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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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교회

개척정보(1980년 기준)
설립 1959.5 개척자 백영희
비고 1차보충



(창동교회 초기개척에 대한 기억은 현재 합동교단에 소속된 변종희집사님의 기억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음은 1994.10.19. 10:00-12:00 면담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창동교회



백영희목사님이 거창에서 직접 지도했던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동교회, 그리고 위천교회 교인들은 백목사님이 부산서부교회로 이동한 뒤 여러 종류의 이주가 있었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백목사님 신앙노선의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 중에 봉산교인들이 거창읍으로 이주하여 주남선목사님이 계시던 거창읍교회를 다녔고 1959년 백목사님이 고신에서 제명되면서 이들은 거창읍교회에서 거창읍 창동교회 (초기명은 중앙교회)를 세우게 된다.


거창읍으로 이주한 봉산교회 교인이었던 이진철집사는 6.25 전란에 집과 가산 전부가 불에 타버렸고 또 위천에 있던 백목사님이 부산으로 갔기 때문에 거창으로 내려와서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인 집사는 봉산에 남아 본 강단을 지키자 하고 이 집사는 내려가자고 하다가 결국 거창으로 내려와서 철공소를 시작하였다. 전후 부서진 트럭 등을 고치며 사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백목사님이 고제에서 거창을 내려 올 때 거창 읍에 들어오기 전 다리 밑에 나환자들이 움막에 기거하고 있는 곳이 있어 늘 전도하고 거기서 예배도 인도하곤 했는데, 백목사님이 거창읍으로 오신다는 기별이 있을 때마다 이집사 부부는 시내 외곽까지 마중을 나갔고, 그 곳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예배 드릴 기회가 많았다. 한번은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께서 여기 나환자 형제들을 위하여 누가 거처와 예배 처소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설교 중 소원을 하셨고 그날 설교 말씀을 쫓아 이집사가 해보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가산을 팔아 현 양혜원 터를 구입하고 교회를 세웠다.


한편 부산에서 백목사님이 제명을 당하게 되고 동시에 거창에서는 백목사님의 신앙 지도를 받던 사람들에 대하여 사전 준비 조처를 강구하던 거창교회에서는 이집사를 장로 장립의 1순위로 올려놓고 백목사님 계열 교회가 분립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양혜원이라는 사회 복음사업체, 또 철공소라는 튼튼한 재력 등에 봉산교회에서 받은 신앙의 불 등으로 교회에서 확실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백목사 직계 사람이라 해서 부산에서 백목사님이 제명되면 거창에서 그 영향을 받을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양혜원이라는 사회사업 기관을 거창읍교회 직속으로 조처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준비도 있었다.


당시 양혜원교회에 시무하며 양혜원 업무로서는 총무직을 가지고 있던 천조사님과 거창교회 최의구목사님이 양혜원을 교회 직속으로 돌리는 법적 조처를 밟게 되었고 이집사의 불복으로 소송에 이르게 된다. 관할 모든 교회의 부동산이 노회 소유로 유지되는 연고로 진주노회 송상석, 황철도 등 노회지도부와 정면으로 법적 투쟁이 있게 되었다. 교회 내에서는 집사들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감정문제로 계속 격화되었다. 백목사님은 부산서부교회 제명건의 격랑에 휘말렸었고 거창지방은 자기들 신앙으로 스스로를 지키던 때였기 때문에 이집사는 개인 사유물을 교회에서 뺏들어가는 것은 소송으로라도 지키겠다고 하였고 승소하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그 동안 부인집사님은 즉시 개척을 주장하고 이집사는 거창교회내 장로직 등에 연연되어 머뭇거리다가 이런 일로 인해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되었다.

결국 이집사는 교회 개척의 동기가 깨끗지를 못했고, 또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으며, 훗날 백목사님이 자신의 신앙역량을 이미 넘어서는 '사회사업'이라고 만류를 했음에도 그 애착 때문에 정리를 못했으며, 그 사회사업 때문에 본인의 신앙 파탄을 가지게 된다. 평생에 다시 헤어나지 못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회개의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된다.


창동교회의 개척은 어쨌던 이집사의 거창읍 하동 278번지 마루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집사부부, 김형순, 변종희 등이었다. 마루에서 한 달 정도 예배를 보다가 넓은 마당 터에 천막을 치고 중앙교회로 시작을 하였다. 설교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국농소에 있던 강집사를 청했다. 봉산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 하던 분이라 바로 합류가 되고, 이순길은 읍교회에서 바로 나오기가 입장이 좀 그러하다 해서 좀 있다 나왔다. 그리고 강원도에 있던 변종희 부모를 불렀다. 현 창동교회 터도 이집사가 소유하고 있던 터라 그 빈터에 강집사 부부, 변을문 부부 등으로 살게 했다.


개척은 되었지만 고신의 박해가 계속되던 때였고 그 박해 중 가장 큰 박해는 부산 백목사님에 대한 중상이었다. 고신 분위기에서 집사 딸이 연애한다고 6개월씩 교회 출석을 금하고 할 때였다. 창동교회 개척이 되면서 한 달이나 있다가 천막을 쳤고 천막을 치자 막바로 백목사님을 모셔서 집회를 했다. 교단적으로는 이미 끊었으나 개인적인 은혜관련 교인이 많았고 천막이 터지도록 많은 사람이 모였다. 원기 김상권집사까지도 합류되었다. 천막에서 1년 정도 예배를 드리던 중 집회를 3번 하게 된다. 천막치고 예배를 드리자 바로 백목사님을 모시고 첫 집회를 가졌고, 그 다음은 김현봉목사님 이었다.


창동교회 백조사님(당시) 집회는 월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집회가 금요일 새벽예배까지 보도록 되었으나 목사님의 안수 문제로 한시간 일찍 마치고 목요일에 떠났다. 창동교회 본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는 흙벽돌을 양혜원에서 찍어 줬다. 천막예배당으로 1년 정도의 시간이 진행되었다. 강집사님이 주로 설교하고 이집사도 설교하는 등 한참 집사들이 돌아가며 강단을 맡다가 서부교회에서 집사님들이 순회로 강단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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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동교회 홈


교회연혁


저희

교회는 1959년 거창읍 하동 278번지 이운길, 김봉선 성도의 가정 마루에서

김형순, 변종희 등 몇 몇 성도가 모여 예배드리다가 그 마당터에 천막을

치고 중앙교회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 양혜원 터를 구입하여

한 동안 예배 처소를 옮겼다가 지금의 중앙리 58번지로 옮겨서 창동교회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종희 조사님 (초대교역자)

송용조 목사님

이재순 목사님

신도범 목사님

백영익 목사님

신용인 목사님

전성수 목사님

이진헌 목사님

송종섭 조사님 1979. 11. 02

전재수 목사님 1980. 07. 17 부임

전재수 목사님 1983. 06. 12 이동

이재순 목사님 1983. 07. 14

안재남 조사님 1984. 07. 10

이재순 목사님 1985. 03. 12 이동

배종일 목사님 1985. 03. 12 부임

안재남 조사님 1985. 03. 26 이동

배종일 목사님 1994. 01. 18 이동

문석표 목사님 1994. 01. 18 부임

신용수 장로 1996. 01. 16 장립

박경순 전도사 인허

김형순, 이옥순 서경숙 권사 취임

오숙자 권사 취임1997. 11. 02

이정애 권사 취임1999. 01. 03

신영철 장로 장립1999. 01. 08

박병은 장로 장립2001. 03. 05

배분순 권사 취임2001. 03. 11

장윤석 조사님 2001. 12. 13 부임



이름 설립 자립 개척 추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