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교학실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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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공회 교학실

비고 1980년

▷ 1980년 부산 양성원 교학실장

(첫 전임 직책)

1980년 2월에 양성원 교학실장으로 부임. 양성원은 1976년 백 목사님이 총공회 목회자 신학 과정으로 개설. 초대 교학실장으로 서영준 목사님. 서부교회 중간반 부장을 겸임. 교학실장을 전임할 필요가 있어 김철수 조사님이 목회하지 않고 공회의 양성원과 행정실의 행정만 전담.

(생활비)

부산에 내려 올 때 목사님은 서울에서 월 생활비를 얼마 받았는지 물으셨고 28만 원이라고 말씀 드리자 교학실장 일에도 그 사례를 주셨고 뒤에 마산 산창교회로 개척해서 나갈 때도 28만 원을 그대로 지출하심.

(서영준 안수 건)

양성원을 맡고 있던 1980년 3월 총공회에서 서영준 목사님의 목사 안수직으로 분란. 전체 목회자들이 양성원 과정을 함께 했는데 정재완 목사님처럼 나이 많고 목회를 한 지도 오래 된 분들도 안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양성원의 졸업 첫 해 안수에 서영준 목사님이 포함 되자 안수하는 그 날인지 그 전날인지 백태영 이재순 목사님들이 교학실로 찾아 와서 서영준 목사님의 안수를 두고 양성원 과정을 마쳤는지 확인. 성경 100독 여부를 물었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하자 우리가 만든 우리 법을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나 라는 논리로 백 목사님께 반발.

3월 초여서 아직 추울 때인데 모두 행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백 목사님은 5층에 몇 사람을 모이게 해서 지적하고 꾸짖고 계셨음. 안수 소식을 듣고 지금 부모가 축하하러 왔다가 그냥 갈 것인가? 누가 100독에 대한 말을 냈느냐? 백태영 이재순 물었을 것이고, 김철수 교학실장은 말했을 것이 아닌가? 양성원 1회 졸업생들은 안수를 받게 되는데 그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는 목사가 안 되고 학생이 목사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이런 말씀으로 오전 10시가 넘도록 시간은 계속 지나 갔고, 김영웅 조사님은 김영웅 전재수는 안 되고 서영준은 되는 것이 무슨 법이냐고 반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그 이후 교학실장을 보는 시선이 달라 진 것을 느낌.

(직책의 특수성)

당시 백 목사님은 교역자들을 면담할 때 5층 숙소로 직접 불러서 바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교학실을 통해 물어 보고 답을 받아 오도록 했는데 그 역할이 비서처럼 되니까 모든 교역자들이 경계하고 조심하는 자세가 되어 대화할 친구도 없다 할 정도.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처세하는 식이 특이한 점도 있고 또 백 목사님도 자신을 편하게 여기지 않으신 것인지? 자는 뭐든지 아니다 싶으면 바로 언행을 하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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