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직
내용 | 백영희 안수 목사님, 김치선 후계자 (백석교단, 대신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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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님을 안수한 분입니다. 공회 신앙을 그렇게 사모한 분입니다.
1. 타이핑을 해서 검색과 읽기가 가능하게 하고
2. 사진과 동영상이 우리 자료가 되도록 조처하고
3. 연구소 '총공회 인물'에 소개하고 백 목사님 약력에 안수 성함이 나오는데 최순직 이름에 글씨를 주변의 연도 표시처럼 옅은 초록색으로 해서 검색으로 연결시켰으면.
최순직 목사
현재 한국교회에 가장 큰 교단으로 합동과 통합이 부각 되어 있으나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성장했고 합동에 이어 교세가 2번째로 큰 백석 교단이 1만개 교회가 된 상태인데 이 교회의 역사는 남산의 대한신학교 김치선 목사님이고 그 직계 후계자가 최순직 목사님이다. 1960년 백영희 목사 안수 때 김현봉과 함께 안수위원이었다. 그는 백영희를 안수했으나 실제로는 백영희 신앙을 평생 흠모하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백석이나 대신의 초기 지도자 또는 그들에게 배운 이들은 '백영희'의 이름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외적 소속은 백석이나 대신이지만 내적으로는 공회를 거쳐 간 또는 공회적이었던 이인재와 같은 입장이다.
①1923년 3월 16일,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에서 출생
②오로리 소학교를 졸업
함흥 영생 중등,고등학교 졸업
*김치선 박사의 양아버지였으며 평생의 은인이었던 캐나다 선교사 영재영(Young)이 설립
③1943년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 징집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해암공립영화 국민우국학교 교사로 봉직
④1945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신학 1년 미만, 폐결핵 진단을 받아 학교를 중퇴하고 요양을 시작
⑤1950년 6.25 전쟁 피해 아픈 몸을 이끌고 그해 12월 남쪽으로 내려와 경남 거제도에 정착
계룡산 기슭에서 병든 몸으로 다년간을 동굴에서 기도하며 생활
⑥1952년 총회신학교에 편입
방학 때에는 목회하며 거제도에서 대구까지 통학하면서 신학을 공부
⑦1955년 한남노회 제37회 정기노회에서 목사안수
부산 한양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
⑧1958년 3월 20일에는 김동화 씨와 결혼 (대한신학교 학장이었던 김치선 박사의 차녀)
⑨1959년 4월부터 대한신학교 서무과장과 시간강사로 근무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신학교 교수
1981년 2월부터는 방배동 총회신학교 교수 (조직신학 강의) 1999년에는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⑩1999년 10월 10일 자택에서 소천 (미국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파크에 안장)
김동화 사모
①1928년 2월 5일, 평양에서 김치선 목사와 이홍순 여사의 둘째 딸로 출생
②193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에서 성장
③1945년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입학
예과를 졸업, (경성사범학교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편입)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 졸업
대한신학교에서 영어 교수
④산부인과 의사에 의해 도저히 아기를 출산할 수 없다는 진단
최순직 박사와 결혼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 태은 두 자녀를 출산하는 기적
-현재 사위는 한국에서 안과의사로, 며느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간호사
⑤1975년 미국으로 떠나 이민생활
1992년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생활
⑥1999년 최순직 목사 작고
온누리 교회에서 권사 취임을 하고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
⑦20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새 소망교회를 출석
2020년 8월 13일,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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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출처: http://www.chera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88
대신·백석 교단의 거목 고 최순직 박사
최 선 박사(Ph.D., Th.D.) 승인 2020.09.15 7:10 호수 493
조직신학자 최순직 박사는 항상 검은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강의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목에서는 분명한 어조로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목회의 열정을 학생들도 갖기를 원했다. 그런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신학과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 박사는 1923년 3월 16일,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로리소학교를 졸업하고 김치선 박사의 양아버지였으며 평생의 은인이었던 캐나다 선교사 영재영(Young)이 설립한 함흥 영생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또한 1943년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 징집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해암공립영화 국민우국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으로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1945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한 지 일 년도 못 되어 폐결핵 진단을 받아 학교를 중퇴하고 요양을 시작하였다.
석 달 정도 살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산기슭의 격리된 오두막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냈다. 당시 최순직은 40㎞가 넘는 ‘결핵환자 보호소’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정을 들은 간호사가 보증을 서주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간호사는 틈틈이 찾아와 “회복이 멀지 않다”고 격려해 주었고 최순직은 간호사에게 희망을 느꼈고 건강에 차도를 보였다.
최순직 박사는 1950년 6.25 전쟁을 피해 아픈 몸을 이끌고 그해 12월 남쪽으로 내려와 경남 거제도에 정착하였으며, 계룡산 기슭에서 병든 몸으로 다년간을 동굴에서 기도하며 생활하였다. 이북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평양신학교를 중퇴하였기에 1952년 총회신학교에 편입하여 방학 때에는 목회하며 거제도에서 대구까지 통학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55년 한남노회 제37회 정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한양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하였다. 1958년 3월 20일에는 대한신학교 학장이었던 김치선 박사의 차녀 김동화 씨와 결혼하였다. 그는 1959년 4월부터 대한신학교 서무과장과 시간강사로 근무하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신학교 교수로, 1981년 2월부터는 방배동 총회신학교 교수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다. 1999년에는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 1999년 10월 10일 자택에서 소천하여 미국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파크에 안장하였다.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대신과 백석교단이 계승하도록 기틀을 놓은 최순직 박사의 아내 김동화 사모는 1928년 2월 5일 평양에서 김치선 목사와 이홍순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치선 박사를 따라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그녀는 1945년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민족이 해방을 받아 경성사범학교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편입됨으로써 예과를 졸업하고 본과에 입학하여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대한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수년간 강의하였다.
산부인과 의사에 의해 도저히 아기를 출산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김동화 사모는 최순직 박사와 결혼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 태은 두자녀를 출산하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현재 최순직 박사, 김동화 사모의 사위는 한국에서 안과의사로, 며느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간호사로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1975년 미국으로 떠나 이민생활을 하다 1992년 한국에서 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최순직 박사에게 다시 돌아와 남편과 함께 생활하였다. 1999년 최순직 박사가 작고한 후 온누리교회에서 권사 취임을 하고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동화 사모는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새소망교회를 섬기며 사명을 감당하다 2020년 8월 13일, 숙환으로 육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장례식은 George Washington Memorial Park Chapal에서 아들 최태은, 며느리 최현숙, 손자 최바울, 손녀 최진주, 손녀사위 저스틴 김, 손녀 최안나와 딸 이은혜, 사위 이기증, 외손자 이명철, 외손자 아내 이조에나, 외손녀 이지혜 씨가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입관예배(Viewing Service)는 8월 15일(토) 오전 11시에, 하관예배(Burial Service)는 오후 12시 30분에 장두만 목사와 구경서 목사의 집례로 가족장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로병사를 겪게 된다. 지금까지 최순직 박사와 김동화 사모의 삶에 대하여 간략하게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김치선 박사의 삶과 사역에 대하여 논문과 글들을 학회발표와 출판으로 소개했다, 그분의 가족인 고 최순직 박사와 고 김동화 사모를 추모하면서 후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한다.
독자들이여!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여 생명의 말씀 속에 위로 받아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 선 박사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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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내래이션 타이핑)
[감동칼럼] '최순직 박사와 김동화 사모를 추모하며' 세계로부천교회 최선 목사(시인작가, Ph.D.), 극동방송FM106.9 '5분칼럼' 269편 매주 수요일 오후 430
극동방송 최선 목사님의 오븐 칼럼 매주 수요일 이 시간은 세계로 부천교회 담임으로 계시며,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시인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계신 최선 목사님께서 말씀 전해주십니다.
은혜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조직 신학자 최순직 박사는 항상 검은 한복을 입고 신학교 강단에 서서 부드럽고 다정하게 강의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목에서는 분명한 어조로 힘주어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목회자의 열정을 학생들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신학과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최 박사는 1923년 3월 16일에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오로리 소학교를 졸업하고, 김치선 박사의 양 아버지였으며, 평생의 은인이었던 캐나다 선교사 영재영이 설립한 함흥 영생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43년 일제강점기에 학도병 징집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해안 공립 영화 국민 우국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중,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부모의 허락 없이 고국으로 들어와, 1945년 3월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신학을 시작한 1년도 못 되어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학교를 중퇴하고 요양을 하면서 결핵병과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석 달 정도 살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산기슭에 격리된 오두막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냈습니다.
당시 최순직은 사십 킬로미터가 넘는 결핵 환자 보호소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정을 들은 간호사가 보증을 서주어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틈틈이 찾아와 회복이 멀지 않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순직이 간호사의 말에 희망을 품게 되자, 건강도 조금씩 차도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을 피해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12월에 남쪽으로 내려와 경남 거제도에 정착하였으며, 계룡산 기슭에서 병든 몸으로 다 년간을 동굴에서 기도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이북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평양신학교를 중퇴하였기에, 1952년 총회신학교에 편입하여, 방학 때는 목회를 하며, 거제도에서 대구까지 통학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55년 한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한양교회 담임 목사로 목회에 전념하다가, 1958년 3월, 대한신학교 학장이었던 김치선 박사의 차녀 김동화 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는 1959년 4월부터 대한신학교 소무과장과 시간강사로 시무를 시작하여, 1968년부터 1975년까지는 대한신학교 현 안양대학교 교수로, 1981년 2월부터는 방배동 총회신학교 현 백석대학교 교수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습니다.
1999년에는 서울 성경신학 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1999년 10월 10일 자택에서 소천하여 미국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하였습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 노선을 대신과 백석교단이 계승하도록 기틀을 놓은 최순직 박사의 아내 김동화 사모는, 1928년 2월 5일, 평양에서 김지선 목사와 이용순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치선 박사를 따라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천구백사십오년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후 경성사범학교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편입됨으로써,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에 의해 도저히 아기를 출산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김동화 사모는 최순직 박사와 결혼을 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 태운을 출산하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현재 최순직 박사와 김동화 삼호의 사위는
한국에서 안과 의사로, 며느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간호사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국내 환경을 벗어나 1975년 미국으로 떠나 이민 생활을 하다가 1992년 한국에서 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최순직 박사와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1999년 최순직 박사가 돌아가신 후
김동환 사모는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숙환으로 2020년 8월 13일 육신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불의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극동방송 가족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로병사를 겪게 됩니다.
지금까지 최순직 박사와 김동화 사모의 삶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 최순직 박사와
고 김동화 사모를 추모하면서 후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에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며, 생명의 말씀 속에서 위로를 받아 앞으로의 삶에 승리하는 방송 가족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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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