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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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교회

개척정보(1980년 기준)
설립 1956.7 개척자 백영희
비고 초기 연혁{사진}

1.남천교회 홈의 교회 역사



교회 역사

1953년 10월 성도 10명과 백영희 목사님을 모시고 이승필씨 집에서 첫예배 시작

[최기주,박노진,지혜순,김창규,곽격희,유영,이승필,함기덕]

[조용림,조유순,최선욱,양순봉,중 2명]


제천장로교회에서 교리와 신조가 맞지 않아 분리됨


교역자 없이 천막교회에서 기도생활을 1년 반 하다가 1955년 봄 초대 김성환 목사님 부임

2대 최용구 목사님 부임... (자료준비중)


1958년 남천교회 설립


시무하신 분들


1. 한동희 전도사님

2. 김삼암 전도사님(군 입대전)

3. 송용조 목사님

4. 김삼암 목사님(군 제대후)

5. 백염침 목사님(일화: 국기배례)

6. 홍순철 목사님(일화: 성령의불)

7. 신연범 목사님

8. 이재순 목사님

9. 김삼암 목사님

10. 김진태 목사님(16년간 시무)

11. 이상규 목사님(현재 시무)


남천교회에서 배출된 교역자


송종관 목사님, 송종섭 목사님, 고장환 목사님, 이종덕 목사님

정병준 목사님, 최현수 목사님, 최광수 목사님


교회건물


1958년 설립후 현재까지 3번 재건축


#아직 자료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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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송종섭목사님 기억


북한의 공산화로 남하했던 최기주집사님 가정이 제천에 자리를 잡았으나 6.25전란으로 다시 트럭에 짐을 싣고 부산으로 피난. 이 시절 막내 최금주가 먼저 믿게 되면서 부산서부교회로 부임했던 백목사님이 시내 하단교회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이 집회에 언니 최기주를 전도, 1주간 은혜를 받고 본격적으로 신앙생활. 수복 후 제천이 복구되지 다시 귀향하게 되고 부근 감리교를 다녔으나 거리가 멀어 1953년 부근에 개척.


우선 혼자 3개월 산기도로 준비하고 집 한 채를 마련 수명이 회집. 아직 몇 명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백목사님이 집회를 인도. 우현룡목사님의 부친이 원래 감리교 장로였는데 합류하였고, 외삼촌인 최동영집사님 역시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합류하는 등 여러 유지들이 합세. 당시 검찰청이 신설될 때였고 그곳 직원으로 취직만 해도 굉장하던 시절, 대검찰청 김증한 부친 김익진 친구 등이 되어 협조하였고 교회 출발과 함께 단기간에 대부흥. 당시 30년 감리교 기성교회와 단 1년만에 교세가 같을 정도.


제천출신으로는 고장환목사님, 최현수목사님, 최광수조사님, 사직동교회 양순봉권사님, 동문교회 박찬성장로님, 잠실동교회 정병철, 유병로장로님, 청량리교회 김중국집사님, 양희선집사님, 임원기집사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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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재완목사님 기억


전방에서는 6.25전쟁이 계속되었고 최기주집사님이 피난 와서 동생되는 최금주집사님이 서부교회 권찰님으로 있었고 조사님이 하단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자 언니를 인도하였고 또 서부교회로도 참석케 함. 제천에서 교장으로 있었던 분이었으나 전란 중 피난살이에서는 가난하고 어려웠음. 하단교회 집회를 마칠 때까지 동생이 데리고 다니며 집회를 마칠 때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 최기주집사님이 수복 후 제천으로 올라가면서 백조사님과 약속하기를 올라가면 제천은 감리교뿐인데 감리교회로 가서 1년 기도한 뒤 장로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었고 그 교회는 벌써 1천명 모이는 교회.


최기주집사님은 예수 믿기 전에는 제천읍에 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고 교만하였던 분. 친하게 지낸 사람이 서장 부인밖에 없었고 6.25이전에는 자기 손으로 세숫물을 떠보지 않았고 그 물을 버려 보지 않았으며, 옷장에 시집올 때 옷이 몇 십 벌 쌓여 있었던 분. 피난 후 최기주집사님은 시내 사람들이 놀랄 만큼 겸손하였고 온 교인들이 하나님을 대하듯 상대하였으며, 하루 3번 시간 정해놓고 산에서 낮12시, 오후 3시, 아침 새벽기도 마치고 기도를 했으며. 그 교회 집사님들이 이상해서 따라 다니다가 14사람이 그렇게 기도생활을 하게 됨. 남편되는 분이 제천 중고교 교장이었으며 친정이 평양 최부자


이제 예수 믿고 학교 교사들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 주며 하숙을 하였고, 그 돈으로 돈을 모은 뒤 1년후 감리교 담임목사님에게 자기는 장로교인이며 장로교 교회를 설립하겠다고 통고. 우현룡목사님의 외삼촌 최집사님이 제제소, 방앗간, 나무장사를 하는 분이었는데 그 분이 따라 나오고 남천교회를 개척하는 첫날 30만원을 내놓고 예배당을 지어라고 함. 모자라는 것은 자기가 다 대겠다고 하여 두 사람이 예배당을 지음.



3.정식 목회 출발


(제천교회 교역자로 부임)


백영희조사님이 서부교회 자체 집회를 계시록으로 강의하시고, 끝나는 날 남반 집사들만 오라고 하였으며 김상수, 김용학, 조종석, 정재완 등 5명에게 제천에서 개척한 교회의 교역자로 나가라고 말씀. 나이많은 김집사님에게 가라고 하였고 차례로 조종석, 한동희 등에게 가도록 했으나 전부들 거부하였고 정재완에게 가도록 말씀했으며 순종.


토요일 기차편으로 제천으로 올라갔고, 주일날 설교. 18명으로 제천교회 창립 예배가 되었는데, 서부집회가 가을에 있었고, 부임 후 몇 주 만에 그 해 성탄을 제천에서 맞았으며 예배당을 건축. 전도사 인허를 받지 않고 집사로 8개월 목회를 한 뒤 부산으로 돌아옴. 제천교회에서 백목사님이 집회를 할 때 은혜를 받았던 분이 고려파가 아니었으나 은혜를 받고 고려파로 넘어오겠다고 하여 영월에서 큰 교회가 되는데, 그 교회에서 정재완집사님을 청한다고 신청이 있어 부산 목사님 허락. 그곳 소속은 경북노회였고 경주 제일교회 윤봉기목사님이 노회장이었고 본인이 청빙받고 올라 간지 2-3개월에 부인이 가지 않으려 하여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와서 보니까 큰딸을 낳고 조리도 못해서 죽어 가는 정도.


석유를 한 숟가락 먹이면 낫는다해서 먹였는데 거의 죽게 된 것을 병원 5곳을 찾아 다니다가 주사 5대를 맞고 낮게 됨. 부산으로 부인을 데리려고 왔다가 이런 일이 있었고 그 뒤 영월에는 다른 후임이 생겨 그대로 부산에 다시 생활하게 됨. 1956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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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설립 자립 개척 추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