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관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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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관

내용 박윤선, 이인제목사님을 상대로 총공회 신앙노선을 지킨 분으로 평가될 분

신도관


1.신상


1930년생

대구 복음외과 원장

1981년부터 장로님으로 동성로교회 목회

2001년 목사 안수


2.초기신앙


양산 통도사 바로 위쪽 지산리가 고향이어서 집안 불교가 대단. 그러나 모태 신앙으로 부산으로 이주. 영도제일교회에서 주일학교. 그 교회는 김길창, 한익동, 한명동목사님으로 이어졌고 한익동목사님 시절 주일학생, 해방 후 신앙학생 10명으로 조직된 '신앙협조회' 일원이 되었으며 주도는 거창고등학교 전영창교장. 이 조직이 해방 후 교계 개혁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고신교단의 가장 큰 개혁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낸 SFC(전국학생신앙운동)가 됨. 이인재목사님의 새벽기도가 계속되던 한 주간 부흥회에서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적 운동으로 이어짐. 이 운동의 핵심 학생 출신들로서 이원홍 전KBS사장, 김봉호 서울대교수 등


학생운동의 초기 10명 회원 중에는 서부교회 한동희가 있었고 그와는 이견이 많았는데 고려파 원로목사님들도 서부교회는 좀 이상하다는 말이 많았기 때문에 인상이 좋지 않았음. 대구 경북의과대학 진학으로 대구로 생활을 옮기게 됨


3.대구고신운동의 주도 서문교회시절


대구로 생활을 옮기게 되면서 고신교단이 총회측과 분리되기 전 서문교회를 출석했고 그곳에는 한명동, 전칠홍목사님이 부목사로 있던 곳이어서 당시 부목 전칠홍목사님 댁에서 생활, 이후 고신이 총회에서 제거되면서 서문교회 박복달, 신정순, 김계초 등 대구의 신앙가들과 전칠홍목사님이 서문로교회를 개척하였고 한명동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 당시 대구는 남산교회 제일교회 서문교회의 교세가 3각. 서문교회와 나란히 하던 제일교회는 대구에서 유력했던 최제화목사님 교회였고 그곳에서는 성남교회가 고신으로 개척하였는데 우동팔집사님 주도했고 이인제목사님을 담임으로 청빙(이인재 전기에는 1960년 서울성산교회, 1962년에는 대구성남교회 부임으로 기록). 학교관계로 신도관은 서문로교회, 아내될 분은 성남교회 출석하였고, 1956년 결혼하고, 그 이후 성남교회로 출석하면서 이인제목사님과 백영희조사님의 신앙연결을 직접 보게 됨.


4.이인제목사님과 동성로교회


고신의 지도부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있던 백조사님을 전폭으로 지원하던 이인제목사님은 결국 함께 제거되기 시작. 이인제목사님은 교회 부흥회를 자주 열었고 강사로는 백조사님만 계속 청하고 있었음. 왜 부흥강사를 유독 백목사님 한분만 청빙하느냐고 신도관이 이인제목사님에게 문의를 하는 정도. 이목사님이 백조사님을 따르던 절정기였고 교인이 200여명이 되어 대단히 은혜로운 상태에서 교회 내 장로 장립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고신과 결별하게 되면서 교회 명칭은 고신이 그리고 교회 별관을 받아 그것으로 현 동성로교회 자리를 매입. 동성로교회가 개척. 이인제목사님이 적극적으로 백목사님 노선으로 서고 있었으나 사모님의 입장은 고신핵심적이었고 이목사님의 입장은 때로 혼동


5.박윤선목사님과 동성로교회의 중생교리 논쟁


개척을 주동한 우동팔장로님은 공장을 경영한 대구분이며 부인은 유분선권사님. 원래 자기 집을 대구로 출장오는 고신 목회자들의 여관이라 불렸던 대구의 고신 핵심. 고신에서 장로안수. 개척초기부터 한동희조사님이 부산에서 파송되었으나 그는 중생 교리 문제에 대하여 백목사님과 반대되는 입장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인제목사님도 기우려지고 있었음. 이미 서울 삼각산기도원에서 백목사님은 이인제목사님과 이병규목사님으로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입장을 문서로 확인해 두고 있었는데 이 문제가 다시 대구에서 제기. 신도관은 분란을 원치 않은 입장이었고 우장로님은 백목사님에 대하여 확신. 신도관은 신앙양심상 당시로는 중생교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이런 상태에서 일단 교회를 안정시키는 것은 교리보다 은혜면만으로 나가자는 주장이었고 그 결과 이인제목사님을 모신 상태에서 교회를 일단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박윤선목사님을 모시기로 하고 일단 교회 내에서는 중생교리 문제는 언급치 않기로 약속.


6.동성로교회의 공회소속은 교리문제


박윤선목사님은 수개월이나 이인제목사님을 도와 교회를 백목사님측에서 돌려보려고 노력. 박윤선목사님은 설교 도중 영혼의 범죄를 말했고, 모서리는 죄를 짓지 않으나 안에서는 죄를 짓는다는 표현이 나오게 되자 교회에서는 이의를 제기. 우동팔장로님은 백목사님의 중생교리를 교회는 사수한다고 선언. 결국 교회와 박윤선목사님의 대립이 있게 되면서 박윤선 목사님 사택의 아이가 경기를 하여 죽게 되었고 이 건에서 박목사님은 깨닫는 바가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며 얼른 사임하고 회귀.


한국교회 최고의 성경학자라고 오늘까지 인정받는 박윤선목사님까지 모셔놓고 수개월 각고노력하고도 교인들의 중생교리를 이길 수 없게 되자 이인제목사님과는 나뉠 수밖에 없게 되고 백목사님을 지지하는 교인은 예배당을 두고 나가서 개척키로 이인제목사님께 통고한 뒤 부근에 있던 우장로님 공장에서 예배를 보게 되었고 백목사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용으로 설교한 기억. 지지하는 교인이 미미했던 이인제목사님은 자진 사표를 냈고 그후 나와서 예배 보던 이들이 다시 예배당을 인계받고 김병도목사님이 파송되어 총공회 교회로 정식 출발. 이미 대구지방에서는 백목사님의 중생교리로 대단히 소란. 동성로교회의 공회 소속은 정치나 인간적 친소관계보다 교리문제가 근본.


7.이후 대구지방의 공회형성


이인제목사님이 동성로교회를 개척하던 때 달산교회 부근이 완전 벌판이었는데 이곳으로 백태영목사님을 안내 개척, 후임이 백영침목사님, 고려파와 교회 분쟁. 덕수교회가 대구에서 공회측 교회로는 3번째이며 동성로교회는 십일조로 지원. 원동교회는 동성로교회의 박선경집사님이 집을 팔아 교회를 하나 세우겠다하여 송용조목사님 시절 대구지방에서 지원. 대구지방에는 이미 박윤선목사님이라는 보수교계 전체가 인정하는 성경학자가 중생교리를 반대했고 한종희목사님은 대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백목사님을 극단적으로 비방. 송용조목사님 도미 유학을 위해 개인적인 지원을 많이 했고, 백목사님이 유학가는 송목사님에게 중생교리에 대한 자료를 많이 가져오기를 당부, 1차 도미 때는 그러했음.


8.백목사님의 지도


공회에는 오랫동안 장로가 없었으나 단일교회의 장로라는 입장보다 공회 전체적 장로의 입장으로 안수. 이후 줄곧 목사 장립 받고 목회출발을 요구하심. 비록 목회는 하지 않아도 교역자회의에는 매월 참석. 원래 의사가 된 것은 하나님 앞에 특별 약속했던 바이어서 목회를 사양. 이재순목사님이 이동되어 간 1981년 백목사님은 잠깐 동성로교회를 장로로서 강단을 맡으라고 하신 뒤 20년간 후임이 지원되지 않아 결국 장로로서 2001년까지 동성로를 담임목회. 2001년 3월 대구공회에서 목사로 정식 안수받고 대구공회의 양성원장까지 담당.


9.초기 백목사님에 대한 기억


진리에 대해서는 아주 깊이 분석했던 것을 기억. 합리적인 해석. 다른 목사님들은 일반적인 설교였으나 그분은 교리에 대해서 철저하고 주권을 앞세우는 성경해석으로 이인제목사님과 두 분이 앉자 계실 때 토론을 듣고 부산 목사님 의견이 더 옳다는 표현을 어린 시절이어서 드렸던 기억. 목사님은 독특했고 설득력이 있었으며 이인제목사님은 은혜롭고 영감이 풍부. 부산 목사님 설교는 합리성, 논리적. 평생 백목사님께서 과분한 대우로 상대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자신을 기르기 위해 했던 일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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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2021-02-20 14:26

신도관- 성남교회 -> 동성로교회



** 1952 년에 개척한 성남 교회가 74 년에 예배당을 이전하면서 이름을 성동 교회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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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동교회 연혁 - 홈 인용

http://www.dgsd.or.kr/korean/viewforum.php?f=89&sid=da4023af3c0386dce4e67b170c9c6835



교회의 발자취

1950년대


1952. 01

첫 주일에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한 고경희 권사, 임장실권사, 조신명집사, 송은경집사 등 9명이 덕산동 임시 예배처소 신일이발관 2층에 모여 당회장 오종덕 목사의 인도로 성남교회 발족예배를 드리다.


1952. 04

성남교회를 설립하다.

(중구 동성로 91번지 / 대지 100평, 건평 30평)


[ 제1대 이인재 목사 ]

1953. 01. 08

성남교회 헌당식 및 이인재 목사 위임식 (1960. 12. 6 사임)


1955. 04. 06

성경환 전도사 부임하다.


1957. 10. 08

박현진 전도사 부임하다.





1960년대


1960. 11. 07

경북노회 제2차 임시노회에서 숭동측과의 합동여부를 37:1로 가결하다.



[ 제2대 손영복 목사 ]


1961. 05. 15

손영복 목사 임시목사로 부임하다. (1961. 11. 23 사임)



[ 제3대 김세영 목사 ]


1961. 12. 06

김세영 목사 담임목사로 부임하다.


1962. 11. 08

백남규, 박등호 제씨의 장로장립식을 거행하다.


1962. 11. 10

성남교회 당회가 조직되어 제1회 당회를 시작하다.

(당회장 : 김세영목사, 당회원 : 백남규, 박등호 장로)



[ 제4대 박정덕 목사 ]


1962. 12. 30

박정덕 목사 청빙 (당시 강도사)


1963. 05. 16

박정덕 목사 위임식 (1968. 9. 28 사임)


1963. 09. 03

환원을 위한 제22회 노회에서 '경북노회(고신)'로 환원하다.


1965. 02. 11

최성순 여전도사 부임하다.


1967. 02. 20

김윤식, 홍승학 제씨의 장로장립식을 거행하다.



[ 제5대 한학수 목사 ]


1968. 11. 22

경북노회 제32회 제1차 임시노회에서 한학수 목사의 청빙을 허락하다. (1971. 10. 5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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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07. 11

성남교회당의 신축 가공예배를 드리다.

(신암4동 257-1/대지 412평, 건평 415평)


1974. 10. 08

교회명을 ‘성동교회’로 변경하여 이전 감사예배를 드리다.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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