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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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조 목사 인터뷰
출처 : http://sdgchurch.kr/songyongjo_interview/
작성일자 2018년 6월 20일
작성자 SDG홈피지기
송- 송용조 목사
김- 김준범 목사
SDG- 미국의 북장로교회에 속한 언더우드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파한지 올해로 128년이 지났습니다. 약 130여년의 시간이 흘렀는데요. 아시다시피 그간 한국교회는 곡절 많은 한국사회 속에서 외적으로 유래 없는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해보면 위태롭기 그지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면적으로 한국교회는 한국 초대교회의 순수한 열정조차 사라진 채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방향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사회적으로도 불신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중에서도 국내 개신교 중에서 가장 많은 교단과 신자수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회의 위상 추락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팎에서 교회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한국 교회와 장로교회를 향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때가 한국 교회의 갱신과 회복을 위해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사려 깊은 고민과 대안이 요청되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일환으로 저희 SDG개혁신앙연구회에서는 개혁신앙으로 살아오신 선배목사님들을 뵙고 그분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요. 오늘은 한국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원로가 되시고 한평생 개혁신앙을 탐구하며 진정한 교회개혁의 헌신해 오신 양의문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송용조 목사님을 뵙고 귀한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한국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산 증인이시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전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요.
송- 예. 감사합니다. 제대로 그 인터뷰에 만족할만한 그런 답변을 드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냥 이래 마음속에 있는 것 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SDG- 마음속에 계신 말씀만 전해주셔도 아마 우리에게 큰 혜안의 말씀을 전해주시리라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초두에 목사님께 한국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산 증인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송- 개혁교회의 산증인이라…..뭐 일찍이 장로교 교인으로 신앙생활 했으니깐, 피부로 느낀 것 또 이래 책으로 읽은 것 대충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하나의 그 증언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웃음) 뭐 산 증인이라 하기보다는 한사람의 증인으로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기대가 됩니다. 우선 목사님의 유년, 청년기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송-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제 고향 동네에는 교회도 없었습니다.
SDG- 고향이 어디신데요?
송- ‘경남 창영군 길곡면 오호리‘라는 곳인데, 그곳에 오호교회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많이 좀 떨어져 있어서 저는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SDG- 어려서는 전혀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환경이셨다는 말씀인가요?
송- 면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 교회에 이북에서 넘어온 전도부인 한 사람이 있었어요. 오늘날 여전도사를 그땐 전도부인이라고 했거든. 그 분이 도시락 싸들고 그 면에 속한 동리 가가호호 다 훑으면서 전도를 했어요. 아주 어릴 때에.
SDG- 전도부인이라는 말은 새로운 용어인데요?
송- 그때는 여전도사를 그렇게 불렀어요. 그분이 여러 번 우리 집을 방문해서 전도를 듣기는 했는데, 귓전으로 듣고 전혀 관심을 안 가졌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해서 그런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태어나서 초등학교 다닐 때가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말년이었어요. 또 중학교 다닐 때는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때 교회는 안 나갈 때인데, 중3때 교회를 나갔으니깐. 우리 고향마을이 낙동강 바로 유역에 위치한 마을이었는데, 그 유명한 낙동강 도강 전투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시체가 즐비하고 그것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중에 교회를 나가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꼈던 것 같애. 아무래도 십대는 감수성이 예민할 때였으니까. (웃음)
SDG- 전쟁을 통해서 인생의 고통을 맛보셨군요.
송- 전쟁은 그동안 공들여 해 놓았던 모든 것을 다 수포로 만들었어요. 일본어 배워서 책 읽고 귀에 좀 들리울만 하니까 쓸데없이 되고, 또 한글 새로 배우고,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충격이었고 그러다보니 십대 때에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허무주의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렇게 살다가 결국 죽을 바에는 일찍 죽는 게 낫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다니지도 않은 나에게 특별히 간섭을 하셨던 같아요. 그때까지 예사로 봤던 것들이 다 새롭게 보여지고 들려지기 시작했어요. 박목월 시인의 ‘해가 솟아라’라는 시도 있듯이 해가 솟아오르는 것이 굉장히 감격스럽고, 들판에 있는 들풀과 조그마한 꽃 한송이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거에요. 그때까지 옆동네에 있던 교회 종소리를 자라면서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그 교회에선 계속 쳤겠지만. 그런데 깊은 허무감에 빠져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전까지는 전혀 귀에 들리지 않던 옆 동네 교회 종소리가 들리더라고요.
SDG- 와….. 그 종소리가 내적 부르심이 아니었을까요?(웃음)
송- (웃음) 하나님께서 참 이상하게 섭리하셔서 그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려서 이 세상이 일찍 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상도, 태양도, 꽃도 참 아름답게 보였어요. 그러면서 예배당 종소리도 귀에 들리고. 그래가지고 교회를 찾아가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도부인의 전도가 결국 열매를 맺게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왜냐면 누가 전도해 주는 것도 없었고, 기독교에 대해서 들은 거라고는 그거밖에 없었으니깐. 그래 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됐는데, 그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어요. 오호교회라고 역사가 오래된 시골 교회인데 고신측 교회였어요. 그 교회 목사님이 교회를 나왔다고 성경과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었어요. 한권은 안용준 목사님이 쓰신 ‘사랑의 원자탄’이었는데, 손양원 목사님 전기였어요. 그리고 다른 한권은 박윤선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주석, 그게 1949년도에 나왔어요. 박 목사님이 제일 먼저 쓴 게 요한계시록 주석입니다.
SDG- 박목사님의 첫 번째 주석이 요한계시록이었군요.
송- 예. 선물 받은 두 책을 참 열심히 읽었습니다. 성경도 이해가 안 되지 만은 열심히 읽고, ‘사랑의 원자탄‘은 읽고 너무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위인전기나 소설 같은 거 읽기 좋아했는데 ’사랑의 원자탄‘을 읽으니깐, ’야 이게 가치 있는 인생이고 진짜 인생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나도 손양원 목사님 같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작정을 했어요.(웃음) 그땐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건 잘 모르니깐. 어쨌든 그것이 살만한 가치 있는 인생이다 생각했어요. 결국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웃음) 그리고 요한계시록 주석은 쉬운 것은 아니었는데, 책을 읽으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웃음) 그전에 독서를 많이 한 것도 있지만은 워낙에 신앙에 대해서 알고 싶은 강한 의욕과 갈급함이 있었던지 신기하게 요한계시록이 이해가 돼. 다 이해는 안 되지 만은 좋더라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신앙생활을 하게 됐어요.
SDG-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이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때 목사님께서 받은 책이 그 교회에 나오는 누구나 받는 것이었나요? 아니면 그 목사님께서 목사님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주셨던 건가요?
송- 특별하게 주었어요. 왜 특별하게 주었는가 보니깐, 그 동리는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그곳에서 학생이 하나 나오니까 이거 잘하면 좋은 기회가 되겠다 싶었던 거예요. 가족전도도 할 수 있을 거고, 또 그 동리에 복음을 전하는 어떤 디딤돌 역활을 할 수 있지 않겠나 해 가지고 좀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 주셨었죠.
SDG- 아, 그러셨군요. 그 목사님에게도 예비된 은혜였겠군요. 그 목사님께서도 방금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이야기를 다 알고 계시나요?
송- 목사님이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소천하시기 전에, 제가 연락을 취해서 마지막으로 뵈었어요. 구체적인 말은 안 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알고 계실테니까요. 신앙으로 이끌어 주시고 양육해 주셔서 참 감사하다는 말씀은 드렸죠. 돌아가시기 전에.
SDG- 말씀을 들어 보니, 청소년 시기에 목사가 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하게 설정된 셈이신데요. 그후로 신앙 생활은 어떠했나요?
송- 그 이후로 특별히 다른 청년들처럼 교회활동에 열심을 품은 건 아니고, 그저 일찍이 주일학교 교사를 했어요. 얼마동안 교사를 하고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고3때부터 부산 서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녔는데 다른 교회 다니다가 친구 권유도 있고 해서 옮겼죠. 고신측 교회였는데, 대단히 열심이 있는 교회였어요. 그때부터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죠. 그래서 다른 그런 방황이나 이런 건 거의 없었던 거 같아요.
SDG- 흔히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데, 별다른 방황은 없으셨나 봅니다.(웃음)
송- 예.(웃음) 서부교회 다닐 때부터 신학서적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박형룡 박사님이 번역한 ‘칼빈주의 예정론’을 읽고 은혜를 참 많이 받았어요.
SDG- 로레인 베트너(Loraine Beitner) 목사님의 책 말인가요?
송- 예. 당시 서부교회에 백영희 목사님이 계셨는데, 청년들에게 신앙서적을 많이 읽히는 편이셨죠. 그때 여러 권을 읽었지만 ‘칼빈주의 예정론‘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암튼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니깐 뭐 방황할 그 틈이 없었어요. 그때는 고신 측 교회들이 어떤 면으론 굉장한 부흥기였어요. 서부교회만 그런게 아니라 교회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뭐 영적 분위기가 지금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었죠. SFC 활동도 당시에 활발했었지만 나는 거기도 관여 안하고, 뭐 청년들 무슨 회합이나 모임 같은데 별로 좀 재미가 없어서 그냥 성경 읽는 거, 또 신앙서적 읽는 거, 기도하는 거, 교회 교사로서 봉사하는 거 그게 취미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다른 운동도 해본 것도 없고 이래 옆걸음 쳐보지도 않았고 방황도 하지 않았고.
SDG- 방황없는 청년기…. 우리 시대 청년상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는데요.(웃음) 그럼 부산 서부교회에서 개혁주의와 개혁신앙을 만났다고 봐야 하겠군요.
송- 그렇지는 않아요. 오호교회 목사님이 고려신학교 출신이니깐 설교하다가 칼빈주의란 말은 많이 하는 데 개혁주의란 말은 한번도 못 들어 본 것 같애. 개혁주의는 말로 듣기는 오랜 뒤에 들은 것 같애. 파수꾼이나 이런 거 읽을 때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간혹 나와요. 나오긴 해도 다른 사람들은 많이 안 쓰고 박윤선 목사님이 주로 쓰셨지. 일반 목사들은 개혁주의라는 말을 거의 몰랐고 잘 사용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칼빈주의라는 말은 다 알아요. 당시 고신측 출신 목사들은 칼빈주의나 청교도 신앙이라는 말을 자주 말하는 거라. 처음 나간 교회에서도 칼빈주의가 뭔지 모르지만은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들었고, 청교도라는 말도 익숙한 용어로 들었고 그랬죠. 그러면서 이제 고신측인 서부교회에 가서 신앙생활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개혁신앙과 동일하지는 않아도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개혁신앙과 접촉하게 되었어요.
SDG- 어떤 면에선 칼빈주의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아시게 되었군요.
송- 그렇죠. 그때는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말할 땐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이라 그랬으니깐.
SDG- 그러고 보면, 당시의 교회들이 지금보단 신학적 정체성이 더 명료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송- 예. 사실 개혁주의, 청교도 개혁, 청교도주의 개혁신학이라는 말은 박형룡 목사님이 가장 먼저 사용했어요. 그리고 고신 교단에서도 칼빈주의와 청교도 정신을 계속 강조하던 때였지요. 그러니 그런 교단에 속한 교회에 몸담아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촉했다고 볼 수 있어요. 뭐 내가 발견한 것도 아니고, 찾을려고 해서 찾은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SDG- 하나님의 손길로 말이지요.(웃음)
송- 그래요.(웃음) 하나님께서 그 노선에 속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게 하심으로 만나게 된 거죠. 은혜로.
SDG- 목사님, 이제 구체적인 신학 공부 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고신 교단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셨나요?
송-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부 교회에서 하는 ‘성경연구과정’ 프로그램을 공부했어요. 일종의 전도사 양성 프로그램과 비슷한데, 서부교회가 고신 교단에 속해 있을 때 백영희 목사님이 청년들에게 성경을 연구시키기 위해 시작한 과정 같애.
SDG- 아, 정식 신학과정이 아니고 교회에서 하는 성경 연구 과정이었군요?
송- 예. 그런데 그 과정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참 많이 읽었죠. 그렇게 거기서 훈련을 받다가 군대에 갔는데, 성경을 좀 많이 알고 하다 보니깐 자연히 군종과에 근무를 하게 되고, 또 군인교회가 없는 파견대대 교회에 가서 예배 인도와 설교를 하기도 했어요.
그래 하다가 제대를 했을 무렵에 백영희 목사님이 고신 교단 목사님들과 마찰이 있었어요. 어떤 마찰인고 하니까, 첫째는 마산 문창교회 예배당 소송문제고, 둘째는 유엔군 철수 반대 운동이었어요. 그 당시 백목사님은 강도사 신분이었는데, 고신 교단의 주류 입장과 차이가 있었어요. 고신 유명한 목사님들이 있는데 어느 새벽기도회 설교를 맡아 하면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지적한거라. 특히나 유엔군 철수 반대 시위는 신자 개인의 자격으로는 참여 할 수 있지만 교단 이름으로 교회 간판을 걸고 교단 이름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걸 회개해야 된다고…. 그게 내가 생각할 때는 가장 큰 화근이 된 거 같애. 그것이 마찰이 되어 결국 부산노회에서 상회불복종이라는 구실로 강도사 인허취소를 했어요. 그리고 1년인가 2년 후에 교단에서 제명당했어요.
SDG- 서부교회가 고신 교단으로부터 나올 때 백 목사님은 강도사였군요.
송- 예, 원래 서부교회를 개척한 분은 손양원 목사님 동생되는 손이원 목사님이셨고, 후에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이 2대 담임 목사를 하셨는데, 3대 교역자로 백영희 목사님이 부임하셨어요. 물론 그때는 전도사였지만 워낙 설교 잘하는 부흥사였어요. 그렇게 서부교회를 담임하면서 교단과 몇 가지 갈등을 빚는 중에 교단에서 나오게 된 거에요. 그때 저는 서부교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와 행동을 같이 했죠. 그리고 신학교를 가야 하는데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에 부산에 교육부 인가받은 곳은 고려신학교와 부산신학교, 두 곳밖에 없었는데, 신학사상으로 보면 고려신학교에 가야 하는데 교회 문제와 얽혀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당시는 내가 굉장히 단순했거든. 그래서 초교파를 지향하던 부산신학교에 가버렸어요. 당시 부산신학교 교수진에는 연대 출신의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어요. 신학노선은 안 맞아도 고려신학교 가는 것보다는 마음이 좀 편하겠다 싶어서 선택하였죠.
SDG- 그런 결정을 백영희 목사님이 허락을 하셨나요?
송- 그랬죠. 백영희 목사님도 고신 교단과 썩 감정이 좋지 않았고, 내가 그리로 갔다간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니까 허락하셨어요. 근데 당시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대원(신학대학원)을 안 가도 목사가 될 수 있었어요. 그땐 신대원이 별로 없을 때였으니까. 그래서 부산신학교에서 4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총공회에 속하게 되었지요.
SDG- 백 목사님이 고신 교단에서 나가신 후에 총공회라는 교단을 만드신 건가요?
송- 교단을 만든 건 아닌데 백 목사님이 나가니까 몇 십개 교회들이 함께 나왔어요.
SDG- 그러니까 백 목사님을 따르는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생기게 되었군요?
송- 그렇죠. 근데 왜 총공회라는 이름을 붙였는고 하니까, 당시 제천에 있는 교회 교역자 한 사람이 국기 계양을 반대했다가 수감이 됐어요. 그래서 그 분을 변호하고 석방시키려다 보니 급하게 교단 명칭이 필요하게 됐어. 그래서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에서 공회라는 단어를 떼와서 공회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런데 사실 그게 번역이 잘못 된 거를 모르고, 공교회, 보편교회를 가리키는 의미인데 당시 목사님들이 잘 몰랐어요. 암튼 나는 그 이름을 반대했어요. 반대한 이유가, 지금도 내가 기억하는 대로는 성경에 보면 사도들을 잡아가지고 고문하고 박해한 기관이 공회아닙니까?(웃음) 무엇보다 당시 양도천 목사라는 자가 하는 ‘세계일가공회’라는 이단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공회라는 말이 이래저래 이미지가 좋지 않으니 다른 이름을 짓자 하는데, 갑자가 다른 이름을 생각하기도 어렵고…
SDG- 그래서 공회 글자 앞에 ‘총’자를 붙였나 보죠?
송- 그건 그냥 처음에는 ‘공회’ 그러다가 나중에는 ‘총공회’로 바꾸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저도 자연히 총공회 목사가 된 거죠.(웃음)
SDG- 아… 그러셨군요. 짧은 이야기지만 한국 교회의 한 부분 역사를 쭉 읆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인터뷰를 듣는 분 중에는 아마 백영희 목사님이라는 분에 대해서 궁금해 하실 분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데요. 총공회에 대해서도요.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후에 그곳에서 나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며, 또 백영희 목사님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송- 백영희 목사님은 실제로 저에게 어떤 신앙과 인격 사상, 경건한 삶을 살도록 지도하고 가르친 목사님입니다. 내가 볼 때는 참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일제 강점기에도 신사참배를 안 했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감옥에 갔을 때, 거창에서 목회하면서 그 가족들에게 해방될 때까지 양식을 조달한 분이에요.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이 평생 사용하시던 성경을 백영희 목사님한테 줄 정도로 어떤 면으론 애제자였죠. 그리고 참 놀라운 거는 6·25 사변 났을 때 피란 안가고 인민군 치하에 거창 지역이 들어갔을 때에도 매일 세번씩 예배를 드렸어요. 교회 종 쳐가면서.
SDG- 놀랍군요.
송- 예. 생명 내놓고 신앙생활 한 분이에요. 하여간 보통 강한 분이 아니죠. 그 정도로 유명하니까 벌써 목사가 되기 전에 부흥회, 사경회 다니시고, 또 목사되기 전에 부산 서부교회 교역자로 청빙되어 오기까지 했던 거지요. 그리고 그분의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 개혁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한 성경을 참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사석에서 한번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신구약성경을 부분적으로 암송 다 했대요. 엉덩이가 다 헐 정도로 앉아서 성경을 많이 읽고, 나름대로 연구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성경 언어도 잘 모르고, 성경해석방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어서 주경하는 식으로의 설교는 아니더라도 어떤 본문을 읽으면 그 본문과 연관되어 있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폭넓게 그리고 또 아주 깊이 있게 파는 그런 설교를 했기 때문에 설교가 좀 뭐라 그럴까 독특했어요. 그래 저는 더러 우리 한국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다라고 하지요.(웃음) 가만 보면, 백 목사님은 많이 읽었어요. 조직신학책이나 기독교강요도 여러번 읽은 것 같아요. 그리고 교회를 특별히 귀하게 여겨서 대충대충 목회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자녀들이 모두 미국에 이민 가 있었지만 자녀들이 그렇게 다녀가시라고 해도 돌아가실 때까지 미국 한번도 안 갔어요. 거 그 쉬운 거 아니잖아요. 아주 독특한 분입니다. 암튼 제가 아는대로는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은 없는데, 성경을 잘 아셨어요. 그런데 때로는 성경의 부분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약간 의혹을 불러 일으킬만한 해석은 했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거 같아요. 큰 틀에서는 칼빈주의 입장을 견지했다고 봐요.
SDG- 예를 들어, 어떤 점에서 의혹이 있었나요?
송- 백 목사님이 목회적 관점에서 제일 중요하게 본 것이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 있는 옛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된다, 거듭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된 새사람으로 살아야 된다 하는 것이었는데요.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깐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는 것은 옛사람이지 그 거듭난 새사람의 본질, 본성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죠. 그런데 죄를 짓지 않는다고 그랬을 때는 오해받을 수 있지만은 사실은 성경 해석을 조금 의미에 안 맞게 해석을 해서 그렇지, 요한1서 같은 데 보면 하나님께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있거든.(웃음) 그래서 뭐 이단이니 삼단이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로 이단은 아니고 한국교회가 낳은 충성스러운 목회자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거는 그 총공회 교단이 하나의 교단으로서 그 이래 목회자들 잘 양성해가지고 건전하게 발전시켜 나갔으면 좋을 건데 지금 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는지 모르지만은, 지금으로 봐서는 그게 바라는 대로 잘 안 되고 있으니깐 약간 안타까운 점은 있긴 있습니다.
SDG- 그렇군요. 어렵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인데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목사님의 주제로 돌아와서 총공회 이후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총공회를 나오시면서 유학을 가셨나요?
송: 아니요. 유학은 총공회 있을 때 갔습니다. 총공회가 어차피 하나의 독립된 교단으로 나가게 되니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백 목사님도 공감하셨어요. 그래서 지금 부산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서영호 목사님이라고 그 분이 먼저 떠나시고, 나는 몇 년 있다가 유학을 떠났어요. 그 사이에 일제 강점기에 옥고를 치르신, 한상동, 주남선 목사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목사님인데, 이인제 목사님이라고, 그 분이 세운 대구 동성로교회에 가서 사역을 하였어요. 그 교회로 부임해 갈 때 제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었는데, 결국은 총공회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유학을 갔어요. 유학을 한 차례 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그 교회로 돌아가서 일년 동안 교회 건축을 마무리 짓고, 두 번째 이래 가서 82년 1월 달에 귀국을 했어요. 그리고 당시 광화문 근처에 있는 총공회 소속 사직동 교회로 부침하였어요. 그 교회는 총공회에서도 꽤 비중있는 교회였어요. 그러면서 부산에 총공회 목회자 양성원이 설립되면서 그곳에 가서 강의도 하게 되었지요.
SDG- 어디로, 얼마간 유학을 다녀오셨나요?
송- 처음 간 곳은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인데, 73년도부터 76년까지 하다가, 76년도에 루터란 계열의 콩코디아신학교(Concordia Seminary)로 Th.M.(신학석사)을 마치고 Ph.D(신학박사) 과정을 하다가 78년도에 귀국했어요. 그리고 일년 후에 Ph.D.를 끝을 못 맺었기 때문에 콩코디아신학교로 가야 하는데, 어찌 사정이 생겨서 풀러신학교로 가서 원하지 않던 선교학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마침 동성로교회에 출석하다가 이민 간 몇 가정과 총공회 속한 교인들이 있어서 가자마자 거기서 교회를 하나 세웠어요. 덕분에 학자금도 나와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별로 원하지 않았던 선교학 박사 과정을 마치게 되었는데, 지나 놓고 보니깐 하나님 은혜라. 내가 콩코디아에서 전공이 조직신학이었는데 그것만 했으면 안 될뻔 했어. 풀러에서 선교학 박사를 했기 때문에 지금 실천신학 교수로 잘 써먹고 있거든. 당시 학위 받을 때만 해도 어디에서 써먹으라고 하나(웃음), 왜 이런 공부를 시키시나 전혀 답이 안 나왔는데 한국에 나와서 보니 선교학을 전공했다고 여기저기서 와서 강의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 덕에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지금까지도 계속 강의를 하고 있어요.
SDG- 그렇군요. 그렇다면 유학 이후에도 총공회 소속 목사와 교수로 사역하셨는데, 총공회와 결별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송- 백 목사님의 신앙적인 면을 여전히 존경하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교리적으로 좀 미심쩍은 게 있어서 나온 것도 아니예요. 다만 거기에 속해 있다면 자유롭게 목회를 못할 것 같애. 왜 그런고 하니, 백 목사님이 목회자 인사이동을 혼자서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장로교 정치원리하고는 맞지 않은 게 있었어요. 그래도 다른 사람을 그리 할 때는 내가 당하는 거 아니니까 ‘저게 아닌데…’ 하는 정도였지. 그러면서 나는 서울에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는데 대구에 있는 달산 교회로 발령이 난 거예요.(웃음) 서울에서 여러 신학교에도 출강하고, 다른 신학자들도 만나고, 복음주의 신학회나 복음주의 선교학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하니까 그대로 나눴다가는 바람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 같아. 달산 교회는 규모도 크고, 대우도 좋고,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더 편해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까 과연 내가 한군데에서 안정적으로 어떤 교회의 방향을 바로 정해서 일관성있게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드는데, 긍정적인 답이 안 나오더라고. 그때가 마흔 다섯 살이었는데, 앞으로 남은 목회가 많은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면 평생 그렇게 끝날 것 같아서, 개척을 해서 내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교회를 한번 이루어 나가야겠다 생각을 해서 총공회도 나가고 사직동 교회도 사임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성도들이 ‘우리도 다 따라 나간다, 절대 혼자서는 못 보낸다.’ 그래 가지고 어쩔 수 없이 교회적으로 탈회를 했잖아요. 공동의회 소집 후에 일부 성도는 그 교회에 잔류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성도는 나와 함께 나와서 양의문 교회를 세우게 되었어요.
SDG- 그러한 상황이라면 총공회 입장에서는 반발내지는 거부로 볼 수도 있었을 것 같고, 목사님이나 교회의 위치로 볼 때, 교단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송- 어떻게 보면 조금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교회정치가 안 맞으니까 있어봐야 서로 피차 좋을 것도 없었을 거예요. 총공회에서 탈퇴하고 나오게 되니까 잔류파와 탈퇴파가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예배당 건물 쟁탈전이 바로 대두되더라고. 당시에는 총공회에서 나올 때, 다수의 교인들이 나왔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예배당 건물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내가 선언을 했어요. 나의 신앙의 골격을 세워주신 믿음의 아버지격인 목사님하고 예배당 건물을 두고 시비 안 붙는다고요. 원래는 내 혼자 깨끗하게 나오려고 했는데, 죽어도 함께 나오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인간적으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교단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 교인들을 기르는 데 백 목사님의 공력이 지대했던 것이도 사실이고, 그만치 믿음을 키워주고 기도도 많이 한 애착이 많이 가는 교회였으니까. 그래 가지고 교회 건물 완전히 내 주었어요.
SDG- 그럼 함께 나온 성도들과 어디서 집회를 가졌나요?
송- 건물을 얻으려 다니다가 지금 양의문 교회 건물을 얻었어요. 때마침 체신청에서 이 건물을 팔려고 내어놓은 건데 개인에게 팔면 문제가 많이 생기지만 종교기관에 팔면 문제가 없으니까 팔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개인 빚도 얻고 은행 대출도 받고 이래 저래 해 가지고 건물을 사 가지고 1988년도에 이리 옮겼지요.
SDG- 그래서 양의문 교회가 탄생하게 된 거군요.
송- 예. 대부분의 성도가 사직동 교회에서 나온 분들이었지만 더 이상 사직동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서 양의문교회로 이름을 바꿨죠.
SDG- 그럼, 양의문 교회를 시작하실 때에는 어느 교단에도 속해 있지 않았나요?
송- 그렇죠. 처음에는 아무 교단에도 속해 있지 않았죠. 하지만 아무래도 소속없이 나가서는 안 되고 어느 교단에 속하긴 속해야겠다 싶었는데, 내가 주도적으로 어떤 교단에 이 교회를 소속시키고 싶진 않고, 교인들이 원하는 교단에 속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일단 교인들은 교단 사정을 잘 모르니까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단 소속 신학자와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그 교단 역사, 교리, 모든 장점들을 이야기 하도록 부탁했어요. 그런 후에 기도하면서 시간을 갖다가 교단을 결정하는 투표를 했어요. 투표를 했는데 원래 뿌리가 고신이다 보니까 고신이 압도적이더라고. 거의 100% 가까이 됐을 거야. 그래서 고신 측 들어갔죠.
SDG- 목사님께서 신앙 생활을 처음하게 된 교단으로 다시 돌아가신 셈이네요.
송- 예. 그때만 해도 우리 교회가 좀 알려진 상태였고, 교회적으로 안정된 처지라 교단에서 적극적으로 환영했어요. 교단 주요 인사들과 접촉도 하고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그래 인자 서울노회에 들어갔죠. 이 노회도 우리 교회를 참 잘 대해줬어요. 그 노회 소속 목사님들 중에는 내 강의를 들으신 분들도 많고, 내가 교역자 세미나도 자주 인도하고 해서 서로 안면도 있고, 가입한 지 얼마되지 않아도 여러모로 사랑과 대우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 노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당시 서울노회 목사 한 사람이 이혼 사유가 안 되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이혼을 했어요. 그렇게 이혼도 불법적인데다가 이혼 하자마자 곧 재혼을 했어.
SDG- 노회의 반응은 어땠나요?
송- 재혼을 했는데 그 사람의 재혼식 주례를 노회장인가 임원들이 가서 했어요. 그 일을 노회 때 인사부에서 이혼, 재혼이 문제가 없다고 보고하니까 회원 가운데 목사님 한 분이 “그것은 불법 이혼이고, 불법 결혼이다.”라고 지적하니까, 노회에서 그분을 옛날 일을 걸어가지고 그 자리에서 제명을 시켜 버렸어요. 그 사건이 터지면서 회개를 주장하는 측과 잘못이 없다는 측으로 노회가 딱 둘로 갈라져 버렸어요. 그래 나는 노회 소집 통지서를 받고 여기 들어 간지 몇 년 안 되니 여기고 저기고 안 가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당회를 소집했어요. 당회에서 “이번 노회는 제 생각에는 이 노회도 저 노회도 안 가야 되겠다.” 이랬더니 우리 장로님들이 “어디든 한 군데 가야지 안 가고 어정쩡하게 중간에 있는 거는 더 안 좋습니다.”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그러면 어느쪽으로 가겠냐 그랬더니 “원 노회는 불법을 저지른 노회인데 개혁하자는 데로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장로님들이 다 그리 가자 그래서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은 그리 갔어요. 그 노회 모임에 우리 장로들하고 내가 가니까 그 목사님들이 내가 잘못 온 줄 알고 “노회 두 군데서 모이는데 장소 바로 알고 오셨습니까?” 그래서 내가 “바로 왔습니다.”(웃음). 그렇게 속하게 된 노회가 개혁노회였는데, 이 문제를 총회에 상소를 했어요. 총회에서 이 문제를 재판부에 넘겨 가지고 재판을 하고 바로 잡아줬어야 했는데, 원 노회측이 워낙 정치적으로 막강한 사람들이다 보니 재판 절차도 제대로 안 밟고 나중에 총회에서 개혁노회에 속한 목사들에게 데드라인을 정해 주면서 “언제까지 무조건 안 들어오거든 다 제명시켜버려.” 이래 버린기라.
SDG- 아, 총회가 그런 불법적인 일을요?
송- 그래가지고 제명을 다 시켰는데, 그때도 저는 제명을 안 시켰어요.(웃음) 1년인가 2년인가 있다가 노회 참석을 안 하니까 제명처리가 되었는데, 그렇게 제명되고 나니까 노회가 독자적으로 나가야 되는 그런 형편이 된거지.
SDG- 총회로부터 제명된 교회가 얼마나 됐습니까?
송- 서른개는 넘어요. 그때 고신 측은 아니었어도 같이 나가자고 하는 교회들도 더러 있었어요. 그렇게 독립적으로 3개 노회가 규합이 되어서 결국은 총회로 출범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 양의문교회에서 서울성경학교라고 있었어요. 89년도에 이 성경학교를 개설했는데, 총회로 출범을 하고 나니 또 목회자를 양성할 기관, 신학교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성경학교에서 신학교로 이름을 변경해서 우리 총회 인준 신학교로 하자고 해서 ‘고려개혁신학교’가 만들어졌어요.
SDG- 그렇다면 고려개혁이라는 교단이 먼저 세워졌다는 말씀인가요?
송- 아니오. 세워지진 않았죠. 원래는 ‘고신개혁총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는데 총회신학교 명칭을 ‘고려개혁신학연구원’으로 하고 나니까, 자연히 교단 이름이 고려개혁교단이 된 거죠. 마치 내가 교단도 세우고 신학교도 세운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사실 나는 그냥 따라 가다가 교단에 들게 된 거고, 신학교도 하게 된 거예요.(웃음)
SDG- 이제 모든 진실이 다 드러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처음에 교단 명칭을 고신개혁이라고 지었다고 하셨는데, 지난 일을 경험으로 교단을 개혁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름 속에 반영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송- 그건 우리가 속했던 서울노회를 개혁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개혁노회라고 그랬거든요.
SDG- 그럼에도 고신에 대한 신학적 전통은 계속 유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셨던 거군요.
송- 예. 우리 고려개혁 헌법 보면 우리 고려개혁교단 출범의 역사적인 과정이 다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고신과의 신학적, 정치적 연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총회 회수도 같은 회수 하고 고신 헌법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어요. 다만 헌법의 시행규칙 정도만 우리 형편에 맞게 좀 바꾸었어요.
SDG- 고려개혁학교가 시작된 게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송- 1992년이죠.
SDG- 그렇다면 고려개혁교단이 출범한 것도 이때로 봐야 되는 건가요?
송- 그렇습니다.
SDG-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새로운 교단이 세워졌고 새 교단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작 이전 총회가 제대로 판단을 잘 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데요.
송- 그렇지요. 교단과 총회의 리더십의 빈곤이라 그럴까, 지교회에 대한 애정 결핍이라고 할까,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모자랐다고 볼 수 있죠. 그들도 그걸 인정하고 있어요. 그래도 교단들 중에서는 고신교단과 가장 가깝습니다.(웃음)
SDG- 그럼 지금 현재 고려개혁 교단 교세는 어떻습니까?
송- 뭐 아주 빈약해요.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김준범 목사님을 가리키며) 금년부터 우리 김목사님이 고려개혁신학연구원장을 맡았으니까.
SDG- (김목사님을 보고서) 김목사님께서요? 축하드립니다.(웃음)
송- 축하가 아니고 위로 해야지.(웃음) 교회수는 김목사님이 정확하게 아실 것입니다.
김- 한 8-90개 정도 됩니다.
SDG- 그때 30여개 교회에서 많이 늘었군요. 사실 제가 양의문교회 설립과 고려개혁교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이미 말씀을 다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개혁신앙으로 오시는 개인적인 역사에 대해서 주로 말씀해 주셨는데요. 오늘날은 우리 장로교회, 혹은 개혁교회라고 하는 교회들의 실상을 보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시대인데요. 이제는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좀 여쭙고 싶습니다. 양의문교회와 고려개혁교단을 시작하시면서 마음속에 바른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특별한 사명 같은 것이 있으셨겠죠?
송- 예. 그게 아까도 말했지만은 처음 신앙생활을 고신교단에서 했고 그곳에서 오래 자라왔지만은 뭐 개혁주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잘 몰랐거든.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교단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 속한 교회들도 어떤 신앙노선에 설지 뚜렷한 방향설정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고, 개혁전통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보니까 책임감이 많이 느껴지더라구요. 내 자신도 어떻게 나아가야 되고, 내가 맡고 있는 교회나 교단도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될 것인가 그 방향설정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듯이 잘 인도해주시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였어요. 그러고 보니까 말은 맞는데 굉장히 막연하고 구체성이 없어요.(웃음)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뭐냐. 그건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진리대로 믿고 또 예배하고 살고 하나님 섬기면 되는 것 아니냐. 성경대로, 오직 성경으로 방향을 잡고 나니까 성경이 가장 중요한지는 알겠는데, 우리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나 이단들도 성경에 근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성경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도 너무 막연한거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되 바르게 해석된 성경 사상으로, 신앙 노선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이렇게 바르게 해석된 성경 사상이나 신학 전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까 결국에는 종교개혁자들을 만나게 되더라구요. 사실 내가 콩코디아 신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루터 신학에 대해서는 남이 하는 것만큼은 했는데, 칼빈이 가르친 개혁주의와 여러 개혁주의자들이 가르친 개혁 노선보다는 너무 넓어서 구체성이 부족해요. 그래서 칼빈의 개혁주의와 개혁주의 1세대 개혁주의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실천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면에서 적용과 발전을 이룬 청교도 사상을 엮어서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노선으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들은 역사상 개혁주의 신앙노선을 가장 강력하고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제가 청교도라고 말할 때는 영국 청교도들만 말하는 게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지만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 화란의 제2종교개혁자들, 또 미국으로 건너 간 미국의 제1세대, 2세대 그 조나단 에드워즈까지를 포함하는 거예요.
SDG- 칼빈주의 전통의 개혁주의와 청교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송- 사실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는 같이 사용하지만은 좀 달라요. 개혁주의는 칼빈주의보다는 좀 더 통합적이고 넓은 사상체계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 걸 다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청교도적 개혁신앙, 정통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거고, 그 이후의 개혁, 개혁사상, 개혁신앙을 좀 변질시킨 그런 건 좀 이래 건너뛰고, 정통 청교도적 개혁신앙 사상을 좀 더 깊고 넓게 연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고독하지만은 이걸 어떻게 목회 현실과 신앙생활에 철저하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죠. 이것이 결국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가자 해 가지고 교단적으로는 이래하자 저래하자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내가 목회하는 교회만은 좀 제대로 해 볼까 해서 교회정관을 만들었어요. 정관에 우리 양의문교회 신앙표준을 사도신경, 또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소위 에큐메니칼 크리드(Creeds)를 일단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한국 장로교가 받아들인 장로교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등을 받아 들였어요. 그리고 유럽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을 우리 교회 신앙기준으로 명문화 해 가지고 공동의회에서 통과시킨 겁니다. 십년도 더 됐어요.
SDG- 교단적으로는 시도하지 못하셨지만 교회적으로는 우선적으로 하셨단 말씀이군요.
송- 네. 공동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이미 이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가르쳤어요. 어떤 교회 후임으로 간 젊은 목사님이 어떤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면 좋겠냐고 묻길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으로 해 보라고 했더니 그 교회의 보수적인 원로 목사님이 왜 장로교 신앙고백이 아닌 것으로 가르치냐고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말도 좀 잘하고 똑똑한 교인들이 “우리 교단 헌법에 인정한 신앙기준은 웨스트민스터 세 가지 문서뿐인데 목사님은 왜 주일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가르칩니까?” 하고 말하면 그것도 말이 될 수가 있거든. 그래서 교단 헌법을 만들기 전에 교회정관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넣어서 공동의회에서 통과 시켰어요. 교단적으로는 아직 크게 영향은 미치지 못 할지라도 제가 생각할 때는 양의문교회는 고대 에큐메니칼 크리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으니까 이거는 보편적 교회고 공교회고, 또 세 가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하고 개혁교회 3대 표준문서를 받아들였으니까 확실하게 개혁교회고. 그 다음에 그 고백들을 받아 들였으니까 컨페셔널 처지(confessional church)다. 즉 고백교회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받아들인 게 아니고, 상당히 오랫동안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에 따라 성경적 예배 회복에 노력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가르치고 엄수했던 주일성수와 요리문답을 통한 교리교육를 강조하고 있어요. 내 생각에는 신앙고백도 좋지만 교육은 요리문답을 가지고 하는 게 좋더라고요. 왜냐하면 요리문답에는 그 고백서에 있는 내용이 문답식으로 다 있고, 그 문답에는 결국 칼빈의 전 가르침이 그대로 엑기스로 녹아 있어요. 그래서 주일 오후에는 요리문답만을 가지고 철저하게 설교하고, 또 여름 사경회에서도 좀 더 깊이 있게 가르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정통 개혁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가정예배, 이걸 청교도들이 굉장히 강조했고, 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이 강조했는데 한국교회에서는 다 던져 버렸잖아. 우리 교회에서는 가정예배 안 드리면 공식적인 직분으로 안 세우겠다고 하면서까지 가정예배를 강조해요. 그 다음에 예배 회복인데, 요즘은 QT 혹은 경건회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은,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개인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어요. 이 개인예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인데 예배적인 정신으로 말씀 읽고, 또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요즘 QT와는 좀 다릅니다. QT에는 경배적인 자세와 정신이 좀 결핍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인예배 또는 개인경건회라는 말로 사용하는게 나아요.
SDG- 그렇군요. 우선 교회적으로 시행하신 후에 교단적으로 확대하시려는 계획이시군요.
송- 예. 이 다섯 가지 회복을 아주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계속 강조했어요. 지금은 얼마만큼 잘 정착이 된지는 모르지만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 교인들이 다 알아요. 청교도 개혁전통에서 내던져 버린 것들을 이제 조금씩 회복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지금은 우리 교회차원에서만 충실히 다지고 차츰차츰 교단에 영향을 끼치려 해요. 그래서 교단헌법 개정할 때에 이러한 조항을 다른 장로교 교단보다도 먼저 집어넣으려고 해요. 또 교역자, 교단 교역자 수련회 같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강조도 하고 강의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SDG- 많은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외국에 있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교단들의 경우를 보면, 말씀하신 내용들을 교단이 주도적으로 행하고 교회들이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 면에서 양의문교회는 많은 교회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송- 예. 모델이 되려고 의식적으로 더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필요하니까요. 저의 방법은 지극히 동양적인 접근법입니다.(웃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웃음) ‘먼저 내 자신이 개혁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되고, 목회하는 교회가 개혁신앙전통에 확고하게 정립되도록 하고, 그 다음에 인자 차츰차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교단에 파급효과를 미치고, 또 다른 교단 다른 교회도 파급효과를 미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갑니다. 예를 들어, 교단이나 학교에서 강의때마다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생각들을 가끔 비치고, 경건회 시간때에도 찬송가 안 부르고 시편 찬송 부르고(웃음).
SDG- 그렇군요.(웃음) 그런데 혹시 이런 정신으로 개혁적이고, 보편적이고, 고백적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특별히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송- 뭐….. 크게 어려움이 있었다기 보다는….. 제가 공부한 곳이 콩코디아 신학교 아닙니까? 그곳은 철저하게 보수적인 루터란 학교인데요. 이곳에서는 뭐든 루터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 너무 루터를 강조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약간 반감이 생기더라고. 루터를 너무 우려먹는다고 생각되어서…(웃음) 그런데 우리 장로교는 뭐냐는 거예요. 칼빈주의, 개혁주의 그러면서 실제로 신학교육에서부터 또 목회현장에 이르기까지 예배나 교인양육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얼마나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는가. 인자 비교를 해 보니까 부끄럽더라구. 우리도 개혁주의, 칼빈주의를 쫓는다고 한다면 신앙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오늘 목회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그 신앙 정신을 접목시키는 활동을 활발하게 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더라구. 그래서 루터란 학교에서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그 다음에는 우리 장로교회가 장로교회답게 나가야 되겠다 하면서 강하게 도전을 받았단 말이죠. 그때부터 미국에 있을 때도 그렇지만은, 한국에 나와서도 개혁신앙 사상에 대해서 내가 먼저 공부를 시작했어요. 우선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다 읽은 겁니다. 핫지, 벌콥, 후크마, 보스웰이나 쉐드까지 미국의 조직신학자들 책뿐만 아니라, 한국의 박형룡 목사님의 교리신학, 조직신학 책은 거의 한 줄도 안 빼고 다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기술한 성경신학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조지 래드에 영향을 많이 받긴 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신구약을 아우르는 책들을 보았어요. 그리고 청교도들의 사상집들과 로이드 존스 성경강해를 읽었어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헤르만 바빙크의 책은 영어로도 번역이 안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 있어서 탐독하고 있고, 요즘은 로버트 레이몬드의 책도 많이 읽고 있어요. 암튼 개혁신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니깐 확신이 딱 서잖아요. 이 방향으로 나가야겠다. 목회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겠다. 이런 확신이 분명하게 서니까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데 힘이 그렇게 안 들었던 것 같애.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지. 성도들은 잘 몰라도 목사가 좋다면 신뢰하고 따라가는 거니까. 그래서 오래 전부터 성도들에게 청교도 서적을 읽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청교도 개혁신앙에 대한 강좌도 많이 했습니다.
SDG- 성도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송- 예. ‘이게 좋은거다.’라고 하니까 잘 믿고 따라줬어요.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니까 주변에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도 ‘참 좋은 모양이다.’고 해서 별로 반발하는 이도 없고요. 물론 이 확신이 없으면 목회 현장에 접목을 시킨다는 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수용 못하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생길 수도 있거든요. 목회자가 확신을 가지고 나가면 반발을 안 합니다. 어정쩡하니까 하다 보면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들리고, 계속 추진할 힘도 잃어버리는 거예요. 목회자는 계속 공부하고 기도하고 계속 끌고 나가야해요. 이러한 사상 무장이 투철하게 돼야 가능하지, 다른 것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SDG- 말씀하신 내용은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전형적인 목회자 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인내와 리더십과 확신이 조화롭게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암튼 지금도 여전히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송- 개혁신앙 가진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지.(웃음) 루터가 평생 그랬고, 특히 칼빈이 죽을 때까지 그랬고, 한국으로 말하면 박윤선 목사님도 평생 공부만 한 분이 아닙니까?
SDG- 말씀하신 것이 어쩌면 목회자가 걸어야 할 정도(正道)인데, 지금은 목회라는 게 방법론이든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서 목회가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목회 현실을 보시는 소감이 어떠세요?
송- 우리 교회 상황이 개혁신앙에 입각한 목회를 하기에는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첫째는 너무 바빠요. 개혁신앙을 고수하려면 그 신학사상에 상당히 깊이 들어가야 되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어. 신학교 때 좀 배운 것으로 설교 준비에 급급해 가지고 이 방대한 개혁신앙의 좋은 양식들을 공급받을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잖아요. 개혁신학은 굉장히 깊이 있고, 참 넓고, 강한 신학사상 아닙니까? 그렇게 물렁한 신학이 아니거든. 그래 이 신학사상을 가져야 목회자 자신도 깊고 넓고 강한 안목과 신앙을 가질 수 있고, 설교도 그런데서 나와야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얕고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런 것 저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신앙을 가질 수 있거든. 그런데 목회자들이 그런 깊이 있는 영양분을 흡수를 못 하고 있으니까 설교가 얕을 수밖에 없어. 깊이가 없어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실용주의적인 방법론이라도 써야지.(웃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자연히 실용주의적으로 교인을 모아야 하고, 교회에 나오게 해야 하고 하니까 더 바빠질 수밖에 없지요.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를 보면 좀 애처로와.(웃음)
SDG- 근래에 개혁신앙과 관련된 책이나 자료들이 출판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긍정적인 면에서는 개혁신앙의 저변 확대라고 할 수 있지만, 개혁신앙의 깊이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송- 깊이도 깊이지만은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목회현장에 잘 접목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개혁주의를 잘 모르면서 어설프게 접목시키는 것은 오히려 안 하니만 못 하죠. 효과가 안 나타나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인내해야 좋은 결과를 얻지, 짧게 이거 한번 해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SDG- 명심하고 들어야 될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송목사님 같은 분을 직접 이렇게 뵙고 사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를 목회현장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 귀감과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송- 내 생각엔 하나님께서 청교도 개혁신앙에 입각해서 목회하는 걸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왜 그런고 하면, 나는 부족하지만은 그리 한다고 애를 쓴 결과를 이래 보면 하나님이 좋게 해 주시니까요. 분에 넘치게 은퇴한 뒤에도 다른 목사들보다도 훨씬 보람있는 삶을 살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고 좋은 후임도 주시고.(웃음)
SDG- 언급하시니 좀 더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양의문 교회하면 개혁신앙 안에서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진 교회로 귀감이 되고 있는데요. 사실 목회자 세대교체는 한국 교회에 여전히 뜨거운 감자가 아닙니까? 세대교체를 통해서 교회가 안정되기는 커녕 불안해지고 사회적으로도 지탄받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또한 어떤 기준으로 세대교체를 하시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 저는 그래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이든지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전통과 문화가 있고 교회로서의 생리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담임목사가 은퇴하기 전에 후임을 정할 때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그런 전통과 문화와 생리를 알고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목회를 할만한 후임자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담임하는 동안만 하고 떠나면 교회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을 해요. 특히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그런 교회의 경우에 그것을 바로 잡아 나가려면 더 많은 생각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후임자를 생각할 때에 개혁사상의 일치성, 즉 신학 사상이 같아야 돼요. 영국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너클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 Church)의 경우도, 사실 그 교회는 스펄젼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거든. 이전에 목회자들이 쭉 있가다 스펄전 목사님이 중간에 들어간 케이스인데, 많은 목사들이 거의 칼빈주의자들이었지만 한 세 사람이 알미니안 목사였어요. 결국에는 얼마 하지도 못 하고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가 나가긴 했지만, 교회를 많이 약화시켰어요. 그 역사를 보면서 ‘알미니안 목사를 후임으로 넣고 나간 목사는 무책임한 목사다.’라는 생각을 했거든. 그 교회도 세 번 정도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다라고. 그래서 지금도 침례교적 배경에 있지만 오랜 기간 칼빈주의 교회를 유지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콩코디아 신학교 유학 시절에 저항하다가 반성한 결과로 어떤 생각을 했는고 하니 ‘내가 돌아가면 정말 장로교회다운 장로교회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변질되고 희석된 장로교회가 아니라 아주 장로교회다운 장로교회를 해야 되겠다는 소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내 후임자는 진짜 장로교가 뭔지 신학, 정치 모든 면의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은 사람을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때 우리 신학교에 교회사 가르치러 온 총신대 홍치모 교수한테 ‘현재 존 녹스의 장로교 가르침과 전통에서부터 변질 되지 않은 신학을 가르치는 장로교 신학교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니까 스코틀랜드 자유신학교(Free Church of Scotland College)를 소개해 주더라고. 학교는 작지만은 제대로된 장로교 신학교라고. 그래서 후임자인 김준범목사에게 그 외에 몇 학교에 지원서를 낸 후에 본인이 직접 한 군데를 택하라고 했어요. 자기가 택해야 책임도 지고 후회도 안하니까.(웃음) 그랬더니 스코틀랜드러 가겠다고 해서 그곳에서 3년을 장로교 신학을 철저하게 공부하도록 했어요. 덕분에 우리 교회 시편찬송도 그곳에서 얻어 쓰잖아요. 마치고 와서 신학석사(Th.M)와 박사학위(Ph.D)는 조셉 파이파(Joseph A. Pipa) 목사님이 있는 그린빌 장로교 신학교(Greenvill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마치고 왔어요. 그렇게 오리지날 전통의 장로교 신학교에서 배웠으니까 다른 게 나올래야 나올 수도 없지. 그래서 안심하고 교회에 후임자로 추천을 했지. 후임을 추천할 때 성급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닥쳐서 하려 하면 안 돼요. 담임목사의 파워가 있을 때 뭐든지 해야.(웃음) 몇 년 전에 만약에 내가 은퇴하고 후임을 정할 때에,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교회에 의견을 물었어요. 교회에서 청빙위원을 내서 그냥 선보고 청빙할 것인지, 당회에서 장로님들이 후보를 물색한 후에 추천을 해서 공동의회에서 결정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담임 목사인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천거하면 그 사람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했어요. 그 때 내가 추천을 해 주는 사람을 공동의회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해서, 몇 년 전에 그거를 딱 받아 놨어요. 그리고나서 몇 년 후에 김목사를 후임으로 추천하고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했는데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어요. 한, 두표 정도 반대표가 있었나?(웃음)
SDG- 그랬군요.(웃음)
송- 투표할 때 은퇴 이후 나에 대한 은급비 등의 액수까지 포함해서 다 투표했어요. 모든 것이 은혜롭게 잘 되었어요.
나는 후임 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사상이라고 봐요. 그리고 그 교회의 문화와 성도들의 신앙생태를 잘 알아야 돼요. 그래야 혼란이 없어요. 또 원로목사를 잘 알아야 돼요. 원로목사와 일단 신뢰관계가 되어져야 오해가 없어지거든.
SDG- 교회 세습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 교회에서 세습이란 말이 나온 것 자체가 유감스러워. 사실 미국이나 화란 교회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왜 한국교회만 이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세습이 문제되는 것은 담임목사가 자기 아들 세우기 위해서 교회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한 나머지 교회로 하여금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거는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목사라도 그런 식으로 하면 그 교회의 기본권을 무시하니까 월권입니다. 그게 아니고 담임목사가 은퇴하기 전에 목회 지도력을 잘 발휘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과정을 공정하고 책임있게 하여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기본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발휘하게 한다면 아들이면 어떻고, 손자면 어떻고, 사위면 어떻고, 다른 모르는 사람이면 뭐 어떻습니까? 아무 상관 없죠. 그러나 역시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상이 일치해야 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그대로 또 전임목사가 해 오던 것들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해요. 별로 나은 대안도 없이 앞서 있던 이념과 전통을 무조건 없애버리고 변경시킨다든지 하면 교회가 또 혼란스러워져요. 발전적으로는 변경을 시킬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함부로 하는 것은 경솔하고 교만한 일입니다. 역사적 연속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김목사(김준범목사)는 담임을 한 지 5년이 넘지만 내가 해 오던 것을 너무 안 바꿔.(웃음) 한 개도 안 바꿔.
김- 가장 안전하니까요.(웃음)
송- 발전적으로 바꾸고 추가해도 돼. 내가 잘 했다고 생각을 안 하거든. 내가 시간이 없고, 여력이 안돼서 내 편의 위주로 해 오던 게 많아. 그런 것은 좀 바꾸고 해도 되는데.(웃음)
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게 저한테도 맞아서요. 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웃음)
SDG- 두 분 모습이 뵙기 좋습니다.(웃음) 김 목사님께는 부담이 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송 목사님께서 기대하시는 부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김 목사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한 말씀 해 주시지요.(웃음)
송- 내가 김 목사님한테 기대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좋은 점은 그대로 지속 발전시키고, 동시에 작은 교단이지만 우리 교단도 제대로 자리가 잡히도록 하는 거예요. 또 신학교도. 작은 신학교라도 개혁신앙 전통에 입각한 목회를 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데 더 충실해야 되니깐. 연합차원에서는 외국의 청교도 개혁신앙의 전통에 입각해 나가는 작지만 견실한 그런 교단들과의 관계를 가져야 해요. 요즘은 좀 크다는 교단이나 교회는 청교도 개혁신앙에 잘 집중하지 못하고 초점이 흐려져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칼빈주의와 성경중심주의, 교회중심주의이고 또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긴 하지만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너무 폭넓게 세계를 케어링(caring)하려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다행히 작은 교단들은 그 초점을 흐리지 않고 목회와 설교와 교육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애. 미국과 화란의 개혁교단들이 좋은 예인데, 조엘 비키 목사가 하는 개혁교회나 칼빈 신학교가 속한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가 여성 안수하는 바람에 떨어져 나온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와 같은 곳이 작아도 철저하게 하는 데가 있어요. 또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미국 개혁 장로교 교단(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이나 저기 아일랜드에 있는 개혁교단(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Ireland), 이런 곳과 교단적으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어요. 또 세계개혁주의연맹(WRF)도 있지만 너무 범위가 넓어서 그건 그렇고, 고신측이 가입되어 있는 ICRC(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같은 데는 교류도 하고 가입도 해서 개혁교회 뿐만 아니라 교단과 신학교까지 튼튼한 기반 위에 세우는 막중한 사명을 김목사에게 기대하는 거지.(웃음)
SDG- 목사님께서는 터를 닦으셨으니 김목사님 체제에서는 아름다운 건물로 세워져 가는 그런 모습이 기대됩니다. .
송- 뭐 그리 될 겁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어학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야 하는데, 우리 김목사님이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지 않겠나 싶습니다.(웃음)
지금까지 개혁신앙으로 오시는 개인적인 역사에 대해서 주로 말씀해 주셨는데요. 오늘날은 우리 장로교회, 혹은 개혁교회라고 하는 교회들의 실상을 보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시대인데요. 이제는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좀 여쭙고 싶습니다. 양의문교회와 고려개혁교단을 시작하시면서 마음속에 바른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특별한 사명 같은 것이 있으셨겠죠?
송- 예. 그게 아까도 말했지만은 처음 신앙생활을 고신교단에서 했고 그곳에서 오래 자라왔지만은 뭐 개혁주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잘 몰랐거든.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교단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 속한 교회들도 어떤 신앙노선에 설지 뚜렷한 방향설정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고, 개혁전통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보니까 책임감이 많이 느껴지더라구요. 내 자신도 어떻게 나아가야 되고, 내가 맡고 있는 교회나 교단도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될 것인가 그 방향설정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듯이 잘 인도해주시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였어요. 그러고 보니까 말은 맞는데 굉장히 막연하고 구체성이 없어요.(웃음)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뭐냐. 그건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진리대로 믿고 또 예배하고 살고 하나님 섬기면 되는 것 아니냐. 성경대로, 오직 성경으로 방향을 잡고 나니까 성경이 가장 중요한지는 알겠는데, 우리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나 이단들도 성경에 근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성경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도 너무 막연한거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되 바르게 해석된 성경 사상으로, 신앙 노선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이렇게 바르게 해석된 성경 사상이나 신학 전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까 결국에는 종교개혁자들을 만나게 되더라구요. 사실 내가 콩코디아 신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루터 신학에 대해서는 남이 하는 것만큼은 했는데, 칼빈이 가르친 개혁주의와 여러 개혁주의자들이 가르친 개혁 노선보다는 너무 넓어서 구체성이 부족해요. 그래서 칼빈의 개혁주의와 개혁주의 1세대 개혁주의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실천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면에서 적용과 발전을 이룬 청교도 사상을 엮어서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노선으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들은 역사상 개혁주의 신앙노선을 가장 강력하고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제가 청교도라고 말할 때는 영국 청교도들만 말하는 게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지만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 화란의 제2종교개혁자들, 또 미국으로 건너 간 미국의 제1세대, 2세대 그 조나단 에드워즈까지를 포함하는 거예요.
SDG- 칼빈주의 전통의 개혁주의와 청교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송- 사실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는 같이 사용하지만은 좀 달라요. 개혁주의는 칼빈주의보다는 좀 더 통합적이고 넓은 사상체계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 걸 다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청교도적 개혁신앙, 정통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거고, 그 이후의 개혁, 개혁사상, 개혁신앙을 좀 변질시킨 그런 건 좀 이래 건너뛰고, 정통 청교도적 개혁신앙 사상을 좀 더 깊고 넓게 연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고독하지만은 이걸 어떻게 목회 현실과 신앙생활에 철저하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죠. 이것이 결국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가자 해 가지고 교단적으로는 이래하자 저래하자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내가 목회하는 교회만은 좀 제대로 해 볼까 해서 교회정관을 만들었어요. 정관에 우리 양의문교회 신앙표준을 사도신경, 또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소위 에큐메니칼 크리드(Creeds)를 일단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한국 장로교가 받아들인 장로교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등을 받아 들였어요. 그리고 유럽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을 우리 교회 신앙기준으로 명문화 해 가지고 공동의회에서 통과시킨 겁니다. 십년도 더 됐어요.
SDG- 교단적으로는 시도하지 못하셨지만 교회적으로는 우선적으로 하셨단 말씀이군요.
송- 네. 공동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이미 이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가르쳤어요. 어떤 교회 후임으로 간 젊은 목사님이 어떤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면 좋겠냐고 묻길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으로 해 보라고 했더니 그 교회의 보수적인 원로 목사님이 왜 장로교 신앙고백이 아닌 것으로 가르치냐고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말도 좀 잘하고 똑똑한 교인들이 “우리 교단 헌법에 인정한 신앙기준은 웨스트민스터 세 가지 문서뿐인데 목사님은 왜 주일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가르칩니까?” 하고 말하면 그것도 말이 될 수가 있거든. 그래서 교단 헌법을 만들기 전에 교회정관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넣어서 공동의회에서 통과 시켰어요. 교단적으로는 아직 크게 영향은 미치지 못 할지라도 제가 생각할 때는 양의문교회는 고대 에큐메니칼 크리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으니까 이거는 보편적 교회고 공교회고, 또 세 가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하고 개혁교회 3대 표준문서를 받아들였으니까 확실하게 개혁교회고. 그 다음에 그 고백들을 받아 들였으니까 컨페셔널 처지(confessional church)다. 즉 고백교회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받아들인 게 아니고, 상당히 오랫동안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에 따라 성경적 예배 회복에 노력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가르치고 엄수했던 주일성수와 요리문답을 통한 교리교육를 강조하고 있어요. 내 생각에는 신앙고백도 좋지만 교육은 요리문답을 가지고 하는 게 좋더라고요. 왜냐하면 요리문답에는 그 고백서에 있는 내용이 문답식으로 다 있고, 그 문답에는 결국 칼빈의 전 가르침이 그대로 엑기스로 녹아 있어요. 그래서 주일 오후에는 요리문답만을 가지고 철저하게 설교하고, 또 여름 사경회에서도 좀 더 깊이 있게 가르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정통 개혁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가정예배, 이걸 청교도들이 굉장히 강조했고, 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이 강조했는데 한국교회에서는 다 던져 버렸잖아. 우리 교회에서는 가정예배 안 드리면 공식적인 직분으로 안 세우겠다고 하면서까지 가정예배를 강조해요. 그 다음에 예배 회복인데, 요즘은 QT 혹은 경건회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은,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개인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어요. 이 개인예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인데 예배적인 정신으로 말씀 읽고, 또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요즘 QT와는 좀 다릅니다. QT에는 경배적인 자세와 정신이 좀 결핍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인예배 또는 개인경건회라는 말로 사용하는게 나아요.
SDG- 그렇군요. 우선 교회적으로 시행하신 후에 교단적으로 확대하시려는 계획이시군요.
송- 예. 이 다섯 가지 회복을 아주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계속 강조했어요. 지금은 얼마만큼 잘 정착이 된지는 모르지만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 교인들이 다 알아요. 청교도 개혁전통에서 내던져 버린 것들을 이제 조금씩 회복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지금은 우리 교회차원에서만 충실히 다지고 차츰차츰 교단에 영향을 끼치려 해요. 그래서 교단헌법 개정할 때에 이러한 조항을 다른 장로교 교단보다도 먼저 집어넣으려고 해요. 또 교역자, 교단 교역자 수련회 같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강조도 하고 강의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SDG- 많은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외국에 있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교단들의 경우를 보면, 말씀하신 내용들을 교단이 주도적으로 행하고 교회들이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 면에서 양의문교회는 많은 교회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송- 예. 모델이 되려고 의식적으로 더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필요하니까요. 저의 방법은 지극히 동양적인 접근법입니다.(웃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웃음) ‘먼저 내 자신이 개혁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되고, 목회하는 교회가 개혁신앙전통에 확고하게 정립되도록 하고, 그 다음에 인자 차츰차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교단에 파급효과를 미치고, 또 다른 교단 다른 교회도 파급효과를 미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갑니다. 예를 들어, 교단이나 학교에서 강의때마다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생각들을 가끔 비치고, 경건회 시간때에도 찬송가 안 부르고 시편 찬송 부르고(웃음).
SDG- 그렇군요.(웃음) 그런데 혹시 이런 정신으로 개혁적이고, 보편적이고, 고백적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특별히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송- 뭐….. 크게 어려움이 있었다기 보다는….. 제가 공부한 곳이 콩코디아 신학교 아닙니까? 그곳은 철저하게 보수적인 루터란 학교인데요. 이곳에서는 뭐든 루터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 너무 루터를 강조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약간 반감이 생기더라고. 루터를 너무 우려먹는다고 생각되어서…(웃음) 그런데 우리 장로교는 뭐냐는 거예요. 칼빈주의, 개혁주의 그러면서 실제로 신학교육에서부터 또 목회현장에 이르기까지 예배나 교인양육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얼마나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는가. 인자 비교를 해 보니까 부끄럽더라구. 우리도 개혁주의, 칼빈주의를 쫓는다고 한다면 신앙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오늘 목회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그 신앙 정신을 접목시키는 활동을 활발하게 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더라구. 그래서 루터란 학교에서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그 다음에는 우리 장로교회가 장로교회답게 나가야 되겠다 하면서 강하게 도전을 받았단 말이죠. 그때부터 미국에 있을 때도 그렇지만은, 한국에 나와서도 개혁신앙 사상에 대해서 내가 먼저 공부를 시작했어요. 우선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다 읽은 겁니다. 핫지, 벌콥, 후크마, 보스웰이나 쉐드까지 미국의 조직신학자들 책뿐만 아니라, 한국의 박형룡 목사님의 교리신학, 조직신학 책은 거의 한 줄도 안 빼고 다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기술한 성경신학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조지 래드에 영향을 많이 받긴 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신구약을 아우르는 책들을 보았어요. 그리고 청교도들의 사상집들과 로이드 존스 성경강해를 읽었어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헤르만 바빙크의 책은 영어로도 번역이 안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 있어서 탐독하고 있고, 요즘은 로버트 레이몬드의 책도 많이 읽고 있어요. 암튼 개혁신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니깐 확신이 딱 서잖아요. 이 방향으로 나가야겠다. 목회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겠다. 이런 확신이 분명하게 서니까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데 힘이 그렇게 안 들었던 것 같애.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지. 성도들은 잘 몰라도 목사가 좋다면 신뢰하고 따라가는 거니까. 그래서 오래 전부터 성도들에게 청교도 서적을 읽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청교도 개혁신앙에 대한 강좌도 많이 했습니다.
SDG- 성도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송- 예. ‘이게 좋은거다.’라고 하니까 잘 믿고 따라줬어요.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니까 주변에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도 ‘참 좋은 모양이다.’고 해서 별로 반발하는 이도 없고요. 물론 이 확신이 없으면 목회 현장에 접목을 시킨다는 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수용 못하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생길 수도 있거든요. 목회자가 확신을 가지고 나가면 반발을 안 합니다. 어정쩡하니까 하다 보면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들리고, 계속 추진할 힘도 잃어버리는 거예요. 목회자는 계속 공부하고 기도하고 계속 끌고 나가야해요. 이러한 사상 무장이 투철하게 돼야 가능하지, 다른 것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SDG- 말씀하신 내용은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전형적인 목회자 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인내와 리더십과 확신이 조화롭게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암튼 지금도 여전히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송- 개혁신앙 가진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지.(웃음) 루터가 평생 그랬고, 특히 칼빈이 죽을 때까지 그랬고, 한국으로 말하면 박윤선 목사님도 평생 공부만 한 분이 아닙니까?
SDG- 말씀하신 것이 어쩌면 목회자가 걸어야 할 정도(正道)인데, 지금은 목회라는 게 방법론이든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서 목회가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목회 현실을 보시는 소감이 어떠세요?
송- 우리 교회 상황이 개혁신앙에 입각한 목회를 하기에는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첫째는 너무 바빠요. 개혁신앙을 고수하려면 그 신학사상에 상당히 깊이 들어가야 되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어. 신학교 때 좀 배운 것으로 설교 준비에 급급해 가지고 이 방대한 개혁신앙의 좋은 양식들을 공급받을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잖아요. 개혁신학은 굉장히 깊이 있고, 참 넓고, 강한 신학사상 아닙니까? 그렇게 물렁한 신학이 아니거든. 그래 이 신학사상을 가져야 목회자 자신도 깊고 넓고 강한 안목과 신앙을 가질 수 있고, 설교도 그런데서 나와야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얕고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런 것 저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신앙을 가질 수 있거든. 그런데 목회자들이 그런 깊이 있는 영양분을 흡수를 못 하고 있으니까 설교가 얕을 수밖에 없어. 깊이가 없어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실용주의적인 방법론이라도 써야지.(웃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자연히 실용주의적으로 교인을 모아야 하고, 교회에 나오게 해야 하고 하니까 더 바빠질 수밖에 없지요.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를 보면 좀 애처로와.(웃음)
SDG- 근래에 개혁신앙과 관련된 책이나 자료들이 출판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긍정적인 면에서는 개혁신앙의 저변 확대라고 할 수 있지만, 개혁신앙의 깊이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송- 깊이도 깊이지만은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목회현장에 잘 접목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개혁주의를 잘 모르면서 어설프게 접목시키는 것은 오히려 안 하니만 못 하죠. 효과가 안 나타나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인내해야 좋은 결과를 얻지, 짧게 이거 한번 해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SDG- 명심하고 들어야 될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송목사님 같은 분을 직접 이렇게 뵙고 사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를 목회현장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 귀감과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송- 내 생각엔 하나님께서 청교도 개혁신앙에 입각해서 목회하는 걸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왜 그런고 하면, 나는 부족하지만은 그리 한다고 애를 쓴 결과를 이래 보면 하나님이 좋게 해 주시니까요. 분에 넘치게 은퇴한 뒤에도 다른 목사들보다도 훨씬 보람있는 삶을 살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고 좋은 후임도 주시고.(웃음)
SDG- 언급하시니 좀 더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양의문 교회하면 개혁신앙 안에서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진 교회로 귀감이 되고 있는데요. 사실 목회자 세대교체는 한국 교회에 여전히 뜨거운 감자가 아닙니까? 세대교체를 통해서 교회가 안정되기는 커녕 불안해지고 사회적으로도 지탄받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또한 어떤 기준으로 세대교체를 하시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 저는 그래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이든지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전통과 문화가 있고 교회로서의 생리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담임목사가 은퇴하기 전에 후임을 정할 때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그런 전통과 문화와 생리를 알고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목회를 할만한 후임자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담임하는 동안만 하고 떠나면 교회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을 해요. 특히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그런 교회의 경우에 그것을 바로 잡아 나가려면 더 많은 생각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후임자를 생각할 때에 개혁사상의 일치성, 즉 신학 사상이 같아야 돼요. 영국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너클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 Church)의 경우도, 사실 그 교회는 스펄젼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거든. 이전에 목회자들이 쭉 있가다 스펄전 목사님이 중간에 들어간 케이스인데, 많은 목사들이 거의 칼빈주의자들이었지만 한 세 사람이 알미니안 목사였어요. 결국에는 얼마 하지도 못 하고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가 나가긴 했지만, 교회를 많이 약화시켰어요. 그 역사를 보면서 ‘알미니안 목사를 후임으로 넣고 나간 목사는 무책임한 목사다.’라는 생각을 했거든. 그 교회도 세 번 정도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다라고. 그래서 지금도 침례교적 배경에 있지만 오랜 기간 칼빈주의 교회를 유지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콩코디아 신학교 유학 시절에 저항하다가 반성한 결과로 어떤 생각을 했는고 하니 ‘내가 돌아가면 정말 장로교회다운 장로교회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변질되고 희석된 장로교회가 아니라 아주 장로교회다운 장로교회를 해야 되겠다는 소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내 후임자는 진짜 장로교가 뭔지 신학, 정치 모든 면의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은 사람을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때 우리 신학교에 교회사 가르치러 온 총신대 홍치모 교수한테 ‘현재 존 녹스의 장로교 가르침과 전통에서부터 변질 되지 않은 신학을 가르치는 장로교 신학교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니까 스코틀랜드 자유신학교(Free Church of Scotland College)를 소개해 주더라고. 학교는 작지만은 제대로된 장로교 신학교라고. 그래서 후임자인 김준범목사에게 그 외에 몇 학교에 지원서를 낸 후에 본인이 직접 한 군데를 택하라고 했어요. 자기가 택해야 책임도 지고 후회도 안하니까.(웃음) 그랬더니 스코틀랜드러 가겠다고 해서 그곳에서 3년을 장로교 신학을 철저하게 공부하도록 했어요. 덕분에 우리 교회 시편찬송도 그곳에서 얻어 쓰잖아요. 마치고 와서 신학석사(Th.M)와 박사학위(Ph.D)는 조셉 파이파(Joseph A. Pipa) 목사님이 있는 그린빌 장로교 신학교(Greenvill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마치고 왔어요. 그렇게 오리지날 전통의 장로교 신학교에서 배웠으니까 다른 게 나올래야 나올 수도 없지. 그래서 안심하고 교회에 후임자로 추천을 했지. 후임을 추천할 때 성급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닥쳐서 하려 하면 안 돼요. 담임목사의 파워가 있을 때 뭐든지 해야.(웃음) 몇 년 전에 만약에 내가 은퇴하고 후임을 정할 때에,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교회에 의견을 물었어요. 교회에서 청빙위원을 내서 그냥 선보고 청빙할 것인지, 당회에서 장로님들이 후보를 물색한 후에 추천을 해서 공동의회에서 결정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담임 목사인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천거하면 그 사람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했어요. 그 때 내가 추천을 해 주는 사람을 공동의회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해서, 몇 년 전에 그거를 딱 받아 놨어요. 그리고나서 몇 년 후에 김목사를 후임으로 추천하고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했는데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어요. 한, 두표 정도 반대표가 있었나?(웃음)
SDG- 그랬군요.(웃음)
송- 투표할 때 은퇴 이후 나에 대한 은급비 등의 액수까지 포함해서 다 투표했어요. 모든 것이 은혜롭게 잘 되었어요.
나는 후임 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사상이라고 봐요. 그리고 그 교회의 문화와 성도들의 신앙생태를 잘 알아야 돼요. 그래야 혼란이 없어요. 또 원로목사를 잘 알아야 돼요. 원로목사와 일단 신뢰관계가 되어져야 오해가 없어지거든.
SDG- 교회 세습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 교회에서 세습이란 말이 나온 것 자체가 유감스러워. 사실 미국이나 화란 교회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왜 한국교회만 이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세습이 문제되는 것은 담임목사가 자기 아들 세우기 위해서 교회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한 나머지 교회로 하여금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거는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목사라도 그런 식으로 하면 그 교회의 기본권을 무시하니까 월권입니다. 그게 아니고 담임목사가 은퇴하기 전에 목회 지도력을 잘 발휘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과정을 공정하고 책임있게 하여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기본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발휘하게 한다면 아들이면 어떻고, 손자면 어떻고, 사위면 어떻고, 다른 모르는 사람이면 뭐 어떻습니까? 아무 상관 없죠. 그러나 역시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상이 일치해야 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그대로 또 전임목사가 해 오던 것들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해요. 별로 나은 대안도 없이 앞서 있던 이념과 전통을 무조건 없애버리고 변경시킨다든지 하면 교회가 또 혼란스러워져요. 발전적으로는 변경을 시킬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함부로 하는 것은 경솔하고 교만한 일입니다. 역사적 연속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김목사(김준범목사)는 담임을 한 지 5년이 넘지만 내가 해 오던 것을 너무 안 바꿔.(웃음) 한 개도 안 바꿔.
김- 가장 안전하니까요.(웃음)
송- 발전적으로 바꾸고 추가해도 돼. 내가 잘 했다고 생각을 안 하거든. 내가 시간이 없고, 여력이 안돼서 내 편의 위주로 해 오던 게 많아. 그런 것은 좀 바꾸고 해도 되는데.(웃음)
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게 저한테도 맞아서요. 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웃음)
SDG- 두 분 모습이 뵙기 좋습니다.(웃음) 김 목사님께는 부담이 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송 목사님께서 기대하시는 부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김 목사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한 말씀 해 주시지요.(웃음)
송- 내가 김 목사님한테 기대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좋은 점은 그대로 지속 발전시키고, 동시에 작은 교단이지만 우리 교단도 제대로 자리가 잡히도록 하는 거예요. 또 신학교도. 작은 신학교라도 개혁신앙 전통에 입각한 목회를 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데 더 충실해야 되니깐. 연합차원에서는 외국의 청교도 개혁신앙의 전통에 입각해 나가는 작지만 견실한 그런 교단들과의 관계를 가져야 해요. 요즘은 좀 크다는 교단이나 교회는 청교도 개혁신앙에 잘 집중하지 못하고 초점이 흐려져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칼빈주의와 성경중심주의, 교회중심주의이고 또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긴 하지만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너무 폭넓게 세계를 케어링(caring)하려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다행히 작은 교단들은 그 초점을 흐리지 않고 목회와 설교와 교육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애. 미국과 화란의 개혁교단들이 좋은 예인데, 조엘 비키 목사가 하는 개혁교회나 칼빈 신학교가 속한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가 여성 안수하는 바람에 떨어져 나온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와 같은 곳이 작아도 철저하게 하는 데가 있어요. 또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미국 개혁 장로교 교단(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이나 저기 아일랜드에 있는 개혁교단(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Ireland), 이런 곳과 교단적으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어요. 또 세계개혁주의연맹(WRF)도 있지만 너무 범위가 넓어서 그건 그렇고, 고신측이 가입되어 있는 ICRC(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같은 데는 교류도 하고 가입도 해서 개혁교회 뿐만 아니라 교단과 신학교까지 튼튼한 기반 위에 세우는 막중한 사명을 김목사에게 기대하는 거지.(웃음)
SDG- 목사님께서는 터를 닦으셨으니 김목사님 체제에서는 아름다운 건물로 세워져 가는 그런 모습이 기대됩니다. .
송- 뭐 그리 될 겁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어학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야 하는데, 우리 김목사님이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지 않겠나 싶습니다.(웃음)
SDG- 이제 짧은 질문 3가지만 더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답해 주셔도 됩니다.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후배 목회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추천해 주실 수 있는 신학자와 신학도서를 부탁드립니다.
송 : 세 사람만 말하라고 해서 좀 생각을 해 보겠는데. 첫째는 누구나 본받아야 할 칼빈. 칼빈은 평생 성경 연구하고 공부많이 한 사람 아닙니까? 처치맨(church-man)으로서 그의 연구의 부지런함과 끊임없는 개혁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또 교회를 말씀대로 개혁해서 교육하고, 예배도 개혁했잖아요. 그런 것을 본받아서 하면 좋겠고, 둘째는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이 분은 평생 독신으로 성경을 참 깊이있게 연구한 사람이거든.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정통 개혁신앙을 사수하기 위하여 프린스턴의 보장된 교수직도 버리고 그 아주 열악한 웨스트민스터 창립하는 그런 모험을 한 분이지요. 그리고 이 분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식처럼 사랑했다고 해요. 자신의 자녀인양 책임을 다해서 길렀어요.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길리움을 받았습니까? 이런 분을 본받아야 하겠지요. 셋째로는 박윤선 목사님. 박 목사님은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지만은 실제로는 메이첸 제자거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전공을 할 때 메이첸의 지도만 받았어. 짧은 기간이었지만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 한국에 나가서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 가운데 신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가르쳤어요. 스승처럼 성경을 중심해서 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이런 신학생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고신, 총신, 합신을 거쳐가지 않았습니까? 목회에 실제로 접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좀 있지만 그래도 개혁주의를 좋아하는 목회자들을 얼마나 많이 배출했습니까?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는 박형룡 목사님의 영향도 있지만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은 박윤선 목사님입니다. 성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40년 동안 신구약 성경 주석 다 썼잖아요. 정말 놀라운 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 세 분을 특별한 신앙선배로 여기고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추천 도서는 우선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네 권. 특히 장로교 목사라면 빠짐없이 사서 읽고 공부해야 할 것 같애. 그 다음에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를 추모해서 나온 논문집이 있는데, ‘개혁주의 예배학’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여러 사람의 기고로 엮은 책인데 내용이 참 좋습니다. 개혁주의 목회자라면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개혁신앙 노선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이클 호튼이 쓴 ‘위대한 사명’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한국말로 번역된지는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의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어떻게 임의로 변경시켰는지를 진단하고, 이 상황에서 주님이 주신 원래의 교회 사명이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를 다룬 일종의 선교학 서적인데, 제가 가르치는 선교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꼭 읽기를 요구하는 책입니다.
SDG-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이 인터뷰를 읽는 분들이 ‘아. 이런 책을 사서 봐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추천해 주신 분들의 책들은 말할 것도 없겠고요.
송 : 그렇죠. 칼빈과 메이첸과 박윤선 목사님의 책들은 기본 교과서니까 평생 옆에 두고 읽고 해야 돼죠.
SDG-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이루셨는데요, 앞으로 주님 앞에 가시기 전까지 꼭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송 : 소망이 있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얼마나 이룰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은.
지난 400년 동안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늘 강해하는 전통 가운데서 그것을 작성한 우르시누스의 해설서를 위시해서 그 설교를 돕는 책들이 엄청 많잖아요. 그것들을 할 수 있는대로 참고를 해 가지고 우리 상황에 맞게 설교하고 교육시킬 수 있는 자료로 정리하는 것을 필생의 작업으로 할라 그래요. 지금 이미 요리문답 해설 초고를 탈고했지만 아직 미흡한 것이 많고 그래서 잘 정리해서 내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한 가지 이루고 싶은 소원은 오랫동안 신학교 교수로서 강의한 것들을 정리하고 싶어요. 특별히 하나님이 불러가시기 전에 목회학, 설교학, 예배학 강의안을 좀 정리했으면 하는 것이 남은 바람이라고 할까요. 소박하죠?(웃음)
SDG- 우리 후학이나 성도님들에게는 귀한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꼭 그 일을 다 이루시기를 바라며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긴 시간동안 마음에 있는 귀한 말씀들을 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송 : 부족한 사람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서 잘 정리도 안 된 채로 그저 두서없이 말한 것 같습니다. 새기고 정리해서 은혜롭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SDG- 참 생생한 교훈과 확신이 되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저나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김준범 목사님뿐만 아니라 이 인터뷰를 대할 많은 분들에게 유익하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한가지 분명한 건 목사님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주도하시는 섭리의 손길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송 : 네. 저도 그걸 느끼고 감사하면서도 그저 인도하는 손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갔으면 그래 생각하고 있습니다.
SDG- 앞으로 목사님께서 전해 주신 말씀과 함께 나눈 신앙 유산들을 잘 계승하고, 그 길을 따라서 일심으로 가며, 또한 목사님과 양의문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나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 참 아름다운 일들을 만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송 : 저도 김병혁 목사님과 SDG 개혁신앙 연구회에 거는 기대도 큽니다. 개혁신앙 사상이 이렇게 보배로운 것인 데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알리고, 선전하고 하면 목회자와 신학생에게는 많은 정보가 전달되리라 생각되고, 평신도에게도 유익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거 뭐 돈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시는 것 보면 아주 참 감사한 일이고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SDG- 감사합니다. 미약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내내 옆에서 함께 해 주신 김준범 목사님께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네. 저도 목사님을 오랜 세월 가까이에서 모시고 지도도 받고 목사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렇게 한번에 장시간동안 목사님의 지나오신 날들을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그런 기회가 돼서 참 너무 감사했고, 또 저도 어떤 목사로 살아야 되나 늘 고민을 하지만은 다시 또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심기일전하고 하나님 은혜에 자신을 더 맡기고, ‘목사의 기본에 더 충실해야 되겠다. 하나님 은혜에 내 자신을 맡겨야 되겠다.’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목사님은 저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스승이자 또 저의 아버지 이상으로 그런 귀한 역할을 해주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해주시는데 이 자리를 빌어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더욱 건강하셔서 양의문 교회를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에 조금이라도 유익을 끼치는 일에 오랫동안 목사님과 함께 사역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런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김병혁 목사님에게도 감사합니다.
SDG- 개인적으로 김목사님이 굉장히 부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두 분을 함께 뵙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긴 시간동안 마음 속 깊은 울림이 되는 이야기들을 전해 주신 송용조 목사님과 진심어린 말씀을 전해 주신 김범준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13.3.8. 양의문교회 파주 수양관 송용조 목사님 서재에서
※ 인터뷰 녹음 파일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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