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조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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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조


송용조 목사님


고향 : 경남 창영군 길곡면 오호리

첫교회 : 오호교회 

고3 : 부산 서부교회 


<신학과정>

1. 서부교회 : 성경연구과정 

  : 전도사 양성 프로그램, 청년 성경 연구를 위한 과정

2. 부산신학교 4년과정

  : 고려신학교는 백목사님 제명 문제로 가지 않음.

3. 총공회 소속 목사

4. 양의문교회 설립 및 목회


<유학과정>

1.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 1973-1976

2. 콩코디아신학교(Concordia Seminary) Th.M(신학석사), 전공(조직신학) : 1976

3. 콩코디아신학교(Concordia Seminary) Ph.D(신학박사) 과정 중 1978년 귀국

4. 풀러신학교 선교학 박사 수료.


<총공회 탈퇴과정>

서울 사직동교회에 시무 중 대구 달산교회로 발령 남. 

신앙이나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 군데서 안정적으로 일관되게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에 총공회에서 나와야겠다 생각했고 

혼자 사직동교회 사임을 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함께 움직이고자 하여 뜻을 같이 한 교인들과 함께 탈퇴 후 양의문 교회를 설립.


<총공회 탈퇴 후>

- 1988년 양의문교회로 출발

- 교인과 논의 후 고신 소속 (서울노회)

- 서울노회에서 사건 발생 -> 개혁노회 소속 -> 총회 상소 -> 개혁노회 제명

  (불법이혼, 불법결혼으로 인해 노회가 둘로 나뉨)

- 제명된 30개 이상의 교회와 몇 교회가 고신개혁총회(고려개혁교단)로 출발. 

- 해당 총회에 신학교가 필요하여 양의문교회에서 운영하던 서울성경학교(1989년)을 총회 인준 신학교로 변경하여 1992년 ‘고려개혁신학교(=고려개혁신학연구원, 고려개혁학교)’ 설립

- 고려개혁교단 소속 교회는 출발시 30여개에서 현재 8-90개




(2023.07.12.수정)


출처 : 주나그네 / 송용조 목사 인터뷰 / SDG개혁신앙연구회/ 2023.7.12.접속 /

http://sdgchurch.kr/songyongj__interview


 

송용조 목사님의 백목사님 회고


송 : 백영희 목사님은 실제로 저에게 어떤 신앙과 인격 사상, 경건한 삶을 살도록 지도하고 가르친 목사님입니다. 내가 볼 때는 참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에도 신사참배를 안 했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감옥에 갔을 때, 거창에서 목회하면서 그 가족들에게 해방될 때까지 양식을 조달한 분이에요.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이 평생 사용하시던 성경을 백영희 목사님한테 줄 정도로 어떤 면으론 애제자였죠. 그리고 참 놀라운 거는 6.25 사변 났을 때 피란 안 가고 인민군 치하에 거창 지역이 들어갔을 때에도 매일 세 번씩 예배를 드렸어요. 교회 종 쳐 가면서.


SDG : 놀랍군요.


송 : 예, 생명 내 놓고 신앙생활 한 분이에요. 하여간 보통 강한 분이 아니죠. 그 정도로 유명하니까 벌써 목사가 되기 전에 부산 서부교회 교역자로 청빙되어 오기까지 했던 거지요. 그리고 그 분의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 개혁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한 성경을 참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사석에서 한번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신구약성경을 부분적으로 암송 다 했대요. 엉덩이가 다 헐 정도로 앉아서 성경을 많이 읽고, 나름대로 연구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성경 언어도 잘 모르고, 성경해석방법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어서 주경하는 식으로의 설교는 아니더라도 어떤 본문을 읽으면 그 본문과 연관되어 있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폭넌ㄹㅂ게 그리고 또 아주 깊이 파는 그런 설교를 했기 때문에 설교가 좀 뭐라 그럴까 독특했어요. 그래 저는 더러 우리 한국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다라고 하지요. (웃음) 가만보면, 백목사님은 많이 읽었어요. 조직신학책이나 기독교강요도 여러번 읽은 것 같아요. 그리고 교회를 특별히 귀하게 여겨서 대충대충 목회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자녀들이 모두 미국에 이민 가 있었지만 자녀들이 그렇게 다녀가시라고 해도 돌아가실 때까지 미국 한번도 안 갔어요. 거 그 쉬운거 아니잖아요. 아주 독특한 분입니다. 암튼 제가 아는대로는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은 없는데, 성경을 잘 아셨어요. 그런데 때로는 성경의 부분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약간 의혹을 불러 일으킬만한 해석은 했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거 같아요. 큰 틀에서는 칼빈주의 입장을 견지했다고 봐요.


SDG : 예를 들어, 어떤 점에서 의혹이 있었나요?


송 : 백 목사님이 목회적 관점에서 제일 중요하게 본 것이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 있는 옛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된다, 거듭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된 새삶으로 살아야 된다 하는 것이었는데요.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깐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는 것은 옛사람이지 그 거듭난 새사람의 본질, 본성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죠. 그런데 죄를 짓지 않는다고 그랬을 때는 오해받을 수 있지만은 사실은 성경 해석을 조금 의미에 안 맞게 해석을 해서 그렇지, 요한1서 같은데 보면 하나님께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있거든. (웃음) 그래서 뭐 이단이니 삼단이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로 이단은 아니고 한국교회가 낳은 충성스러운 목회자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거는 그 총공회 교단이 하나의 교단으로서 그 이래 목회자들 잘 양성해가지고 건전하게 발전시켜 나갔으면 좋을 건데 지금 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는지 모르지만은, 지금으로 봐서는 그게 바라는 대로 잘 안 되고 있으니깐 약간 안타까운 점은 있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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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조 1935년생 창녕군 길곡면 오호리 814 조사 1958 목사 1968.7.4 미국 오렌지 카운티 1983.1. 1. 신앙출발 고향에 오호교회는 있었으나 먼 곳에 있어서 불신 환경으로 성장하였다. 이북에서 월남한 전도부인이 집집마다 전도한 것은 기억하나 신앙에는 무관심하였다. 초등학교 때 2차 대전 말기, 중학교 때 6.25전쟁 발발했고 창녕의 낙동강 전부에 대규모 사망을 보며 인생의 허무함을 실감하였고, 비로소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3에 고신의 오호교회를 출석하였고, 학생이라 해서 담임 목사님이 안용준의 사랑의원자탄과 박윤선의 요한계시록 2권을 선물받았다. 손양원 전기에 크게 감명 받고 목사를 소망했고 계시록은 어려운 책인데도 이상하게 이해는 되었으며 오호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고, 고교를 부산에서 다니면서 교회를 출석하던 중 친구의 권유로 고3에 부산 서부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서부교회는 고신 소속이었고 대단히 열심 있는 교회였고 그 때부터 교회 생활에 매진하게 되었다. 서부교회를 출석하면서도 신학서적을 탐독하고, 박형룡 번역의 ‘칼빈주의 예정론’이 특별하게 은혜가 되었다. 당시 고신 측 교회는 굉장한 부흥기였고 서부교회도 그러했으며, 교회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영적 분위기가 아주 활발. SFC 활동도 당시 활발했으나 학생 운동에는 관여한지 않았고 청년 모임 회합 등도 한 적이 없고 그냥 성경 읽고 신앙 서적 읽고 기도하고 주교 반사로 활동 열심. 당시 박윤선은 개혁주의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고 다른 고신 목히ㅗ자들은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을 주로 말했으며, 서부교회 생활을 하면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개혁신앙과 같지는 않으나 칼빈주의 이름으로 개혁신앙과 접촉은 했음. 고향 오호교회 목사님의 경우 개혁주의 표현은 사용한 적이 없고 칼빈주의 청교도만 익숙. 사실 개혁주의 청교도 개혁 청교도주의 개혁 신학이라는 표현은 박형룡이 가장 먼저 사용했고 고신도 늘 강조. 그런 것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접촉한 것. 고신 시절의 서부교회 백 목사님은 교회 안에서 일종의 전도사 양성 프로그램 비슷하게 ‘성경 연구과정’을 했는데 그 과정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많이 읽게 됨. 그렇게 훈련을 받다가 군대를 하게 되었는데 성경을 좀 많이 알게 되니까 자연히 군종과에 근무했고 군교회 없는 파견대대에서 예배 인도와 설교도 했으며, 제대를 했을 때는 백 목사님과 고신의 마찰이 있었는데, 첫째가 마산 문창교회 예배당 소송 문제였고 둘째는 유엔군 철수 반대운동. 백 목사님은 강도사 신분으로 유엔군 철수 반대시위는 신자 개인이 참여할 수는 있으나 교단이 교회 이름으로 할 수 없다며 회개하라 했고 아마 이 것이 가장 큰 화근이 된 듯. 결국 부산노회가 상회불복종이라는 구실로 강도사 인허취소를 했고 1-2년 후 고신이 교단에서 제명. 서부교회는 원래 손양원 동생 손이원 목사님이 개척했고,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이 2대, 제3대 교역자로 백 목사님이 전도사로 부임. 설교를 워낙 잘하는 부흥사. 일단 서부교회와 고신이 갈등을 빚는 중 교인으로 교회와 행동을 같이 하다 보니까 신학교를 진학할 때 부산에서 교육부 인가 받은 곳은 고려신학교와 부산신학교 2곳뿐인데 신학 사상으로는 고려신학교를 가야 하나 교회 문제로 고신과 얽혀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초교파를 지향하던 부산신학교에는 연대 출신 진보 신학을 가진 분들도 있었으나 신학 노선이 맞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겠다 싶어 부산신학교에 진학. 백 목사님도 고신과 대치할 때였고 청년이 고신으로 다니면 어떤 입장으로 바뀔지 모르니 차라리 자유주의 신학을 조심 시키면서 그 쪽으로 가게 했다. 부산신학교에서 4년을 공부하고 1968.7.4. 총공회에서 목사 안수. 당시 백 목사님은 고신에서 제명 되었으나 따로 교단을 만든 것은 아니고 고신에서 제명이 될 때 따르는 교회들이 몇십 개였고 세월이 지나 가며 교단이 된 것. 총공회라는 교단 명칭이 생기게 된 것은 제천 남천교회 백영침 목사님이 국기 배례 때문에 수감이 되었는데 형사 사건에서 석방을 시키고 교회 입장을 주장하는 과정에 ‘교단 명칭’이 필요해 졌고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가 나오니 공회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그 공회라는 표현이 공교회 보편교회라는 원뜻이 오역이 된 것을 목사님들이 몰라서 채택. 본인은 성경에서 사도들을 잡아 고문하고 박해한 기관이 공회였기 때문에 반대를 했다. 또 당시 양도천 목사라는 사람이 ‘세계일가공회’라는 이단 이름을 가졌는데 그래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반대를 했으나 다른 이름을 생각하기도 어렵고 해서 ‘공회’로 결정. 공회라고 사용하다 어느 날 ‘총공회’로 다시 사용하게 되었으며 본인도 자연스럽게 총공회 목사가 된 것. 백영희 목사님은 신앙과 인격 사항과 경건한 삶을 살도록 나를 지도하고 가르쳤다. 참 훌륭한 목사님. 일제 때 신사참배도 하지 않았고 또 주남선 목사님의 감옥 시절에 해방 때까지 가족들에게 양식을 조달한 분.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이 평생 사용하던 성경을 주셨던 애제자. 참으로 놀라운 것은 6.25 사변에 피난 가지 않고 인민군 치하에서 매일 3번씩 교회 종을 치면서 예배를 드린 분. 생명 내놓고 신앙생활을 했고 그렇게 강했고 그렇게 유명하다 보니 목사 되기 전에 부흥회 사경회 강사로 활동. 서부교회 오기 전부터. 특히 그 분은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성경을 참으로 사랑한 분. 사석에서 ‘신구약 성경을 부분적으로는 다 암송했다’고 직접 들음. 성경 원어도 해석 방법도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떤 본문을 설교해도 성경 전체를 폭넓게 깊게 설교를 했다. 그 설교가 독특했다. 개인적으로는 로이드 존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어 보면 조직신학 책이나 기독교강요를 여러 번 읽은 느낌이다. 백 목사님은 교회를 아끼는 분이었다. 그래서 목회를 대충대충 하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 했다. 자녀들이 모두 미국에 이민을 갔고 한 번만 다녀 가시라고 해도 종신토록 단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신학 공부를 한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데 성경을 잘 알았다. 때로는 성경의 부분적인 해석만 자기 나름대로 하다 보니 오해 소지는 있었었으나 큰 틀에서 보면 칼빈주의 입장을 견지했고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백 목사님은 목회적 관점에서 제일 중요하게 본 것이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 있는 옛사람으로 살면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것인데 이 면을 강조하다 보니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는 것은 옛사람이지 거듭난 새사람의 본질 본성은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면 오해를 받을 수 있으나 성경 해석을 조금 안 맞게 해서 그렇지 요한1서에 하나님께 난 자는 죄지 않는다는 말은 있다. 이단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단은 절대 아니고 한국교회가 낳은 충성스런 목회자. 아쉽다면 하나의 교단으로 목회자들을 잘 양성해서 건전하게 발전 시켜 나갔으면 하는데 현재 그렇게 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유학은 총공회 시절이다. 총공회가 하나의 교단이니 목회자 양성이 필요했고, 부산 서부교회 현재 담임 서영호 목사님이 먼저 유학을 갔고 몇 년 뒤에 본인도 유학. 유학 갈 때 이인제 목사님이 개척한 대구 동성로교회에 있었는데 이 교회는 주남선 한상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출옥성도. 동성로교호로 갈 때 30대 중반. 목회자 양성원의 교수 요원 차 1973-1976년 기간에 Fuller Theological Seminary 유학, 1976-1978년 Condordia Seminary Th.M 과정을 마치고 Ph.D를 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귀국. 귀국해서 동성로교회 1년 동안 교회 건축 마무리했고, 이후 Concordia로 다시 가야 하는데 다른 사정 때문에 풀러 신학교로 갔고 원치 않던 선교학을 전공했으며, 마침 동성로교인 출신으로 LA에 이민 온 몇 가정과 총공회 교인들이 LA에 있어서 유학을 가자 바로 교회를 설립했고 학비도 해결. 당시는 원치 않게 선교학 박사 과정을 1982년 1월에 마치고 귀국. 결과적으로 선교학 박사 과정이 조직신학보다 평생 유용. 선교학 학위 때문에 강의 요청이 많음. 다시 귀국했을 때 광화문 부근의 총공회 사직동교회 부임. 이 교회는 총공회에서도 비중 있는 교회. 또 부산에 총공회 목회자양성원이 설립 되어 강의도 진행. 50년대 부산 서부교회 백영희 목사님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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