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일

공회 인물      

배종일

설명 서부교회 직원 역사 (2차 보충)
보조CNS 0 29

일시: 1996.11.7.08:20-12:40

장소: 대전 동북교회


1. 출생

1947.11.2.(호적48년), 함안 칠서면 구포리(현 칠서면)


부친 배효윤, 모친 신용선, 농사 짓는 가정의 형제 7남매에 장남


2. 신앙

출생 후 바로 창녕 이주, 5 세에 남지제일교회(고신) 주일학교 출석. 남지초,중,고교를 졸업하고 부산. 고교 3학년 2학기에 입시 차 학원 준비를 위해 부산으로 왔고 신용인 목사님 신용진 집사님이 외삼촌이어서 서부교회에 연결.


3. 집안

모친이 10 남매로 신용인 목사님 신용진 집사님 등을 중심으로 서부교인


신용선: 모친

신용호: 이모

신성기: 이모, 김효순 권사님 구역

신용희: 이모, 김효순 권사님 구역,

신용인: 목사님

신용도: 땅콩 장사, 서부교인이 아니고

신용진: 외삼촌, 서부교회, 땅콩 장사

신용섭: 이모


* 신용진 부인

백 목사님의 막내 여동생 백상순의 딸로서 4 남매였으며 남매 중에 언니는 가북에 있고, 남동생 이상공은 서부교회에 있다 다른 곳으로 갔고, 여동생 이인자 집사님은 박동운 집사님의 부인으로 남정교회 교인.


4. 서부교회


- 연결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예수 믿는다고 핍박, 신용인 외삼촌이 집을 방문하면서 연결 되어 신앙으로까지 이어 짐. 신용인 외삼촌이 믿게 된 것은 서부교회였고 뒤에 믿었으나 자주 오면서 신앙 연결이 되어 집에서 쫓겨난 것을 데려 들어 오는 등의 감사한 일. 신용인 목사님이 창동교회에서 목회할 때 대성고등학교로 전학까지 가려고 고교 1학년 때 백보인 교감 선생님을 면담까지 했음.


- 신용인 송용조

신용인 목사님은 송용조 목사님과 앞 뒤 집의 친구로 한 살이 많았고 송용조 목사님을 신 목사님이 전도


- 구역 소속

고3으로 부산 올 때가 1966년, 신용인 목사님이 거창에 목회하셨고, 신용진 집사님 댁에 2개 월 있었으며, 그 뒤에 오은해 집사님 댁 옆에서 생활. 대입에 한 번 실패하여 1967년 서울 종로의 제일학원에 다니다가 9월에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전포동으로 와서 서부교회를 다님. 이 때 정식으로 구역이 추 집사님 구역으로 시작. 그 곳에 갔을 때 백을순 할머님 추순덕 전도사님이 동성로교회에서 박창희(주덕원 장로님 부인) 윤정숙(박장관 집사님 부인, 남정교회 개척 후 현재 고신대학원 졸업과 강도사 거쳐 진영에서 개척) 두 분을 데리고 처음 부산 올 때였는데 배종일을 출석에 올리지 않고 추순덕 시작할 때 그 구역에 기둥이 되라고 백을순 식구로서 추순덕 구역이 됨.


- 사택 형편

백을순 집사님이 부산에 먼저 와서 교회 2층 다락방에 있던 시절, 당시 청년방이 예배당에 있고 그 청년방 옆에 백을순 방이 있고 거기서 백 목사님은 식사하셨음.


- 백영희 목사님

주변 분들로부터 말씀과 경건의 분이라고 굉장히 많은 자랑을 들었는데, 부산에 오는 날부터 목사님께 인사하며 '목회할 것입니다.'라고 하니까 목사님의 관심과 대접이 특별. 일거수 일투족을 목사님이 아시고 직접 부르심. '목회하고 싶으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야 하니까 열심히 잘 하라. 반사를 해라'고 말씀해서 시작.


정재성 부장 김영웅 반사 시절로 결혼 이야기 나올 때. 학생이 둘인가 되었는데 예배 보면서 선생님을 묵살을 만들어서 그 날 한번 하고 안했으며 본격적인 반사는 제대 후. 당시 주교 체제는 공과를 불러 주고 현재와 꼭 같은 체제.


- 대학교와 공무원 생활

1967년 부산 내려 와서


1968년 동아대학교와 공무원 합격하여 3월부터 정치외교학과를 공부하며 공무원은 4월 8일 발령 받아 주간에는 동광동사무소 근무. 가정 경제가 어려운 것은 아니나 예수님 믿기 때문에 자력으로 하기 위해 주야간 노력했고 선배 권유로 시험을 쳐서 그렇게 되었음.


1970년에 3학년 1학기 마치고, 철원의 6사단 19연대 7중대 통신병으로 근무하다가


1973년 9월 동광동 근무 다시 1년


1969년에는 여성회관 근무


입대 전 3 - 4개 월 전에 시청 조사통계국을 근무했는데 제대 후 중구청 발령, 1년 6개월 시청 수도국 업무과에서 목회 나올 때까지 그대로 근무.


- 70년대 서부교회 주일학교

제대하자 30반을 맡았고, 주일학교는 50여개 반으로 늘어 났고, 장열 목사님은 청량리로 갈 때 1973년. 30반을 할 때 서부교회가 한참 일어날 때. 학생이 제일 많은 반이 5반 이경애 선생님의 100여 명, 서혜경 서수경(조준영 사모님) 25반, 22반 이은숙 선생님(이동근 목사님 딸), 19반의 정풍섭 선생님과 19반 후임 서영준 선생님, 임규완 선생님도 힘을 썼고, 그 당시 이경애 선생님은 확실히 탁월했고 그다음이 이은숙 서혜경 배종일 임규완 선생님으로서 6-70명이 선두 그룹이고 100여 명 반이 1-2개 반으로 형성 최고 선두 유지.


주일학교 부장이 정순환 선생님으로 바뀌고, 이형 선생님이 생활지도, 배종일 선생님이 월말통계를 맡아 1974년 10월부터 분기별 심사 분석을 했고, 반사들의 산기도가 시작.


목사님께서 한 번 부르시며 '너, 너무 날뛰지 말라.' '목사님, 한 반이 올라가면 자극이 됩니다.'라고 답변. 생활 지도라는 것을 목사님 지도와 현장에서 느낀 것 전하고, 잘하는 반사에서 뒷반사를 붙이고, 새벽 일찍 나가는 것 주장.


생활 지도를 처음에는 장기상 집사님이 했고, 그 전에도 계속 했을 것인데. 1973년 제대하고 다시 반사할 때는 장기상 이형 순서. 이형 선생님이 서울로 올라 가고 배종일 유주열로 나감. 목사님이 배종일을 목회에 염두를 두고 투표를 해서 결정함. 당시 투표에는 정영덕 정순환 두 분 중에 3표가 적었는데도 정순환 선생님을 임명. 생활 지도는 배종일 유주열 중에서 표가 많다고 배종일 임명. 1974년 10월, 교회 직책을 처음 맡음. 1975년 3월의 연중행사에 집사 직분.


- 결혼

74년에 들어 서면서 직장의 계장님이 사위를 삼고 싶어 제의가 있었고 구역장 추 집사님께 상의를 드리자 목사님이 부르심. '너 목회할 거지' '예' '내가 말할 때까지 함부로 하지 말라' '예' 이렇게 끝이 났고, 어느 날 이발 하고 오라는 전달이 있었는데 중간고사 시험때문에 바빴으며 다음날 새벽기도 마치고 오니까 이재순 목사님과 딸과 신용진 외삼촌과 4층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대학교 출신이니까 대화를 해 보라 하지만 말할 것이 없어서 5 분만에 끝을 냈고, 의견을 물으실 때 '목사님께서 보라고 하실 때는 하라는 것이니 하겠습니다.'라고 결정. 문제는 고향 집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집에서 신부를 묻는데 이 씨라는 성외 에는 이름도 몰랐고 학교는 서울대를 나왔으나 학과도 몰랐고 나이도 고향과 성 씨조차도 본관을 모름. 9 가지를 묻는데 하나도 모르니 난리. 이야기를 듣고 신용진 외삼촌이 가서 설명.


불신 부모의 반대가 극심해서 결혼식은 낮에 했고 당시 결혼 비용이 5만 원이 상한이었으나 특별히 10만 원으로 진행. 교회 전체적으로는 밤 결혼식을 한참 강조할 때.


- 서부교회 형편

1966년 67년 처음 교회 왔을 때가 4백여 명이며, 예배당이 2층 다다미 시기였는데 꽉 찼었고, 주일학교는 최대 200 - 500 명 사이를 오르내리며 대개 3 - 400 명이었던 시기


- 예배당 건축

전체 교인 연보 광고가 있었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바치도록 강조가 있어서 다 바쳐 연보. 하계순 집사님처럼 반대한 사람과 순종하고 다 바친 사람들의 결과는 너무 확연하게 나타 났고


1970년의 건축이 서부교회 개척한 후 첫 건축으로 건축 후 본당 기준에서 빈 곳들이 있었으며, 본당은 의자 24 줄 옆으로 4 줄, 한 의자에 8 명이 앉았으며


1978년 2월에 교체가 되었는데 신준범 조사님이 통계를 보고 있었으며 장년반 900여 명


목사님이 언제 행정을 모르니까 서류 정리를 하라고 시켰고 교회의 관공서 관계가 어렵던 시절.


5. 직원 시절


- 주일학교 통계

1974년 이전에는


부장이 설교하고


교육감은 문답과 모범반을 선정했고


생활지도부장은 주교 생활을 맡았었는데


1974년 10월부터 배종일 선생님이 주일학교 통계를 맡은 이후는 통계를 작성하고 행정을 하여 처방이 따라 가니까 마치 주교 목회가 되어지는 것과 같아 졌으며, 반사회 때 발언을 많이 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목사님께서 경계를 하시다가 목사님에게 보고가 되고 처방 문의를 하시게 되면서 전적 밀어 주시고 건의가 올라 가는 대로 승인.


- 양성원 교학실

1977년 5월에 서부교회 내부에 있던 양성원의 교학실 일을 보라고 해서 교학실 행정 직원으로 출근. 전임은 1976년부터 서영준 집사님.


- 서부교회 행정실

교학실 1년 맡은 뒤 1978년 1-2월에 3 직책 인사.


서부교회 행정실장 배종일


서부교회 중간부장 서영준


양성원 교학실장은 김철수


보직 배치가 되면서 배종일 집사님은 전도사, 서영준 집사님은 3월 공회에서 목사 안수.


서부교회 행정실장은 서부교회의 주일학교와 장년반의 전반을 맡고 서영준 목사님은 중간반 전담


6. 주일학교 미아 사건


- 미아 문제

1974년 주일학교 일을 맡고 나서 1975년부터 미아가 생기기 시작. 1974년에서 1975년도를 넘어 가면서 1천 명 학생이 갑자기 폭증하면서 나타 난 현상. 기도 부족을 느껴 산기도를 시작. 주일학교는 정신 없이 계속 늘어 나고 미아 사고에 교통 사고까지 겹치는데, 교통 사고를 처리하다 보면 오히려 전도에 더 보탬이 된 경험.


- 지역 확장

장림 지역, 신평 지역, 다대포 지역, 영도의 청학동에 영선동으로까지 주일학교 전도 지역은 계속 뻗치고 있었으며, 반사로서는 전성국 김춘도 장영목 나종덕 류정현 이전석 손권식 등이 남반의 주력이었고 서문행 집사님도 잘 하시던 분.


- 박일연

1979년 12월 마지막 주일에 79반 류미정 선생님의 학생이 집으로 돌아 간다고 나섰다가 시내버스를 잘못 타게 되었고, 훗날 감천에서 아이를 발견. 알고 보니 감천으로 가는 학생들을 따라 섞여 갔다가 그 곳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음. 가정 내적으로는 부모님의 사이가 안좋고 아버지의 폭행이 있어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면도 있었는데, 당시 9세.


잃은 지 6개월 만인 1980년 5월 말에 백 목사님과 권사님들과 교회 직원들까지 언양의 중산 팔복산기도원에 기도 갔을 때 교회서 혼자 지키고 있는데 부모 쪽에서 찾았다는 통지. 감천동에 보호하고 있더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부모가 연락와서 그 다음 감천으로 가서 확인.


- 조갑제 기자의 보도

아이를 찾아 안심했고 미아 사건을 잊고 한 달이나 있으니까 조갑제 기자가 서부산 경찰서에서 진정이 들어갔고 그 사건이 되어진 것을 발견한 뒤, 말 없이 교회 주변을 지키며 아침 8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주일학교가 마칠 때까지 다 지켜 본 다음에 배종일 조사님을 면담. 국제신문 조갑제 기자라면서 아이들의 관리 교통지도 데려오는 모습 등을 취재기자로서 관찰 파악하여 여러 가지를 물었고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았으나 세계 제일 같다, 스크랩으로 봤는데 이렇게 질서 정연하고 이렇게 헌신적으로 돌보는 모습이 감동적이라. 주일학교가 끝난 다음 청소하고, 버스 타는 데까지 데려 주는 모습도 감탄'이라고 언급.


주일 날 왔고 그 다음 월요일에 바로 신문에 보도가 되었으며 이후 언론과 교계에 널리 알려 지게 되었고 서부교회 장년반도 급증


- 주일학교 분위기

당시 목사님은 1등 반사가 1등 신랑이고 신부라며 주일학교 위주로 교회를 운영. 장년반은 헌 솥이고 주교는 새 솥으로 비교. 1975년부터 바짝 힘을 썼는데 그 전에도 늘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음. 주일학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물통 협조로부터 멀리 가는 것이나 예산도 적극적이었고, 주교는 1980년부터 2-3년 정도하여 자립. 선물도 안 주고, 성탄이나 성경학교에 선물 없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목사님께서 자립 하라 해서 주교가 장년반 보조 없이 자립.


- 장년반

본관에 새벽 기도 교인이 찼고, 1982년에는 장년반이 3천 명을 통과했고, 이말출 구역의 보고가 1천 점에 주일 오전 출석 교인이 5 - 6백 명이 넘는다는 정도에서, 목회 출발.


7. 목회


- 안양 안산교회

1982년 4월 8일 안양에 개척. 목회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밑에서 행정 뒷받침이 중요하고 위에서는 영적 지도가 되어야 한다는 점. 서부교회의 그 시절은 그 것이 잘 맞아진 것 같음. 빈 손에서 방 한 칸으로 시작했고 100여 명으로 부흥이 되어 좋았던 상태에서 창동.


- 거창 창동교회

1985년 3월에 창동교회로 갔고, 창동교회 이재순 목사님이 몸이 불편하여 안양으로 교환 부임.


- 대전 동북교회

1994년 1월 18일 창동교회에서 동북교회 문석표 목사님과 교환 부임


8. 거창 집회 장소


- 불법 건축 문제

거창의 기도원에 대규모 지하실을 설치하고 예배당 바닥 공사가 1988년.


처음 갔을 때 건축 공사 전체가 불법 건축이 되었음. 송종섭 목사님 시절에 산림 훼손 문제가 있었는데 허가 나온 것보다 실제 건축할 때 더 많아서 문제였고 마을의 진정이 있어서 기도원의 존폐 문제가 되었는데 이재순 목사님이 형 이재형 국회의장 현직의 도움을 받고 황길태 장로님으로 해결. 이재순 목사님 두 분이 직접했고 밑에 실무는 모름. 비록 국회의장이 현직에서 해결을 노력했으나 민원 진정인이 있어 어려웠음. 대대적으로 공사가 되어져 완결이 됨. 농지는 천막터로 전용할 수 없는데 농지법 이전부터 된 것이라고 밀어 붙임.


집회 장소의 예배당 밑의 강사용 2층 건물은 신고가 끝나서 다 되었고, 자라는 세대를 보며 저런 집회가 계속되겠는지 의문.


9. 거창지방 교회


- 창동교회의 중요성

창동교회 부임 전에 창동교회가 복음의 본산지로 중요한 곳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처음 갈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고 6개 월만 있어 보라는 말이 있었는데, 가게 되자 창동교회 부흥.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고 많을 때는 380 명에 주교가 1천 명까지 가니까, 백 목사님의 기대가 컸고, 지방에서 말을 잘 듣지 않던 분들도 화합이 되고 해서 좋은 분위기.


창동교회 올 때 1 년 후면 개척교회로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창동 후임이 없어 나오지 못하게 됨.


10. 백 목사님 사후


- 대구공회와 거창공회의 분리

신도관, 류차연, 배종일 3 명이 총공회 명칭 문제로 분쟁하다가 백태영 목사님에게 제명 당하여 분리


- 공회 재산권 소송

부산고등법원에서 총유로 판결


11. 공회 인물들


- 신도범

목사님이 신 목사님을 귀하고 소중히 생각했으나 백태영 목사님과 알력이 있었고, 정경수 목사님에게 백태영 신도범 2 명에 대해서 묻는데 정경수 조사님은 교훈은 백태영 목사님이 바로 한다고 보고하여 그 말이 결정적으로 백태영 목사님을 신임케 된 것이라고 후일 들음.


5층에서 신도범 목사님에게 이동을 권유했고, 당시는 목사님 명령이면 가야 하는데 이만기 목사님과 이형 장로님을 통해서 종교 부지를 받아 개척을 지원했는데 탐탁치 않게 본 것.


지금 1천여 명 모이는 남산교회 자리를 공회가 분양 받았다가 판 것. 좋은 자리. 창원의 개척 현지까지 확인하러 갔던 분이 강남으로 개척한 것이며 당시 표면에 나타 난 원인은 이동에 못 마땅 해서 신도범 목사님이 이동 거부한 것이나 실제로는 백태영과 관계 악화라고 짐작. 탈퇴를 전혀 비추지 않았음.


- 송용조

송 목사님이 백 목사님에게 왜 경계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음. 내가 다리를 다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날이 월요일 저녁인데 이재순 목사님 집에 와서 목사님께 인사 하러 하루 밤 있었는데 5시 반이나 6시에 온다고 했는데 수위실에 최봉석 집사님이 계셨고, 인사 하고 나니까 이재순 목사님이 그 주간 사직동교회를 다녀 왔고, 안산의 묘지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5층 목사님은 화를 내심. 경과 된 내용이 테이프에 실린 것을 신길범 집사님이 주더라고 가져 왔는데, 송용조 목사님은 쫓아 내야 한다고 했음. 그 다음 월요일 저녁 교역자회의를 모이는데 송 목사님을 달산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탈퇴 말이 나옴. 뒤에 들으니 일산 기도원에서 신학자 부르고 또 출판사를 만든 그런 이야기가 있었음


12. 서영준 목사님과 서부교회 후임


- 서 목사님

교학실에서 함께 근무할 때 느낌이 서 목사님은 하나님 중심과 충성하는 분. 그러나 백 목사님을 계대해서 서부교회를 이을 정도까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 후계 부탁

82년 1월 2일, 전날의 1일 세배 후 다음 날인 2일에 5층에서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고 기침 등 몸이 불편해서 목회를 내보내 주시면 좋겠다고 하셨고 가고 싶은 곳을 물으셔서 개명을 말씀 드렸는데 안 된다하셨고, 그 다음에는 북림을 말씀했는데 역시 안 된다 하셨음. 목사님은 '내가 너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 나는 김현봉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 내가 죽어도 내 뒤에 기반이 든든하기를 원한다. 장년반의 당회장은 서영준 목사, 그리고 서부교회 행정 목사와 주교는 네가 담당해서 계대해 달라'고 부탁. 일언반구 대답을 못함. 큰 일 났다는 생각.


그 후 서 목사님은 공사적으로 모든 일을 했고, 내가 이 자리 더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교 졸업이 2월인데 그 때 명단이 확실해지고 그 전에는 일부만 되는데, 1월 중순 어느 월요일에 오늘 중에 졸업 명단 다해서 중간반에 넘기라, 중간반에서 주교 일을 해준다는 말을 듣고 '내가 목사님 경비까지 서 가면서 제 힘껏 일하고 있으며 3월 앞두고 공회 준비까지 있었는데 오늘 당장 명단을 어떻게 합니까?' 밥 먹으러 갔다가 출근을 못했으며, 목사님은 마음이 아파서 나오지 않는가 라고 하셨고, '예, 목회 나가야 해결됩니다.' 하니까 '네가 나가면 주교는 큰일 난다'고 하시면서 정영덕, 정순환 집사님을 불러서 보냈고 김효순 권사님도 보냈고 마지막에는 목사님이 불러서 갔는데 1년만 하고 나면 사직동교회로 보내 준다고 했으나 나는 그 마음은 없고 개척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씀 드림. 김효순 권사님이 어른들 말을 들으라고 했고 추 집사님은 야단 치며 여러 이야기가 다 나왔고 이재순 목사님도 야단.


혼자 생각할 때 그 동안의 서부교회의 공로나 연륜이나 도리 등 모든 면으로 볼 때 그 처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서 목사님과 힘을 합해 일을 하는 것은 이전에 교학실에서 함께 근무해 봤기 때문에 어렵다고 짐작. 결국 5층에서 '나가라' 하셨고 안양으로 간다고 말씀 드림.


평소 서부교회 당회장은 연륜이나 공로나 공인 등을 고려할 때 원로가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


서 목사님과 두 사람이 교학실에서 일할 때 실장 이름 때문에 고민했으나 내가 1년을 더한 서 목사님이 적임이라고 말씀 드렸으나, 목사님이 같이 직원으로 조처. 평소 사람들은 목사님을 맞추기 위해서 했고 나는 내 소신대로 말하고 살아 옴. 어떤 가까운 김 목사님은 목사님을 무엇보다 위에 둬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 나 자신은 많은 생각.


- 직원 인계

행정실장 후임으로 이탁원 집사님을 추천했고


주일학교 지하실 부장은 목사님이 이춘영 장로님을 시켰고


총무직이 될 생활지도부장에는 김현갑 집사님을 추천했으나


목사님은 장영목 주교 총무와 손권식 행정실장으로 결정.


그렇지만 배종일 이동 후 한 번씩 거친 다음 추천한 사람들이 맡게 됨.


교회 직원으로 혼자 다 해 왔는데 한 사람의 분량으로 너무 많기 때문에 직책을 분산 시킴.


이민영 편집실장님은 그 뒤에 조직이 확대 된 것이고 일이 안 되니까 사람을 많이 붙임. 한 사람이 하던 일을 3 - 4 명으로 나누고 그래도 안되니까 계속 사람들을 붙여 나간 것.

손권식 집사님은 민첩하나 자기 생각이 있고, 이탁원 집사님은 무던하고 말이 없어 공직에 적합하다고 봤음. 목사님 밑에는 일 잘하는 사람보다 듣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


13. 추순덕 구역


- 인물

분구역장: 이해순, 이필희, 전준화, 윤정숙, 박소윤, 박창희, 김성희, 박옥자, 박정희 집사님


남반: 김병춘, 배종일, 장영목


- 역할

추 집사님은 목사님에게 식구들을 잘 접목. 성 내고 하면 달래고 목사님이 최고라고 말하고, 목사님 교훈을 잘 전하는 등 추 집사님이 신앙의 굉장한 역할 하심. 추 집사님은 남자답고 대범하고 하나님 중심이고, 상관을 아주 중시하여 목사님과 관계를 굉장히 중요시. 목사님 상관 관계는 배반치 않겠다고 늘 말하는 분.


14. 백 목사님의 교인 지도


- 측근

집사님 중에서는 추순덕, 나인숙, 이복순 집사님이 가까왔고 생활 속에서 살피는 이숙희 집사님이 제일 가까움.


- 역할

큰일은 추 집사님과 4 명 권사 등이 맡았고


추 집사님에게는 동역자로 생각하는 것 같이 느낌.


박상희 집사님이나 김현찬 권사님은 조심을 하시는 편이었고 이말출 권사님은 편하게 대하셨고, 김효순 권사님은 원만하게 보셨음.


실력으로 보면 이말출 권사님을 제일, 추 집사님을 둘째, 그 다음 나인숙 권사님으로 생각하며, 이복순 집사님은 가까이 하면서도 조심하신 듯. 그 다음이 김효순 권사님, 박정자 권사님은 좀 조심하셨는데


백 목사님의 인물 처리에 대해서는 칭찬도 책망도 함께 문제. 아주 다양하여 목사님의 사람평가를 액면 그대로 믿으면 큰일. 굉장히 예민하여 말 한마디라도 문제가 있는 것은 몇 번이고 전화. 큰 뜻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말씀하신 표현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

공회 교역자들이 목사님을 가까이 모셔 보지 않아서 목사님이 경계한 줄을 모름. 상대방을 다 사로 잡아버리는 분. 네가 나를 하나님같이 섬겨도 이 복음대로 할까?


신연범 목사님 개척 때 홀을 얻어 주고 달산 가고 할 때

정순환 장로님이 LA 시합 갈 때 부장으로 장영목 시킬까 하시는데 위계 질서 때문에 소신 반대


15. 경제 문제


백목사님은 흰 고무신 아니면 털신, 검은 양복 4벌이면 죽을 때까지 된다 하셨고

자녀나 사모님에게 너무 생활비를 적게 주셔서 불평 듣는 정도이나 건강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았고,


사례는 노방 전도하는 장 목사님, 어려운 사모님들을 도움.


서영준 배종일 2 명이 5만 원 사례 받을 때 사모들을 불러서 2만 원씩을 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하면서 주고, 목사 되었다고 원망하는 사모들을 많이 도우심. 목사님 밑에서 큰 김호경 부인 오화순 이런 사람들에게 신경 많이 씀.


목사님 밑에 들어가면서 신과 같이 생각하던 사람. 일반 교역자로 보이지 않았음. 서영준목사 후계로 하던 때부터 혈육적이라고 느낌. 추집사가 주로 다른 것은 해명을 해서 그런 것으 ㄹ보는 눈에 다른 것이 없고 끝까지 해나가는 분이라는 생각, 횡적은 너무 없고 종적만 있다. 밤 11,12시 3시까지, 전국 일하고 일보는것, 나보다 더하니, 일마치면 텐트에 성경,기도하는 분


(계속)


번호이름설명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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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공1 목사 안수식(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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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의 주인글을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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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4
    서부교회 외부 업무 담당
    2
  • 163
    1960년대 목회 준비하던 청년들의 형편 중 하나
    1
  • 161
    고장환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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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
    한 때 이 노선을 향했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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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
    백영희 목사님을 위해 전부를 다한 마지막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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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8
    여산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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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7
    FRANK WILLIAM CUNNING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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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6
    부공4, 중앙보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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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5
    서부교회의 대표적 교인, 전도의 생애 (22.8.29. 내용 일부 수정)
    1
  •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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