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요한
내용 | 김현봉, 이병규, 백영희를 모신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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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차요한
일시: 2011.10.19. 10:30-12:30
이름: 차요한(본적, 차주완)
생년: 1938.9.2.-2013.2.12.(임종은 13.8.8.확인)
가족: 고은희 사모님, 1남(69년생, KT 미국 LA지사 근무) 1녀(합동 부목 사모)
세례: 1960-61년 서울 성은교회 백영익 조사님 목회할 때 백영희 목사님께 받음
고향: 충남 예산군 오가면
주소: 대전역, 동구 판암동
■ 1950년 - 신앙 출발
- ‘오가 교회’
초등학교 때 고향에 ‘오가영문’이라는 구세군 교회의 주일학교 출석.
- 구세군
교회를 군대식으로 운영. 교단 본부를 본영이라 하며 영국에 있고 각 교회의 연보는 전부 위로 보내고 또 사용할 돈도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군대식 교회. 세례 받는 것을 예비병 입대식이라는 세례 대신 절차 통과.
■ 1955년 - 서울 생활
- 무작정 상경
1955년 부친 사망으로 서울 생활 시작. 가정이 다 믿게 되었는데 중학교 졸업하던 해에 부친이 돌아 가셨고,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작정 상경.
- 옳은 곳을 찾아
서울에서 살게 된 곳이 서대문구 홍은동인데 구세군 교회를 찾으려니 멀었고 그 동네에 성결교회가 있어 출석. 어디든 잘 믿는 곳을 찾아 다녔는데 감리교도 가 보고 장로교 여러 교단들 경험. 군 생활을 강원도 양구에서 하면서 새벽 기도를 참석하면서 어느 날 중생의 체험을 하고 이후에 신앙에 불이 붙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는지 이 마음뿐이었고 제대를 하면 서울로 돌아 갈 터인데 서울에서 제일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던 중, 고신이 제일 잘 믿는다는 말을 듣고 고신 소속 양구중앙교회를 출석했고 담임이 홍용희 목사님인데 제대할 때쯤 내수동교회 홍근섭 목사님을 사경회 강사로 초빙했고 큰 은혜을 받아 제대 후에 홍 목사님의 내수동교회를 출석.
- 내수동교회 홍근섭 목사님
1960.9.20. 양구에서 군 생활을 제대하고 서울의 홍제3동 문화촌에 살면서 홍근섭 목사님께 배우려고 내수동까지 10리 더 되는 예배당으로 새벽 예배를 걸어 다님. 신앙의 불이 붙어 정신도 없을 때고 물불 가리지 않던 시기.
- 성은교회 백영익 조사님
내수동교회가 원래 공회 백영희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인 줄도 모르고 홍 목사님만 알고 다녔는데 어느 날 내수동교회는 고신이고 고신에서 백영희 목사님을 트집 잡아 쫓아 냈다는데 고신보다 잘 믿는 백 목사님 계통 교회가 최고며 바로 주변으로 개척을 나간 것이라는 말을 듣자 바로 있는 백영익 조사님의 성은교회를 찾아 감. 1960년 말에 성은 교회를 찾았고
- 백영희 목사님 세례
1961년 신년행사 세례 성찬에는 부산의 백영희 목사님께서 성은교회에 순회 왔고 이 때 세례를 받음. 구세군 교회에서 세례에 해당하는 ‘예비병 입대식’을 거쳤으나 물로 안수 받는 절차가 없었으므로 내용을 살핀 목사님께서 세례를 주심. 세례 연도는 정확하게 1961년. 세례 받을 때 백 목사님께서 성경을 몇 번 읽었냐고 물어 본 것이 가장 기억. 그 때 제대로 읽지 않았고 중요성도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백 목사님은 성경 100번 읽으라는 분, 나는 33번까지 읽음.
-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님
성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막 출발하며 얼마 되지 않던 1961년 정도에 잘 아는 친구 김석대 백영희 목사님보다 더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님이라고 했고 아현동까지 걸어 감. 아현교회로 확정을 하고 백영익 조사님에게 가겠다는 말을 하자 백영익 조사님은 아현교회가 문제 있는 곳이라며 극구 만류. 김현봉 목사님은 멀리서 봐야 하지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하심. 덧붙여 백영익 조사님은 차요한 김석대 두 사람을 보고 목회한다며 만류. 그래도 뿌리치고 바로 아현교회로 소속 전환을 결행. 오직 제일 잘 믿는 쪽을 소망하는 마음만 있을 뿐.
■ 김현봉과 백영희
- 아현교회
20리 길이 되는 아현동까지 걸어서 갔는데 교회 안에는 가마니를 깔아 놓았고 예배당 실내에는 기둥이 수십 개나 되었는데 예배당을 따로 짓지 않고 집을 사들여서 지붕을 잇고 기둥은 그냥 둔 상태. 마이크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설교 내용도 듣기 어려워 친구와 함께 갔다가 뭔지 모르고 그냥 왔고
그 친구가 그래도 또 한 번 가보자 해서 다음 날 또 갔는데 마르다와 마리아 설교를 하는 중에 큰 은혜. 그날 저녁에 바로 백영익 조사님을 찾아 가서 아현교회로 간다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위협을 했다가 달랬다가 최선을 다하시는데 이미 말씀에 붙들렸으니 돌이 킬 수 없었음.
- 신앙생활
김현봉 목사님을 찾아 아현교회로 오겠다 하니까 다른 목사님이라면 무조건 좋아 할 터인데 목사님의 첫 마디는 ‘백영익 조사님이 섭섭해 할 텐데?’ 그런 목사님이 있을까? 없을 것.
직업은 을지로 4가에 있는 인쇄 계통에서 일을 하며 아현교회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아현교회는 오후 5시면 문을 걸어 잠그고 취침에 들어 가는데, 토요일에 교회로 가면 다른 때는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자는데 김현봉 목사님이 시켜서 뒷문에 문고리를 빼 놓고 차요한 들어오도록 배려. 좀 추울 때는 목사님께서 밑에 교인을 시켜서 요와 이불을 하나 어디 갖다 놓도록 시키고 또 내일 아침에 밥 먹을 거니 밥 준비까지 다 시켜 놓음.
- 머리 깎기
이병규 목사님은 김현봉 목사님 밑에서도 머리를 깎지 않았는데 김 목사님은 그런 이 목사님을 두고 엉터리라 함. 배우긴 배워도 엉터리라 한마디로. 그 곳에 있으려면 머리를 깎아야 제대로 배움. 김 목사님이 깎는 것을 좋아하니까. 나중에는 머리를 그냥 길렀는데 지금 병난 뒤로 귀찮아서 짧게 깎음.
평생 경험이 김현봉 목사님이나 백 목사님처럼 지금 최고의 스승이 계시면 무조건 가서 배우는 것이 났지 내가 연구해 봐야 얼마나 발전이 있겠는가? 그러나 스승이 없으면 내가 연구. 에디슨이 전기 하나 발견하기 위해 11만 번을 실험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후배는 항상 5 촉짜리 전구만 켜고 있을 것인가? 형광등도 만들고 인터넷도 발명해서 나가야지.
- 백 목사님의 아현교회 집회 참석
김현봉 목사님을 안 뒤에는 모든 예배나 집회를 철저히 참석했는데 백 목사님이 김현봉 목사님 집회를 참석한 것은 삼각산에서인지 한 번 뵌 것 같고 아현교회에서는 본 기억 없음.
- 김현봉 목사님의 책망
김현봉 목사님께 가서도 백 목사님 집회를 계속 다녔는데 한 번은 김 목사님이 부르시고 아현교회에 와서 있어 봤자 변화가 없는 것은 양 쪽을 왔다 갔다 해서 그런 것이라고 책망하시며 양자택일하라는 식으로 말씀. 차요한은 속으로 생각할 때 백 목사님께 배우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김현봉 목사님은 연세가 80 세니까 얼마 살지 못하실 것이고 돌아 가신 다음에 다녀야 하겠다고 생각.
- 월요 교역자 성경공부
아현교회에서는 매주 월요일에 교역자가 모이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었는데 몇십 명 정도가 회집. 백 목사님을 비롯하여 공회 목회자들을 본 기억은 없음.
- 이병규 목사님
1961년 이후 당시 서울에서는 삼각산 2회와 관악산 1회 집회가 있었고 삼각산의 1 년에 2 회 집회는 백 목사님이 강사였고 이병규 목사님은 앞에 나와서 사회를 하는 정도. 당시 교역자 상대의 성경 공부가 있었는데 이병규 목사님은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와서 배우는 사이
- 김현봉 목사님의 오해
백영희 목사님이 삼각산 집회 할 때, 당시 이병규 목사님이 은근히 백 목사님을 좋지 않게 상대할 때였는데 백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감탄사라고 설교.
그런데 김현봉 목사님이 그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설교하면서 ‘감사 찬송’이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런 설교를 이해할 사람도 없었고 어떤 목사님은 김 목사님을 좋아서 따라 다니다가 이 설교 때문에 실망했다는 말까지 나온 정도. 그런데 얼마 후에 백 목사님 집회 도중에 백 목사님이 자기가 연구한 것이라며 그 설교를 하자 이병규 목사님은 김현봉 목사님이 설교한 것을 백 목사님이 자기 것으로 거짓말 한다고 전하고 오해 받을 상황..
그런데 차요한은 따로 아는 한 서부교회 청년에게 미리 듣고 아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김현봉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는 것을 듣고 백 목사님께 가서 필기한 것을 전하자 백 목사님이 그 말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내가 그 성구를 그렇게 깨닫고 있었으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소란만 날 것이어서 발표만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말을 전해 듣고 용기를 얻어 설교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병규 목사님은 괜히 오해만 했고 김현봉 목사님에게 잘못 전해서 이간한 것이 됨.
- 장례식과 이병규
김현봉 목사님이 돌아 가셨는데 이병규 목사님이 장례식을 관리하면서 백영희 목사님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았고, 뒤 늦게 알게 된 백 목사님은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서 홍제동 화장터에서 있었던 장례 예배에 겨우 도착하여 차요한 옆에 앉았으며, 장례식에 기도 한 번도 시키지 않음. 김현봉 목사님 사후 아현교회에 일어 난 모든 일을 생각해 보면 철저하게 교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 백 목사님이 걸림이 되어 제거하는 노력은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면에서 시도.
이병규 목사님은 아현교회 김학조 조사님과 손을 잡고 아현교회를 붙들기 위해 행동. 이병규 목사님이 오후에 설교하러 가면 미리 지키고 섰다가 반대하는 사람들을 막아 섰으며 아현교회 싸움은 시작. 김현봉 사후 제일 먼저 갈라져 나온 것이 창광교회이며 450 명 정도로 기억. 그 다음 염천교회 신촌교회 여러 교회들이 복잡하게 분열.
- 백 목사님의 처신
그 후 백 집사님이라는 분이 백 목사님을 초청하여 삼각산에서 사경회를 하고 싶으나 백 목사님을 알지 못한다 해서 차요한에게 부탁했고 백 목사님께 집회를 청했는데 ‘지금 서울은 이병규 목사님이 다 주관하고 계시니 이 목사님이 서울 쪽을 맡고 나는 부산 쪽이나 맡겠습니다.' 하여 거절하심. 장례식에 온 줄 알면서도 기도 한 번 시키지 않고 아현교회 전체의 사후 처리를 주관하던 이병규 목사님을 보며 백 목사님은 접촉을 피함.
김현봉 목사님 사후 아현교회가 너무 걱정스럽게 돌아 갔고 이병규 목사님이 그 중심에 있었으므로 전체 방향이 하도 걱정이 되어 백 목사님께 편지. 역시 백 목사님의 답변은 지난 번과 같이 목사님은 부산 쪽을 맡겠으며 서울은 이병규 목사님이 맡으면 된다 하시고 차요한에게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해서 도와 달라고 답장. 편지로 오갈 때인데 백 목사님께 목회 성공의 비결을 물어 보니까 답장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씀을 주셨는데 제일 첫째가 물질 성결을 말씀했고 둘째가 이성 성결 그리고 충성을 말씀. 내나 그 편지에 책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자 책 한 권의 이름을 적어 보내 주심. 읽어보지는 못함.
- 김현봉과 백영희를 비교한다면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면 김현봉 목사님이 ‘백영희 목사는 지식 중심’ ‘이병규 목사는 허우대는 좋지요.’라고 표현.
김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야단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백 목사님이나 이병규 목사님을 강단에서 설교 중에 치면서 했던 비판. 이병규 목사님은 체격이 큰 분인데 그 신앙을 평가하며 ‘허우대’를 말함.
백 목사님은 논리가 철저. 칼빈이 구원에 대해서 하나 밖에 몰랐으나 백 목사님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봤는데 김현봉 목사님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건설구원 상 받는 구원을 말하는 것보다 실제 자기가 그렇게 한 분. 양심을 써라 소리를 많이 했지만 양심을 써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데, 하여튼 김 목사님의 백 목사님 비판은 그러함. 김현봉 목사님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행함이고 백 목사님은 철저한 논리. 그러나 순서는 논리가 먼저니 바로 알아야 그 다음 행할 수 있는 것.
배우는 사람 입장에 깨닫게 하고 이치를 가르 치는 것이 백 목사님. 김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양심이란 단어가 안 나온 설교는 없는 정도. 듣는 사람의 변화.
■ 강원도 양구송천교회 목회 출발
- 부임
1966년, 김현봉 목사님 사망 다음 해에 이병규 목사님의 창광교회 교인으로 있었고 당시 창광교회는 예배당 건축 중이었는데 교인으로 있던 나를 양구 송청교회에 목회자로 청빙하러 홍영희 목사님과 장로님이 방문. 홍 목사님이 원래 고신에 계셨는데 김현봉 목사님을 모시고 사경회도 했고 소속은 독립교회 비슷한 모습. 일단 교회 소속은 합동에서 나왔고 홍 목사님은 합동 교단으로 개척 나가면서 후임으로 차요한을 생각했고 당시 그 장로님도 합동 측에 실망하고 그 교단에서 나오면서 차요한을 후임으로 동의한 것. 두 사람이 의논한 것도 없이 오심.
- 결혼
양구에 있던 1968년에 결혼하고
- 소속
부임한 후에 이병규 목사님 계통이 되었고 이병규 목사님이 당회장으로 집회도 인도함.
- 신학
1968년 대한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백영희 목사님과 이병규 목사님은 대한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이 목사님은 단독 신학교를 생각했고 그래서 1967년 창광교회에서 성경학교를 먼저 시작한 후 1969년에는 계약신학교를 설립하자 이병규 목사님이 입학을 원해서 계약신학교를 새로 시작. 성경학교의 경우는 안길옹 목사님이 전담한 정도. 계약신학교 3 년을 공부.
- 이동
양구에서 시내 한복판에 예배당을 짓고 빚이 좀 있게 되는 문제도 있었는데 마침 친구 김석태 목사님이 올 수 있어서 부임 시키고 1971년에 서울로 왔는데
■ 순천 남문교회
- 박래석 목사님의 후임
1971년 양구 송청교회에서 서울로 나와서 이병규 목사님에게 갔는데 그 자리에 신학을 함께 한 박태환 목사님이 보고 차 들어 와서 함께 만남. 얼마 전 순천 남문교회 박래석 목사님이 여수 신풍교회에서 순천 남문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회를 나갔다가 쓰러졌고 후임이 필요해서 박태환 목사님을 파송하고 사례금까지 결정해 놓았는데, 박 목사님이 순천을 다녀 왔다면서 불과 한 주간만 있었는데 그 곳에 가니까 오로지 ‘이교부 조사님’ 말만 해 대어 ‘이교부’ 문제로 한 주간 싸우다시피 하다 돌아 왔다며 그 곳에서 목회 할 자신이 없다며 돌아 온 상태. 남문교회를 가니까 교인들이 모두 ‘이교부’ 조사님이라는 말만 하는데 그 영향력이 너무 커서 목회를 못하겠다 함. 남문교회에는 이교부 처남 유완종 청년이 있었음.
박태환 목사님이 못 가겠다고 하니까 바로 다음 주일에 차요한 조사님이 가서 예배를 인도하라 하여 돈 5천 원을 아내에게 받아 1971.12.4. 토요일 순천으로 내려 갔는데, 신풍교회 서천석 집사님이 연락을 받고 순천 남문교회로 와서 나를 꽉 붙잡고 남문교회로 와야 한다며 강하게 부탁. 교인들이 대부분 신풍 출신들인데 교인들에게 좋은 분이라고 적극 소개함. 그리고 그 다음 주간은 전북 이리 왕궁교회에서 이병규 목사님의 집회가 있었는데 그 집회에 서천석 집사님이 차요한과 함께 참석하여 이병규 목사님께 남문교회 파송을 강하게 요청. 서 집사님은 남문교인도 아닌데.
- 남문교회 갈등과 이교부
순천시 인제동 66번지, 남문교회를 부임하고 보니 이교부 문제는 너무 큰 문제. 교인들은 김현봉의 유일 직계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그를 추종하는 자세. 그러나 차요한은 이교부의 잘못을 모르고 양구에서 목회할 때 집회 강사로 초청도 한 관계. 이교부가 차요한을 좋아함. 이교부는 김현봉 목사님을 따르던 교역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이교부가 강사를 하고 나머지는 경청하는 위치. 그는 결혼을 했으나 아내의 손목도 잡아 보지 않았다는 것으로 추종자를 만들었는데 성결교회 목사나 감리교회 목사를 막론하고 교역자들 방을 찾아 다니며 가르쳤고 모두가 하늘처럼 높게 보는 위치.
- 주변 공회 교회 상황
1973-74년, 여수 신풍교회 묘도교회 여산교회, 순천 순산교회 상서교회가 차례로 공회 소속 문제 발생
- 이교부 개입 사건
1975년, 이교부 쪽 교인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쪽 노선을 확실히 거부하자 어느 주일 예배가 끝나고 광고 시간도 아닌 상황에서 이교부 처남 되고 교회의 주동인 유완종 집사님이 자리에서 일어 나서 내일부터 이교부를 초청해서 교회에서 집회를 한다고 발표. 목회자에게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없다 해서 반대. 전체 교인 30 - 40여 명 중 8 명의 교인이 핵심적으로 이교부 측을 따르고 또 강사로 오는 이교부 자신이나 그 추종 교역자들과 맹종하는 일반 교인까지 합하면 숫자가 평소 30여 명.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분들이어서 단단히 준비. 마침 휴가 나와 있던 차갑준 청년을 포함해서 이 쪽의 교인들에게 미리 오게 말해 놓고 월요일 아침에 미리 철 대문을 잠그고 전기도 다 꺼 놓아 예배당 사용을 못하게 해 놓았는데 저녁 시간에 이교부와 그 무리들이 교회로 왔고 대문을 두드려도 열지 않으니까 문을 밀쳐 철문이 꼬부라져서 열림. 막고 나설 교인의 숫자가 저 쪽을 이길 수 없었고 저 쪽이 밀고 들어 왔는데 전기가 없으니까 양초로 대신하고 강단에 이교부가 올라 갔는데 목회자의 인간적 감정으로는 손에 뭐가 있으면 머리를 내리 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자제하고 대신 바로 길 너머 파출소가 있으니 112로 신고했고 파출소에서 현장을 출동. 경찰은 단도직입으로 ‘목사님이 누구신가?’ ‘예, 제가 담임 목회자입니다.’ ‘이 분들을 교회 안에 들어오라고 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확인을 하자 이교부와 대화가 진행. ‘허락 없이 들어 왔으면 무단침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아무나 들어 가는 곳입니다.’ 옆에 있던 차요한은 ‘순천 시내 교회 어디든 이 시간에 다 가 보라. 예배가 없는 월요일 저녁에 문 열어 놓은 곳이 있는가?’ 경찰이 ‘문을 잠가 두었는데 이렇게 강제로 열고 들어 가면 잘못입니다.’
결국 ‘야간특수주거침입죄’로 입건이 되었고 구속 상황이 아니어서 경찰은 1차 조사만 하고 현장을 되 돌려 놓은 뒤 돌아 감. 이교부와 따르는 교인들은 아래 동네에 살던 문 집사님 집으로 가서 가정 집에서 집회. 집회가 끝난 후부터는 이교부를 추종하는 교인 8명이 남녀 4 명씩이었는데 매 예배 시간에 제일 앞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려 하면 찬송을 불러 방해. 이교부 침입 건은 순천경찰서로 넘어 가서 조사가 진행 중이었고, 전체 교인이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되니 어려웠지만 목회자가 끝까지 버티므로 그들은 그렇게 얼마쯤 하다가 나가서 개척. 이교부를 추종하는 서왕석 목사님이 와서 2층을 얻었다가, 그 후에는 과수원 하는 김 집사님 집에서 모임.
한 편 순천경찰의 조사가 끝나고 검찰에서 쌍방 폭행이라 해서 5만 원씩 벌금을 내게 했는데 차요한 쪽은 억울했지만 별로 좋지 않은 일이어서 벌금을 받아 들였으나 이교부 쪽에서 광주고등법원에 항소. 이의를 받은 검사가 사건을 면밀히 검토한 후 사건의 모든 책임은 배후 조종을 했던 이교부라 해서 투옥 시킴. 이교부의 실형은 여기서 시작하고 이후 사회적으로 대형 사건까지 계속 드러남. 전주교도소 시기에 금당살해사건이라는 사회적 유명 사건의 살인범을 만나게 되고 그를 데리고 일이 자꾸 커지고 점점 막 가는 사람이 됨.
- 이교부
머리는 비상한데 철저하게 자기를 성자로 위장해서 결혼한 아내와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않았다는 그런 말로 추종자를 만들고 이교부 말이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다님. 그런데 갈수록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 드러 나게 됨.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김현봉 목사님 강단 제일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밤새 철야를 하니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돋보였고, 김 목사님도 속았고 이성 문제도 그렇게 철저한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다 속인 것. 좋은 사람이 가면서 탈선했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철저히 이중을 해서 모두를 속인 것.
부인이 유점자, 신풍 교인이며, 산파여서 사택 딸을 낳을 때 받은 분. 이교부와 결혼해서 살다가 순천 오빠 집에 돌아 와 있던 중.
- 이교부 내막 폭로
그런데 이교부가 이리 주현교회에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순천의 남문교회는 이교부 아내의 친정 가족들이 있어 처음부터 세세하게 하나씩 폭로가 되어 감. 하루는 이교부 아내가 순천의 남문교회를 찾아 와서 남 몰래 이교부의 여러 내막을 폭로. 펑펑 울면서 예배당에 들어가 한창 지나서 나오더니 웬일이냐 하니까 이교부한테 폭행 당했다는 말. 모두가 그를 성자로 생각했는데. 멍이 다 들었어 얼마나 맞았는지. 이교부의 말하는 것과 행동은 모든 것이 아주 달랐고 부인을 통해 내가 다 캐냈고 부인은 남문교회 사택에 며칠 머물고 그 부인의 치료를 위해 약국에서 물파스 등도 사다 주며 도움. 이교부의 잘못이 자꾸 드러나고 가장 가까운 측근 목사님들이 이교부의 잘못을 지적하겠다고 갔다가 집단 폭행 당함. 찾아 갔을 때 이교부가 자기 잘못이 있으면 자기를 때리라고 해서 간 분들이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흉내만 냈겠지. 그러고 나자 이교부가 이 번에는 너희들 차례라 하면서 깡패를 동원 시켜 진짜 뚜드렸고 대형 사건이 되고 감옥에 간 것. 유완종은 자기 여 동생을 이혼 시켰고.
- 남문교회 기타 기억
이교부 문제로 교인들이 분쟁하고 나가서 개척한 교회는 이교부 문제가 표면화 되면서 저절로 해체 되고 교인도 해산. 당시 남문교회 주력 교인으로 기억 나는 인물들은 차경연 차갑준 신기호 3 명. 고등학교를 다니고 성년이 되고 결혼 후까지 계속 연락. 차경연은 졸업 후 철도청 서울 근무하며 매 주 기차로 본 교회 출석. 서울 유명한 목사님들을 소개해도 한 두 번 참석 후에는 다시 돌아 옴.
강부자라는 교인 하나는 서부교회로 가서 교회 옆에 살았고 서부교회 나뉠 때 남정교회로 나갔다는 소식.
■ 백영희 목사님께 배우던 시절
- 교역자회
내가 공회 교역자 공부를 쭉 다닐 때 매월 첫 주일 지난 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새벽까지 모였는데 모이면 처음에 교회 출석 보고. 신도범 목사님이 앞에 나와서 서기처럼 불렀는데 서부교회부터 한 교회씩 목회자의 부임 시 교인 숫자와 지난 달의 출석 평균수와 한 달 중에서 가장 많이 출석할 때의 숫자 그리고 연경 횟수라 해서 성경 읽고 전도한 횟수까지 보고하면 전체 교역자들이 ‘늘었습니다.’ ‘줄었습니다.’ 이렇게 복창함. 남문교회는 소속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서 제출하지 않았는데
박은석 목사님이 여수 계실 때를 예로 들면, 주일날 오전 예배 본 뒤에 동네 나가서 앉아 있는 노인들에게 그때 돈 500원 짜리니 지금은 5,000원 정도일 것인데 돈을 주고 우리 교회 한번 왔다 가라고 해서 출석수에 보고하는 정도. 박은석 목사님의 후임으로 신용인 목사님이 갔는데 출석 보고가 그때 한 50명이 되어 그 만하면 꽤 많은 정도인데 막상 가 보니까 30명 정도. 알고 보니까 장년반 예배에 업고 온 유아까지 다 포함해서 보고. 군대도 숫자로 관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쓰는 것. 어쩔 수 없어 그렇지 않으면 뭐 저 시골교회 어디로 쫓겨 감. 그럼 어떡해. 가짜 보고라도 해야지.
- 성경공부
출석 보고 끝나면 그 다음 바로 성경 딱 읽고 설교는 꼭 불러주듯 하심. 그때 처음에는 녹음을 못하게 했고 대신 필기를 빨리하면 다 받아 적을 정도. 그 정도로 천천히 불러 주듯 설교.
지금 생각해 보면 교역자회 2박 3일 성경공부할 때 특징 하나가 있는데, 공부가 끝나면 모두 누워서 자는 것. 피곤하니까 무조건 눕는 것. 자거나 식사하러 가거나. 모두 자기 힘 다하니까 시간이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
- 교역자들의 열심
그 때 모두 녹음을 못하게 하여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 오동원 목사님만은 지프 달린 성경의 책을 빼 내고 빈 자리에 녹음기를 넣어 녹음. 처음에 모두 녹음을 하지 못하게 해서 하지 않았는데 다음에 가보니까 전부 녹음.
- 호남의 동역자
순천에서 부산으로 함께 다닌 분들은 신풍의 통합 교단 성암교회 오동원 목사님, 신풍교회 손오영 목사님, 순산교회 박은석 목사님, 여수 신용인 목사님 등이었고, 오동원 목사님과는 잠깐으로 기억. 모두 순천에서 기차로 부산까지 가던 시절.
- 양성원
나로서는 백 목사님을 다 파악했다고 생각. 그래서 양성원 참석하지 않고 배우지 않음. 필요를 느끼지 못함. 백 목사님 사후 대구 집회 한 번 참석한 기억. 강 집사님도 만났고. 책에 그 설교 그대로 재독하고 사회자는 사회만 보고, 꼭 목사님이 직접 하듯 했으나, 나는 못 마땅.
- 달섬 기도
순천 10년 동안 신풍의 달섬에 기도실 생활 계속. 매주 목요일 들어 가서 토요일에 나왔는데 달섬이 물 나고 들 때 길이 생기고 달섬에 들어 가면 왼 쪽으로 절벽이 있는데 바위가 있고 파진 곳이 있어 사람 하나 눌 자리. 그 곳에 창문 하나 달고 블록으로 벽 만들고 기도생활. 차가 불편해서 오토바이로 순천에서 신풍교회로 들어 가면 곽봉빈 목사님께 맡겨 놓고 달섬으로. 혼자 만들어 사용. 밀가루 1kg 가지고 가서 토요일까지 수제비만 만들어 먹었고, 바다에 내려 가면 반지락이 있어 국물 만들어 수제비 만들고 된장 감자 넣고 그 것만 먹음. 신풍교회 뒤에 있던 호남기도실은 사용하지 않음. 달섬의 저 쪽으로 가면 우물이 있었음. 참으로 귀한 생활. 신풍 기억 생생.
- 말씀의 효력
늦어도 한 말씀 바로 배워 써 먹으니까 갑자기 부흥되는 것은 없어도 아는 사람은 알아. 한 번은 순복음교회가 통째로 들어온 적. 그 사람들은 말만 하면 꿈 이야기. 목사든 교인이든 할 것 없이.
- 김현봉 백영희를 비교한다면
김현봉 백영희 두 분은 좋게 말하면 서로 은사가 다르다고 해야 되겠으나, 백 목사님은 교회 부흥을 위해 노년에 신유 은사를 사용했고 또 교역자회에서도 봤듯이 숫적 부흥을 강조한 것이 아쉬움.
■ 순천 남문교회의 정리 과정
- 1974년 7월, 남문교회 차요한 조사님이 공회 소속을 정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갔고 순천 지역에 공회 개척을 원하는 박은석 목사님의 지원이 있어 공회가 허락. 순천시 인제동의 남문교회와 남정동의 순산교회는 직선거리 2 - 300 미터 정도.
- 남문교회와 순산교회의 합동
1981년 어느 교역자회 새벽기도를 끝나고 가려는데 백 목사님이 직접 오셔서 순천에 있는 박은석 목사님의 순산교회와 차요한 남문교회를 하나로 합하여 누가 맡든지 한 사람이 맡고 한 사람은 개척을 할 의향을 질문.
조건은 1천 만 원을 주면서 퇴직금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또 어느 곳에 가서라도 개척해도 좋으니 마음대로 할 것을 제안. 그 조건으로 등기를 공회에 이전하고 서울로 이주.
- 이병규 목사님의 간여
남문교회에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병규 목사님 쪽에서 개입. 공회에서 송용조 신도범 2 명과 이병규 목사님 쪽에서 2 명의 대표가 함께 만난 자리에서, 남문교회 입장을 설명. 이병규 목사님 쪽에서 생각하면 그 쪽에서 개척했고 차요한 조사님도 파송했으니 차 조사님이 목회를 그만 둔다면 그 쪽으로 교회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차 조사님은 이미 그 쪽 교인들은 1975년에 분리해서 나뉘었고 개척 10 년이 지났으며 차 조사님이 공회에 소속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차 조사님은 향후 어디에 속하지 않고 항상 독립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 원했으므로 이병규 목사님 교단의 소유라는 전제로는 대화할 수 없다고 설명하자 이병규 목사님 쪽에서 온 분들은 더 이상할 말이 없었고, 차요한 조사님으로서는 백 목사님이 제시한 조건은 신앙과 인간적인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어서 수용. 교회를 순산교회과 합하고 서울로 이동. 이병규 목사님 쪽에 뒷 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 ‘탈퇴서’까지 보냈고 남문교회 등기 이전 서류는 백 목사님께 보냄.
- 박래석 목사님 방문
박 목사님이 순천으로 한 번 방문. 온 이유를 묻자 솔직하게 말씀. 이병규 목사님이 ‘야, 네가 애를 낳았으면 네가 키워야지!’라고 하셨다면서 남문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남문교회를 계속 맡으라는 뜻으로 전달. 이병규 목사님 소속을 벗어 난 차요한 조사님이 남문교회를 차지하고 있으니 회수하라는 뜻. 박 목사님도 남문교인들을 통해 교회 소식을 알 것이고, 나 역시 교회 상황과 현재 공회에 배우러는 가지만 소속은 엄연히 독립적인 면을 명확하게 설명. 박 목사님도 백 목사님이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또 남문교회와 차요한 목회에 대해 인정하고 돌아 감. 다시는 아무 말이 없었음. 이병규 목사님도 최종적으로 포기한 듯.
- 박래석 목사님
박 목사님과는 계약신학교 1회로 함께 들어 갔으나 나는 예배당 건축 때문에 1 년을 쉬고 2회로 졸업했고 박 목사님은 1회로 졸업. 박 목사님은 한 마디로 말하면 수단이 좀 계신 분. 모두 서울로 신학교 다닐 때 돈이 없어 완행 열차를 타고 갈 때 좌석이 없어 입석으로 서서 다니고 폭이 좁고 휴대 간편한 낚시 의자를 가지고 가서 앉고 했는데 박 목사님은 그 때도 2등칸 사용. 평소 이교부와 아주 가까운 측근.
■ 공회를 떠난 후
- 로고스신학교 안길옹 목사님
어디 갈 곳이 있어 예정을 해 두고 간 것이 아니라, 순천에서 상황이 2 개 교회가 부근에 있고 서로 어렵기 때문에 합하는 것이 옳고, 그런 제안이 있기 때문에 받아 들였던 것이고 그 대신 앞 날을 따로 알아 보지 않고 밤차 타고 부부가 서울로 이사.
화곡동에 전세 460만 원으로 살고 있는데 로고스공회의 안길옹 목사님이 차요한을 인정하여 그 교회로 오게 했고 로고스신학교 강사로 임명하고 일신교회의 고등부 여름 수양회 강사로도 세움.
- 개봉동 애양교회
로고스신학교와 일신교회에 있던 중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개봉동교회로 올 수 있는지 제안. 교회 내에 경제 문제가 생겨서 싸움이 났고 그 수숩을 하지 못해서 후임을 찾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3,500 만 원 제의도 있었다 하나 가진 것이 천 만 원이라 했고 그 것으로는 안 된다 하나 그 것이 전부라 하자 교인들이 그 돈 전부를 연보해야 한다 해서 그대로 개봉동교회에 연보. 1982년경 부임. 원래 이름이 개봉동교회인데 부임하면서 ‘애양교회’로 명칭 변경. 백 목사님께 받은 1천 만 원에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고 연보하고 부임한 것
- 양구교회와 교환 근무
개봉동에서 목회를 하던 중 과거 1971년에 양구에서 순천으로 올 때 양구에 부임하게 했던 김석태 목사님이 가장 친한 친구인데 그 분과 서로 교회 임지를 교환. 1983년도에 양구를 두 번째 부임. 간다고 하니까 안길옹 목사님은 가게 되면 교회를 빼앗기게 되고 김석태 목사님께 당하기만 할 것이라고 극구 만류. 차요한 조사님으로서는 가장 친한 친구여서 안 목사님의 만류를 듣지 않고 결행.
우선 사택 자녀들은 서울에 있는 사람이 맡고, 한 달에 한 번씩 강단을 교차하여 설교하는 조건으로 교환했는데 아주 이상적인 조건으로 시작했으나, 설악산에서 두 교회가 함께 집회를 하면서 강사는 두 목회자가 하고 양쪽 교인들이 함께 참석하는데 대형 사고가 발생.
교회 차를 이용해서 오늘은 서울의 교회 교인들이 사용하고 내일은 양구교회 교인들이 타고 해수욕장을 가도록 해 놓았는데 첫날 서울 사람들이 가면서 양구교회 새로 산 차를 가지고 가면서 목사님 동생이 운전하다가 모퉁이에서 사고가 나서 많은 부상이 발생. 사고 수습 과정에서 서울의 애양교회 등기는 교회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고, 교회 이름으로 등기 신청할 때 나는 대표자로 신청만 했으니 아무 권리가 없고, 애양교회가 재직회 명의로 처리하자 바로 종결. 목회자 사이에 언쟁도 있었으나 해결 될 일이 아니어서 포기하고 양구교회를 떠남.
- 춘천의 침례교회
1985년도 춘천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 곳에 침례교 교회를 하던 분에게 교회를 인수 받아 다시 목회. 2,600 만 원을 빌려서 인수를 받았는데 내게 돈을 받은 사람은 지혜롭게 챙겨 갔고 나는 법을 잘 몰라 어수룩하게 또 속은 것. 알고 보니 계약서에 침례교유지재단에 소속한다는 특약을 기입했는데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것. 예배당 권리 문제로 침례교 유지재단과 소송을 했고 돈이 없어 변호사도 없으니 직접 적어 소송을 했는데 승소.
교회 인수금 2,600 만 원도 빚이고 갈수록 생활비 문제가 있어 빚이 8천 만 원까지 올라 감. 다행이 어느 장로님이 배려를 해서 신용협동조합의 이자 10.3%인데 그 장로님이 돌아 가셔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 장례식 전에 인수자가 나섰고 1억 7,500 만 원을 받게 됨. 빚을 다 갚고도 1억은 되었고 침례교에 있었던 시기는 1995년도까지 총 10 년.
- 경북 성주
여생을 기도하다 산에서 죽는다고 성주로 갔는데 1 년 뒤에 대전으로 이주
- 대전 생활
1996년, 대전으로 온 다음 15 년이 되었고 지금 나이 74세. 가정에서 연락이 닿으면 가르 쳤는데 주변 대광교회 최헌 목사님이 자녀를 후임으로 세우다 교회 분란 때문에 개척한 분들이 배우러 오기도 했고 교역자 공부를 매주하다가 월 모임으로 바꾸고 열 댓명까지 모였는데 2006년에 병환으로 중단. 자녀는 포항공대 대학원 나온 아들이 KT 미국 LA 지사에 근무. 대학원 다닐 때 학원차 운전 2년을 하면서 지원. 딸 부부는 노량진의 합동측 교회 부목으로 근무
■ 평생 목회를 회고한다면
- 배움과 연구
에디슨이 전기 5 촉짜리 처음 발명할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지만 지금은 별별 전구가 발전. 5 촉에 만족할 수 없음. 5 촉에 만족했다면 컴퓨터니 냉장고니 TV가 나올 수 없는 것. 지금 백 목사님보다 잘 알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지만 백 목사님께 배운 것으로 연구해서 나가야 함. 칼빈이 연구했다고 위대하다고 그러는데 통합 교단은 지금도 칼빈 칼빈 말만 하지만 백 목사님은 거기서 연구를 해서 건설구원까지 알아 낸 것. 그러나 그게 지금 다냐? 아닐 것!
- 이병규 목사님의 교훈 세계
이병규 목사님도 건설구원을 말은 하는데 한 집회 동안에 성경을 몇십 장은 하고 나는데 그냥 읽고 나감. 김현봉 목사님은 아주 극과 극. 베드로전서 2장 1절 한 절 시작하면 집회 끝까지 그대로 가는 정도. 설교를 시작하면 ‘이 말씀은 지금 믿는 사람보고 하는 소리야, 안 믿는 사람보고 하는 소리야?’ 딱 이렇게 시작을 해 가지고 그 말씀 속을 계속 증거해서 내는 분. 이병규 목사님은 그 제자라고 하면서 스타일이 정반대. 염천교회 이한영 목사님도 겉으로는 그렇게 하나 문제는 내용.
- 소속과 독립
나는 김현봉 백영희 목사님부터 시작해서 여러 곳을 다 다녀 봤는데, 염천교회 가면 이한영 목사님이 최고지 다른 사람은 소용이 없고, 이병규 목사님 쪽에 가면 세계 제일의 진리라고 해. 심지어 뭐 ‘창광맨’ 창광인이라는데 자기들이 제일이라 하고, 감리교 순복음교회 다 마찬 가지. 모두 자기가 제일. 소속을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되는 법.
- 백 목사님을 두고 아쉬운 것 2 가지
첫째는 신유 능력을 사용하면 교인 수가 부흥 되는 것은 도움이 되나 부흥 위주가 되어 문제. 조용기 목사님의 서대문교회 50년대부터 아는데 병이 낫는다 해 놓고 낫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나은 줄로 알라는 말씀으로 간증을 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대거 모아. 방언은 방언 할 줄 아는 사람 옆에 두고 ‘할렐루야’ 같은 말을 빨리 하도록 시켜서 계속 하다 보면 방언이 터진다고 가르 침. 성경에 그런 게 어디 있는가? 근데 펌프물을 올라오게 하려면 물을 붓고 잣아야 하니까 그렇게 한다는 것. 순복음의 경우는 사기 수준이지만 일단 교인 모으는 데는 효력.
둘째는 보고서를 내게 해서 출석을 챙겨 부흥하는 것이 문제. 장년반 구역장이나 주일학교 반사나 자기가 데려 오면 자기 식구 되는 것. 나도 해 봤는데 효력. 백 목사님의 방법을 좋게 말하면 지혜를 사용하신 것. 김현봉 목사님은 진실을 주장. 꾀 쓰는 것을 아주 싫어함. 교역자의 출석 성적을 가지고 이동에 반영하는 것이 싫었음.
- 김현봉 목사님의 문제
김 목사님의 머리 깎는 것은 잘못. 바울은 서원이 있을 때 삭발. 나실인의 경우는 오히려 머리를 기르는 것. 오해를 많이 불러 일으 킴. 김 목사님 밑에서는 마치 부부가 잠자리를 하면 간음죄 정도의 분위기.
김현봉 목사님이 평생 꾸지람하지 않은 사람은 둘인데 이한영 목사님과 한명도 장로님. 뒤에 목사님이 되었고.
- 김현봉 목사님 일화
이병규 목사님의 사모님 교회가 평택 감리교회인데 그 곳에 김현봉 목사님 집회가 있어서 직장도 때려 치고 쫓아 감. 저녁 식사 초대가 있어 먹고 거기서 걸어 오시는데 젊은 나로서는 내가 김현봉 목사님을 보호한다고 생각하여 따라 감. 한참 가시다가 왜 따라 오냐고 하시고 먼저 가라 하심. 가까이에서 대화해 보면 어린 아이와 대화를 하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목사든 누구와도 대화가 같은 것. 정말 자기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가 말하고 일하시는 대로 하신다 하심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분. 김현봉 목사님을 통해 그런 모습을 한 번 체험. 아! 하나님이 저 분 속에서 함께 한다! 이렇게.
- 교인 애착
이병규 목사님이 명륜교회를 개척하고 아현교회에서 교인을 갈라서 창광교회를 할 때 명륜교회를 동생 이용규 목사님께 맡겼는데 아는 교인 하나가 명륜교회를 다니다가 이병규 목사님의 집회를 참석한 후 창광교회를 가보고 싶어 별 생각 없이 한 주일을 갔다 왔고 이용규 목사님께 말씀을 드리려고 인사를 드리자 ‘지난 주에 어디 갔다 왔어!’라고 하셨고 창광교회 예배를 드렸다 하니까 ‘왜 남의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려!’라고 함. 목회자는 교인 문제가 걸리면 형제간도 싸우는 법.
김현봉 목사님은 교인 숫자가 아니라 그 사람 사람 되는 것에 중점. 한 번은 백 목사님이 김현봉 목사님 집회를 참석했다가 목사가 심방 전도 열심히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신 대목에서 전율하며 들었다 하심. 큰 교훈으로 받음.
- 이병규 목사님과 학생들의 논쟁
한 번은 신학교에서 학생들과 이병규 목사님이 의견 대립으로 싸움이 났는데 이 번에는 이 목사님의 잘못. 나중에 이 목사님이 차요한이 중간에 서서 자기 편을 들지 않았다고 뭐라 하심. 옳은 것을 따지지 않고 자기 편을 들라는 것. 그래서 이병규 목사님을 떠남. 그 분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 나는 10원짜리 하나 양심에 어긋난 것 없음.
■ 면담 후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려고 이 세상에 구원을 이루어가고 상 받는 일을 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상 받게 하시려고 지금 저희들을 지금 이렇게 여러 가지 고난도 받게 하시고 성도의 교제도 하게하시고 가르치게도 하시고 배우게도 하시고 이렇게 행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렇게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또 우리에게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와 들을 것을 또 빼앗고 마귀는 방해하는데 마귀에게 속지 않게 하시고 들은바 그대로 행하고 순종하여서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영광스러운 상 받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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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1.17. 10:40
제목: 차요한 목사님이 yilee에게 전화하다 대화한 내용
전화: 042-523-9611
총공회가 현재 몇 개인가?
-> 5 곳의 200여 교회
그렇게 많은가? 73년 그럴 때는 3-40여 개였다.
그 때 매월 첫 주간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부산으로 박은석 신용인 차요한 이렇게 다녔는데
교역자회에 가면 매월 출석 보고가 있었고, 서기 신도범 목사님이 읽으면서 다 함께
이기수 오기수라 해서 교인 출석 발표와 최고 출석을 발표하면서 올랐다 내렸다 복창을 했고
그 때 성경 100독을 시켰는데 백 목사님께서 참 잘 하셨는데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함께 오면서 성경 읽느라고 서로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1981년에 순천을 떠났는데
->
큰 형님은 돌아 가시고, 둘째 형님이 용인의 총공회 교회에 다니며 건축 때문에 어려움이 많더라
->
양구에 있을 때 상사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월남 갔다 오면서 부산으로 가게 되며 교회를 물어 봐서 서부교회를 소개해 주었는데 나보다 나이 한 살 밑이었는데 남정교회 나간 강부자 집사님이며 유차연 목사님 시무 시절 통화
->
이병규 목사님 쪽에서 지난 주간 정월 집회를 했는데
김현봉 81세, 백 목사님 80세 모두 건강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가셨고
백 목사님이 어느 때 대구집회에서 건강 과시하면서 재림 때까지 사실 것같다 하셨는데 가셨다.
이병규 목사님은 올해 90세인데 짱짱하다는데 노인 건강 믿을 수 없다고 했고
김현봉 목사님도 당시 안 돌아 가실 줄 알았지. 전라도 왕궁교회 부흥회 갔다 오셔서 쓰러 졌고
돌아 가시기 직전에도 옷을 벗으면 피부가 어린 아이처럼 팽팽했고
->
이병규 목사님 계통은 80교회 정도
->
교회는 교인이더라
사람은 사람이더라
지도자 목사님 돌아 가니까 다 흩어지니 두 사람만 뜻이 맞으면 총공회라 하는 것처럼 다 갈라 지는데,
->
아현교회 합동측 제일 잘 지었고
염천교회 이환영 목사님하고
창광교회 이병규 목사님하고
신촌예배당 안 목사님, 사모님이 계셨는데 사모님 돌아 가셨는데, 안 목사님 돌아 가시니까 아래 위층에서 또 예배드리고 분열
그래서 목사님 돌아 가시면 교회는 갈라지게 되어 있고 싸우게 되어 있고 어디든지 다 그렇게 되어.
감리교회에서는 세습 방지법까지 만들었다는데 (차 목사님의 전화 벨 때문에 통화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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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1/24(목)
1. 신풍 추억
며칠 전 대화하다 이한영 목사님 계통에 있는 친구 목사님의 전화 때문에 끊어짐
신풍은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고향 같은 곳, 곽 목사님 계실 때부터 순천에서 10여 년을 다녔고 처음에는 자전거로 그 다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나중에는 신풍까지 차로 가서 자전거를 세워 두고 달섬에 기도 생활, 목요일 가서 수제비 만들어 바닷가 고막 바지락을 넣어 국 끓여 먹고 기도 생활. 하루 두 번 물때를 따라 건너 가면 왼쪽에 바위로 된 절벽이 있고 브럭으로 벽을 만들고 문을 달았고
2. 용인충인교회
(생략)
3. 예배당 문제
요즘 모든 교회들이 다 그렇고 모두 경제 문제가 많고
예배당을 지으면 모두 잘 짓고
대전에 며느리가 다니던 고신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마당까지 마련하고 잘 지었는데 교인들에게 빚 얻어 오게 해서 시작하다가 결국 경매로 넘어 갔는데 주변 대광교회라는 곳은 10만 원 차이로 떨어 지고 다른 교회가 낙찰.
4. 김현봉
기둥을 늘리며 스레트인가 위에 입히면서 늘려 나갔는데 나중에 기둥이 몇십 개. 예배당 짓기는 김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들. 김 목사님 돌아 가신 다음에 4 개가 되었는데
신촌교회: 이대 입구에서 대광동 쪽으로 오른 편으로 올라 가면 김현봉 사택이 있던 쪽에 예배당
합동교회:
염천교회: 제일 그대로. 이한영, 100여명, 8개 교회가 지금도 함께 하고 3 년마다 소속 교회 집회
창광교회: 제일 많은 곳
- 이한영 목사님
같이 나가는 신촌교회가 지금 8개(보은, 대구, 화순, 광주, 청주...). 여기도 요즘은 예배당 짓는 운동 일어 나고 대구에 있는 교회만 안 짓는다고 하는데. 내가 그곳에 더러 다닐 때 보니까 예배당 짓는 붐이 일어 나더라고. 이한영 목사님이 누가 먼저 하겠느냐고 하면서 도와 주면서 붐이 일어난 것.
나는 독립으로 나가니까 몇 년 전까지 창광에도 염천에도 기도원에도 가고 무소속이어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것은 장점인데 단점도 있어 소속이 없어니 보조가 없는 것이 단점. 이한영 목사님은 아무 조건 없이 심지어 대전에 나와서 처음 교회를 세웠는데 돈이 없었는데 그 때 아무 조건 없이 천만원 도와 주고.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면은 그 목사님 따라 갈 사람이 없었음.
김현봉 목사님 돌아 가시고 교회 갈라 질 때 그 곳에 있었고, 그 때 제일 많이 나간 곳에 있었고 옆에 학교에서 예배를 드림.
- 창광교회
창광교회도 문제가 많음. 이병규 목사님만 강사를 하니까 다른 교회에서 그 집회에 가면 교인들이 그리로 자꾸 가게 됨. 그러니 교인들이 그 쪽으로 가니까 목사님들이 그리 가지 않으려 함. 돌아가신 안길홍 목사님도 로고스공회라 하고 일찍 갈라섬. 목사님들이 교인 욕심이야 다 있지만 이병규 목사님은 네 영혼이 죽지 않으려면 와라 해서 불러 들임.
순천 00의 최00 집사님 딸이 여중 3학년이고 어떻게 김포에서 합동 교회를 다니다가 이병규 목사님을 만나게 되니까 안부 묻고 단번에 그곳에 있으면 네 영혼이 죽으니 오라 해서 온 것, 교인이 많으니까 더 욕심.
명륜교회에 이용규 목사님 있을 때 (차요한 목사님이) 양구교회에 있었는데 학생 하나가 신학생으로 명륜교회 반사를 했는데 주일에 창광교회를 가 보고 싶어서 한 번 빠지고 갔는데, 형제니까 같은 교회니까 간 것인데 '지난 주일 어디 갔던가?' '창광교회 갔습니다.' '왜 남의 교회 갔나!'라고 책망했다고. 목사의 교인 욕심은 대단한 것. 이병규 목사님은 특히 심함.
이병규 목사님이 차요한 양구교회 있을 때 당회장도 했는데 겪어 보니까 아니라.
- 백 목사님과 김현봉, 이병규
백 목사님은 교역자 공부에 그냥 받아 주셨고. 원래 세례도 백 목사님께 받았고
어느 날 김현봉 목사님이 나를 부르더니 백 목사님 교회와 아현교회 둘을 다 다니는 것을 지적하면서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해서 김 목사님 돌아 가실 때까지 순종하자는 마음으로 아현교회를 택했고, 그리고 얼마 안 되서 돌아 가심. 그리고 바로 백 목사님 집회를 다니기 시작.
이병규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강사를 하시면 사회를 보시는 분.
그런데 김 목사님 돌아 가시니까 바로 백 목사님을 막아 버림. 백 목사님은 장례 연락도 못 받았는데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비행기를 타고 장례식에 도착했고 그 때는 안길홍 목사님의 기도 순서였는데 자리에 와서 앉으며 나를 아니까 옆에 앉혔고, 교회서 화장터까지 갔는데 그 곳에서도 기도 한 번도 안 시켰음.
김 목사님 장례 후에 아현교회에 이병규 목사님이 갈라설 때 아현교회 백 집사님이라는 분이 백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하고 싶었는데 차요한 목사님이 백 목사님을 아니까 5월 집회에 함께 가서 차 목사님 소개로 강사실로 갔는데 백 목사님은 일언지하에 '서울은 이병규 목사님 계시니 그 분에게 하게 하고, 나는 부산만 한다'고 막음. 그 때 집회를 해 주지 않으셨다. 그 때 했으면 총공회로 돌아선다든지 그럴 수 있는데 그리 하지 않더라고.
김현봉 목사님도 따라 다니다 보니까 내 생각이 아니라 성경으로 볼 때 확실히 잘못 된 것이 있었음. 없는 것이 아니었음.
- 김현봉 제자들
이한영 목사님이 제일이고 제일 가깝고
- 이교부
창광교회에 오면 밤에 잠도 안 자고 강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니 누가 볼 때도 최고로 보이고 그 때는 집회 숙소에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여러 곳에서 온 교역자들이 다 있었는데 숙소에 모이면 말을 잘하니까 교역자 자는 방에서 강사. 주로 써 먹는 것이 결혼을 했는데 아이가 없는 것으로 가지고 늘 동침을 한 번도 안했다는고 말함. 그 부인이 신풍교회 출신이고 순천에 있을 때 왔었고 유00의 동생이어서 본인에게 직접 들었음, 000000000 사건도 있었음. 부산 목사님께 그런 이야기를 그대로는 못하고 대충 말을 했는데 그 때는 이단 말이 나기 전. 목사님은 단번에 (입에 담기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며) 호통.
이교부가 순천으로 쳐들어 왔다가 패싸움 때문에 교인들만 양측이 벌금 5만원씩 나왔는데 그 쪽에서 항소하는 바람에 광주고검에서 이 싸움의 배후를 000로 지목하고 소환해서 3주를 실형 시켜 전주 교도소로 갔고 그 곳에서 당시 유명한 금당살해범을 꼬셔서 데리고 나왔고, 그 때부터 일이 커지기 시작해서 결국 이단으로 표면화. 이리 주현교회에서 따라 다니는 이들이 당시 열 몇 명이고, 신풍에서도 청년 한 사람이 이교부를 따라 다니는 처남인가 한 사람이 열심히 따라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 이병규
처음에는 한복도 입고 하다가 김 목사님 이야기도 하다가 얼마 지나니까 하지 않고 책을 출간하면서도.
- 송용조
춘천에서 언제 한 번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며 카 센터에 왔다는 송용조 목사님 만남, 부부끼리 자동차 여행한다면서.
- 김무웅
그 아버지가 한약방, 김석태와 김무웅과 차요한이 아주 절친한 친구, 김무웅 아버지는 사주팔자도 보고, 김석태와 차요한이 친구가 되다 보니 김석태와 친구 되는 김무웅과 아주 친함.
김석태는 목사고 개봉동에 차요한 개척하고 그 후임으로 양구 후임 갔던 곳의 이 친구를 불렀음. 김석태는 그 곳에서 서부교회 다닌 정도. 교인으로서. 고신 출신 홍용인 (홍요섭 탈랜트 부친) 목사의 후임으로 그 곳에 갔었는데 김석태는 그 목사님과 맞지 않게 되어 양구에서 서부교회로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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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8.8.
제목: 차요한 목사님 소천
공회사 확인 전화를 했다가 사모님께 소천 소식을 들게 됨
'뇌졸증으로 편마비는 왔었으나 건강했다가 2013년 2월 12일 10시에 갑자기 혼절하고 119로 병원에 옮겼으나 13일, 새벽12:48 소천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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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