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완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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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완

내용 초기 목회자의 고난과 역경을 가장 많이 겪은 대표적인 분

(안내)


*백목사님 신앙노선에서 목회한 분들의 초기 고생과 어려움을 가장 많이 겪고 가장 장기간 수고한 분으로는 정재완목사님 이상이 없습니다. 목회 연륜으로는 백영침 이재순 백태영목사님 등과 비슷하지만 평생 개척교회와 시골교회로만 이동하였기 때문에 정목사님은 총공회 목회자의 고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신앙으로 끝까지 그 길을 걸었갔다고 하더라도 그 자녀분들은 부모의 신앙과 다른 자신들의 신앙과 수준에서 자라나온 평범한 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자녀 중 목사님 한 분과 사모님 한 분이 또 그 길을 자진해서 걷고 계신다는 것은, 다른 목회자들의 자녀가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 자녀들이 목회를 할 때는 그 부모의 목회가 경제적으로 또 세상 형편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면을 보았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료는 잠깐 앉은 자리에서 메모했던 것이므로 정확한 일자나 순서에 일부 착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 지적하시거나 정정할 부분을 알고 계시는 분들은 연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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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족 및 신앙 출발


1922. 7. 5. 하동군 출생으로, 하동군 고전면 고화리교회에서 신앙출발

가족은 사모님(1929.10.20.)과 26세에 결혼하였으며, 자녀로는 장남 정두용 손미자집사님 부부(남정교회), 장녀는 여헌영 정정자 목사님부부(안산교회), 이녀는 강순현 정정순집사님부부(남정교회), 이남은 신시동교회 정기용 유춘열목사님부부, 삼남 정인용 임민엽집사님부부(신시동교회)


정재완목사님 18세 때, 부친이 집을 지으면서 큰 나무를 베었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목신이 들어 모친이 죽게 되어 굿도 하고 점도 쳤지만 허사. 당시 부친 외가에서 일찍 믿어 전도사님이 있었고, 그 분이 기도만 하면 병이 나음. 그분이 너희도 예수를 믿어보라고 하였고 그분을 모셔다가 기도를 받아야 낫는다고 본인이 모시러 갔고, 금요일 밤에 모시고 기도하였고, 그분이 구렁이가 나간다고 하였으며 모친이 완치. 그다음 주일에 십오리를 걸어서 교회로 출석.


부친이 원래 한학을 했기 때문에 반대를 오래 했으나 결국 해방후 부산으로 이주를 하면서 모친이 먼저 믿고 이후 부친도 출석을 하게 되고 후에 장로 안수.


2.1948년: 부산 이주


(목수로 교인 생활)


1945년 해방 후 목공을 배워 가구를 했으며 주인이 가게를 판다해서 인수하여 시장에서 공장을 경영. 1947년 대홍수가 있었고 하동 골짝 전부가 바다가 될 만했으며 가을 추수에 나락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 선생 되는 분이 먼저 부산으로 갔고 함께 부산에서 살자는 편지가 왔기 때문에 1948년 부산으로 이주


길이 3m 60cm 되는 학교 칠판을 만드는 보수동에 있는 회사였고 일본에서 막 나왔던 최씨가 칠을 하고 본인은 목공. 일하러 가는 길에 아미동 화장막 바로 앞에 집을 얻게 되었고 교회는 밑 쪽에 있는 항서교회로 정하여 이사 가던 수요일에 첫 출석. 첫 출석하면서 교회 전도사로 계시던 이명달여전도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전도사님이 사는 곳을 확인한 뒤 앞뒤집이 술집 노름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지도하여 전도사님 집으로 이사.


집사로 피택 받고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첫주 셋째주일은 주일 때문에 일하지 못한다고 하자 회사에서 나가라고 함. 흑판 회사에서는 돈을 많이 받았으나 나와서는 집 짓는데 가서 문을 짜고 있다가 징용. 하루는 교회 분위기가 이상하였고 전도사님 집으로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알고 보니 총회파와 고신이 교파 분열. 함께 나가겠느냐고 전도사님이 물었고 대답하여 서부교회로 개척나오게 됨


(1949년: 서부교회 개척)


1949년 4월, 신사참배문제로 항서교회에서 서부교회로 개척하기로 출발한 교인은 이명달, 김장로님 부부, 정재완부부, 박남숙(박정자집사님 언니), 한동희 한종희 형제, 김용학 김분옥집사님부부, 정금출선생님, 그 외조모 되는 윤권찰님, 장렬 현목사님, 그 모친 고점순. 4월 10일 정식 개척예배를 드릴 때는 손양원목사님 동생 손이원목사님이 목회자로 부임하면서 부산으로 막 이사해 왔던 서영호 현 목사님 가정도 참석.


손이원목사님의 목회 조건은 무보수였고 생활비는 미국의 누님이 보내주었으며 개척 후 곧 이어 교회의 집사님들을 임명하게 되어 집사로서는 김용학 부부, 고점순, 박남숙, 정재완 등이 임명되고, 그 자리에서 40만원 연보가 나와 현 서부교회 본당 자리에 있던 식민지 때 지었던 집 2층의 한쪽 칸을 예배당으로 구입. 약 25평 정도였고 당시 일본 고급집 수준. 집의 구조는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한 가구씩 살도록 2층 구조이므로 총 4가구가 살던 집.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 가운데 계단이 있었고. 서부교회 밑에는 아직까지 초가집과 논이 그대로 있던 때.


(1952년: 징용과 군 목회)


손목사님 후임으로 김창인목사님이 삼일교회 청년회 전도사님으로 있다가 설교가 좋아서 모시게 되었고, 1952년 김창인조사님 부임 후 4-5개월에 주일 아침 징용으로 차출. 새벽기도 마치고 그날 읽을 성경 5장을 보고 교회 앞에 나와 청소부터 한다고 내려오니까 기다리던 사람들이 바로 파출소로 넘겼고 성경 하나만 지참. 그동안 지도하던 전도사님과 김창인목사님이 본인과 가정을 특별히 아꼈기 때문에 가정 염려 없이 평안하게 갈 수 있었음


부산역으로 데려가고 짐 싣는 기차로 가게 되었으며 그 속에서 기도하고 나서 교인을 찾으니까 한 사람이 더 있었으며 그도 역시 성경 하나를 가지고 있었음. 대구로 갔으며 방적회사 비어있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결. 그곳에서 만난 교인은 5명이었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 권씨 등이 있었고 다음날 강원도 양구로 간다고 했으며 교인들이 모여서 초를 구해서 떠나기 전 새벽예배를 보고 출발. 서울을 지나고 강원도로 추럭 이동. 그곳서 배씨라는 사람이 취사반으로 불렀고 강원도 양구로 배치 받아 취사반 소속이었고 배씨는 반장이 됨.


첫 주일 취사반장에게 교인이라 주일에는 일을 못한다 했고 다른 사람들은 밤에 불러 예배를 보고 계속하게 했으며 거기서 한 소대를 떼 내어 양구 소양강 38선으로 보내는 데 취사반에 2-3사람 가라는데 다른 사람이 가지 않으려 하여 지원. 미군부대 지원이었고 하루는 한국노무자들을 만났으며 거기 교회가 있다 해서 미군 일하는 사람들을 따라 미군 종군목사를 따라 다니는 사람을 만났고 그 종군 목사가 딴 부대 갈 때 동행을 원하여 이동.


군목은 미군 예배를 인도하고 정재완은 한국 노무자들 예배를 인도하게 됨. 오후에는 산하나 넘으면 후방, 징용 치료하는 야전병원이 있었고, 미군의 한인 종군 목사가 그 병원 예배 한번 인도한 다음부터는 종군 목사를 따라 다닌 사람에게 십자가를 붙어 목사 노릇을 하게 했는데,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냈고 그 자리를 정재완이 대신하여 후방에 있는 산을 하나 너머 학생들 예배를 인도하면서 또 병원으로 넘어 가서 원장, 간호원, 신학생이었던 통역 등을 상대로 예배를 인도. 따라서 1952년부터 미군부대 한인 노무자와 야전병원에서 말씀 증거를 맡아 1년간 계속 예배 인도.


(교회 복귀)


1년 만기 제대증 받아 나오려 할 때 그곳에서 4사람을 전도. 굴에 데려가서 예배보고 오전에는 산너머 주교학생, 오후에는 병원사람을 상대하며 목회 연습. 서울로 가서 제대하고 나왔으나 식구들이 고향에 가 있는 동안 전부 도적 맞음. 당시 서부교회는 박복달전도사를 모시고 집회를 했고 김창인목사님이 계셨으나 김목사님에게 고향갔다 온다고 하고 갔다 오니 이미 김목사님이 갈려 나가도록 준비.


김창인목사님이 동일교회로 개척해 나갈 때 당시는 돈이 없어 경제지원은 하지 못했고 대신 풍금, 사택 등을 가지고 나갔으며 교회에 있던 본인 살림은 한동희 등이 말해서 가져가지 않았는데 김창인목사님은 꼭 따라 가자고 살림을 미리 가지고 이사를 하려 했고 본인 위한 기도도 많았음. 교회 분리로 인해 살림도 어려웠고 김창인목사님은 집을 마련해 주겠다고 오라고 하지만 서부교회에서는 있어라고는 하지만 챙겨주는 이는 없었음.


정금출선생님의 모친 윤권찰님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지만 못쓰는 헛간을 고쳐 다다미로 살면서 한 달 이상 교역자 없이 계속되던 차에 백영희전도사님 청빙이 진행


(백목사님 부임)


고려파의 부산 지방 목사님들이 백영희전도사를 청하라는 권면이 많았고 특히 이인재, 한상동, 한명동 목사님들이 서명 날인해서 청해라고 하면서 그는 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는 분이라고 소개. 목회자를 모시지만 도시 교인들은 인정이 없었으니 모시다놓고 사택수리도 하지 않았고 목사님이 자기 손으로 음식 사서 먹이며 본인도 함께 일하고 있었음.


사택을 손보고 있었는데 백조사님이 서재로 사용할 책상을 앉으면 비스듬하게 몸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어 달라하심. 기도하면서 기댈 수 있도록 했고 그 책상에서 목사님은 3년간 앉아 자리에 누워보지 않고 목회를 계속하심. 옷 끈을 풀지 않았고 책상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 전부. 어떤 때는 예배에 나오지 않아 시간이 되었다고 부르러 가야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사님이 설교를 못할 때는 본인이 설교.


(최기주집사님이 부산에서 서부교회 출석)


전방에서는 6.25전쟁이 계속되었고 최기주집사님이 피난 와서 동생되는 최금주집사님이 서부교회 권찰님으로 있었고 조사님이 하단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자 언니를 인도하였고 또 서부교회로도 참석케 함. 제천에서 교장으로 있었던 분이었으나 전란 중 피난살이에서는 가난하고 어려웠음. 하단교회 집회를 마칠 때까지 동생이 데리고 다니며 집회를 마칠 때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 최기주집사님이 수복 후 제천으로 올라가면서 백조사님과 약속하기를 올라가면 제천은 감리교뿐인데 감리교회로 가서 1년 기도한 뒤 장로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었고 그 교회는 벌써 1천명 모이는 교회.


최기주집사님은 예수 믿기 전에는 제천읍에 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처럼 볼 정도로 수준 높고 교만하였던 분. 친하게 지낸 사람이 서장 부인밖에 없었고 6.25이전에는 자기 손으로 세숫물을 떠보지 않았고 그 물을 버려 보지 않았으며, 옷장에 시집올 때 옷이 몇 십 벌 쌓여 있었던 분. 피난 후 최기주집사님은 시내 사람들이 놀랄 만큼 겸손하였고 온 교인들이 하나님을 대하듯 상대하였으며, 하루 3번 시간 정해놓고 산에서 낮12시, 오후 3시, 아침 새벽기도 마치고 기도를 했으며. 그 교회 집사님들이 이상해서 따라 다니다가 14사람이 그렇게 기도생활을 하게 됨. 남편되는 분이 제천 중고교 교장이었으며 친정이 평양 최부자


이제 예수 믿고 학교 교사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 주며 하숙을 하였고, 그 돈으로 돈을 모은 뒤 1년후 감리교 담임목사님에게 자기는 장로교인이며 장로교 교회를 설립하겠다고 통고. 우현룡목사님의 외삼촌 최집사님이 제제소, 방앗간, 나무장사를 하는 분이었는데 그 분이 따라 나오고 남천교회를 개척하는 첫날 30만원을 내놓고 예배당을 지어라고 함. 모자라는 것은 자기가 다 대겠다고 하여 두 사람이 예배당을 지음.


3.정식 목회 출발


(1954년: 제천교회 개척 교역자로 부임)


1954년, 백영희조사님이 서부교회 자체 집회를 계시록으로 강의하시고, 끝나는 날 남반 집사들만 오라고 하였으며 김상수, 김용학, 조종석, 정재완 등 5명에게 제천에서 개척한 교회의 교역자로 나가라고 말씀. 나이많은 김집사님에게 가라고 하였고 차례로 조종석, 한동희 등에게 가도록 했으나 전부들 거부하였고 정재완에게 가도록 말씀했으며 순종.


토요일 기차편으로 제천으로 올라갔고, 주일날 설교. 18명으로 제천교회 창립 예배가 되었는데, 서부집회가 가을에 있었고, 부임 후 몇 주 만에 그 해 성탄을 제천에서 맞았으며 예배당을 건축. 전도사 인허를 받지 않고 집사로 8개월 목회를 한 뒤 부산으로 돌아옴.


(1954년: 마화리교회 개척 교역자로 부임)


제천교회에서 백목사님이 집회를 할 때 은혜를 받았던 분이 고려파가 아니었으나 은혜를 받고 고려파로 넘어오겠다고 하여 영월에서 큰 교회가 되는데, 그 교회에서 정재완집사님을 청한다고 신청이 있어 부산 목사님 허락. 그곳 소속은 경북노회였고 경주 제일교회 윤봉기목사님이 노회장이었고 1955년에 정재완은 청빙받고 올라 가서 2-3개월 목회. 그러나 부인이 동행치 않았기 때문에 사택을 옮기려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와서 보니까 큰딸을 낳고 조리도 못해서 죽어 가는 정도.


석유를 한 숟가락 먹이면 낫는다해서 먹였는데 거의 죽게 된 것을 병원 5곳을 찾아 다니다가 주사 5대를 맞고 낮게 됨. 부산으로 부인을 데리려고 왔다가 이런 일이 있었고 그 뒤 영월에는 다른 후임이 생겨 그대로 부산에 다시 생활하게 됨. 1956년도.


(1956-58년: 남해 도마교회 개척)


1956년, 백목사님께서 남해에 개척하기 좋은 곳이 있다며 권했고 순종하여 개척한 곳이 도마교회. 당시 남해에는 김수목전도사님이 남해읍에 개척을 하고 있었음. 김수목전도사님에게 2일 있으며 같이 전도하였고 도마에 방을 얻어 이사. 여관을 하려던 집이어서 방 3칸이 나란히 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얻었고 배로 건너고 버스에 짐을 실어 도마 도착 밤 11시. 먼지 묻은 방에 가서 자고 뒷날부터 전도하다 정경노(현 장로님)를 만남. 군에서 상이군인이 되어 고향에 왔고 남해읍으로 걸어서 예배당을 다니다가 청년들에게 놀림을 받게되자 교회를 쉬고 있던 중. 그날은 동네 구장이 동사무소에서 회의한다고 하여 기다리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기뻐 교회 출석.


도마에서 개척한 지 1년 반이 지나면서 부산 목사님은 자립하라고 명령. 남해 계란이 좋다고 구해 달라 하면 부치고 이를 서부교인들이 팔며 5개월 견딤. 당시 월급은 1만 5천원이었고 1957년 둘째 딸 출생.


(1958-60년: 금성교회, 충북 금성면)


때마침 한종희는 입대를 거부하다가 형무소를 가게 되었는데 제천 고암리교회에 있으면서 제천 금산에까지 전도를 했고 두 군데를 전도하다가 대가리(里)에도 전도를 했다고 정재완을 청함. 금산교회 개척은 학교 빈칸을 얻었고 교인은 15명, 사례는 서부교회에서 1만원 제천교회에서 2만원 합하여 3만원이 예정되었으나 첫 달 2만원 다음달에는 1만원, 그다음에는 그 돈도 중단. 당시 제천교회는 한동희조사님. 대가리는 송종섭목사님 고향.


한동희조사님에게 내가 어디로 가야겠는가 물어보고 한조사님과 함께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같이 기도를 다녔고 이어 백목사님 집회를 청해놓고 한달이나 기도가 계속됨. 집회를 오신 목사님이 거창 양혜원교회를 권했고 순종. 백목사님 말씀의 첫 마디가 나오면 항상 순종.


(1960-66년: 양혜원교회, 거창군 거창읍)


1960년 12월에 양혜원으로 이사를 하였고, 큰아들 졸업장과 우등상이 거창으로 우송되었고 양혜원에 와서 화폐교환이 있었으며 61년 2월 막내 출생. 양혜원에서는 교역자를 모시려면 사택이 있어야 한다며 거창읍 내에 양옥집을 잘 지어놓았는데 고신에서 제명될 때 고신측 전도사가 집을 차지하게 되었고 교회는 원내에 사택을 새로 건축. 7년 시무.


양혜원을 설립한 원장은 백목사님을 따라 창동교회를 개척한 공회측이고 양혜원교회의 전임 교역자는 여전히 고신측에 소속을 두고 있었고 또한 거창의 고신측 주도 교회인 거창읍교회가 양혜원을 중요한 사회사업으로 보아 이를 확보하기 위해 양혜원에 갈등이 시작. 원장만 쫓아내면 잘해주겠다는 고신의 지원이 있어 고신을 지지하는 측이 2/3, 원장을 따라 공회를 지지하는 측이 1/3으로 나뉘어 예배당 안에서 3번씩 충돌이 있었고 결국 나뉘어 예배 진행.


한번은 주일 설교를 하는데 반대측에서 강단에서 끌고 나와 옆문으로 데리고 나간 다음 삼천포 사건을 들먹이며 협박하는 사람, 또 한쪽에서는 막대기를 들고 위협. 당시 삼천포 나병원에서는 천막에 불을 질러 사람이 타죽는 사건까지 발생. 작대기 들고 협박, 사택으로 데려가서 똥물을 퍼붓겠다고 계속 협박. 시종일관 웃음으로 상대. 원장집에는 똥물을 퍼붓고 소동을 버렸다가 경찰에 신고가 되어 경찰 백차가 출동되었고 주동 몇 사람은 소록도로 보내짐. 당시 고신에 선 교인들은 죽거나 고생하고 다 없어짐.


양혜원은 원장의 개인 설립 단체였고 원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교역자를 청빙했으므로 공회에서는 양혜원 자체는 개인 단체로 분리 운영하는 곳으로 취급하고 단지 교회만 공회 소속으로 대했으나, 고신은 양혜원이라는 단체 자체를 고신 소속으로 확보하기 위해 시비를 계속 벌여, 후에 기존 원장은 불법이라고 선포하며 새로운 절차를 만들어 고려신학교에서 원장을 새로 한 명 선임하여 파송하게 하였고 이후 경남노회가 노회차원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소유권을 두고 원장과 고신의 경남노회가 법정에서 공방하고 결국 경남노회 송상석 황철도목사님 등 대표들이 패소


(1966-68년: 도평교회, 거창군 주상면)


도평교회 우현룡전도사님과 임지 교환. 도평교회는 송용조조사님이 그 이전 전임이었고 그때 예배당 건축. 1968년까지 근무. 이동이 많았고 고생이 많았으므로 부산 목사님이 순교하기 전 정재완목사가 날 제일 많이 욕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


(1968-73년: 평천교회, 경북 영천군)


1968년 겨울에 경북 영천군 임고면 평천리 평천교회로 부임했다가 김석준목사님이 탈퇴할 때 교회가 그쪽 계열이었기 때문에 영천 시내로 개척하고 나오려고 하였으나 백태영목사님이 창북교회로 이동을 적극 천거


(1973-76년: 창북교회, 경남 거창군 거창읍)


창북교회로 이동했고 5년간 80명으로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들과 관계가 좋았는데, 무월교회 정수암조사님이 나이가 좀 더 많았는데 당시 교통이 좋지 않아 재를 넘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불편했고 그래서 무월교회로 이동. 교인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백태영목사님이 와서 공회와 관계를 끊겠느냐고 하여 결국 교회도 동의.


(1976-80년: 무월교회, 경남 거창군 위천면)


무월에서 재임 중 1979년 화전교회 신준범조사님이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이동, 무월의 후임은 임상렬조사님


(1980-84년: 화전교회, 경북 의성군)


경북 의성군 화전교회에서 5년간 근무하고 큰 부흥이 있었으며 여기서 양성원 1회 졸업을 하면서 목사로 안수. 1984년 2월 거창 위산교회로 이동하고 화전교회 후임은 이종희목사님


(1984-87년: 위산교회, 경남 거창군 위천면)


위산교회 전임은 이종희목사님이었기 때문에 화전교회와 맞교대가 되었고, 3년 시무 후 1987년에 창북교회 이상규목사님과 맞교대가 되어 창북으로 이동


(1987-88년: 창북교회, 경남 거창군 거창읍)


1988년 5월 집회를 마치고 양혜원교회로 다시 부임하였으며


(1988-95년: 동산교회, 경남 거창군 거창읍, 구 양혜원교회)


1988년부터 근무하다가 1995년 거남교회 안재남목사님 사망으로 거남교회를 맡게 되었고


(1995-2002년: 거남교회, 경남 거창군 주상면)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거남교회를 담임

2002.11.4. 사역 50년 및 은퇴 예배



정재완목사님 목회사역 50주년 감사예배 - 대구공회 공고문



■ 일 시 : 2002년 11월 4일(월요일) 12시

■ 장 소 : 거창 창북교회(정동진 목사 시무)


■ 준비위원장 : 정경수 목사


■ 위원: 신두범 목사, 장신석 목사


(점심식사는 감사예배 후, 창북교회에서 있습니다. )


-거창지방 공회장이시고, 현 거창 거남교회 담임목사이신 정재완 목사님께서 목회사역 50주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은퇴를 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주셔서 말씀 증거자로 강단을 지켰으며, 교단과 교회를 위해서 힘써 일해 왔으나, 이제 후배들을 위하여 교회를 비우고, 교단과 후배들을 위하여 기도로서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목회사역 50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참석하여 주셔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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