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상남교회
설립 | 1967.3.27 | 개척자 | 이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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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1976-80년 |
(묘창교회 개척)
김철수 조사님이 나온 뒤 묘도교회는 통합측 목회자를 새로 맞지만 이제는 공회 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해 본 은혜 경험 때문에 예전처럼 그대로 있을 수가 없게 되고 그 중에서 큰 은혜를 받아 완전히 공회 교인이 된 김상곤 김정식 등 청년들이 공회 교회를 추진했고 자신은 이를 공회로 출발하게 연락 지도. 1973년 그 해 가을에 묘도교회에서 찬송가 궤도 걸이 등 몇 가지만 받아 나와서 가정 집에서 공회 소속 묘창교회 출발.
▷ 1973년 대구 덕수교회
송종섭 목사님이 대구 간호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군인 신분에 개척한 곳이 덕수교회. 송 목사님이 반 년 정도 군사 교육 과정 때문에 서울로 가게 되어 임시 목회로 부임. 일반적으로 장기 군 교육을 받게 되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는데 만일 다른 곳으로 발령 나면 덕수교회에 계속 목회하고 대구로 다시 발령이 나면 송 목사님의 빈 자리를 임시 맡기로 했는데 반 년 교육 후 특이하게 원대 복귀. 덕수교회 시절 전임 묘도교회 교인들의 묘창교회 개척을 지도.
▷ 1974년 울산 남산교회
(개척)
송종섭 목사님의 덕수교회 복귀가 결정 되자 다음 목회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백 목사님께 개척을 하겠다고 건의. 지역은 울산으로 신청. 목사님께서 울산은 어려운 곳이라 하며 허락을 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보라고 몇 차례 보류하며 남해를 권했고 꼭 가 보겠다고 말씀 드리니까 미리 한 번 가서 살펴 보라 하심. 몇 번을 방문하고도 뜻을 말씀 드리니까 허락.
(교동교회 - 사택 예배)
1974년 2월 24일에 울산에 와서 예배당은 없는 상태에서 교동 317(370)번지 이석구 씨 댁에 전세 사택에서 3월 10일 8 명이 모여 첫 공식 예배. ‘교동교회’라고 함. 평일은 사택이었고 예배 드릴 때는 방 2 칸의 사이에 문을 떼고 이불은 다락에 올린 다음 예배당으로 사용. 6 개 월을 예배 드리다가
(남산교회 시절)
1974년 8월 21일 수요일 밤예배를 새로 마련한 학성동에서 예배. 2층 집에 전세로 들어 갔고.
(예배당 건축)
1974년 10월에 야음동 690번지 부지 184평 360만원 조건으로 차용술 씨에게 50만원 계약금을 지불하고 10월 30일에 예배당 32 평을 착공. 예배당 마련 후 첫 주일 11월 30일에 27 명이 출석하고, 1976년 1월 7일 남산교회로 공회에 허락 받음.
1976년 2월 22일에는 장년 43명 유년 110명 출석하고 2월 26일 집사로 남자 3명(이술이 이윤재 황길태) 여자 4 명(장영재 이소둘 이경자 이명달) 그리고 권찰 2 명(곽금자 이항순) 임명. 당시 황길태 장로님은 울주 군수로 계시며 울산 시내 거주. 당시 직장 가르쳐 준 가정의 곽금자라는 분은 딸이 김진복 집사님 부인
▷ 1976년 서울 상남교회
1976년 7월 13일 상남교회로 이동, 개척은 이원일 목사님이며 2대 목회자가 이종옥 조사님이며 100명 간신히 넘었고, 예배당은 부지를 확보한 상태에서 30평 스레트 건축물에 교인이 가득 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