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철
내용 | 성령의 불로 살다 간 홍순철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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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의 인물사로 기록하려면 관련 기록이 첫째 가는 분입니다.
백목사님의 목회가 만들어 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를 연구하면 이 복음을 받은 이들이 걸어가야 할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분입니다.
초장동 3가 65-9 번지 서윤호목사님 집 밑에 불란서 영사관이 있고, 그 밑 골목으로 홍순철의 집이 있었습니다 교회 처음 나올 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모친 윤집사님이 화랑국교 교사였습니다. 나인숙권사님이 전도하여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구역 소속도 그러 했습니다. 주변에 전도하는 다른 분들에게도 경남 고교 시험을 치고나면 교회 다닐 것이라고 한 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1958년이었습니다.
당시는 서부교회에 아직까지 학생회가 있었을 때이나 그는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 충실하였고 백목사님이 없앨 때를 찾고 있던 학생회에는 거의 상관치 않았습니다. 고3 때부터 신앙의 불이 붙기 시작하였습니다. 피난 시절 부산에 피난와 있던 연세대학교 상대에 합격하였는데 1965년까지는 부산에서 2년을 마친 학생이 서울 본교로 올라가서 4년을 마저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는 경우였습니다.
신앙지도자에 대한 사랑이 특심하였고 그 가족 사랑이 그렇게 뜨거웠습니다. 장년반 새벽기도에 목사님 셋째 아들이 추운데 윗 옷을 입지 않은 것을 보자 예배 중인데도 얼른 사택으로 가서 옷을 가져다가 입히는 성격이며 신앙이었습니다. 옳으면 주저하지 않는 행동, 신앙 계통을 넓은 범위로 아끼는 중심,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 이런 것은 백목사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아주 깊은 속 기준이었고 홍순철은 백목사님의 눈에 처음부터 아주 크게 들게 됩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급격히 타오르는 불길을 주변에서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가까운 교인 집을 방문하게 되면 가지고 다니던 성경을 그 자리에서 펴들고 예배를 보자고 그 집 식구들을 재촉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였고, 주일 오후 예배가 끝나고 나면 부산에서 가장 번잡하고 험한 길목인 영도대교 입구 교각에 서서 수없는 뱃사람들과 통행인을 향해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고 외치게 됩니다.
1966.2.28.밤 10시 통일호를 타고 동행하는 분과 좌석에 앉았다가 여자분이 자리가 없어 서 있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서며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 특별했습니다. 함께 하던 분이 뒤에 좀 지나치지 않느냐고 하자, '이렇게 자리를 비켜주면 하나님이 5분 전에 급하게 열차를 타도 나에게 필요할 때에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법이라'는 회고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에 대한 뜨거움과 단행의 일면을 보이는 일화입니다. 매사가 그러했고 생의 마지막까지 그러했습니다.
군복무를 부산 부산 병기창에서 하게 되자, 온 부대 내를 복음으로 요동하게 됩니다. 부대 안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그의 소개를 받고 수많은 부대 내 선후배, 군 간부까지 동행하여 서부교회로 계속 출석하게 됩니다. 이 시절 전도 받고 이후 고향에서 예수를 믿게 되는 숫자가 적지 않았고 제대 후에도 부산에서 자리를 잡고 서부교회 교인으로 생활하게 되는 숫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강행수목사님 등 목회자로 나선 이들도 수 명이 있습니다.
제대 후 주교 부장을 맡았고 1970년에 청량리로 부임하여 이만기목사님 후임을 맡았고, 거제동으로 1971년 가을에 거제동교회 이진헌목사님 후임으로 이동하였으며 이곳에서 손정숙사모님과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목회를 나간다는 것은 백목사님 생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으나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제천 남천교회로 이동하였고 1977년, 가장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암을 가지고도 기쁨과 넉넉함으로 온유하게 세상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바, 마지막이 되는 토요일 새벽설교까지 부축을 받아 강단에 섰고 설교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새떼가 사택으로 몰려 가는 성자를 배웅하였으며 그의 소천 소식을 들은 백목사님은 그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여러 면에서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는 복음으로 걸어갈 치우치지 않는 한 길을 찾았던 분입니다. 그는 그 길을 찾기 위해 남들이 아주 오해할 만한 모방의 길을 극단적으로 걸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를 '아' 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받아적었으며 그가 맡은 강단에서 그 '아' 소리 하나를 누락치 않고 반복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교인으로 앉아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재미없고 가장 지겨우며 가장 듣기 어려운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또박 또박 받아적은 노트를 그대로 흉내내며 읽고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발성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사정없이 내리꽂는 좌우에 날선 검이 되었음은 앉아서 듣는 이들만 아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백목사님의 재독을 두고 가능한 모든 이론을 개발 동원하여 반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만, 천국을 보지 못한 이들이 천국을 본 이들을 상대로 천국을 잘못 보았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지 못한 이들은 보지 못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인데, 보고 기뻐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그러하냐고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터인데.
홍목사님의 설교 세계는 그렇게 계속되었으나 백목사님은 그의 마지막 시기에 이제 홍순철의 설교 세계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음껏 외쳐도 전부가 진리요 성경 복음이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하게 됩니다. 그 동안 그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있는 정성을 다해 흉내를 냈던 것은 자기 속에 말씀과 다른 요소들을 말씀과 같은 요소로 정리하는 기간이었다는 것이 백목사님의 평이었습니다.
한편, 홍목사님의 끓는 신앙은 주변을 뜨겁게 달구었고 그 불빛 역시 주변을 너무 환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게 되면 여간 밝은 불도 더 밝은 그의 불빛 때문에 다 묻혀버립니다. 밝은 대낮에는 하늘의 별들이 보이지 않듯이.
홍목사님에게는 신앙의 사모님이 계셨고, 홍목사님 생전에는 묻혀있었으나 그가 가신 뒤부터는 오늘까지 홀로 자신의 신앙 불빛으로 주변을 비추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그 사모님과 딸에 대한 애정이 참으로 남 달랐습니다. 그 사모님의 신앙은 오히려 지금 서부교회 모든 신앙이 어두워 있는 때 홀로 빛을 발한다 할 만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01.12.14. 한 분 따님으로 있던 홍영희선생님의 결혼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공회가 교단으로서는 보잘 것 없어 공회의 공로 가정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의 신앙걸음은 오히려 공회를 비추고 있습니다. 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합니다. 대를 이어 신앙의 걸음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가야 할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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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1.7.25. 16:40
이름: 이재희 목사님
남천 교회 출신으로 총공회 소식지 2호에 실린 홍순철 목사님에 대한 생애 중
'홍순철 목사님이 새벽 강단에서 설교하기 전 운명. 당시 투병 생활을 예배당 위 층의 기도실에서 하셨고, 사찰이 매 번 업어 드렸는데 제대로 설 수 없었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서 설교하셨고, 설교를 하시다가 옆으로 넘어진 적이 있어서 의자를 높이는 등 보완해서 계속 설교. 설교 시간은 계속 줄어서 마지막 즈음에는 10분 정도 설교.
돌아가실 때 새들이 몰려 온 것은 직접 볼 수 있었고, 마치 갈가마귀 모여 앉 듯 10 평짜리 기도실 벽에 많이 앉고 5 일 장례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했는데,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왔고 그분들을 옥상이 넓어서 그 곳에서 식사를 모셨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왕래를 해도 계속 난간에 앉아 있고 새들이 사람을 피하지 않음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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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