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교회
설립 | 1937.3.1 | 개척자 | 변와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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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교회
1.소개
백영희 목사님이 예수 믿고 처음 다닌 교회가 고제면 소재지에 있던 '농산교회'였고, 이어 살고있던 마을에 개명교회를 개척하고 동시에 이미 개척이 되었으나 교역자가 없었던 봉산교회, 가장 먼저 세웠던 원기동교회까지 3개처를 맡았던 교회 중 하나. 기도의 교회로 특별했고 순교자 변판원선생으로 알려진 교회, 백영익, 백영침, 이백원 등 초기 공회 교역자들이 한번씩 거쳤던 교회이며, 백목사님 집회가 가장 폭발적으로 요동쳤던 곳. 늘 기도 다니던 칼바위가 있었던 곳이며, 봉산교인들이 거창 읍내로 진출하면서 창동교회를 세워 고신교파 최고 중심지 중에 하나인 거창에서 가장 큰 교회로까지 발전되고 나환자 정착 마을을 백목사님께서 출발시키면서 그 양혜원교회를 세우는 등 거창지방 총공회 교회를 형성하는 가장 중심적 교회가 됨
2.교회 개척 초기
1)먼저 세워진 원기동교회가 힘써 출발된 봉산교회
봉산교회 위쪽 원기동 마을에 예수교를 믿는 희안한 사람들이 생겼고 또 그 집에 서양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소식은 이곳 봉산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음. 원기동을 가는 길목이요 또 덕유산 막바지에 갇힌 바로 이웃마을이었기 때문. 더하여 원기동을 오가는 이 선교사들과 먼저 믿는 원기동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이곳 봉산에 부지런히 복음을 전파.
동네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 다니는 이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옷차림은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듯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될망정 자기가 그런 원숭이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으나, 부지런히 기회되는 대로 전도를 하고 다녔고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고 지나치는 일들이 20여년이나 공허하게 계속됨.
2)첫 전도
1931년 7월, 여느때처럼 길을 가며 전도를 하고 있던 정선택의 딸 정봉선과 선교사 전은혜 선생의 눈에는 한없는 인생고에 찌던 한 여자가, 변판원 선생의 집안 고모뻘 되는 와룡댁. 이 가정도 어렵기는 변판원 가정만 못지 않았고, 남편으로 속병으로 사람 구실을 못하고, 시아버지가 빚보증을 서서 몇 안되는 살림마저 다 내주고 마지막에는 부엌에 있던 솥까지 다 내주고 굶어죽을 지경. 5남매에 둘은 결혼을 시켰으나 남은 3형제를 다 먹일 수 없어 세째를 13살에 면서기 집에 머슴으로 보내서 먹을 입을 줄여 놓고 있었던 때. 굶어죽어도 엄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을 때려서 보내놓고 가슴을 아픈 가정에 그래도 병든 남편에 어린 둘 합해 4 식구 입이 굶고 있던 보릿고개 춘궁기,
이날도 뜨거운 햇빛 아래 먹을 것이 없어 마을 밖 언덕배기에서 나와서 끓여먹을 풀을 손으로 쥐어뜯고 있다가 전은혜선교사와 원기동교회 정봉순이“예수 믿고 복받으시라'는 복 소리에 귀가 떨어졌고 그곳으로 가서 예배를 보면 점심 한 그릇 얻어먹는 소망이 생겨 6세 10세된 아이 둘을 데리고 원기동 정선택씨를 찾음. 다음 주일 10리 산길을 찾아나섰고 예배를 보았으며 또 밥 한끼 얻어먹는 '복'을 받아 새 세계로 발을 디딤
3)커지는 복음
와룡댁에 이어 한 마을에 사는 친정집 올케뻘 되는 김옥출, 곧 이어 서순이까지 함께 다니게 되었으니 혹 한 사람이 빠져가며 2-3명의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원기동교회를 찾는 일이 시작되고, 선교사 전은혜선생이 봉산마을 가정을 심방하면서 병석에 있던 이를 진주 배둔병원으로 후송시켜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회복된 몸으로 귀향,
1932년에는 남녀 10여명 어른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며, 와룡댁 머슴간 둘째가 일본에서 노동과 장사로 큰 돈을 벌면서 논밭을 사게 되고 동네 제일 부자가 되었으며 병고와 가난이란 절망에서 큰 부자가 된 이들이 자기 집에 예배당을 세워 봉산교회가 출발.
4)봉산교회 개척
1937년, 이미 원기동 본 교회로 다니는 봉산교인이 그곳 교인보다 숫자가 많게 되고 또 봉산 아랫 마을 둔터동네 교인들이 농산교회로 멀리 걸어다니며 예배를 보았으니 봉산마을 전체를 넓게 합하면 넉넉히 교회가 형성될 정도. 둔터 교인들은 강재희, 형난이, 권순이, 이화백, 김순복, 정선임, 정말순, 임춘종, 임삼준 등이었다. 자연히 지방교회들의 의논이 봉산에 교회를 세우도록 뜻을 모으게 되었고 이미 경제가 든든해진 와룡댁에 예배당을 새로 짓게 되었다.
1937년 3월, 봉산리 472번지 225평의 대지에 14평 작은 초옥을 짓게 되었으니 예배당은 와룡댁 윗채 맞은편 아랫채가 되었다. 2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으니 봉산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단독 교역자를 모실 정도는 아니었고 순회교역자가 지나가거나 아니면 교회 내에서 글을 읽어본 이홍길씨 등이 한번씩 강단을 맡고 계속.
1937년 20여명으로 시작된 교회는 1945년 해방이 되는 때까지 40여명으로 부흥되고 세례교인만 20여명.
당시교인명단:
강재희, 김옥출, 이임순, 김순옥, 서순이, 변와룡, 장도음, 변을문, 형난이, 정말순, 임춘종, 임삼준, 박순금, 장성조, 김일분, 김규야, 이순길, 이상순, 하이석, 이남이, 이임이, 김난선, 김준이, 이명술, 김귀순, 이운길, 박조야, 임사용, 김수암, 김숙이, 박무영 등
5)신사참배에 교회는 파선되고
봉산교회가 재미있게 출발하던 1937년, 산골짝에 작은 예배당에 모여 세상복을 받아본 재미로 하루하루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전부. 더 넓은 세계에서부터 포위해 들어오는 신사참배라는 시험은 전혀 맞설 신앙이 아니었고, 교회 대표로 취급되던 강재희, 이홍길 두 사람이 고제면 주제소를 잡혀가서 예수를 믿지 않기로 각서를 쓰고 귀가. 강재희는 이후 신앙에 힘을 잃고 이홍길은 평생 낙심으로 허송. 교회는 큰 가책없이 그냥 신앙생활에 따르는 복을 보고 지속.
3.해방후 백목사님과 봉산교회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