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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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교회

개척정보(1980년 기준)
설립 1952. 개척자 정양순
비고 1975. 공회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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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공회 '신풍교회 개척' 기록

- 일시: 1956.7.

- 설립: 서귀덕, 손양원 목사님 부인

- 규모: 건평 59평, 대지 235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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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10. 11:30, 입당식 예배




성암교회 약사 참고 - 성암교회 홈페이지 인용 06.6.17.


(성암교회는 애양원제2교회의 위치)



역대 교역자


제1대교역자 양용근전도사


약력

-양용근 전도사

- 1905년 전남광양군 친월면 오사리 출생

- 순천매산학교 졸업

- 1930년 3월 동경대학 법률학과 졸업

- 요꼬하마 일원 관동 대지진 후 일본의 조선인 무차별 학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 귀국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6년만에 졸업

- 순천노회 23회 정기회에서 라덕환 안덕윤 등과 목사안수 받음

- 광양읍교회, 고흥길두교회, 구례읍교회 시무

- 신사참배 거부로 1943년 12월5일 옥중 순교 하였다.

-양용근 전도사 구곡교회 시무

-1937년 초가로 된 구곡교회에 부임해와서 흩어져 있던 주변의 교우들이 함께 모여서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다.

-1939년 3월 31일 사임할 당시 많은 성도들이 헤어짐을 아쉬워 했다.



※1937년

4월10일 양용근 초대 교역자 부임 그는 당시 신풍, 구곡, 덕양묘도, 쌍봉전도사로 청빙함



※ 1939년8월~50년6월

-양용근 전도사 사임후 당시 애양원교회 당회장인 손양원 목사가 협력목사로 부임



※ 1940년9월25일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여수 경찰서에 검속되어 심문을 당한 후 3년 징역을 언도받고 광주로 압송 당함 성암교회(당시 구곡교회)는 패쇄되고 건물은 쓰러 졌다.

-성암(구곡)교회의 신사참배 근거는 손양원목사의 당시 여수경찰서에서의 피의자 심문조서를 통해서 알수가 있다.「손양원 목사님의 말 “성암(구곡)교회는 순천노회와 전연 독립되어 있다” “피의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는 어떤가?”“내가 담임하던 교회는 율촌 애양원 교회, 율촌 구곡교회로 순천노회와는 전연 독립으로 있어서 어느 것이나 율촌 애양원에서 경영합니다.”」라고 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담임하던 교회가 신사참배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던 것이다.



※ 1948년

구곡교회는 일본경찰에 감시를 받다가 해방되었다

교회는 48년 손양원 목사님의 노력으로 구암리 동청(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 하던 곳)을 매입하였다.(6.25전쟁 당시 부역거부로 다시 패쇄)



※ 1949년

구암리 동청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제2대교역자 서현식목사




약력

-1920년1월21일 전남 광양 진상면 황중리 출생

-일본 경판 상업학교

-초창기 장로회신학교 졸업

-성암교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손양원 목사 순교후 애양원교회 담임 시무

-1970년 여수중앙교회 담임

-여수 산돌교회 개척

-산돌교회 원로목사

-1998년 5월 28일 심장병으로 갑자기 별세



※보이열 목사의 주선으로 고흥 지역으로 청빙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손양원 목사가 서현식 목사를 성암(구곡)교회를 전적으로 섬기게 하여, 손양원 목사와 보이열목사 사이가 약간 불편하였다.



※ 1950년

-구곡교회에서 성암교회로 이름을 지었다(손양원목사 그후 서현식 조사를 담임하게 했다)

-중.고등부 학생회가 출범했으나 정확한 기록은 알 수가 없다.

-주일학교 시작-서현식 조사 사모가 아이들을 가르침(아이들은 사모를 예배당 선생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 1952년

-교회를 옛 구곡교회 자리로 옮기고 교역자를 위해 사택을 마련 하였다.







제3대교역자 손활인전도사



순천중앙교회 오예택 장로에 의해서 성암교회에 모시게 됨






제4대교역자 박창호전도사



약력

-전남 광양 골약면 출생

-일본에서 원폭으로 부인과 자녀를 잃고 귀국

-귀국 후 재혼(재혼한 부인이 믿지 않은 분이라 뜻을 이루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여천 쌍봉교회 개척 시작

-교려신학교 별과 3년 졸업(고신측 교단에 소속되어 목회)

-1965년말까지 광양남부교회 섬김

-부산에서 시무하다가 혈압관계로 소천 하였다.



※1953년

애양원 의사로 파견된 이은태 선생의 도움으로 성가대가 시작되었다.







제5대교역자 강중식강도사


약력

-1927년3월27일 전남 광양 출생

-순천 고등성경학교 졸업

-과양 진목정교회를 거처 성암교회로 옴

-거제도 유천교회, 칠천도교회를 섬김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합동측 강릉(제일)교회, 서울 승동교회, 경기도 중앙교회시무

-현 경기도중앙교회 원로 목사



※1954년

-혼란의 시기로 서귀덕 집사 중심으로 고신측교단 지향 하겠다는 의견으로 교회분열

-손양원 목사의 바램을 성도들이 잘 지키려고 노력하여 통합측 교단을 유지.

(신사참배 문제로 다른 교파를 만들어서는 안되며 교단이 분열되어서도 안된다고 강조)

-정양순(손양원 목사사모)사모는 부산에 있으면서 성암교회를 자주 방문하여 여러 차례 오인덕 사모와 서귀덕 집사에게 고신측 교단을 소개 하였다.

-성암교회는 차종석, 서귀덕등 약 20여명을 출교 하였다.



※1955년

-교회 신축하려는 계획을 수립

-9월5일 교회앞길 땅 매입(당시 사택 현 공항입구 3거리)








월래 여수동광교회를 청빙을 받았으나 서현식 목사의 주선으로 성암교회로 오게 되었다.

당시 강석원, 양일만, 장로가 초대 시무장로로 취임하여 당회가조직 되고, 주일학교 어린이가100여명이 넘었다.

강중식 강도사는 성암교회를 시무하면서 보이열 목사의 요청으로 “한성신학교”(한성신학교는 보이열 목사가 애양원안에 설립한 학교였다)출강 하여 기독교 윤리를 강의 하였다.



※1956년

3월에 애양원의 도움으로 교회 건물을 착공해서 10월에 완성 하였다.

(당시 교회의 위치는 지금의 여수비행장 활주로와 공항청사 중간쯤이다.)

5월에 완전당회 조직(강석원,양일만 시무장로 취임)






제6대교역자 김홍규목사



전임자이던 강중식 강도사의 추천으로 성암교회에 오게 되었다. 강중식 강도사와는 총회신학교(전 장로회 신학교) 5회 동기생 이었다.

-57년10월22일 목사 안수를 받음

-개척사업에 힘을 기울여 후산리기도처(후 신산교회)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당시 임원석 장로가 시무장로로 취임 하였다.



※1957년

-차종석, 서귀덕 “다시는 교회를 어지럽히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보이열 목사도 비슷한 내용의 각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햇빛 찬란한 한적한 오후 잔잔한 호수 한 가운데에 작은 돌맹이 하나를 던짐 같이 교회내적 사건으로 발전한다. 차종석 집사는 대구서부교회에서 장로가 되어서 돌아왔다.

-11월 43평의 석조건물인 교회당 헌당식을 가졌다



※1958년

-3월23일 제직회를 열어 후산리(현 신산교회)기도저를 설치 하기로 결의하여 땅을 매입토록 했다.

-성암교회 교인중 누군가 땅을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천군 취적리에 대지150평을 매입하여 한맹연 목사 주례로 매입한 대지에서 남자 교우7명 여자교우13명이 참석 후산리 교회 기공예배를 드렸다.(지금의 주유소 근처이다)



※1959년

-한맹연 강도사 부임(1961년5월16일 목사안주 받음)

-아동부가 가장 번성하던 당시 부장이 유지형 집사였으며, 이돈수, 차진록, 김양례, 차양수 등 19명의 교사가 어린이의 벗이 될 정도로 왕성 하였다.



※ 교회의 혼란을 일으킨 백영희파 ※

백영희 파(아현파,일명백파)는 주로 부산, 대구, 거창을 본거지로 활동한다. 백영희 목사는 1910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28세 나이로 목회를 시작 1951년 이래로 대한 예수회한국총공회 부산서부교회에 목회하다가 1998년8월27일 사망 했다.

그가 주장한 교리는 “거듭(중생)난 영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비성경적인 구원파식 교회와 비슷하다. 또한 기독교의 구원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이원화 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7대교역자 한맹연목사



약력

-1929년2월19일 서울 출생

-서울 대광교등학교 졸업

-서울 의과대학 재학중 한국전쟁 으로 광주연합대학을 다님

-군 복무후 순천에서 예과를 거처 호남신학교 전신인 광주신학교 3학년에 편입

-장로회신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공부

-남면 두라리교회 강도사

-성암교회 담임

-서울로 목회지를 옮겨 강서교회를 개척

-1998년 은퇴 현 강서교회 원로 목사



1959년 강도사로 부임

1961년5월16일 목사 안수를 받음

시무 하시면서 “한성신학교”강사로 출강 하였고, 보이열 목사가 당회장인 교회를 함께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며 성찬예식을 인도 하였다.

지난 1999년3월21일에 김귀순 사모와 함께 요 13:34~3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제목의 말씀가지고 방문 하시기도 했다.

「한편으로 한맹연 목사와 차종순 장로 사이는 몹시 불편했고, 그사실은 당시 둘 사이에 말다툼끝에 한맹연목사가 「당신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한번 봅시다」라고 말할정도 였다.이런 사실을 알고있더 애양원교회 서현식 목사와 보이열 목사가 애양원 원장실에 차종석 장로를 불러 화합하지 못할 경우 전처럼 조치 하겠다는 말하기 까지 했다고, 한맹연 목사는 개인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와 눈물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철야 기도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있는데, 새벽4시경 서귀덕 집사가 들어와 한맹연 목사에게 “대단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차장로를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한맹연 목사와 차종순장로 사이에서의 화합이 이루어 졌고, 이 사실은 노회에까지 약소 하였다.」 이 사실은 한맹연 목사와 김윤선 장로의 증언으로 알려저 있다.



※1960년

-60년대 후반부터 장년부 교회학교가 시작 되었다(68년12월11일에는 연말종합시험도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초대교사 : 김원식, 곽장하, 송옥석 장로와 이승원 집사가 수고했다)



※1962년

-애양원에 살던 교우들이 약150여명이 성암교회로 이동하였다. 교회는 활기차 있었다.

한편 구암, 학서,를 중심으로 기존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 한맹연 목사를 비난하며 교회를 향한 좋지 않은 소문도 있었으나 성암교회는 슬기롭게 잘 대처하였다.



※1963년

-9월20일 율촌면 신산리 341번지에 대지 73평을 새로 구입 12평 교회를 건립하였다.

-12월에 예배를 단독으로 운영하고, 주일학교도 운영하게 되었고, 임원식 장로가 시무하면서 예배를 인도 하였다.(1968년 까지 임원식 장로가 시무하면서 예배인도와 제직회를 주관)



※1964년

-보이열 목사 관련된 미국 교회에서의 도움으로 15평을 증축 하였다.

-후산리 기도회 청년회가 조직 최무남 교우가 회장으로 수고하면서 유년주일학교 반사회도 조직 하였다.

-후산리기도처는 교회를 출석치 않는 마을 어른들의 관심과 도움이 컸다고 한다.







제8대교역자 오동원목사



약력

-1924년11월24일 경북 청도 출생

-대구고등성경학교 졸업

-장로교 총회신학교

-신생원에서 사역시작

-진주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광양 광동중앙교회 사역

-애양원 의사인 윤후근 집사의 소개로 성암교회 부임

-부산 동부교회 개척

-현 동부교회 원로 목사



성암교회에서 7년간 시무 하면서 농촌운동을 전개 하는 강사를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열고“모태신앙의 비학습자도 세례문답에 참여할 수 있기로 가결”하는 등 의욕적으로 일하였다

한편, 오동원 목사가 부임할 당시에 보이열 목사가 미국으로 떠났고, 성암교회는 또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확실치 않은 복음노선도 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백영희 노선의 설교자를 강단에 세우고, 백영희파 노선을 지향한 목회를 추구하기도 하여 교인들과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결국 오동원 목사는 백영희파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설교 중에도 공공연히 노회를 탈퇴하자 하면서 백영희 집회만이 배울만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창 도평, 부산에서 열리는 집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기도 했으면, 급기야 백영희씨를 직접 성암교회 강단에 세워 말씀을 인도케 하였다. 이후 오동원 목사는 1974년4월 순천노회 제56회 정기회 재판국에서 목사면직 무기 수찬정지에 처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 일로 인해 큰 시련을 직면 했으나 김원식 장로를 중심한 교우들이 통합측 교단을 지켜나가자고 결의하여 오동원 목사의 의견에 반대 이것은 당시 시무 장로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젊은 청년들이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던 일이다.



※1964년

-청년부가 주관하여 주보를 발행 하였다(63년부터 청년부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66년

-청년부가 정식으로 출범「회장-김양춘(현 미국거주) 부회장-차양수(현 목포노회 목사)」

청년부는 출범 초창기부터 교회학교 여러부서에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 하였다.



※1967년

-청년부 활동-신산교회 청년회와 친선제육대회,헌신예배, 토론회 등의 공식적인 교류가 있었다 (당시 회장-이희우 부회장-차인기, 신산교회 회장-서종빈)

-교회 신축하여 이전 하였다(현 교육관)

-김원식 장로 장립








제9대교역자 이순배목사


차종석 장로의 소개로 성암교회에 부임(누구보다도 보이열 목사가 가장 기뻐했다)


약력

-1930년9월13일 출생

-순천고등성경학교 졸업

-순천중앙교회 전도사

-장로회 신학교 졸업

-곡성 석곡교회 담임

-순천중앙교회 부목사

-고흥 중앙교회 목회

-성암교회 부임

-1999년 성울대방동 대봉교회(대한예수교 합신)다임



1)조직적 교회를 이루려 노력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요리 문답 1,2항을 많은 어려움 속에서 수정한 일이 있다.

이순배 목사가 추구한 구원신앙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이었다

이순배 목사는 어린도 구원에 참여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순천 어린이 전도협회생길 때 관여 하기도 했으며 어린이 부흥집회나 여름성경학교를 열기도 했다.

또한 교인들이 성경에 접속시키기 위한 의도로 성경의 일정한 부분을 주고 묵상을 통해서 발표하게 하였으나 후에 부작용을 초래하여 구원파의 교리를 공부하는 모임, 신비주의 모임 생기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있기에는 동생 이진배씨가 권신찬 무리의 일파와 교제를 계속하였고 동생을 통해 인도 받은 김춘식 전도사, 허승주 청년도 그 곳에 드나들었다. 남기백 목사를 초청하여 성암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였고, 이런 일은 애양원교회 교역자와 성도들에게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일로 이순배 목사는 노회로부터 많은 책망을 받았다고 한다.



※1973년

-곽장하 장로를 교인들의 손으로 선출



※1975년

-평신도회라는 이름으로 남선교회가 시작 되었다.(1992년 남선교회로 명칭 변경)



※1978년

-전계환, 정지은 장로를 교인들의 손으로 선출(당회 조직이 강화 되었다)








제10대교역자 박병식목사


약력

-1950년6월19일 순천시 옥천동 출생

-순천중학교 졸업

-순천농업전문학교

-1977년 호남신학교 졸업

-1979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목회학과 졸업

-외서교회 전도사

-별교제일교회 전도사

-덕양교회 담임

-성암교회 담임

-현 순천 남부교회 담임



박병식 목사가 지향한 사역의 특징은 2가지로 나눌수 있다.

1)청년들을 향한 관심이었다

새벽조깅, 조기축구 등을 통해 그들끌어 안았다 이는 갈 곳이 없고 방황하는 청년들이 모 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자 했던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2)성도들과의 일체감

심방으로 성도들과 가까워지려는 열심 으로 각 가정의 형편을 헤아리고 위로를 전했으며,

한번 찾아간 교우가 별 반응이 없으면 교회로 나오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곤 했다.

박병식 목사 시무당시에도 구원파 교리를 강변하는 도전이 계속되었으며 어떤 성도는 구원파 모임에 참석하는 일도 있었다, 박병식 목사는 이런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말씀연구에 몰두 하였다. 때때로 몹시 갈등이 되고 설교하기가 힘들었지만,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설교에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제11대교역자 장광윤목사


목포노회 산하 낙도교회인 수다교회 섬기다가 성암교회로 부임

신학교 재학시절부터 교회 개척시작, 서울 중량구 면목동에 은휼교회를 세우고, 후에 같은 지역에 위치한 이귀선교수가 시무하던 교회와 한 울타리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진광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 2년후 교회성전 건축되었고 교회가 든든히 서가자 장광윤 전도사는 새로운 목회지로 떠나서 목포노회산하 수다교회로 옮김 (그 곳에서「한국도서교회 현장조사 연구」라는 논문을 씀) 애양원 월요예배설교 월1회

약력

-전북 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출생

-전주신흥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학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서울 장로회신학교 학사편입

장로회신학교 목회학과(목회학사,BM), 장로회신학대학원(신학석사,Th.M)

장로회신학대학 박사원,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목회학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사를 엮임

-진광교회, 수다교회

-1983년 10월4일부터 현 성암교회 시무


※1983년

10월1일 청년회 주관 전교인추계체육대회

학생회에서 “면류관” 이라는 회지 발간



※1984년

1월13일 제1회 베데스다의 향연(89년1월11일을 끝으로 행사가 없었다)

6월 38평의 (현 본당자리)조립식 교육관 건축

성암선교원 개원(91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송도교회 최문규 전도사 파송

여수노회 최초로 OHP를 사용 축제예배를 시도



※1985년

아동부와 유치부가 예배를 나누어서 드리기 시작함,

중고등부 왕성하던 시기(100여명이 넘었음)

5월 송도교회 사택 마련

8월2일 송도교회 헌당식(장광윤 목사 주례)



※1986년

불우이웃돕기 위해 고물을 수집

중고등부 여전히 왕성하던시기

10월에 학생찬양대 출발(지금의 호산나)

송도교회에 서병근 전도사 파송



※1987년

1월에 시나고그 자치회 창립총회를 가짐

이후성, 오도일, 송옥석 장로 장립

수난의 비 제막



※1988년

중등부와 고등부를 분리 하였다.



※1989년

전교인 참가 필사본 성경을 제작



※1991년

CMS 선교원을 개원 하였다.

1992년

5월 박준보, 이희우, 최서동, 유영도, 박도근 장로 장립

8월에 현재의 예배당부지에 있던 조립건물 자리에 건축위원을 조직하여 기공예배를 드렸다.



※1994년

최초로 김원식장로 원로 장로로 추대

9월18일 중국 선교사 파송



※1995년

5월21일 케냐 최서동 선교사부부 파송



※1996년

시나고그와 청년회로 나누었던 청년회가 통합되었다

6월 호산나 성가대 발족

10월 전교인 복음송 경연대회

12월 새 성전 봉헌식과 함께 박용탁, 노영규, 조옥봉, 김두천, 은창영, 이종선 장로징립



※1997년

샬롬중창단 발족(영아부 어머니들)



※1998년

청년회 일일찻집으로 수익금 전액 최희락, 구승옥 선교사 부부에게 헌금



※1999년

2월2일에 CMS 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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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1924. 04.13 교회창립 [구곡교회]로 명명(命名)


1936. 12. [구곡교회]이름으로 교회 설치 허가


1937. 초가로 교회신축


1937. 04.10 초대 교역자 양용근 전도사 부임


1940. 09.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교회 폐쇄


1948. 구암리 동청 매입하여 교회 복구


1950. 06. 08 제2대 교역자 서현식 조사 부임,

교회 명칭[성암교회]로 변경


1950. 공산당 부역(附逆)요청 거부로 교회 폐쇄


1952. 동청교회 옛 구곡교회 자리로 이전 및 개축


1953. 04. 13 제3대 교역자 손활인 전도사 부임


1954. 02. 03 제4대 교역자 박창호 전도사 부임


1955. 교회분열(일부 백영희파로)


1956. 01. 05 제5대 교역자 장중식 강도사 부임


1956. 05. 완전당회 조직(강석원, 양일만 장로 취임)


1956. 10. 현 여수공항 자리에 43평 석조교회당 신축


1957. 10. 20 제6대 교역자 김홍규 목사 부임


1959. 제7대 교역자 한맹연 강도사 부임


1959. 09. 임원식 차종석 장로 취임


1961. 05. 19 한맹연 목사 안수식


1964. 11. 석조예배당 15평 증축, 사택 수리


1965. 05. 23 제8대 교역자 오동원 목사 부임


1967. 03. 22 김원식 장로 장립


1969. 10. 신풍리 1006번지로 교회신축 이전


1972. 05. 28 제9대 교역자 이순배 목사 부임


1973. 05. 18 곽장하 장로 장립


1978. 11. 29 전계환 정지은 장로, 신점덕 나정애 권사 임직


1982. 02. 05 제10대 교역자 박병식 목사 부임


1983. 10. 04 제11대 교역자 장광윤 목사 부임


1984. 01. 유영동 전도사 부임(교육)


1984. 06. 02 교육관(38평)완공


1985. 08. 02 개척교회 율촌 송도교회 헌당


1986. 08. 07 이성방 전도사 부임(전임)


1987. 07. 01 유영동 전도사 부임(교육)


1987. 11. 27 이후성 오도일 송옥석 장로,

박준보 이희우 최서우 류영도 박도근 집사,

배귀순 권사 임직


1991. 02. 03 류성환 전도사 부임(교육)


1992. 01. 최성호 전도사 부임(전임)


1992. 05. 17 박준보 이희우 최서동 류영도 박도근 장로,

박용탁 노영규 조옥봉 김두천 은창영 김성익 집사,

문삼애 강이엽 오수복 주창희 권사 임직


1993. 12. 07 새 성전 완공


1994. 01. 30 이종선 집사 임직, 이점아 권사 취임


1994. 04. 17 김원식 원로장로 추대


1995. 04. 02 오은아 전도사 부임(교육)


1996. 12. 08 새 성전 헌당

박용탁 노영규 조옥봉 김두천 은창영 이종선 장로,

이영래 김유현 집사, 이순애 권사 임직


1999. 01. 03 박정환 (부)목사 부임


1999. 02. 02 성암씨엠에스(CMS) 선교원 개원


1999. 04. 18

이원옥 차상만 신용 집사,

손동심 박삼덕 고마진 배연임 권사 임직


1999. 05. 02 [성암교회 75년사] 발간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이 땅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924년 신풍리에도 차진회의 집 작은방에서 예배가 시작 되었고. 1926년 부터는 광주에서 신풍리로 이주해온 애양원 직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애양원이란 이름은 1936년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1936년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응규 목사가 순천노회에 청원서를 올려 정식으로 설치 허가를 받았고, 1937년에는 1대 교역자인 양용근 전도사를 청빙해 교회를 신축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양용근 전도사는 1939년3월31일에 사임했는데 성도들은 양용근 전도사와의 헤어짐을 무척 아쉬워했다. 이후 손양원목사가 임시로 교회를 돌보다가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일경에 연행되어 1940년 애양원교회와 함께 강제적으로 패쇄 되어 해방될 때까지 일경에 감시를 받았다.

1948년 손양원 목사의 노력으로 구암리 동청(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 하던 곳)을 매입하여 1949년부터 구곡교회로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1950년 손양원 목사는 교회의 이름을 구곡교회에서 성암교회로 명명하고 서현식 목사를 청빙하여 성암교회를 담임하게 한다. 서현식 목사 부임 후 주일학교와 중/고등부가 시작되었는데 중/고등부의 시작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1952년 교회는 옛 구곡교회 자리로 옮기고 이때부터 교역자사택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1953년 애양원병원 의사로 파견 나온 이은태 선생의 도움으로 성가대가 시작된다. 1954년 4대교역자인 박창호 전도사 부임하던 해에 서귀덕 집사가 고신측 교단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교회는 혼란과 분열이 시작된다. 그러나 성도들은 손양원 목사의 유지(신사참배 문제로 다른 교파를 만들어서는 안 되며 교단이 분열되어서도 안 된다)를 들어 통합측 교단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교회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온 차종석, 서귀덕과 함께 약 20여명을 출교 시켰다. 1955년에 교회신축계획을 수립하고 그해 9월에 교회앞길 땅을 매입하였다. (현 공항입구 3거리에 사택이 있었다고 한다.) 1956년 3월에 애양원의 도움으로 교회건물을 현 공항청사에서 활주로 중간쯤 위치한 곳에 착공해서 10월에 완성한다, 1956년5월에 강원석, 양일만을 시무장로로 장립하여 완전한 당회를 조직한다.

1957년에는 차종석, 서귀덕 집사 부부가 돌아와, "다시는 교회를 어지럽히지 않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뿐 보이열 목사의 뜨거운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교회의 분열을 만들었다. 본 교회 책자인 「75년사」에서는 이 시기를 “꺼지지 않는 교회의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1958년 3월에 제직회에서 후산리기도처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여 취적리, 현재 주유소 근방에 “후산리교회(현 신산교회)”를 새운다. 1959년은 아동부가 가장 왕성하던 시기로 유지형 집사와 함께 이돈수, 차진록, 김양례, 차양수,등 19명의 교사가 열심히 봉사하였다.

1960년 후반부터 장년부 교회학교가 시작되었고, 68년12월에는 연말 종합시험을 실시하기도 한다. 1964년도부터 청년부 주관으로 주보가 발행 되었고, 그 다음 해인 65년에 8대교역자 오동원 목사가 부임 한다. 그러나 오동원 목사는『확실치 않은 복음노선 이라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신측인 백영희 노선의 설교자를 강단에 세우기도 하고, 설교 중에 공공연히 노회를 탈퇴하자 하면서 백영희 집회만이 배울 만 하다고 주장하다 급기야 백영희씨를 성암교회 강단에 세워 말씀을 인도 하게도 했다. 이 일로 교회는 큰 시련에 직면하나 시무장로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젊은 청년들의 노력으로 지혜롭게 극복한다. 1966년 회장 김양춘, 부회장 차양수로 청년부가 정식으로 출범해 각 부서에서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67년에는 회장에 이희우 부회장에 차인기 등이 임원으로 선출되어 신산교회와의 친선체육대회, 헌신예배, 토론회 등의 공식적인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편 교회를 지금의 교육관으로 신축이전 하여 김원식 장로를 장립하였다.

1972년 9대 교역자인 이순배 목사가 부임여 성경을 읽고 발표하게 하여 말씀을 알리고자 했는데 오히려 구원파와 신비주의 모임이 생겨나 교회는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이순배 목사는 노회로부터 많은 책망을 받는다. 1973년에 교인들의 손으로 곽장하 장로를 선출하고, 75년에 드디어 평신도회라는 이름으로 남선 교회가 시작된다 하지만 평신도회는 2~3년 정도에서 사라지고 92년에 남선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을 한다. 78년에는 전계환, 정지은 장로가 교인들의 손으로 선출되어, 당회조직은 강화된다.


1982년2월5일 박병식 목사가 부임한다. 박병식 목사는 방황하는 청년들이 모이게 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성도들과의 일체감과 한번 찾아간 교우가 별 반응이 없으면 교회로 나오기까지 관심을 갖고 찾아보곤 했다. 한편 박병식 목사는 구원파 교리를 강변하기위해 말씀연구에 몰두하기도 하며. 때때로 설교하기가 몹시 힘들고 어렵기도 했지만, 늘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설교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큰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83년8월21일 박병식 목사가 사임하기 전 성도들은 박병식 목사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밤에도 찾아가 떠나지 말라고 간청하기도 했지만 끝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다. 박병식 목사는 부임 하면서부터 떠날 때 까지 교회가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하였다.


1983년10월4일 장광윤 목사가 부임하면서 구역을 정비하고, 친교를 향한 공동체를 엮어갔으며 교육목회에 주력하였고, 교회는 박병식 목사 이후 제2 제3의 발전을 갖기 시작했다.

1984년에 학생회에서 베데스다의 향연 개최하고 6월에 조립식 건물로 현 본당자리에 교육관 건축, 성암 선교원을 개원하고, 여수노회 최초로 OHP를 사용하여 축제예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1985년은 교육부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린이 성가대가 생겨나기도 했었다. 교회외적으로는 송도교회를 지원하여 장광윤 목사의 주례로 헌당식을 드렸다.

86년에는 청년회에서 불우이웃돕기 고물수집을 하고 10월에 학생 찬양대가(현 호산나의 시작) 출발하고, 서병근 전도사를 송도교회로 파송했다. 87년 흩어진 청년들을 위해서 시나고그 자치회 창립총회를 가지고, 교회의 아픈 과거를 되세기는 의미에서 수난의 비를 세우고 89년에는 전교인 참가 성경 필사본을 제작한다. 1992년5월에 박준보, 이희우, 최서동, 유영도, 박도근 장로를 장립하고, 청년회에 다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8월에는 현재 예배당부지에 건축위원을 조직하여 기공예배를 드렸다. 94년, 최초로 김원식 장로를 원로 장로로 추대하고, 9월18일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이어 95년5월21일 최서동 선교사 부부를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한다. 1996년 시나고그와 청년회로 나누었던 청년회가 다시 통합되었고, 6월에는 사라진 호산나 찬양대가 부활하여 새롭게 발족하였고. 10월에는 전교인 체육대회, 12월에 새 성전 봉헌식과 함께 박용탁, 노영규, 조옥봉, 김두천, 은창영, 이종선 장로를 장립했다. 98년 청년회에서 일일찻집을 열어 수익금 전액을 최희락, 구승옥 선교사에게 보내졌고, 99년에 CMS를 개원 하였다.


2000년! 2000년은 밀레니엄이라 한다. 밀레니엄은 새천년이라는 뜻이다. 이제 교회도 새천년에 발맞춰 변화하고 있다. 특히 청년회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교회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젊은 집사님들과 함께 앞장서서 일 함으로 교회는 젊어지고 있다. 셀라찬양팀은 매주 오후찬양예배을 인도하고 있으며 때때로 섬 교회, 농촌 미 자립교회 등을 방문하여 전도에도 힘을 쏟고 있다. 교육부서 또한 청년들이 교사로 봉사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치부에서는 2003년 재적 50명을 놓고 기도한 결과 연말에 기도에 응답을 받은 바 있고, 아동부에서는 메빅을 도입하여 아이들과 교사가 하나가 되는 예배를 드리고 있고, 중고등부에서는 여두둔찬양팀이 매주일 예배인도와 또 아이들에게 찬양에 대한 도전을 주고 있다. 2003년부터 교육부서는 매월 각 부서별 기도모임과 교사연합 기도모임을 갖고 있다. 이런 기도의 기둥은 오랜 세월 교회어른들이 새벽마다의 기도함이 이루어진 결실이라 하겠다.

2004년 여두둔찬양팀에서 베데스다의 향연을 열었고, 셀라찬양팀은 고흥세곡교회를 찾아 찬양인도를, 남선교회는 이웃에 독고노인을 찾아가 돕고 있다. 무엇보다도 장광윤 목사의 여수노회 부노회장 당선은 노회 선거운동에 또 다른 문화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교회내적인 것에서 교회 외적으로 우리의 지경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돌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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