목사님은 답변자에게 이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도록 처리하라는 말씀이 있어 당시 서부교회장으로 했었습니다.


3.공회를 두고, 아직도 공회 신앙의 제일 깊은 중심에는 그분이 있음을 참고하셨으면


그동안 과정이 어찌 되었던 현재 소속 공회가 다르고 목회지나 주로 활동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들 그분과 접촉할 기회는 거의 없을 듯 합니다. 비록 백사모님을 백목사님 위치 정도에서 평가할 수는 없으나, 현존하고 있는 이 시대 인물 중에서 공회 신앙노선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백명희사모님이라는 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주목하셨으면 합니다.


특히 눈앞에 있는 교권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그분과 맞서지 않을 수 없는 서부교회 서목사님측 지도부와 그 주도 교인들께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과 진심을 가지고 권합니다. 백목사님께 받은 은혜면을 생각하나, 오늘 서부교회가 존재하게 된 내력을 보나, 백목사님의 서부교회에 대한 마지막 처리와 방향을 보나, 더구나 현존하는 이 공회 신앙의 중심 인물이라는 점을 보아서라도 서부교회 간판이 '총공회'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분은 서부교회 지도부와 주도 교인 전체에 의하여 비록 서부교회 담임목회자는 아니지만 담임목회자 차원에서 극진한 예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결정이나 입장 중에서 자신들의 신앙양심에 이해 되지 않는 것까지 무조건 따라 가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앉아서 그분에게 던지는 언사는 분명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분이 백목사님 노선에 가장 충실하다 하여 백목사님까지 욕을 하되 심지어 백목사님을 7계명 죄인으로 거론했던 권사님과 그 추종 지도부들은 지금이라도 공개 사죄하고 스스로 돌아서셨으면 합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냥 자신들을 좇고 있는 교인들까지 고라의 죄값을 받게 할 것을 신중히 생각할 때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서부교회 역사와 현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거의 대부분의 서부교인이라면, 어디에 소속을 했든지 그분과 맞서거나 그분에게 대하여 조심없는 언행을 하는 분이 있다면 고라쪽으로 가는 사람이지 모세쪽으로 가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곳의 주관이라고 생각하여 웃고 넘어갈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이곳은 공회 내 신앙노선 전반을 두고는 거의 그 평가가 잘못된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곳은 1990년 이후 오늘까지 백목사님의 그 소중한 가족들에게 누구보다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애매하게 당했는지 마땅히 당할 일이었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그 사모님과 반대 입장에 있는 분들에게 비록 자기 양심에 꼭 그분과 함께 갈 수 없다면 갈 수 없는 일이겠지만, 현재처럼 해 내려온 언행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하지 말아야 할 일임을 말씀드리는 이곳 입장이, 현재 그 사모님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측과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담대히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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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면/총공회/내부소식/'238번'자료(함병례집사님 장례식순 중 약력)


*함병례집사님은 서영준목사님의 모친입니다.


고인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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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5년 7월 26일, 전북 익산군에서 교육자인 아버지 함 경근 씨와 어머니 강씨 사이에 태어남


가족:

남편 서 병주 씨와의 사이에서 영준, 보석, 보광 삼형제를 낳고 그 아래서 손자 여섯을 얻음.


사람 관계:

성품이 부지런하고 포용력이 있어 따르는 사람이 많음


믿음 생활:

동생 금례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맏아들 영준을 교회로 인도할 때 공부 잘하는 영준에게 해가 된다고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나중에 둘째아들 보석도 형의 권유로 믿게 됨에 따라 차차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평생 굳건한 믿음으로 일관함. 사직동 교회가 여러 차례 나뉘는 환난 가운데 외줄기 신앙 노선을 한결같이 지켰으며, 말년에 악화된 목뼈의 병으로 고개를 숙인 채 들지 못하고 두 팔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형편에서도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아 성도의 귀한 본이 됨


유언:

자식과 손자들에게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권하고,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 충성하다 앞서 간 맏아들 서 영준 목사의 무덤 곁에 묻히기를 희망함.


임종:

2003년 2월 6일 오전 11시 40분, 폐렴으로 세란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기도 막힘 때문에 향년 78세로 별세함.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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