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일교회
비고 | 서울 원효로의 원일교회와 원성교회의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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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공회의 50년대 교인들에게 확인 중입니다. - 24.8.16. 현재
원일교회에 박윤선이 와서 목사님과 만났던 기록과 박윤선 이상근 등이 1957년에 원효로에서 개혁신학교를 했는데 이 시기와 겹칠 정도로 이상근 목사님이 원성교회에 왔다는 기록 때문에 더 살펴야 할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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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0.5수새
서부교회에서 세워 가지고 고신에 뺏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서울에도 중앙교회도 서부교회서 세웠지 원일교회도 서부교회서 세웠지 원남교회도 서부교회서 세웠지 세워 가지고 전부 고신에 다 벗겼어요.
87.5.22금지
서울에 있는 중앙교회도 우리가 세운 교회입니다. 그거 돈 많이 들여 세웠지마는 그 교회 지금 딴 진영 교회 됐습니다. 또 원남교회도 그 교회 지금 큰 교회지마는 우리가 세워 가지고 그랬는데 또 그만 딴 교회로, 교역자가 딴데로 가니까, 딴데로 그만 살살 꾀워 가지고 가 버리니까 뺏기고 말았어. 또 원일교회도 그거 큰 교회인데 서울에 있는 교회인데 원일교회인데 그 교회도 얼마나 내가 고생을 하고 세웠지마는 교역자 보내 놓으면 그 교역자가 둔갑해 가지고서 그만 딴데로 끌고 가 버리니까 헛일이라.
83.8.27토새
그전에는 제가 원남에서 자고, 원일교회 원남에서 자고 저 사직동까지 자가용 가지고 온 것을 안 타고 걸어갔습니다.내수동교회를 가면서 걸어갔습니다. 몇 시간이나 걸렸느냐 하니까 그때 내가 잊어버렸는데 몇 시간 걸린다 해서 일찌거니 출발해 가지고서 거기까지 걸어서 그 시간 안에 도달해 가지고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83.8.21주전
저도 예수 믿은 이후로 차 타 본 일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청량리에서 효자동이라고 하면 내가 거리는 똑똑히 모르지마는 아마 한 삼사십 리나 사오십 리 안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청량리 그날 밤에 있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청량리 밤에 거게서 머물고 또 내수동교회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될 일이기 때문에 내수동교회 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 그때 변영태씨 가정에서 자가용을 보낸 것을 그 운전수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하니까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믿는 사람이면 같이 예배보러 가는 것이니까 가 가지고 예배 보면 되지마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불가타 해서 그때 도보로 나서 가지고 걸었는데 그때가 상당히 추운 때입니다. 영하 아마, 영하 그때가 한 십도 이상 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도보로 갔었고 또 원효로에 있는 원일교회에서 토요일날 밤까지 집회를 마치고 주일날은 또 내수동교회 가서 예배드리게 될 때도 도보로 걸어갔습니다.
81.6.5금밤
내가 원일교회 가니까 어떤 여인이 하나 오더니마는, 와가지고서, 왔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그때에 오차를 가지고 와서 한잔 마시라고 하니까, ‘예, 고맙습니다.’ 하면서 입이 떡 가져 가더니만 도로 내놔. ‘아, 드이소.’ ‘아, 주님이 못 먹게 합니다.’ 주님이 못 먹게 하면 되겠나? 다 먹는데, 그렇게까지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거든. 그래서 일어나더니만 ‘가겠습니다. 왜, 주님이 가라 합니다. 여기 앉아 있지 말라 합니다. 가라 합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조금 있으니 가다 또 와. ‘와 옵니까?’ ‘주님이 다시 가라고 해서 옵니다.’ 그래서 내가 야단을 쳤어요. 그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걸린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는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라.
원효로 원성교회
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718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간 박윤선은 그해 4월 원효로 원성교회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개혁신학원’이라는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부의 학생들은 박윤선을 따라 그 곳으로 이동했다, 반면 고려신학교는 1957년 4월 학기를 시작했으나 박윤선 없는 신학교는 주인 없는 집처럼 쓸쓸했다.
원효로 원성교회
글_ 이상규 (전 고신대학교 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1950년대 후반기 고신교회가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교회당 쟁탈을 둘러 싼 의견 대립과 법정 소송문제였다.
고신 총로회가 조직된 후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기존 교회의 고신총회 가입을 둘러싼 대립은 재산건 문제를 야기하였고, 이는 교회당 쟁탈을 위한 법적 소송문제로 발전하였다.
이런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된 때는 1956년이었다. 고려신학교 설립 10주년을 기념하여 1956년 9월 20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개최된 제6회 총회 벽두에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목사는 교단 탈퇴를 선언했다. 고신10주년이라는 축제의 자리가 비통한 충격의 현장이 되었다.
설왕설래 논란이 있었으나 목사의 소속은 노회이므로 총회에서의 탈퇴운운은 잘못임을 깨닫고 박윤선 교장은, “목사는 노회에 소속한바 총회에서 탈퇴 발언함은 잘못인 줄 알고 이를 취소한다.”고 하여 탈퇴선언은 일단락되었으나 그가 고신 철수까지 생각했던 4가지 문제는, 예배당 쟁탈 문제, 교회질서에 대한 문제, 기독교보에 대한 문제, 그리고 신학교에 대한 재정문제였다.
그가 가장 중시했던 문제는 교회당 쟁탈 문제였다. 박윤선은 교회당 쟁탈이나 이를 위한 법정소송 문제는 비성경적인 처사로 보았다.
그런데 당시 교단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한상동 목사마저도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자 박윤선은 고신 탈퇴까지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윤선의 문제 제기로 교회당 쟁탈과 소송문제는 현안으로 제기되었고, 그 첫 반응은 경기노회 총대들의 집단 최장이었다.
이때 경기노회 중심인물은 이학인, 전칠훙 목사였다. 이때 총회는 “경기노회원 전원이 회기 중 무성의하게 돌아간 일에 대하여 회장이 서면으로 책망하도록 가결”했지만, 결국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 채 경기노회는 행정보류를 선언했고(1957) 결국 경기노회의 다수 인사들은 고신에서 탈퇴하는 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고신 총회는 총회의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박윤선 교장은 1957년 2월경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온 힘을 다해 봉사했던 고려신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비장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주석집필에 전념한다는 이유였지만 교회당 쟁탈과 소송문제에 대한 총회의 미지근한 태도에 저항한 것이다.
이 무렵 박윤선이 쓴 글이 ‘우리의 갈길’과 ‘나의 걸어가는 길’인데, 이 글을 보면 교회당 쟁탈이나 소송은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신덕(信德)을 잃는 일이며, 고린도전서 6장 1-7을 어긴 일인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제부터 신덕으로 일관하여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 주장은 진리문제 이외엔 덕을 손상치 않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많이 양보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실상 회개운동자들이 취할 노선입니다.
남들과 싸우며 소송하면서 어떻게 남들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까?…예배당 건물을 파수하기 위해서 신덕에서 손해를 당하고 있습니다.…혹설(或說)에 예배당 건물 때문에 소송에 가담하는 것이 교리에 위반된 사항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단정을 내리지는 않습니다.…예배당 건물 안내어 주겠다고 소송까지 가담하면 신덕을 잃으며 성경말씀 고전 6:1-7을 어긴 것이라고 불초는 생각합니다.
고신 총회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으나 위의 글은 박윤선의 분명한 입장이었다. 그가 고려신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한 이면에는 소송건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 외에 다른 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고신 교회 지도자들과의 불편한 인간관계였다.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간 박윤선은 그해 4월 원효로 원성교회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개혁신학원’이라는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부의 학생들은 박윤선을 따라 그 곳으로 이동했다, 반면 고려신학교는 1957년 4월 학기를 시작했으나 박윤선 없는 신학교는 주인 없는 집처럼 쓸쓸했다.
조직신학을 교수하던 이상근 교수도 곧 박윤선을 따라 서울로 갔고, 5월에는 한부선 선교사마저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세 교수가 없는 고려신학교는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사회는 다시 박윤선을 모셔오기 위해 그의 송사불가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고려신학교 이사회는 1957년 9월 13일 교수회와 합동으로 “교회 쟁탈전과 소송은 하지 않기로 하는 교육이념으로 교육한다.”는 결의서를 제시하였고, 고려신학교 대표 한상동 목사와 개혁신학원 대표 박윤선 목사는 양교 합동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협상은 일단락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개혁신학원의 고려신학교와의 합동이란 명분으로 이상근 교수와 함께 다시 고려신학교로 복귀한 것이다. 그 때가 1957년 9월 말, 고신을 떠난 지 9개월만이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당 쟁탈을 둘러 싼 법정 소송건에 대한 고려신학교의 입장을 표명한 공식 문서는 아래의 ‘결의서’라고 할 수 있다. ‘결의서’(1957. 9)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결의서
우리 고려신학교 당국은 ‘파수군’ 제 65호에 박윤선 목사가 발표한 ‘교회소송문제 재검토에 대한 대답’이라는 글에서 말한 대로 현하 “한국교계의 여러 교파에서 우리 믿는 형제끼리 예배당 쟁찰전을 위하여 혈투전의 추태를 연발할 뿐 아니라 세상법정에서 소송하는 불상사들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 일대 유감스러운 일이므로 차제 우리 신학교는 이것을 불가히 여겨서 이런 쟁탈전과 소송은 하지 않기로 하는 교육이념을 세우고 해 이념 하에서 우리 노선 교회의 교역자들을 육성하여 한국교계에 솔선수범해야 하겠다는 그 견해에 찬동하여 자(玆)에 차(此)를 결의 서명함.
고려신학교 이사회 교수회 일동
고려신학교 이사: 박윤선 한상동 이인재 윤봉기 황철도 손명복 박상순 최일영 최준호 전성도 고려신학교 교수 겸 강사: 박손혁 김진홍 안용준 이상근 하도례 오종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