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일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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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일

내용 백영희의 전우 : 6.25전쟁. 국기배례. 위천교회...

참고 :


진학일 목사님 장례 일정(총공회/소식/12946)


강희주 사모님 별세 (총공회/소식10689)


국법을 바꾼 주일학교 서적 다운로드(초기화면/자료/출간목록/4)




 


■ 면담

이름: 진학일

면담: 2016.7.7. 13:00~17:00

장소: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유강길 9번길 62

방문: 이영인

 

■ 불신 가정

출생: 1930.2.17.생

본가: 거창군 가조면 도리 1203번지

성장: 가조국교 20회, 1944년 3월 20일졸

교사: 해방 후 초등교원 양성과정이 있어 1948년 봄 남일국민학교에서 진행 된 ‘경남초등교원

양성‘ 과정의 3개월 교육을 받고 위천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게 됨.

화랑국민학교 위치에 있었던 부산사범학교는 훗날 부산교육대학교로 전환

 

■ 가족

▪ 부인

이름: 강희주 사모님

출생: 1932.3.3.(실제, 1931.10.14.음력)

출신: 1951년 결혼

위천면의 강씨 마을인 당산이 본가였는데 부친이 사업 수완이 있어 위천에서 장사를

하다가 거창읍으로 옮겨 대창백화점을 운영. 그러던 중에 위암이 걸렸고 대구의

경북도립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쪽복음서를 보고 믿게 되고, 거창으로 돌아 와서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게 됨.

당시 임규희 영수가 북상교회 교인인데 임영수(설교록에 소개된 임영수)라는 이름으로

거창 교계에 유명한 분.

원래 부친과 친구여서 임영수님이 한부선 선교사의 거창읍 부흥회를 참석하도록 매일

데리러 왔기 때문에 참석. 임영수는 늘 한복 두루막을 입었던 분.

▪ 자녀

①진신덕: 1956년생. 대성중, 고신대, 미국 일리노이 목회 어바나 샴페인 (한인)새생명교회

손주: 보라 형진

②진신행(기행): 1959년생. 거창중, 거창고 재학중 부모님이 먼저 부산으로 이동하고, 천세욱

선생님 댁에 맡겼다 뒤에 부산으로 전학. 현재 부산외국어대 교수

손주: 유남 영익

③진신은(기은): 1962년생, 샛별초교 출신, 나머지 공부는 부산에서, 현재 포항재활의학병원장

손주: 보미 현창

④진신환: 1964.12.7.년생. 군복무 중 사고로 국가유공자. 미주 생활 중 별세 1996.12.20.

 

 

■ 위천 생활

▪ 위천국민학교

1948년 4월 1일. 위천국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고 3학년을 맡았으며 당시는 한 번 맡은

담임을 받으면 학년이 바뀌어도 계속 데리고 올라 가면서 졸업 때까지 가르치게 됨.

위천국민학교를 부임하면서 학교에서 2세 위의 천세욱 교사를 만났고, 천세욱 선생님 인도를

받아 천 선생님이 출석하던 위천교회를 출석했고 교회를 다니던 중 1949년 백영희 전도사님

부임.

 

전체 교사 중에서 천세욱 진학일 2명 교사만 교회를 다녔고, 다른 교사들은 잠깐 왔다 가거나 몇 달 정도 다니는 분들도 있었으나 교인이 된 경우는 없었고 여교사들도 마찬가지.

 

▪ 신앙

풍기진씨 순천공파, 유교에 완고하고 완고한 유교 가정. 가정의 전체 식구 중에서 처음 믿게 되었는데,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환란을 받게 됨.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믿고 나가게 되자 남아 있는 사남매 형제가 다 믿게 되고, 아들은 대를 목사가 됨

 

위천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이후 가북국민학교로 이동하면서 가북교회에서 세례 받고 세례 받으면서 바로 집사. 위천에서 결혼할 때는 학습만 받은 상태였고 신부는 세례 교인

 

■ 백영희 조사님의 부임

▪ 사택

1948년에 3학년을 담임했고 1949년에 4학년을 담임했는데, 백 목사님 자녀는 직접 담임하지 않았음. 당시 백 목사님 자녀 중 첫째인 백도광 장남은 서울대 법학과 공부, 둘째인 백순희 장녀가 거창여고를 다녔고, 셋째인 백은희 차녀는 위천국민학교 재학. 조사님과 사모님은 너무 좋은 관계였고 특히 조사님의 사모님 상대는 아주 좋았고 사택 분위기도 모두의 부러움을 살 정도.

 

▪ 교회

부임 당시 특별한 일들은 없었고 매 주일 설교 때마다 은혜를 받고 하루 성경 10장을 읽었는데 백 조사님이 새벽 종을 치라 해서 매일 그렇게 했으며 당시 뭐든지 말하면 ‘예’ 하고 순종이었으며 천세욱과 진학일 두 교사는 토요일마다 예배당 청소를 했으며

 

교회 주변 창촌 마을에도 신 씨가 있었고 황산에 신 씨, 강동에 정씨, 말매기에는 이씨, 모두 성받이로 이루고 사는데 그런 가운데 각 집안이 엄한데도 골고루 나왔으며, 주교 반사 중에 교사는 2명이지만 김시원 장로님 이만기 목사님이 당시 함께 주교 교사를 했음.

 

 

▪ 교인들

박춘만의 모친 염분이 권찰은 새벽마다 출석. 하루도 빠짐 없이 소리 없이 앉은 자리를 눈물로 고이도록 기도. 박춘만 박복만 형제와 딸 둘. 아버지가 가끔 교회 나와도 안 믿는 정도의 신앙이나 돌아 가실 때는 믿고 갔기 때문에 장례식에 진학일도 대매. 신덕범 모친 강덕이 기도하고 나면 늘 눈물이 고였으며. 김시원 모친의 정길성 집사님 마찬 가지.

 

▪ 국기배례 사건

① 출간도서

1997년 출간 된 ‘위천주일 국기배례’ 내용은 정확

다만 한 가정에 대한 내력에 이의가 있으나 고쳐서 출간하는 것보다 전체 흐름에서 빠져도 자연스러울 것이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② 박수복 지서장

위천 지서장이던 박수복은 2014년에 별세했고 부인은 살아 있으며. 박수복 씨가 동래 제일교회를 출석했고 부인은 권사님. 그 딸이 박명조로서 손창호 목사님의 사모님이 됨. 손 목사님은 센프란시스코에 생존해 있으나 사모님이 작년 별세. 박명조 딸은 위천교회 사건을 어렴풋이 알 것이고, 부인 김 권사님은 남편이 지서장 할 때 위천에 와서 살았으니까 중대 사건으로 기억할 것.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일반 사회 문제가 아닌 종교성을 띤 사건인데 당시 도지사와 대통령이 알 만한 이야기여서 평생 기억했을 것. 뒤에 교회를 출석한다는 말을 듣고 부인은 만났고, 사위 손창호 목사님이 진학일 목사님의 범천교회 목회 때 부목이었으며 범천교회에서 첫 아이 낳았음.

 

당시, 지서에서 호출이 있어서 교사 2 명과 주교생 전부가 불려 갔는데 지서에 가자 두 사람의 뺨을 때리며 왜 아이들을 유인 유혹 하느냐, 선생이 지도를 잘못 해서 감염을 시켰다. 뺨을 맞았음

 

③ 박해의 양상

학교에서 둘이 당한 일보다 각 반에 담임 선생님들이 반별로 학생들을 강압한 것이 큰 박해. 아이들을 위협하여 교회를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아이들도 있으나 믿는 집 학생은 괜찮았고 끝까지 행동을 함께 했으며

 

④ 신소남

부모님 조부모님이 엄격한 신 씨 가문

 

⑤ 타 교회의 경우

국기배례가 전국적 시행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교회들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당시 생각의 차이로 모두들 그렇게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훗날의 김해여고 사건도 3-40명이 문제가 되는데 그 때 간여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아는 장로님들이 있어서 내용을 알고 있음.

 

⑥ 두 교사

천세욱 선생님은 먼저 믿었고 진학일 선생님을 전도한 분으로서 매사에 앞섰고 진학일은 매사에 동지로 뒤따르면 함께 함. 부모님은 믿지 않았지만 천 선생님의 신앙은 확고했고 진 선생님을 지도하는 위치.

 

평소 두 교사는 누가 봐도 교회라는 간판을 머리에 붙여 놓은 생활. 교무실에 들어오면 두 사람의 책상에는 성경을 올려 놓았으니 한 눈에 표시가 또렷했고 만사 언행도 마찬 가지. 훗날 전쟁이 터지고 위천이 점령되자 숨어 활동하던 좌익들이 드러 났으며 생각하지도 못할 인물들이 평소 포섭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 났으나 두 교사에게는 공산당이나 빨치산의 접근이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표시가 됨.

 

국기배례 문제로 거창경찰서에서 아침 일찍 조사를 받으러 오라 해서 하루 일찍 가서 여관에 자고 갔는데, 당시 신중철 장학사가 장학사 중에서도 장학사로 인정 받는 인물로서 2 명 교사의 호출을 알고 먼저 경찰서에 들어가서 사찰계 계장 혹은 서장 중에 누구인지는 모르나 취조 과정에 교사 신분을 감안하도록 부탁했을 것으로 생각함. 당시 사찰계는 빨치산과 전시 상황이어서 사상범에 대한 취조는 조사 정도로 그치지 않고 고문을 통해 단번에 해결하는 것이 일상사. 형사 취조실로 가면 몽둥이로 때려 놓고 시작하며 전시 상황에 준하여 죽어도 말이 없던 때. 그런데 사찰계에서 인격적으로 대하고 험한 말로 진행하지 않았으며, 옆에 있는 다른 형사들이 그런 식으로 취조하지 말고 몽둥이로 때리고 핀잔을 주고 야유를 하여 분위기는 살벌.

조사 담당자가 고려신학교를 다녔던 사람인데 조사는 신사적으로 했고 성경의 신명기 5장과 출 20장을 펴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조서를 썼는데, 당신은 그렇게 믿어도 우리는 성경대로 믿는다 하며 맞섬. 하나님께서 예비 한 사람이며 담당자가 불신자거나 공산사상을 가졌다면 때려 놓고 시작했을 것.

 

⑦ 사석에서조차

초등학교 교장의 관사에서는 면직원이나 교사나 지서 직원이 한 번씩 놀기 위해 모이는데, 지서 차장은 당시 빨치산의 잦은 출몰 때문에 카빈총을 늘 메고 다녔으며, 국기배례 사건이 발생하던 초기의 어느 하루는 함께 대화를 하다 국기배례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는 절대로 신앙적으로 굽힐 수 없다고 했는데 당시 국기배례 문제가 위천면에서는 모두가 수군거리거나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토론적이거나 논쟁적일 때.

대화가 격해 지면서 절대로 굽힐 수 없다고 하는 순간, 지서 차장은 바로 총알을 장전하고 눈 앞에서 총구를 겨누며 ‘그러면 네 놈들은 공산당 아니냐’라며 바로 발사를 할 정도의 살기 띤 눈으로 노려 봤으며 무슨 자극이 주어 져서 충동적이 되면 일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어떻게 기독교인이 공산당과 같을 수가 있냐. 공산당은 무신론자인데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공산당과 같을 수가 있냐’며 맞서 버림.

 

평소 주변의 가까운 사람조차 전혀 모르고 살다가 사찰계에서 누구를 잡아 가면 그때야 유추하며 지난 날을 짐작해 보았고, 누구 누구 이름이 나오면 잡혀 가면 또 알게 되는 정도지 철저히 지하조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워도 알 수 없었음. 한 학교 교사들조차 그런 줄은 몰랐음.(1)

 

(1)면려청년회보지, 월간, 정홍석 목사님이 등사 출간하였는데, 위천교회 국기배례 보도. 파수꾼 이전

 

▪ 6.25 전쟁

① 점령지 3개월

전쟁이 났고 거창까지 시시각각 다가오는 소식을 듣고 피할 사람들은 미리 다 피했고 교회마다 피난을 갔지만 위천교회 교인들은 진학일 선생님이 알기로는 아무도 피난을 가지 않았고, 7월과 8월 그리고 9월 기간의 점령기간 내내 예배당에서 매일 3번씩 예배를 계속 드렸으나 죽는다 것에 대해 따로 생각을 한 적은 없었음. 밤에 예배를 드리는데 지서에서 나와서 잡아갔으며 당시 밤중에 그런 분위기에 그렇게 잡아가면 처형하는 것이 보통. 한 사람도 피난을 가지 않았고,

 

② 강희주 가정의 위천 이주

진학일 선생님의 부인인 강희주 사모님 가정은 위천에서 거창읍으로 갔다가 전쟁이 거창까지 미치며 거창읍에 첫 폭격이 있을 때 거창읍교회의 별관과 함께 집이 함께 폭격을 당했고, 이론 인해 이북에서 넘어 왔던 유기도 장로님이 별관에 거처하시다가 바로 돌아 가셨고, 강희주 사모님 가정은 친정인 위천의 당산 마을로 바로 피난을 오게 되었으며. 전쟁 기간에 친정의 고향에 거주하던 중에 위천교회를 출석하게 되면서 진학일 선생님과 1951년에 결혼

 

③ 산제리

점령 기간 중에 인민군들은 곧 부산이 점령 된다면서 의용군에 참가하라면서 밤마다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선동했고, 그들의 훈련소는 오도산 산제리에 있었는데 배추달 선생님이 순교한 곳.

 

④ 인민군의 퇴각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을 하게 되고 미군의 폭격이 계속 되던 시기에 교회의 지붕이 도단인데 교회가 폭격을 당하게 될 수 있으니 CHURCH라고 적자는 의견이 있어 흰베로 지붕에 적게 되었고 당시 백도광 장남도 함께 있던 시기. 지붕에 설치를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겠다는 의견과 함께 예배당이라ㄷㅎ 필요하면 폭격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 며칠 있다가 철거함.

 

⑤ 금원산 수색

수복 후, 하루는 경찰이 면민을 전부 동원하다 시피 하여 금원산을 수색. 초등학교에 전 면민을 집합 시켰고 밤중에 모두 금원산으로 동원하는 과정에 경찰들은 앞에서 총 매고 전투경찰도 있었으며 한 밤중에 걸어 가게 되니까 잠깐 쉰다고 앉으면 바로 잠이 들고, 걸어도 모두 졸면서 밤새 올라 갔는데 산등선에 올라 가자 해가 떴고, 산 꼭대기에서 전 면민들에게 산을 내려 오면서 빨치산 굴을 찾게 한 적이 있었음.

 

⑥ 결혼식(2)

(2)김시원(사직동교회, 현 고양, 동생 김유복은 지금도 위천 목욕탕. 김시원 89세)

전방에서는 전쟁이 계속 되는 중인데 결혼을 하게 됨.


 


1951.4.26. 위천교회 예배당에서 당회장 남영환 목사님의 주례. 예배당 아래채와 입구가 배경

2줄: 중앙에서 남영환, 우1 백영희, 우2 김시원, 우3 미상, 우4 이광휘 전도사님(진산교회)

중앙에서 남영환 좌1 이만기, 이종석, 신숙희(위천교인), 미상

1줄: 중앙에서 신랑의 우1 신덕범, 우2 이종희, 신부의 좌1 김덕분, 좌2 신부 모친, 신부 숙모

천세순(천세욱 여동생),

 

■ 전쟁 후


 


원래 위천교회 예배당은 입구 쪽에 창문이 있었고, 사진의 중앙에 양복은 진학일 목사님이며, 데리고 있는 딸은 1952년이므로 사진은 1954년

 

 

▪ 가북국민학교

전쟁 전의 국기배례 사건, 이어 진 점령 치하의 3개월 그리고 인민군이 물러 간 뒤에 천세욱 선생님이 거창군 가북면의 가북국민학교로 전근을 갔는데 천 선생님에 이어 진학일 선생님도 가북국민학교로 발령, 가북의 근무 중 천세욱 선생님은 웅양국민학교로 먼저 전근을 가게 되고 진학일 선생님은 1954년에 목회자로 출발하기 위해 교사직을 사면하고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지원

 

▪ 가북교회

① 교회

가북교회는 면 소재지에 위치했으나 교회 주변에는 할머니 2~3명이 살고 교회를 맡은 장병용 전도사님 부부가 자녀 2명을 데리고 있었으며, 실제 교회의 주력 교인들은 가조면에 가까운 용산리에 거주하였으므로 용산에는 기도소를 두고 가북교회에서는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고 나머지 주일과 수요일 저녁 예배와 매일 새벽예배는 10리가 떨어 진 기도소에서 16명 정도의 용산 교인들이 예배.

 

② 목회적 신혼

위천에서 막 결혼은 했으나 신혼의 첫 살림은 가북면 소재지의 학교 쪽에 살아야 했으나 용산리의 교인들 때문에 첫 신혼을 용산리에서 지냈고, 위천교회에서 주남선 목사님께 학습만 받은 상태에서 가북으로 부임하여 용산리 기도소를 통해 예배를 인도하며 사실상 목회에 준하는 생활하여 부목이나 전도사 역할

 

③ 세례와 집사 임명

천세욱 선생님이 웅양국민학교로 발령이 난 후, 남영환 목사님이 12월 연말 순회를 왔다가 집사 임명을 하려 했는데 세례도 아직 받지 못했다 하자 그 자리에서 세례를 베풀고 집사로 바로 임명함. 집사 임명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제가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것이 무슨 말인고! 지금 설교까지 맡고 있는 사람이!’ ‘전쟁 통에 주 목사님까지 돌아 가셨고 순회도 없었습니다. 저는 학습 교인입니다.’ 여러 면에서 초기였고 엉성했던 시절이었으니 절차와 형식은 보잘 것이 없었으나 이미 이들의 신앙은 사선을 넘고 세상 모두가 두려워 하던 사찰계의 고문과 인민군 빨치산의 살해 위협을 넘어 선 상황이었으므로, 신앙이 앞서 가고 제도가 뒤를 따른 상황. 초대교회적 모습일 것

 

④ 이대용 집안

교인 중에 신앙 있는 분으로는 이대용을 기억하며 바로봉에 살면서 새벽예배 한 번을 빠지지 않았으나 부인은 믿음이 없었고 아들은 이덕조. 註 후에 창동교회로 이주, 개명 이재순 사돈

 

⑤ 제상세 집안

현재 고신교단의 부산한울교회 제인출 목사님과 창원 가음정교회 제인호 목사님의 부친이 되는 제상세 장로님. 그 본가가 가북 용산이었고, 신혼 살림은 그 아래채. 부친 제 집사님과 모친 신 집사님은 배운 것이 없으나 신앙생활은 잘했고 가정이 너무 가난하였으며 형님이 돌아 가셔서 부모 형님 집까지 합하여 7~8명의 식구 때문에 상세 아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으나 한 집에 살았고 교인이어서 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게 됨. 훗날 거창에 살면서 어려웠을 때 목사님 때문에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서 일부로 큰 절을 한 적이 있음. 5학년 때는 담임.

 

■ 목회 생활

▪ 고려고등성경학교, 1954년

① 목회로 인도하심

남들이 보면 국기배례 사건이나 6.25 점령치하를 모두 넘어 섰기 때문에 굉장한 신앙으로 봤을 것이나 정작 본인은 목회자나 성경학교 신학교 등을 생각하면 부러운 마음이고 선망만 했을 뿐. 본인의 길이라고 마음을 가진 적은 아예 없었는데 어느 날 주님의 인도를 받고 부인에게 교직을 그만 두고 성경학교를 가겠다며 불쑥 말을 하게 됨. 성경학교를 가기 불과 2일 전.

가북국민학교를 사직하고 바로 고려고등성경학교로 진학했고 원래 3년 과정이나 4년에 마침. 이미 성경학교는 며칠 전에 개학을 했기 때문에 어느 여자 분과 함께 시험을 따로 치고 함께 입학.

 

② 부산 서부교회

교사를 사직하고 갑자기 성경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자 학교가 있던 부산을 가야 했고, 강희주 사모님은 백 조사님이 계시던 서부교회의 사택에 사모님과 몇 달을 함께 살게 되면서 부산에 계신 백 목사님의 가정을 생활 속에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 당시 밖에서는 조사님의 가정에 대해 별별 소리와 비판이 있었지만 사택에 살던 강희주 사모님은 가정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무슨 문제라는 외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교인들도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일이 없고 모두 은혜롭게 잘 있었음. 노회의 오종덕 목사님 등이 백 조사님이 어디를 갔니 어떻게 했니 하는 말로 자꾸 말이 퍼진 것. 註 최근까지도 고신에 남아 있는 모략적 비판에 대한 설명

 

김용학 집사님은 부자였고, 백 조사님은 교회에 교인들이 많고 아이를 낳아 아이도 울고 피난살이들로 밤낮이 없을 때여서 따로 쉴 공간도 없어 이말출 집사님 댁에 가서 쉬고 성경도 연구하는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사모님이 의부증이 있다거나 시기심이 있어서 내외가 만나면 늘 불화가 있다는 말도 있고 주먹이 오갔다고 했으나 이미 사택의 아이들은 다 컸었던 시기.

 

사택에 거주하던 강희주 사모님은 이말출 집사님이 조사님을 위해 아침마다 녹용을 달여 가지고 덮어 오면 직접 받아서 드리는 정도로 가족처럼 살아서 사택의 내면을 잘 파악할 수 있던 위치. 註 아무 문제도 없는데 고신에서 모략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 오늘까지 유포됨

 

▪ 거제 삼거교회, 1955년

1955.5. 거제도 일운면 삼거리 삼거교회, 6개월을 목회했고 성경학교를 위해 배를 타고 다님

 

▪ 김해 북섬교회, 1955년

1955.11월, 김해 대동면 예안리 북섬교회(지금 예안교회)으로 이동. 이 곳에서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신학교에 입학

 

▪ 창원 용원교회

1959년,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 용원교회에서 신학교를 다녔고

1962.12.18. 고려신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식장을 찾아 와서 너는 내 것이라는 이사야 성구를 쓴 것을 주시며 축하함.

 

▪ 거제 송진교회,

김해 대동의 육지 생활에서 거제도 송진교회로 부임하여, 섬으로 다시 들어 감

 

▪ 안동 운산교회

1965.9.8. 목사 안수

 

▪ 대전 한밭교회

1965.11.25.-1968.10.29.현재 한밭교회는 당시 삼선교회로 2대 목회자로 부임했고, 훗날 천세욱 선생님의 사위인 김덕복 목사님이 목회한 곳

 

▪ 하동 진교교회

1968.10.30.-1972.2.20.

 

▪ 거창 창남교회

1972,2,21,-1974.9.

 

▪ 부산 범천교회

1974.9 - 1987.4.

범천교회에 화란에서 보내는 지원금이 있어서 몇 가정을 도왔는데, 손양원 목사님의 유가족으로 손동장 가정도 조금 도울 수 있었음.

 

▪ 미국 목회

1987년 4월 30일, 이민을 가기 위해 날짜를 받아 놓고 서부교회 백영희 목사님께 5층으로 인사를 갔으며 이경순 사모님의 버선도 기워 살고 그 사무실에 방석밖에 없던 분인데, 미국의 목회생활에 사용하라고 10만원을 건네 주며 ‘신앙의 동지’라 함

 

▪ 귀국

2005.8.5.

 

■ 여러 말씀들

▪ 면담 내용을 소개할 때

할 수 있는 대로 백영희 목사님의 지도를 쓰고, 천세욱 진학일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으면.

 

▪ 최재진 목사님

부인 박숙자 사모님이 안동에 있을 때 교인이어서 최재진 부부의 결혼을 주례.

 

▪ 신도성 씨 아들

신도성 씨 아들이 천세욱 선생님의 제자


 


제목: 김시원 장로님 결혼식 사진

장소: 북상교회 예배당

인물: 김시원 옆 천세욱중앙에 백영희 조사님, 황보유안 전도사님, 그 사이에 박기천 전도사님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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