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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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교회

개척정보(1980년 기준)
설립 1964. 자립 1976. 개척자 신숙자
비고 거창 신천교회

용산교회가 고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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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 가북면에 위치한 용산교회(담임목사 정영화)가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다. 설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난 8월 26일 모 교회를 찾은 출신교역자 일동은 모 교회 성도들과 함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정영화 목사의 인도로 시작된 이날 예배는 정철호 장로(용산교회)의 기도와 전영욱 목사(서현교회)의 설교, 정찬수 목사(거창교회)의 축도로 은혜가운데 드려졌다. 2부 순서에서는 전영한 목사(함양중앙교회)의 사회로 최창규 목사(위천교회)의 축사와 전정식 장로(용산교회)의 교회약사 보고가 있었고, 교회를 위해 수고한 분들에게 간단한 선물증정이 있었다. 이후 예배에 참석한 용산교회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간단한 기념품과 떡을 선물로 나누어 주고, 가까운 계곡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용산교회는 1953년 설립된 이래 지난 60년간 지역사회를 섬기며 목사 13명과 장로 7명을 비롯해 수많은 일꾼들을 배출했다. 교인 수 60여 명 정도의 작은 시골교회임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작은 능력’(계 3:8)으로 나름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온 것이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던 것처럼 ‘작은 능력’으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해온 이 작은 시골교회도 칭찬해 주시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용산교회는 언제 어떻게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렀을까?


거창지방에 최초로 복음을 전해준 이는 미북장로회선교부의 스미드(1874-1932) 선교사이다. 그는 1902년에 내한해 북장로회선교부 부산지부에 소속돼 있으면서 7년간 거창지역을 순회전도 했다. 그가 거창지역에 세운 교회는 모두 8개인데 고제면 개명리 교회(1904)는 이 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그는 1912년 평양선교부로 전임해 숭실대학에서 강의했다. 이후 귀국해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1932년 7월 6일 델레위어주 웰밍턴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용산리가 위치한 가조, 가북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가 스미드가 설립한 가조교회(1906)이다. 용산교회는 스미드 선교사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가조교회 교인들의 전도로 가북에 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당시 거창지역의 순회목사였던 이자익 목사가 1932년에 가북면 우혜리에 가북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자익 목사는 본래 충남 금산교회의 마부였던 자로서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금산교회의 초대 장로가 됐다. 그리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고 금산교회의 2대 목사가 됐다. 그는 장로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던 매우 존경받는 목사였다.


이자익 목사가 호주장로회선교부 거창지부의 요청으로 1926년 거창지역의 순회목사로 부임해 1938년 거창을 떠날 때까지 자그마치 12년을 거창지역 교회를 돌아보았다. 그 시기에 이자익 목사가 가북교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용산교회는 가북교회의 용산기도소에서 출발했으니 이 마부출신의 목사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용산리에 최초로 교인이 생겨난 것은 1938년경이다. 이때 처음 믿은 신자들은 신만조, 이인수, 조외순, 노구장의 처 모씨, 이씨 등 5명이다. 이들은 모두 여인들이다. 이들은 일제말의 혹독한 식민통치 아래서 남편들의 지지도 없이 10리길을 걸어서 가북교회로 출석했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온몸으로 맞섰다. 급기야 이인수와 신만조 씨는 신사참배 거부로 거창경찰서에 감금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


해방을 맞이한 후, 여인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대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들 용산리 교인들은 1949년에 용산리 기도소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새벽기도와 수요예배를 드리면서 주일만 가북교회로 출석했다. 그런데 이즈음 한국 장로교회는 교단분열의 암흑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가조와 가북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52년 4월 경남(법통)노회가 제37회 총회로부터 거부되고 그해 9월 11일 경남(법통)노회는 총회로부터 독립된 총노회를 조직 했다. 경남, 특별히 거창지역은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의 영향으로 모든 교회들이 경남(법통)노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조교회 시무하던 정모 전도사의 선동으로 가조교회와 가북교회가 총회측으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법통노회를 지지하던 교인들은 교회에서 내몰리게 됐다. 이렇게 가조교회에서 나온 교인들이 장기리 신천마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가북교회에서 나온 교인들은 용산기도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때 이 소식을 보고받은 거창교회 남영환 목사(당시 거창성경학원 교장, 주남선 목사의 후임)는 거창성경학원에 재학 중이던 배영오 전도사를 가조, 가북 지역에 파송했다. 가조, 가북 교회로부터 축출된 성도들을 모으고, 가조, 가북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 총회측으로 뺏긴 손해를 만회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렇게 파송된 배영오 전도사는 장기리의 교인들과 함께 신천교회를 설립했고, 용산리 기도소에 모인 교인들과 함께 1953년 5월 3일 용산교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후에 신천교회는 교세가 약해 용산교회에 통합되게 됐다.


이렇게 지역의 장자교회인 가조교회로부터 내몰리고, 모교회인 가북교회로부터 거부된 용산교회였지만 출옥성도들이 부르짖었던 그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용산교회는 주남선 목사의 영향으로 설립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용산교회는 미북장로회선교부의 스미드 선교사와, 마부 출신의 이자익 목사,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 등의 영향으로 설립된 교회다. 하나님께서 용산교회를 사랑하셔서 이와 같이 훌륭한 사역자들의 섬김을 통해서 교회를 설립하게 하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이다. 용산교회는 이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또 오늘날 도시교회는 농촌교회에 빚을 지고 있다. 하나님은 용산교회 초기의 그 여인들 속에 있었던 불굴의 신앙을 그 후손들을 통해 이어지게 해 주셔서 오늘날 대도시에 있는 건강한 고신교회들을 이루게 해 주셨다.


현재 창원 반송제일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이인덕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거창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이인수의 손자다. 또 부산 한울교회에서 시무하는 제인출 목사와 창원 가음정교회에서 시무하는 제인호 목사 형제는 역시 신사참배 거부로 거창경찰서에 감금됐던 신만조의 손자들이다.


이와 같이 현재 도시교회를 이루는 대다수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농촌교회 출신들이고,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교회는 그들의 요람인 농촌교회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용산교회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자녀들은 장성해 도시로 떠나가고, 교회에는 남아있는 젊은 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용산교회는 현재 상황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꾸준히 사역하고 있다. 재가복지노인센터를 교회 내에 설치해서 지역의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또 도시의 개척교회와 해외 선교를 지원하는 것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는 제2의 부흥을 꿈꾸며 예배당 건축을 준비 중에 있다. 용산교회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로 용산교회 출신 목회자와 장로는 다음과 같다. △전영한 목사(함양중앙교회) △전영욱 목사(서현교회) △전영천 목사(부산나눔의교회) △이인덕 목사(반송제일교회) △김영인 목사(복있는교회) △제인출 목사(한울교회) △정원석 목사(바르셀로나 한서교회) △이환득 목사(한가족교회) △제인호 목사(가음정교회) △정섭호 목사(연일샘교회) △정원길 목사(평택일심교회) △이병근 전도사 은퇴(반송제일교회) △정철호 장로(용산교회) △전정식 장로(용산교회) △제상세 장로 △김천수 장로(진주중부교회) △문정심 장로(아름다운교회) △김석호 장로(거창교회) △문정택 장로(세움교회)



■ 정원길 목사 / 평택일심교회


출처 : 고신뉴스 KNC(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92

서기 2024.08.16 16:50  
정원길 진학일 이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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