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준 - 형 김영광. 아들 김성봉 김성욱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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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 형 김영광. 아들 김성봉 김성욱

내용 이 노선 제자로 독자 노선 개척

김석준 - 형 김영광. 아들 김성봉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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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김석준(金錫俊) 목사님의 4남 5녀 중 막내아들(7째)로서 신앙의 스승이며 신학과 신앙을 전하여 주신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복음이 이 가정에 소개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각 성도들을 참으로 다양하게 부르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친은 조부 이신 김상조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의 첫째 아들은 경상도에서 공부를 가장 잘해서 조선총독부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통학하던 중 한 전도인이 전해준 누가복음(쪽복음)을 받아서 학교를 오가며 그 성경말씀을 다 암송할 정도로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강한 불교 집안 분위기로 인해 미루다가 전염병을 얻게 되어 죽어가면서 자신의 부친에게 예수 믿는 것을 고백하고, 영수님을 모셔서 세례를 받고 죽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죽어가던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영수님을 모셨는데 세례 문답 시 묻는 것마다 정확하게 대답하여 영수가 놀랍게 여기며 교회를 가지 않고도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누가복음을 다 외워서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큰 기대 가운데 가문의 모든 것을 걸었던 장남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할아버지는 분통하고 막막함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통곡으로 지냈습니다. 불교집안임에도 아들의 유언으로 기독교 장례로 치른 후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세상의 덧없음과 절망의 결과로 노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노름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길바닥에 나앉았을 때 포항 유금교회 전도부장의 노력으로 교회 사찰로 살 길을 제의 받았습니다. 그 때의 할아버지의 고백이 '우리 아들이 이상한 길을 믿고 망했으니까 우리도 이 신을 믿고 빨리 망하자' 하면서 온 가족을 데리고 유금교회 사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처럼 귀한 목사님의 전도나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삶을 포기할 목적으로 선택한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결과를 이 집안에 선물하셨습니다. 유금교회 주일학교에서 할아버지의 자녀들이 한글과 성경을 배우고, 김석준 목사님은 현숙한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조부의 두 아들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김영광 목사(합신교단 총무역임)와 김석준 목사, 더 나아가 김영광 목사님의 두 사위와 김석준 목사님의 네 아들을 목사로 부르시고 여러 딸들을 사모로 부르시더니, 그 다음 세대까지도 주님의 부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장남인 김성봉 목사(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역임)에 이어 손자인 김의창 목사 역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엔드류에서 신약학 박사를 마치고 현재 횃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로 활동하는 등 전체 집안에 많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김석준 목사님과 함께 그의 아내인 어머님(권생이)와 외할머니(김분희)를 함께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가 어머님를 낳기 전 세 아들을 낳았으나 다 죽고 네 번째 딸인 어머님를 베었을 때, 하늘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면서 천사가 백합화 한 송이를 던지는 것을 외할머니께서 치마를 펴서 받는 태몽을 꾸셨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딸이 너무 허약하여서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를 입학할 나이가 되어 이름 없는 아이에게 학교 선생님이 이 아이가 살아있다는 하여 '날 생(生)'자를 써서 '권생이'라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안동 권씨 가정에서 배척받은 외할머니에게 유일한 소망과 기대는 그 신앙을 이어받은 무남독녀 딸이었습니다. 이 귀한 무남독녀 딸을 데리고 산 기도를 다니며 늘 기도하셨던 기도제목이 이 '이 딸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목사, 장로, 주의 종들이 많이 태어나게 해주세요' 였습니다.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옹기장사, 비단장사 등 사업을 해서 재산이 많았던 외할아버지의 지인 중 부유한 집안의 청년과 결혼하면 많은 유산을 물려받고 부를 누릴 수 있었으나, 단 한 가지 조건 '예수 믿는 청년'을 원하였기에 제 부친이신 김석준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의 목회를 하면서도 신앙으로 세워진 가정에 주님께서 많은 자녀를 허락하셔서 어머니는 12자녀를 임신하였고, 6남 5녀를 낳으셨으며 현재는 4남 5녀가 남아있습니다.


소명에 따라 순종하며 열심히 달려가신 목사님은 52세에 갑작스럽게 간경화로 몸이 약해지셔서 병원의 신세를 지기도 하였지만, 마치 바울 사도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갈 길을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듯이 그 질병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삶을 6년 더 살아가시다가 마침내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소명**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자 아버지께서는 이미 결혼하셨고, 어머니께서 임신한 상태이지만 자원하여 입대하셨습니다. 1.4 후퇴 때 수류탄을 오른쪽 허벅지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후 은혜로 다리를 자르지 않고 살아나셨으며, 그 후 여러 과정을 거쳐 대구신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당시에 만난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나 존경하여 이성봉 목사님처럼 훌륭한 부흥사가 되고자 닮으려고 노력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마침 큰 아버지이신 김영광 목사님께서 먼저 대구신학교에 입학하여서 수학 중에 아버지인 어머님을 불러 신학교를 하도록 권하였습니다. 4월 중순이었으나 이미 개강한 후이지만, 청강을 허락 받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공부 후 성적이 너무 우수하게 나오자, 정식 입학을 허락받아 대구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형제가 나란히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인 남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의 권유로 신학교에 입학한 사실과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가운데 목사로서의 길을 가게 된 것을 기억하면서 김영광 목사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형제로서의 깊은 우애를 항상 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언제나 기도하시는 외조모님과 많은 자녀를 기르면서도 끝까지 후원하는 어머니의 기도와 내조 덕에 신학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남산신학교 졸업반 때, 김현봉 목사님을 알게 되면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즐거움과 감격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봉 목사님을 흉내 내던 부흥강사 식의 설교나 목회를 포기하고 깊은 성경연구와 진리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말씀의 깊은 연구와 말씀에 완전히 매달리는 가르침이나 설교를 접하고자 하나 그런 교훈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새벽기도를 마치면 말씀을 연구하며 묵상하고 기도하려고 많은 산을 다니며 눈물로 기도드렸습니다.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다가 심지어는 묘지 옆에 가서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고백한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감격 가운데 기도하였던 내용을 옮겨봅니다.


"하나님이여, 김현봉 목사님에게 주신 성령님, 그 성령님을 김석준에게는 안 준다는 법칙이 없지 않습니까?", "백영희 목사님에게 주신 해, 성령님, 내게는 안 주신다는 그런 법은 없지 않습니까? 주실 줄 믿습니다", "이병규 목사님에게 내렸던 그 각성적 영감의 감화를 내게도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많은 때를 쓰며 자신의 인생을 걸고 애타게 매달렸습니다. 당시의 기도가 너무나 간절하여, 도무지 밥 먹을 생각도 나지 않고 정말로 애타게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도 아마 에이, 이놈, 참 고집불통이구나!" 하시고는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김석준 목사에게 주신 것으로 알며 그 이후의 인생을 오로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였습니다. 심지어 이전에 이미 받았던 많은 은사들, 치유와 축사와 촉새의 은사들을 가져가지고 오직 성경을 깨닫는 은혜를 달라고 애타게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이후의 사역에서는 영적인 은사에 대한 강조가 없고 오직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말씀을 강조하는 목회와 사역을 펼쳐갈 수 있었습니다.


**목회**


목사님은 신학교 재학시절에 박형룡 박사님을 통하여 소개된 벌코프의 조직신학의 내용들을 거의 외울 정도로 공부하였고,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과제에 관하여서는 성경을 읽으며 고민하고 정리하였습니다. 대구 신천동에 위치한 동교회에서 사역할 때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에 말씀을 배우려는 많은 목사님을 대상으로 심도있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서울 광진구 능동에 있는 대동교회에서 목회할 때에도 많은 목사님과 성도님이 배우려 할 때에 3~5시간이라도 계속 성경을 가르치는 사경회를 열어주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고 감격하셨습니다.


대구의 신천동(東)교회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평안남도 안주(安州)에 있던 동교회의 명칭을 따라 세운 교회로, 통일이 되면 그 곳에 교회를 다시 세우겠다는 분들이 출석하는 교회였습니다. 대구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영신고등학교 건너편 대구의 동쪽 신천동 산봉우리에 위치한 백 명 정도 모이는 작은 "피난민 교회"였으나, 귀한 말씀과 실천으로 꾸준히 성장하면서 그 지역의 사람들의 교회의 절반 정도를 이루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며 그곳의 다음 세대들을 일깨워 교회와 사회의 일꾼으로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대부분 성도들의 삶의 수준이 자식을 중학교에 보내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좀 어렵더라도 계속 공부를 시키도록 권유하였고, 학생들은 새벽기도를 다니며 깨어서 공부하도록 이끌었기에, 그곳에서 귀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대구 신천동에서 사역 중에도 말씀이 더 확장되기를 원하여 남교회(현재 수성구 참좋은교회 - 이윤창 목사님)를 개척하였습니다. 1972년에 뜻한 바가 있어서 서울로 올라와 대동교회를 개척하시고 말씀운동, 진리운동으로 15년 목회를 하셨습니다. 서울에서의 목회는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개척멤버도 없이 가족들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대동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모습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배시간에 필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전체적으로 함께 나아가야하기 때문에 주일예배의 설교가 다음 주 주일학교 분반공부의 교재가 되었습니다.


(사진) 김석준 목사의 아들들


그렇기에 주일학교 교사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반드시 공부할 수밖에 없었으며, 교회는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주일학교의 또 다른 특징은 학년 구분 없이 교사가 전도하면 같은 반의 구성원이 되었기에 열심히 전도하고, 교사는 토요일에는 심방을 하여 다음 세대를 양육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고등부 학생들을 보조교사로 섬기도록 하였는데, 방황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어린학생들에게 좋은 본이 되는 모습을 갖도록 인도하였기에 대동교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목회의 방향**


목사님의 가장 자랑스러운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시골교회에서 부흥회나 사경회 요청을 받으시면 말씀을 준비하여 일심일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냥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보면 그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목사님께서 친히 청년들의 부모님께 간곡하게 서울로 보내어 인재가 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런 청년들은 교회에서 함께 거주하며, 야간에는 공부하도록 하여 낮에는 빛나는 성도로서 훌륭한 가정을 세워나가도록 인도하였습니다. 그런 인도로 인하여 공부하면서 훌륭하게 직장생활도 하며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가는 청년들이 많았기에, 교회에는 언제나 새로운 청년들이 넘쳐났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삶은 바쁜 목회 중에도 자녀들을 위하여 뒷바라지를 하며 다음 세대의 인물로 키워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어린 아이들을 업고 청소도 하셨기에, 아들과 딸들은 개척교회 목사님의 자녀들이지만 다 대학을 마칠 수 있었으며, 삶의 모범을 교회보였기에 자녀들 모두 신앙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그의 성경연구입니다. 찬송가 중에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낡아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성경을 읽고 읽어서 다 닳아버린 성경책을 친히 보여주신 분입니다. 성경에 메모도 거의 하지 않는데, 성경을 넘기며 읽는 것으로도 가족은 다 닮았고, 성경책 종이가 파이고 상할 정도로 성경연구에 평생을 몰두하셨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낮 12시까지 그 누구의 방해에도 받지 않고 성경 읽고 묵상하는 평생의 습관은 그의 목회에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세 시간 이상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도 메모도 거의 없이 전체 내용을 헷갈림이 없이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펼쳐나갔으며, 계속되는 집회에 거의 반복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설교나 강의를 진행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설교의 경우 조직신학적 접근과 성경신학적 접근을 통한 강해설교를 이미 오래전부터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와 더불어 내세를 바라보며 살도록 촉구한 설교였습니다.


김석준 목사님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공헌은 성화에 대한 강조입니다. 1970~80년 한국교회가 부흥에 대한 관심과 구원의 확신에 관한 한 가지 논의에 집중할 때에도, 구원의 세 가지 시제(과거, 현재, 미래)를 언급하며, 칭의를 근거로 성화(성화구원, 건설구원 등으로 표현)에 대하여 그 중요성과 신학적 내용들을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이나 감격도 중요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모든 것이 기회임을 알아서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성화의 과정을 걷도록 독려하였습니다. 또 다른 신학적 공헌은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분명한 선포와 그 내용의 풍부함을 토대로 하는 말씀 선포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한국에 칼빈주의 5대교리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을 때, 그는 이미 그러한 내용들을 성경을 통하여 강론하였으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는 말씀선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안목과 구체적인 삶의 방향과 실천을 강조하는 말씀을 힘 있게 선포하였습니다. 이런 신학적 내용들은 그의 자녀들의 신학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특별한 집회의 경우 세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집중하여 강론하시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메모하며 받은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리성가**


전파된 말씀을 평생 기억하도록 만들려는 목사님의 열정은 그의 찬송과 작사에도 잘 나타납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 성경학교가 열릴 경우 공부하는 성경의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찬송가 곡에 맞추어 작사를 합니다. 여호수아서의 경우 '승전가'의 곡에 15절의 여호수아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습니다. 마지막 일제 강점기에 한서 남궁억 선생님께서 노래로 백성들을 일깨우듯이, 어린 아이들의 머릿속에 신앙과 성경의 내용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또한 평생을 기억하도록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직도 그 노래가사와 성경의 내용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11절로 구성된 사도행전 노래와 10절의 느헤미야 노래 등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불렸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선포된 말씀과 신앙의 자세를 추스르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니엘의 노래입니다. '영문 밖의 길' 곡에 7절로 개사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부르는 이로 하여금 그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리고 주님의 인도 가운데 신앙절개를 굽히지 않고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찬송으로, 한 번 들은 말씀이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생생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 다니엘아 다니엘아 무슨죄로 어디가나

> 내동족을 생각하며 기도함이 죄라더냐

> 예루살렘 바라보며 기도함이 죄라더냐

>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함이 죄라더냐


> 다니엘아 다니엘아 안심하고 걸어가라

> 네가섬긴 여호와가 너를구원 하시리라

> 사자입이 무서워도 다니엘은 못삼킨다

> 맹수발톱 강하여도 주의종은 못해친다


그의 생애 마지막 6년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간경화 판정을 받고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을 것이기에 의사나 주위의 많은 목회자가 이제는 그만 쉬고 편하게 목회하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아니면 여기 저기 기도원에 다녀보든가 안수를 받아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목사님은 친구 중에 중이 천국 간 사람을 보시고는 자신의 남은 생을 쉬거나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생을 마치기보다는 오히려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로 살아가기로 다짐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다른 목사님이라면 20~30년에 이룰 일들을 이 기간 동안 성실하게 행하셨습니다. 6개월이 결국 6년이 되었는데, 약해진 간이 낙엽처럼 사그라들 정도로 모든 진액을 쏟아 부은 삶을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변함없는 고백과 설교한 대로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친히 보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


지금도 종종 자라던 시절의 기억이 꿈으로 재현된다. 학생 시절, 좀 더 자고 싶어서 잠이 깨었음에도 자는 척하며 잠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성봉아, 새벽 기도 가자!" 하시던 그 음성. 조금 있다 들려오는 성도들의 찬양 소리. 미안한 마음에 "일어나 가야지" 하고 기를 써서 일어나 보면 기억도 선명한 한바탕 꿈.


내게 있어서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하시면서도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셨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내가 소위 '천재여행'을 하느라 며칠을 연거푸 학교를 빠지고 이 산 저 산으로 돌아다녔을 때에, 교회 마당에 있던 버드나무 가지를 다 꺾어 회초리를 만들어서라도 맏아들을 바로 기르시려고 고뇌하시던 모습. 그로부터 몇 년 후 계성중학교 특설반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며 비싼 일제 자전거를 선물로 주셔서 서툴게 통학하게 하시던 일. 그 때 이후로는 줄곧 믿어 주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주셔서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애썼던 기억들.


내가 초등학교 시절, 30대 초반의 젊은 목사로서 성경연구에 불이 붙어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배처에 나가시면 낮 12시나 되어서야 돌아오시던 모습. 그 때 이후로 내게는 그 분에게서 성경을 배우려고 모이신 목사님들과 함께 그 모습이 기억된다. 폐결핵 환자, 행려 환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심방하시다가 병을 얻어 피를 토하시던 모습.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며 머리를 중처럼 빡빡 깎았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어느 토요일 저녁의 기억. 사춘기 시절 까다로운 질문으로 곤란하게 했을 때에도 끝까지 진지하게 대답해 주시던 모습. 눈물을 흘리며 묻는 아들에게 시원한 대답을 못해 주어 미안한 듯 얼굴을 밝히시면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던 모습. 다음 주 설교 시간에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소재가 되어 말씀으로 선포될 때에 가졌던 뿌듯함.


대구에서의 목회를 정리하시고 서울로 오셔서 개척하실 무렵 차비가 없으셔서 두 분이 점심도 못 드시고 한양대에서부터 어린이 대공원까지 함께 걸어오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미어지는 듯 하던 일. 우리들이 시험 준비하느라고 예배실 책상 용기에 옹기종기 붙어 공부하고 있으면,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들의 발 사이를 대걸레를 밀고 당기시면서 청소해 주시던 일. 때로는 솜씨를 부리셔서 빵도 구워주시고, 때로는 어린 동생을 업고 계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손에 걸레를 쥐고 방과 거실을 청소해 주기도 하시던 모습. 아들이 사귀는 애인을 사랑과 관심으로 받아 주시던 모습.


때가 되어 결혼하게 되었을 때에 아들의 요청을 따라 주례를 맡아 하시면서 "마을이 실라를 택하여"라는 사도행전의 본문으로 주례사를 해 주시던 모습. 첫 손자를 안고 감격해 하시며 마음껏 축복해 주시던 모습. 한 번도 누워 계시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 분. 내가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일어나 계시던 분. 50을 넘기면서 과로한 몸에 병세가 나타나면서 투병하시던 모습.


생의 시간이 단축된 줄 아시고는 더욱 열정적으로 밤낮으로 성경을 읽어 가시던 모습.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유학 중에 급히 귀국한 아들에게 "아비 때문에 매이지 말고 주님의 종의 길을 계속 가라!"고 말씀하시며 차마 돌아설 수 없었던 발걸음을 다시금 유학길로 내미신 그 분. 그 길이 그 분을 이 땅에서 마지막 보는 길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내게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좋은 것들이 그 분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나의 설교에서 느낄 수 있다는 영감과 감동, 교훈의 깊이는 거의 모두 그 분을 통한 영향이다. 사춘기, 청년기, 장래를 결정해야 할 결단의 시기들을 거치면서 나를 강력하게 붙들어 놓은 것은 그 분의 모습이었다. "주어진 한 생애를 저렇게 진지하게 살아가시는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 분은 늘 성공만, 늘 승리만 했던 분이 아니시다. 때로 실패와 패배의 처절한 형편에서도 다시금 일어나셔서 앞을 향하여 가시던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지울 수 없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 분의 설교를 듣는 동안 우리에게는 가난도, 시련도, 역경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난도, 시련도, 역경조차도 영원한 나라에서의 면류관 마련에 둘도 없는 기회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성경의 인물들이 살아서 성경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이 느껴졌다. 그 분을 기억하면, 나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일에도, 그 말씀을 붙들고 일사 각오의 자세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 은혜로 받은 기회를 은혜로 잘 감당하고 싶다.

> 주께서 부족한 종에게도 잘 감당할 만한 은혜를 더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정리**


김석준 목사님의 생애와 신학에 관하여 많은 내용들이 있으나, 그의 삶과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훈련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기본자세**


>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 나는 영존할 자이다.

> 현세는 나의 영존처가 아니다.

> 나는 현세에서 조만간 떠나야 한다.

> 현세는 나의 영적 실력 양성의 교육장이다.

> 나의 영원히 누릴 곳은 무궁세계(천국)이다.


김석준 목사님의 묘비를 보면 그동안 살아오신 삶과 자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진토에서 일으키사 말씀의 종 삼으시고

> 높이고 또 낮추시며 한길 가게 하시었다

>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리는 말씀

> "선민의 긍지를 가지고 무궁세계를 바라보며 주어진 현실을 살자!"


30년의 목회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정말 많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깨달은 진리를 전하기엔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으로도 다 알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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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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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그리워지는 목회자들(2020년11월20일 발행)


출판사: 아벨서원


지은이: 안명준 외 17명


김석준 목사님 관련내용: p34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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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지는 목회자들

-백향목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워지는 목회자들〉은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 있는 목회자들의 이야기, 피와 땀이 섞여 있는 21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버지가 목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자녀의 생생하고도 애달픈 증언이다. 곁에서 보고 배운 것을 따라 열심히 목회하고 있는 제자들의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저자(글) 안명준 외

● 이상규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 김명혁 강변교회 원로목사,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유광웅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 박시영 무지개전원교회 목사, 부ㆍ경 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 최홍준 호산나교회 원로목사, 국제목양사역원 원장

● 김광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 박상은 샘병원 미션원장, 아프리카미래재단 대표

● 안인섭 총신대학교 교수, 기독교통일학회 회장

● 권호덕 전,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안명준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교수

● 스데반 황 그리스도의 보혈교회 담임목사

● 박희근 뉴욕동원장로교회 담임목사

● 김현진 평택대학교 신학부 교수

● 김성욱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이은선 안양대학교 교수,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 이종전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어진내교회 목사

● 오현철 성결대학교 교수, 성결설교클리닉 대표

● 이종훈 닥터 홀기념 성모안과 원장, 가톨릭의대 외래교수

● 이경직 백석대학교 교수, 개혁주의생명신학회 회장

● 류원렬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교수



목차

발간사 안명준 ▶ 4

머리말 이상규 ▶ 10

추천사 김길성 ▶ 13 김상복 ▶ 15 노영상 ▶ 19

추천사 오정호 ▶ 22 이승구 ▶ 25 채이석 ▶ 28

추천사 최충산 ▶ 31


1 의와 사랑을 추구한 목회자 이약신 목사 ● 이상규 ▶ 37

2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 ● 김명혁 ▶ 61

3 예수에 미쳐 순교한 나의 아버지 유재헌 목사 ● 유광웅 ▶ 91

4 태양신과 맞서 싸운 신앙의 투사 이인재 목사 ● 박시영 ▶ 113

5 한국 교회의 지도자 노진현 목사 ● 최홍준 ▶ 141

6 무명의 복음 전도자 이갑득 목사 ● 이상규 ▶ 153

7 왕진 가방 버리고, 심방 가방을 택한 김재술 목사 ● 김광열 ▶ 183

8 아버지의 꿈, 나의 꿈-박용묵 목사 ● 박상은 ▶ 215

9 사랑으로 역사하는 교회의 목회자 안성수 목사 ● 안인섭 ▶ 231

10 내 아버지 권태석 목사 ● 권호덕 ▶ 255

11 기도와 사랑을 실천한 노윤석 목사 ● 안명준 ▶ 271

12 사랑의 실천자 이상춘 목사 ● 스데반 황 ▶ 293

13 협력하여 선을 이룬 하나님의 종 박장하 목사 ● 박희근 ▶ 313

14 선교에 총체적으로 헌신한 김성규 목사 ● 김현진 ▶ 327

15 말씀의 실천자 김석준 목사 ● 김성욱 ▶ 345

16 교육 목회에 헌신한 김대인 목사 ● 이은선 ▶ 363

17 영원한 순례자 이봉재 목사 ● 이종전 ▶ 399

18 아름다운 목회자 오희동 목사 ● 오현철 ▶ 431

19 아름다운 은퇴자 이노균 목사 ● 이종훈 ▶ 447

20 은혜 목회자, 평생 목회자 이재기 목사 ● 이경직 ▶ 471

21 나사렛 예수의 사람, 류동형 목사 ● 류원렬 ▶ 515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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