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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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교회

개척정보(1980년 기준)
설립 1939.1. 개척자 백영희
비고 1904 박순명 1차 개척 / 백목사님 첫 목회 교회

개명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은 이곳에서, 그리고 구체적으로 개명교회 역사가 될 수 있는 내용은 개명교회 관련 언급이 있는 여러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1.개명교회


한편 봉산교회가 예배당을 짓고 교회가 서게 되는 즈음, 고제면에서 20리 떨어진 봉산만큼이나 다른 방향으로 20리를 덕유산 자락으로 들어가는 개명마을에 술도가 주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36년 7월 4일이었다.


원래 도평 사람이었으나 가정 경제가 파탄이 되어 맨손으로 처가동네로 들어가서 술도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마침 주류 제조업이 전면적인 전매사업으로 정책이 바뀌는 시점을 잡아 개명에 허가를 내어 개업한 것이 1929년이었다. 다방면에 출중한 실력을 가진 그는 주류업에서 큰 돈을 벌고 이 돈으로 고리대금을 해서 다시 돈을 불려 나갔다. 술은 최고의 맛을 자랑했고 사채는 신용을 철저히 지켜 손님이 줄을 이었으며 또 8년간 사업을 하는 동안 술값이든 사채돈이든 단 한 번도 떼여본 적이 없는 철저함으로 그는 거부가 되었다.


불과 25세를 넘으면서 세상 누릴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려보고 사는 그에게는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 빈구석이 있었고, 인생의 이 공허함에 괴로워 청년의 몸이 망가지도록 술로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동네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술도가만 빼놓고 지나가는 것을 불러다 전도강연을 청하게 된다. 온 동네 사람을 다 모아놓은 이날밤 전도강연에 그는 믿기로 작정을 하고 먼저 아내를 한 주 보낸 다음 그 다음 주 1936년 7월 4일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간 종교라는 종교는 다 섭렵하며 도를 찾아 미쳐버렸던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봇물이 터져 홍수가 나듯 신앙에 돌진하게 되었다.


고난을 찾는 복음


믿는 그날부터 성경을 붙들고 얼마나 씨름을 했든지 엉덩이가 터져 방석을 몇 개씩 쌓아두며 앉아서 연구를 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지켜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읽는 즉시 실행을 해버렸다. 교회 갔던 당일에 담배를 끊었고 3일 만에 술을 끊어버렸고 또 자기 재산이 술과 고리대금으로 번 불의의 제물이라고 깨닫자 예수 믿은 지 17에 만에 술도가와 그동안 번 모든 재산을 다 흩어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고 남은 돈은 성서공회에다 연보를 해 버리고 말았다. 빈손들고 모든 생활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였으니 3년을 콩 이파리로 멀건 죽을 끓여 먹을 만큼 고생을 했으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실행하는 가운데 넘치는 은혜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3년간의 회개생활이 끝나고 그에게 찾아온 축복은 이전에 불의의 제물로 벌던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깨끗한 돈으로 보상이 되고 있었고 곧 그는 또 다시 거부가 되어졌다. 경제가 다시 일어서는 1939년, 그는 그동안 20리를 걸어다니던 농산교회에 그동안 전도해서 함께 다닌 어린 신앙의 사람들 때문에 본 동네에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어 1939년 새해부터 교회가 출발하였다.


마침 이 해부터 신사참배는 총독부가 교회를 탄압하는 제일의 목표가 되어 전국적 탄압이 극심했고 이곳 고제 주재소에는 악질적인 일본 부장이 있어 그 탄압의 도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전도한 박점하, 조정대, 이이미, 박봉순, 조정원, 정갑용, 백집사님 부부 등 8명으로 시작한 개명교회는 신사참배의 한파 속에도 45년 해방 될 때까지 40여명 교인이 되도록 부흥이 되었고, 특이한 것은 교회를 책임맡은 백 집사님과 전 교인이 단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신사참배를 교회 전체적으로 승리해 버렸다. 신사참배 한국교회사에 개인이 신사참배를 승리한 경우는 있어도 전교인이 교회적으로 승리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한 교회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겪으며 해방을 맞는 교인들로서는 이재순을 비롯하여 강순이, 이선이, 김점임, 표경순, 김옥순, 양은생, 전난이, 유숙이, 임갈지, 김명준, 정순말, 박칠산 등으로 이어졌다.


번져가는 불길


신사참배를 승리로 이끈 백 집사님은 해방이 되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그와 함께 하여 그는 움직이는 곳마다 여름 장마비와 같은 은혜를 몰고 다녔으며 이곳 고제면 전체와 거창관내 신앙 불길의 진원지가 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신앙을 가진 경남에서 그의 이름은 진동이며 불이었다. 바로 이런 백 집사님의 불 같은 신앙이 해방 직후 개명교회를 넘어가는 첫 교회가 바로 봉산교회였다.


물질 복 받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알고 믿어 나오다가 십자가 고난에 걸려 파선된 봉산교회, 냉각된 심령들을 백 집사님이 인도하게 되었으니 그는 집사로서 인근 목회자 없는 4교회를 자부담으로 맡아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봉산교회에 신앙의 불이 떨어지게 되었고, 보이는 물질 축복에 더하여 또 하나의 신앙세계를 배우게 되었으니 이제는 십자가의 고난을 사모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인물편의 '황보기/황보유안' '이재순' '정갑용' 을 참고하십시오.

*교회편의 '농산교회'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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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16.화 -pkist.net/총공회/발언


김동신 조사님과 동문교회 장로님이셨든 고 김동근 장로님의 어머니는 우희식 권사님이시며 개명교회 초대 장로님이신 김수길 장로님과 부부이기도 하십니다 소영자 권사님의 친정어머니는 유 권사님으로 정확한 성함은 알지 못했으나 달산교회 소성인 장로님의 모친이기도 하므로 행정실에서도 알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백정대 장로님의 어머니는 나명주 권사님으로 2012년에 소천하셨습니다

참고로 정갑용 권사님과 이선희 권사님 나명주 권사님 세분은 세벽예배 끝나면 고개를 서너개 넘어서 현제 최제현 목사님 어머니 산소가 있는 뒷편에 자리를 잡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사시사철 백영희 목사님과 총공회와 거쳐간 목사님들을 위해 거적대기 둘러쓰고 기도하시다 해가 중천에 뜨서야 기도 끝내시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든 기억이 또렸합니다

한국총공회가 이른분들의 기도와 눈물로 이루어졌지 서부교회 잘난 분들의 공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착각이십니다

개명교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의 형제 자매들 자녀들은 현제 공회의 지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을뿐 아니라 목회자로 장로와 권사로 한두분 없으신 분들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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