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섭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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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섭

내용 공회의 특별한 이름

송종섭목사님



대화: 송종섭목사님

장소: 청량리교회예배당 4층 목사님 사무실


시간: 96.9.16.16:30-18:00



1.신상:


송종섭(鍾涉), 1936년생, 충북 제천읍 명동 출신

형제: 송종관목사님(1933) 송종섭목사님(1936) 송종숙(1938, 김응도사모님)


2.초기신앙:


1953년 12월 제천고등학교 2년 재학 중, 제천고등학교 교장 사모님이던 최기주집사님에게 전도되었고 처음에는 교회를 놀러 다니는 정도로 출석. 1954년 제천고 3학년, 1955년 연세대학 영문과 입학, 부모님과 형님이 제일 뒤에 교회를 출석.


백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1954년, 예수 믿고 난 다음해 1월 부산 남교회에서 동계 학생 수양회 SFC 1주일을 참석하였고 전국교회 웅변대회에서 1등. 최귀주집사님 인솔로 20여명 제천식구들 전부는 주일에 서부교회로 가서 첫 인사. 교회들이 서로 와서 설교해 달라고 난리들이었고 서부교회에서도 학생회에서 부탁이 왔었는데 백목사님은 안된다고 거절해 버림. 1주간 학생회 기간 중 주일날에는 차를 타지 않고 서부교회까지 걸어갔기 때문에 모두들 설교시간에 조는데 또렷이 설교를 들을 수 있었음. 설교 때 대답을 잘 했고 목사님은 직접으로 또 간접으로 목회자가 되라고 기대


행:27, 광풍에서 276명 생명을 구한 바울에 대한 설교였고, 믿는 자에게 우주보다 큰 이런 276 우주를 맡겼다는 내용. 40년 지난 지금도 그때 목사님의 설교하던 얼굴모습 인상까지 그대로이며 조금 달라진 것은 당시는 면도칼 같이 카랑카랑하고 웅변적이었고, 자세도 앞으로 움직임, 목사님 훗날은 틀도 잡히고 좀더 원만한 모습. 백목사님은 제천에 1년에 한번 정도 집회를 오셨고, 최집사님 따라 4년을 잘 다님.


3.군생활


1957년 입대를 해야 했지만 당시 군입대가 주일에 맞추어져 있어 이를 거부하였고 군기피 상태로 지속되어 학교에서는 제적되고 취직은 금지. 1957년 결혼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전도사는 아니었으나 개척교회 전도사 역할. 1961년 혁명 후 군기피자 단속이 강력하였기 때문에 장교시험을 쳐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3천명 응시생 중 1등으로 합격되어 군에 붙들리게 되는 동기. 입대 후 육사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교육학을 전공으로 하여 연세대에 3학년으로 복귀하였고 군인의 신분으로 3학년에 행정고시 합격, 학교는 당시 데모 와중, 국방부와 연세대와 육사로 진출하는 문제로 부서간 차출 갈등이 있었다가, 결국 국방부와 연세대와 육사가 조인트 프로젝트로 하자고 해서 서울로 전출.


1972년 대구 국군 간호학교 교수로 부임, 대구 봉덕동에서 교회 개척 시작, 매월 교역자회 부산 참석 때문에 군에서 감시가 있었고 군생활 중 제일 어려웠던 것은, 국기배례문제, 소령으로 일직사령, 주일과 수 금 예배 인도 때문에 외출하는 일. 집회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 초기 개척교회 당시 백태영목사님이 덕수교회로 와서 인허.


4.목회생활


군에서는 서울로 교육을 가라하고 홍순철목사님은 덕수 집회로 와서 제대하고 목회로 정식 출발할 것을 권고, 백태영목사님도 내려 오라 하였고 결국 제대.


1974. 원동 신연범목사님 후임으로 부임

1976. 6. 30. 제대, 덕수교회 담임

1979. 11. 창동교회 전성수목사님 후임으로 부임

1980.6. 포양교회 전재수목사님과 목회자 상호이동으로 부임

1982. 덕수교회로 다시 부임

1988. 사직동교회 부임.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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