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조
내용 | 배추달의 증언, 그 가족, 그 신앙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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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회
: 식민지 말기에 합천의 화양리는 워낙 골짝이고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가끔 순회 오는 분은 계셔도 별다른 교회 행사는 없었는데 해방이 되고 주남선 목사님이 감옥에서 돌아 오시니까 주변에는 집회들이 열리기 시작. 여기저기 집회를 하면 은혜가 넘쳤고 가족들은 집회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짐을 싸서 따라 다니고 은혜를 받음. 너무 많이 다녀 기억도 다 못하겠으나 어디든지 빠지지 않고 다님. 너무 행복했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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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만술 집사님
: 관기교회에는 유명하게 잘 믿는 김만술 집사님이 계셨는데, 원래 가난했으나 남편이 일본에서 돈을 보냈고 그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그 일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김만술은 백영희 조사님 집회에 은혜를 받아 거창의 봉산교회 집회도 가는 분이었고, 모두 백 조사님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당시는 그렇게 유명한 분인 줄 몰랐고 그 분께 받은 은혜는 기억하지 못함. 훗날 묘산 창촌에 묘산교회를 세우고 대구와 거창 집회를 참석하면서 모든 것을 알게 됨. 배추달이나 이우조는 백영희 이름은 알아도 그 은혜 세계는 모르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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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전쟁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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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난길
: 전쟁이 났고 인민군들이 밀려 들어 온다는 소식이 합천 골짝의 화양리에까지 들렸음. 그들은 교회의 적이라는 소식에 별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이 나서는 피난길에 배추달과 온 가족도 함께 출발. 일단 이우조 부부가 딸 배문옥을 데리고 배추달과 집에 있던 소를 끌고 창녕 가는 창덕면 적포까지 갔으나 낙동강 철교가 끊어져 돌아 옴. 집으로 바로 돌아 오지 못하고 야로 합연에 있었는데 인민군이 점령하고 시간이 좀 흐르면서 사는 모습이 안정 된 것 같아 화양리 집으로 돌아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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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추달의 순교
: 하루는 배추달이 집에 있던 밤나무를 한 손으로 붙들고 ‘형수’를 부름. 서로 신앙에 하나가 되었고 형수였기 때문에 대소사를 형수 이우조와 의논하던 사이.
: ‘인민군들이 나를 오라해!’
: '그래! 오라면 가야지. 그래도 계명 어기는 것은 목숨 바쳐야 해!‘
: ‘알았어, 알았어!’
: 그 것이 마지막. 인민군들이 잡아 갔고 주일이 지났는데도 돌아 오지 않아서 시어머니와 이우조 두 사람이 도시락을 싸서 배추달을 데리고 간 인민군들이 있는 묘산면 소재지의 묘산초등학교로 감. 저녁이 되고 밤이 늦어도 돌아 오지 않아 너무 궁금했고, 아침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인민군들에게 가 보기로 함. 인민군에게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담대한 신앙. 하나님께서 간이 크도록 인도하심. 학교로 가서 인민군에게 물었음.‘어제 화양에서 데리고 온 청년은 어디 있습니까?’
: ‘저 미국 갔어. 미국!’
: 초등학교 뒤편의 산제 골짝 쪽을 가르치며 좋은 나라 미국에 갔다며 조롱하는 인민군의 말을 듣고 느낌이 이상했으나 일단 초등학교 뒤쪽 산제 골짝으로 배추달을 찾으러 가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고추를 따서 내려 오고 있어 다시 물어 봄.
: ‘할머니, 어제 인민군들이 화양에서 믿는 청년을 한 사람 데려 왔는데 혹시 아십니까?’
: ‘아뿔싸! 어제 산제 골짝에서 총 소리가 두 번 났는데...’
: 두 사람은 할머니가 알려 주는 골짝으로 들어 가서 산을 뒤지기 시작함. 배추달은 산에 누워 있는데 오른 쪽 옆구리와 얼굴에 총을 한 번씩 맞았고 마침 비가 좀 오고 있어 물과 피가 섞여 코에서도 비핏물이 좀 흐르고 옆구리에서도 좀 흘렀음.
: 두 사람은 임시 좀 닦아 두고 두 사람이 데려 올 수가 없어 시어머니는 관기교회 이대인 집사님과 또 화양에서 내려 가는 길도에 사는 윤선(이 씨나 김 씨) 씨라는 사람을 소리해 달라 해서 순교 현장에 모시고 옴. 미군 비행기들이 수시로 공중을 날고 있던 때여서 비행기 소리가 나면 소나무 아래 숨고 가고 나면 땅을 파고 해서 일단 가매장을 함. 후에 인민군이 물러 가고 나서 남영환 목사님과 거두 목사님들이 와서 고향 화양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음.
: 현재 한 장 남아 있다는 배추달 사진은 배추달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그 사진이 배추달 사진으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으며, 확실히 배추달 사진이 아님. 함께 믿고 한 집에 살았던 형수와 누나 되는 배시야가 아니라 하는데 누가 그 사진을 내 놓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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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교 상황
: 알려 지기는 모두들 돼지를 몰고 가자 했다는데 돼지가 아니라 ‘개’만 데려 가자고 했음. 주일이라고 개 데려다 주는 것도 못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가 죽었고, 그 것을 본 사람이 전함.
: - 순교 후의 가족들
: 시어머니는 평소에 그렇게 신앙이 있었으나 막상 배추달이 순교를 하자 허망하여 홧병이 들었고 결국 그 병으로 돌아 가심. 며느리 이우조는 시어머니께
: ‘어머님, 이 세상 천지 사람이 순교의 그 길을 가려 해도 그냥 가는 길이 아닙니다. 감사하입시다.’
: ‘다른 사람은 다 죽음 앞에 굴합니다. 감사하이소!’
: ‘나 같은 죄인에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종을 주셨으니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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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아들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순교를 감사로 받지 못함. 3 남매를 낳았는데 하나는 딸이고 아들이 둘인데 막내는 실성을 해서 사람 노릇을 못했으니 배추달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컸겠는가? 사람도 좋고 건강하고 나무랄 데 없는 아들 하나를 보고 살았으니. 하선이 집사님은 그런 순교에도 기뻐할 신앙이고 평소 자기를 돋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속에 옛사람을 발견해서 밟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시어머니는 그런 정도는 아님.
: 큰 형인 배봉추는 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첫 마디가 ‘예수 믿으면 집 구석 망하는 줄도 몰랐나!’라고 내 뱉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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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총공회 신앙 출발
: - 묘산교회 개척
: 배추달의 순교 후 전쟁이 끝나고 관기교회는 고려파 교회가 되었고 김만술 집사님은 백 목사님께 크게 은혜를 받은 분이고 또 이우조 집안의 신앙 중심인 하선이 집사님이 부산에서 서부교회를 출석하며 공회 신앙을 받았기 때문에 김만술 집사님이 묘산에 총공회 교회를 개척하고 싶었고 면 소재지 옆에 있던 창촌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이우조 가족들도 묘산교회를 출석. 이후 대구 5월집회와 거창 8월집회를 참석하게 되면서 공회 교훈을 제대로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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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 비교
: 과거 고려파에만 있을 때는 자기를 돋우는 신앙으로 살았는데 백 목사님께 배우니까 자기 속에 옛사람을 꺾고 죽이라는 말씀이 위주.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나라는 원수와 싸울 것. 다른 모든 가족들도 이 말씀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돌아 가신 시어머니도 또 배추달의 누나가 되는 배시야도 훗날 3백만 원 돈 문제가 생기자 그 것이 걸려서 시험에 드는데, 신앙은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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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산교회 교역자들
: 김만술 집사님이 주도하여 묘산교회가 면 소재지 옆의 창촌에 개척 되었으나 첫 목회자는 김태희 목사님. 거쳐 가신 분은 김태희 정경수 김명재 목사님들. 김태희 김명재 정경수 이런 목사님들은 참으로 하나님만 바라 보는 종. 요즘은 그런 목회자들이 없을 것.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순교자 될 분들. 묘산교회는 창촌에서 나중에 면소재지 장터로 옮기게 되는데 이병준 목사님이 교회 짓고 수고하심. 그래도 앞에 목사님들과 비교하면 좀 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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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수 목사님
: 특히 기억 나는 분이 정경수 목사님인데 말씀도 잘 전했고 주일학생들도 잘 가르쳤으며 학생들이 잘못하면 막대기를 들고 때리는 정도로 엄하고 권위 있고 사랑이 있는 분. 이우조 아들도 맞는 정도. 참으로 똑똑하게 가르 쳤음. 사모님은 주일에는 아기 기저귀 외에는 빨래도 하지 않는 분. 정 목사님의 자녀는 정광희 정광공 정광봉이며 정광봉은 오가는 차를 보면서 차에 적힌 글을 보고 글을 다 배운 똑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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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 구원
: 남편도 뒷 늦게 믿게 되고 화양에서 창촌까지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믿게 됨. 백 목사님 집회를 가서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하면 다리 아픈 관절도 그 자리에서 벌컥 낫고, 또 그 말씀의 은혜는 표현도 못하겠고. 그래서 백 목사님 생전에 이우조도 부산 서부교회로 갔고, 하선이는 벌써 가 있었고 그 딸이 배이조며 손주는 서부교회 직원으로 오래 근무했던 서은정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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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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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곡동 기도원
: 노곡동 기도원에 관리할 사람이 없다 해서 7 - 8 년 정도 그 곳에 있었고 그 당시 큰 딸이 사망. 인산 이재순 목사님이 3 년 위에여서 올해 93 세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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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신정동교회
: 노년에 시누가 울산 호계에 있고 또 큰 딸 손주와 둘째 딸이 울산에 있어 울산 신정동교회로 오게 됨. 큰 딸 손주는 울산 UBC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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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 교회
: 고향 묘산 면에는 지금은 교회가 4 개가 있음. 화양, 계동, 관기, 장터에 각각 교회가 하나씩 있음. 관기교회는 이대인 집사님의 아들이 서울에 살면서도 관기교회 장로님으로 활동하며 할 일을 다하고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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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쓰기
: 올해 10 번째 성경을 쓰고 있는데 한 해에 2 독을 노트에 적고 있으며 현재 10 번째 적으면서 레위기를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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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기교회 ‘순교자교회’ 지정식
: 2011년에 관기교회에서 울산 호계교회에 다니는 시누 배시야 집사님께 전화가 왔고 외손주를 통해 모두 시누 올캐가 함께 관기교회 방문. 고신교단에서 배추달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라 해서 ‘순교자교회 지정식’이 있었음. 관기교회가 인쇄한 기록에 나온 배추달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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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면담을 마치고
: 90 세에 아직도 얼굴이 붉어 건강했고 총명했으며 날짜와 당시 상황을 세세히 기억하는 분. 16세에 믿고 75년이 된 90 세에도 처음 믿었던 그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여전히 식지 않고 펄펄 끓고 있었음. 면담을 해 보면 대개 과거에는 참으로 잘 믿었으나 면담하는 때에는 회고적 신앙이 되고 풀이 죽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독 권사님은 끓어 오르는 신앙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특별. 연로한 분들의 은혜란 대개는 감상적 은혜거나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인데 권사님은 말씀의 구별이 있었고 이 노선의 감사와 가치를 알고 계셨고 이 교훈의 내용을 세세하게 되짚으며 핵심을 잡고 계신 분. 일반 교인으로서 이렇게 산 신앙으로 노년을 끝까지 붙든 분은 참으로 희귀하여 면담한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음.
: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런 평생의 은혜 생활을 하게 되면 슬하 자녀들에게 두루 눈에 띄는 복도 많이 주시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러 계신 것은 노년에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기도의 제목으로 멍에를 얹어 주셨다고 느껴 짐. 예수님 한 분을 이렇게 오랜 세월 변치 않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면 주님도 권사님에게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되 고난 속에서 사랑하는 참 사랑을 주신다는 것이 눈에 환하게 보여짐.
: 공회에는 이렇게 귀한 신앙들이 아직도 곳곳에 계시니 보배로운데 이 연세에 고신 교단과 교훈 비교를 정확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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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우조' 권사님과 면담 후 작성하였고 본인 확인을 부탁해 놓은 상태이며, 재확인이 끝나면 일반 공개와 함께 복사 사용이 자유롭게 되나, 아직은 열람만 하실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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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기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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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650-2
: 토지: 대지 91평
: 명의: 박지봉
: 개척: 1921.2.
: 연혁: 1920년 봄, 합천읍교회 교인 정주상씨가 대서 개업을 하기 위해 묘산면으로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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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기 -> 최영(돈)교, 고령 전도인 파송, 몇 달 실패, 대신 21년에 함양의 황보기 파견 문한구, 유덕순, 서수철 믿고, 문한구 가정에서 예배 시작. 27년까지 순회, 김동노(번)씨 전도인 가조 마상리에서 격월 순회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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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도별익 20-22, 권임함 박영숙 22-25, 이자익 25-36, 고도열 36.10.-
: 전도인: 최영교(돈)20, 황보기21-27, 김동노(번) 27.4-33.8. 김항립33.9.-
: 집사: 이세춘(33년), 유옥선(37.1.)) 유해강, 성외흠(38.1.)
: 건축: 1925년, 신축, 1931년 증축, 1938년. 4-50명, 예배당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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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의 일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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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afe.naver.com/chdrhdghl.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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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926. 07. 07(음)
: 순교일 :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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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학에서 한글공부
: 고등성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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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은 1926년 7월 7일(음)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26번지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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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의 아버지 배한도씨는 본처에게서 두 아들을 낳고 상처를 하는 바람에 둘째 아내 이지순을 얻어 그 몸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추달과 월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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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달의 아버지 배한도씨는 몸이 약했다. 그럼에도 가정을 이끌어나가려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추달의 어머니 이지순씨가 예수를 믿은 것도 이때였다. 그녀는 거친 세상 살 수 없어 고난을 당할 때 조카 며느리 하선이씨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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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석했다. 그러나 추달은 학교 갈 나이가 되었어도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여 배움의 기회를 노친 배추달은 18세때 해방이 되자 전국 강토에 문맹퇴치운동이 일어날 때 매일 밤 국민학교 교실에서 하는 한글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오직 그의 목적은 성경을 남처럼 막힘 없이 죽죽 읽고픈 염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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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처의 두 아들이 있는 배한도씨에게 후처로 들어간 배추달의 모친은 추달과 추도 두 아들을 낳고 남편이 죽자 조카 며느리 하선히 씨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고 아들 추달은 자연적으로 모친을 따라 교회에 출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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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토라곤 한때기도 없는 모친은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추달을 남의 집에 보내졌고 남의 눈치 밥을 먹으며 농사를 지어주다가 8.15해방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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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1950년 거창읍교회에서는 주남선목사가 모자라는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주무교사는 남영환전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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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은 모처럼 머슴생활을 그만두고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농사일을 하듯 밤낮으로 밝혀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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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6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주남선목사를 존경하여 그를 닮길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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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성경학교를 시작한지 한학기도 되기 전에 6.25가 터졌다. 조기방학을 하고 배운 바를 복습하고 다시 만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온 얼마 후 순경이 나타나 피란 가라고 하는 바람에 추달도 어머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들었으나 공산군에 의해 적포철교가 끊어져 집으로 돌아갔으니 1950년 6월 3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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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화양리로 돌아온 교인들은 교산국민학교 정운택선생의 인도로 구역예배를 마치고 감자를 먹고 있을 때 인민군이 마을가까이 왔으니 남자들은 피해야 한다는 급한 상황에서 정선생과 추달은 급히 몸을 피해 뒷산에 깊숙히 들어가 숯을 굽던 숯가마로 피해 그곳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다가 20일후 7월 중순 마을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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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온 날이 마침 주일날이라 예배를 마치고 났을때 인민군과 치안대원이 인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선생과 배추달을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배추달은 주일에는 일을 안 한다고 거부하자 배추달을 내무소로 데리고 가서 미루나무에 매놓은 돼지를 강 쪽으로 몰고 가자고 했다. 그것도 거부하자 비를 주고 마당을 쓸라고 했지만 그것도 거부했다. 인민군은 배추달을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추달을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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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달이 24세에 살해된 뒤 감동스러운 일이 생겼다. 추달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사경에 얼마씩을 떼어 주인에게 맡겨놓은 벼 한섬과 돈15만원을 주인이 가지고 와서 화양에 교회를 짖기 위해 추달이 맡겨둔 것이라고 내놓아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에게 전해져 남교회는 헌금을 하여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12평의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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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화양교회는 묘산장터로 옮겨져 묘산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배추달은 주일 성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귀한 교훈을 오늘의 교회에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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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추달 선생님 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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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5.14 10:14:51 (*.247.14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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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남선 전기 '해와 같이 빛나리'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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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순교자 배추달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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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 집사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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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일찍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었기에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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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화양리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곳에서 이십리 밖, 관기리에 교회가 있었다. 관기교회였다. 추달은 어머니와 관기교회를 출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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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달은 학교를 하지 못했고 집에서 한글을 좀 익혔다. 집이 가난하여 먹는 문제가 항상 염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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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달이 뼈가 굵어지자 남의 집일을 도와 주었다. 머슴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가슴에도 배움에 대한 염원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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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달은 남의 집 머슴으로 있었지만 교회생활을 부지런히 잘 하므로써 교회에서 일찍 집사로 임명이 되었다. 관기교회 집사로서 그는 열심으로 신앙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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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3월이었다. 거창에서 주남선 목사가 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관기교회에도 날아왔다. 소식을 들은 추달집사의 가슴이 뛰었다. 배우고 싶었다. 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돈이 별로 들지 않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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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부모보다 열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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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서 공부를 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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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추달 집사는 거창으로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학생이 된 추달 집사는 너무나 기뻤다. 처음으로 노트에 글을 썼다. 성경을 체계 있게 배우는 일은 그의 가슴을 흐뭇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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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감격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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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슴살이로 천대받으며 지내야 했던 그가 성경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주로 학과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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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학교의 수업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6·25동란이 터졌다. 성경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식 날, 주 목사님의 설교에 추달 집사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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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으로 살되 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싶었다. 산 순교자 주 목사님의 행동 하나 하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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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길은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품위를 한결 높혀 준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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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추달 집사는 계속 성경을 읽었고 노트를 훑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군들이 묘산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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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경들이 피난을 가라고 호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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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리 사람들은 봇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추달 집사도 어머니와 함께 피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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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난민들은 낙동강 철교가 있는 합천과 창녕의 경계선까지 갔다. 적포철교가 파손되어 끊어져 통행이 중지된 것이었다. 건너 갈 수가 없었다. 화양리 사람들은 그만 되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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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으로 돌아온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밤, 가정에서 추달 집사와 교인들은 구역 기도회를 가졌다. 예배는 정운택 선생이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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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택 선생(현재 부산시 이사벨여고 교사)은 당시 묘산국민학교 교사였다. 정 선생은 하동 사람으로 사범학교 졸업 후, 묘산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나서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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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회를 마치자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선생은 배추달 집사와 함께 뒷산으로 도망갔다. 배 추달은 24살이었는데, 다섯 살은 아래로 볼 정도로 몸이 가늘고 뼈대가 가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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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이 검고, 죽은 깨가 조금 깔아져 있었다. 그는 관기교회 청년 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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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는 뒷산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에 숯을 굽던 굴이 있었다. 숯굴에 자리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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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종일을 숯 굴에 있다가 밤이 되어 내려와 먹을 것을 얻어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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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을 지내니 배 집사 어머니가 걱정을 하여 아들을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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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와서 집에 있거라. 뒤는 어찌되든 그냥 지내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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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되요. 정 선생이 그러는데 잡히면 큰일난데요. 괴뢰군은 지독하답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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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곧 배 집사는 정 선생과 함께 숯 굴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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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정 선생과 배 집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정 선생 사촌 누나집에 들렸다. 이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정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부인들이 몇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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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가 끝나고 나자 인민군을 앞세우고 지방 치안대원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인부동원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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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를 끝낸 이 집 마루에는 청년이라곤 두 사람뿐이었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였다. 치안대원 중에 정 선생을 잘 아는 분이 있었다. 해서 정 선생은 차마 가자하지 못하고 배추달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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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따라갑시다. 일을 해야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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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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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되다니?”“오늘은 주일이빈다. 주일은 일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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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는 끝났지만, 주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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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일이 다 뭐냐? 지금은 전시야! 나라를 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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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음은 죄가 만항서 그렇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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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새끼 아주 악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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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에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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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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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추달 집사는 그들에게 끌려 내무서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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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벼 한 가마를 방앗간까지 져다 주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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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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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해! 그러면 내일 부역을 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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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역이란 탄약을 지고 영산까지 가는 일이였다. 화양에서 영산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백리 길을 탄약을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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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부역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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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 집사는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탄약을 지고 전쟁터를 나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 인민군은,
:
: “그럼 벼 지고 가는 일은 그만 두고, 저 돼지를 몰고 따라가자.”
:
: 내무서 앞 미루나무에 매어 둔 돼지를 가리켰다.
:
: “그럴 바엔 벼를 지고 가지요. 돼지를 몰고 가자 함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
: 그러자 다시 인민군은 비를 가지고 왔다.
:
: 비를 추다 집사에게 주면서
:
: “자, 그럼 이 마당이나 좀 쓸고 가라!”
:
: “안됩니다. 주일에 마당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쓸라고 명령하심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
: “좋아! 그럼 이 비를 받아 들기만 해! 그럼 용서한다.”
:
: “그것도 못합니다. 내가 비를 받으면 마당을 쓸라 할 것이고, 마당을 쓸면 돼지를 몰라 할 것이고, 돼지를 몰면 벼 지고 가자 할 것이고, 그러면 잡일을 다하게 될 것이니 나는 주일을 범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
: “썅, 이 간나새끼!”
:
: 인민군의 부릅뜬 눈알이 금시 뚝 삐져 나올 것만 같다.
:
: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내무서 안으로 끌고 가 유치했다.
:
: 다음 날,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을 쏘았다.
:
: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스물 네 살의 젊은 청년 집사 배추달은 순교를 당한 것이었다.
:
: 관기교회 이대형 집사가 배추달 집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
: 시체는 두개골과 가슴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두개골에 총을 맞았지만 그의 시체는 험하지 않았다.
:
: 타박상의 상처처럼 보였고 얼굴은 평화롭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마치 찬란한 무엇을 바라보듯 황홀경에 빠진 듯,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
: 이대영 집사는 교회에 알리고 배 집사 어머니에게 통지하여 배 집사 시체를 그곳에 가매장 하였다.
:
: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창호지로 곱게 덮어 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묻어두었다. 인민군들의 눈이 두려워 정식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가매장을 해 둔 것이었다. 그 날, 배추달 집사가 끌려가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정 선생은 치안대원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윤용환이란 사람의 헛간에 숨어 십오일을 지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에게 발견되어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
: 저녁 무렵, 허술한 틈을 타서 담을 뛰어 넘었다. 뒷산을 향하여 뛰었다. 무사히 숲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 날부터 나무 뿌리를 파먹고, 송피를 벗겨 먹으면서 야생동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
: 20일이 지났다. 얼굴을 숲 밖으로 내밀고 마을 쪽을 살피니 인민군들의 행렬이 삼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후퇴하는 듯 보였다.
:
: 일직이 해가 저물 무렵, 고령 쪽에서 유엔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
: “살았구나!”
:
: 정운택 선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정 선생은 수복 후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가 금융조합 서기 일을 봤다.
:
: 그 해 12월 중순. 남영환 전도사는 관기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주간에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이야기가 나와 장례를 하도록 주선을 하였다.
:
: 관을 준비하여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무덤을 팠다. 교인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마니가 그대로 나왔다. 가마니에 응겨붙은 흙을 털고 가마니를 풀었다. 시체가 창호지에 싸인 채 나왔다.
:
: 수분이 빠지고 곱게 말라 있었다. 창호지도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를 풀었다. 시체가 하나도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
: 창호지에 총 맞은 가슴과 등 쪽에 노란물이 번져있을 뿐 시체는 깨끗했다. 관에다 그대로 넣었다. 흰 꽃상여에 관을 실어 청년들이 메었다.
:
: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장례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성대히 진행되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모든 장례를 집례하였다. 배추달 집사의 관은 그의 집이 있는 화양리 뒷산에 고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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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 집사는 전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화양에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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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달 집사는 머슴사경 받은 것 가운데서 푼푼이 떼어 주인집에 맡겨 둔 것이 있었다. 순교 후 주인집에서 내어놓은 것이 벼 한 섬 반과 돈 15만환이었다. 주인은 배추달 집사 모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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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추달이 머슴사경 중에 화양에 교회 짓는다고 별도로 맡겨 둔 것입니다.”
: 벼와 돈을 내밀었다.
:
: 이 사실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는 이 소식을 듣고 화양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당 건축을 서둘렀다.
:
: 다음 해, 화양에는 교회당이 서게 되었다. 아담한 교회당이 화양리 마을 중아에 찬란한 십자가 종각을 우뚝 내밀고 서게 되었다.
공회 인물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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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