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창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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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창교회

이름: 김철수 목사님

면담: 2011.10.28.

주소: 창원시 의창구 북면


-1941년생





■ 목회 출발


▷1971년 청량리교회

이미 학생 때부터 모든 집회나 교회 활동에 정신 없이 달려 왔고 백 목사님이나 공회 목회자들에게 앞으로 목회 나갈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던 청년으로 고향에 있던 중, 1971년 말에 청량리 신용인 조사님이 간 때문에 입원하여 청량리교회의 설교만 맡도록 부탁을 받아 두 달 정도 있었으나 설교만 맡았고 그 외 교회 일에는 일체 무관.


▷ 1972년 묘도교회

(부임 배경)

통합 교단에 속한 애양원이 개척하고 지원하는 신풍 성암교회가 시골 교회라도 규모나 경제가 든든했고 여수의 인근 도서 교회들을 지원해 오던 차, 성암교회 담임 오동원 목사님이 백 목사님 교훈에 붙들리고 주변 여수 시내에는 순복음교회 출신 박은석 목사님이 공회 교훈을 사모하여 여수 시내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개척하고 공회 교훈을 주변에 전파하려고 애를 쓰던 중. 성암교회가 묘도교회를 지원해 왔으므로 묘도교회의 상황을 오 목사님이 잘 알았고 묘도교회가 방치 된 정도여서 공회 목회자라도 보내게 되면 환영할 것 같고 공회 소속 가능성을 두고 오동원 박은석 두 목회자가 노력. 오동원 목사님은 처음 길만 텄고 박은석 목사님은 꾸준히 여러 면에서 현장을 지원. 박은석 목사님은 밀양 얼음골 백도광 장로님의 목장에서도 몇 달 정도 일을 본 적이 있던 상태.

(부임)

1972년 3월 초에 묘도 부임. 당시 묘도교회는 통합측 교회로. 작은 섬이어서 모든 것이 열악했고 중고교 진학 못하던 청년들이 많았고 믿는 사람도 없고 섬 전체가 어려워 교회 운영이 곤란. 목회자들이 기피하여 1 - 2 년씩 강단이 비기도 하고 와 봐야 얼마 있지 못하던 곳.

묘도에 들어 가던 날 하루 배가 2 회 오가는데 통합측의 순천 노회에서 소개해서 보낸 신학교를 막 마친 한 분이 오전 배로 묘도에 부임했는데 손에 라디오 하나를 들고 왔었는데 묘도 형편을 보고 돌아 갈 상황인데 김 조사님은 그 다음 배를 타고 가족 없이 김 조사님 혼자 이불 하나에 냄비 하나 들고 묘도 도착. 가족들은 한 달이나 뒤에 이사. 함께 갔던 오동원 박은석 목사님들이 그 분에게 묘도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고 왔다가 모두 그냥 가고 교인들 상처만 많았다, 괜히 후회하지 말고 그냥 육지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꼭 여기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김철수 조사님을 성산교회로 보내겠다고 하자 그 분이 내키지 않던 차에 바로 돌아 감. 성산교회라는 이름을 그 때 처음 들었고 그 교회 이름 때문에 그 후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얼마나 약한 교회일까 하고 마음 속에 그 교회를 기억한 적이 있었음. 신발은 모두 먹티 고무신에 연보는 동전. 섬이고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은 술 먹고 노름하고 게으르고 여자들은 모두 바다에 고막과 굴 캐러 다니는 분위기.

부임하던 날 성암교회 담임인 오동원 목사님이 한 달 생활비라 하면서 7천 원을 가져 오셨는데 도움은 받지 않고 해 보겠다고 거절. 주고 거절하기를 반복하다가 오동원 목사님이 한 달만 받으면 그 뒤에는 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1 회 받음. 당시 보통 교역자 생활비가 4 - 5천 원 정도로 기억. 묘도 간 다음 달 첫 아이 명신 출생.

(교회 부흥)

묘도교회 교인들은 목회자가 장기간 없고 와도 잠깐 있다 가는 정도에 주변 잘 아는 목사님들의 소개로 가게 되니까 모두 반김. 당시는 여천 공단에 호남정유(칼텍스)만 있었고 남해화학과 같은 회사조차 전혀 없는 초기. 바닷가에서 고막 바지락을 캐도 가난. 사람들은 좋아도 가난하고 미신이 많아서 전도는 어려움.

가난해서 중고등학교 진학생이 몇 없었고 대부분은 집에서 일이나 하는데 17 - 20세 분포가 많았고, 이 학생들을 전도하려고 섬에 있던 분교인 초등학교를 빌려 밤으로 야간학교를 시작했고 교사로는 묘도 초등학교 교사 1 명과 섬에 초소에 파견 나온 경찰 2 명과 함께 야학을 시작. 당시 나라에서 재건학교를 권장하던 시기. 모두들 많이 했다가 실패도 많이 하였고 앞에도 하다 실패. 그래서 담당자들이 들으면 ‘재건학교구나!라고 함. 교과서는 교육청에서 지원해 주었는데 가니까 ‘재건학교요!’ 이렇게 흔하게 알던 시기. 조사님은 고교 시절 배운 태권도로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다른 선생님들은 학과목을 가르쳤는데 학생수가 6 - 70여 명에 많을 때는 80여 명에 이름. 학생들이 진학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고교 과정을 배웠기 때문에 나이는 십대 후반에서 20세도 출석하는 정도여서 건장한 청년들인데 전원이 다 교회를 출석하게 되고 야학 때문에 학생들의 평소 자세도 변화가 생겨 섬 전체의 평판과 교회 영향력이 확고하게 됨. 집에서 부모 말을 듣지 않거나 심지어 대드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교회로 연락이 오고 조사님이 나서면 통제가 되는 형편. 나중에는 부모들이 ‘전도사님에게 일러 준다.’ 하면 통할 정도. 장년반도 부흥이 되어 20 - 30여 명이 되자 주일 오전 예배에 100여 명이 출석하게 됨. 경제는 어려워도 보람 있고 희망 찬 나날이며 섬 사람 전체의 호응 속에 교회가 굳건해 짐. 안 믿는 분들이 예배당 땔감을 준비해 주고 천정 작업도 지원해 준 정도. 그 중에서 김상곤 김정식 청년은 은혜와 충성이 뚜렷.

(교회 소속 문제)

원래 올 때부터 교회는 통합 교단. 그 동안 버려 둔 정도. 단 시간에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니까 통합 원래 교단의 순천 노회에서 대표들이 주일 오후마다 방문하여 교회의 소속 문제를 제기. 나는 공회 목회자로 갔기 때문에 통합노회나 지방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묘도 교인들을 데리고 공회 집회만 자꾸 가니까, 통합교단의 조직상 그들에게 당회장이 있어 나를 노회에 참석하도록 설득, 당회장 목사님 중에서 우리와 잘 지내 보자, 분립을 해 봐야 재미 없다, 자기도 젊을 때 그렇게 해 본 경험이 있다며 권유했으나 내가 단호히 거절, 그래서 그들이 당회장을 자꾸 바꾸면서 권면했는데, 그 분들은 주일 오후에 예배가 없으니까 주일 오후에 자주 와서 권면했고, 어떤 때는 순천의 인휴 선교사를 포함해서 한 번은 8 - 9 명이나 와서 권면한 적도 있고, 이순배 목사님이 당회장이던 시절에 나중에 안 되겠다고 목회자를 교체하겠다는 말까지 나옴. 당시 내가 가장 존경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에게 내가 3월 부산 총공회에 가서 지도를 받겠다 사임하든 어떻게 하든 결정을 내겠다 하고 상호간 싸움을 격하게 하지 않음.

(교회 인계)

부산에 가서 목사님께 교회의 상황을 말씀 드리니까 ‘그 사람들 말이 맞다. 그들 교회다. 달리 욕심 낼 것 없다.’ 하시고 종결 지움. 박은석 목사님은 우리 공회의 교회들을 넓힌다고 교회 확장에 관심이 많았고 목사님께 현장 이야기가 100% 전달 되지 않아서 생긴 일. 그리고 한 두 달 뒤에 교회를 통합측에 넘겨 주고 대구 덕수교회로 부임한 것은 1973년 9월 14일.

(묘창교회 개척)

김철수 조사님이 나온 뒤 묘도교회는 통합측 목회자를 새로 맞지만 이제는 공회 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해 본 은혜 경험 때문에 예전처럼 그대로 있을 수가 없게 되고 그 중에서 큰 은혜를 받아 완전히 공회 교인이 된 김상곤 김정식 등 청년들이 공회 교회를 추진했고 자신은 이를 공회로 출발하게 연락 지도. 1973년 그 해 가을에 묘도교회에서 찬송가 궤도 걸이 등 몇 가지만 받아 나와서 가정 집에서 공회 소속 묘창교회 출발.


▷ 1973년 대구 덕수교회

송종섭 목사님이 대구 간호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군인 신분에 개척한 곳이 덕수교회. 송 목사님이 반 년 정도 군사 교육 과정 때문에 서울로 가게 되어 임시 목회로 부임. 일반적으로 장기 군 교육을 받게 되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는데 만일 다른 곳으로 발령 나면 덕수교회에 계속 목회하고 대구로 다시 발령이 나면 송 목사님의 빈 자리를 임시 맡기로 했는데 반 년 교육 후 특이하게 원대 복귀. 덕수교회 시절 전임 묘도교회 교인들의 묘창교회 개척을 지도.


▷ 1974년 울산 남산교회

(개척)

송종섭 목사님의 덕수교회 복귀가 결정 되자 다음 목회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백 목사님께 개척을 하겠다고 건의. 지역은 울산으로 신청. 목사님께서 울산은 어려운 곳이라 하며 허락을 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보라고 몇 차례 보류하며 남해를 권했고 꼭 가 보겠다고 말씀 드리니까 미리 한 번 가서 살펴 보라 하심. 몇 번을 방문하고도 뜻을 말씀 드리니까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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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議錄

1973.12.4 敎役者會

1. 猫島敎會에 對하여

(一)猫島敎會 禮拜堂 買入에 對하여 10萬원을 補助하되 長生谷 祈禱원 捐補에서

支援키로 하고,

(二)同敎會 長年禮拜說敎는 김상곤 執事로 擔當케 하고

(三)主日學校는 金正植氏로 引導케 하고,

(四)禮拜堂 垈地는 愼道範 牧師 名義로 移轉登記하기로 各, 決意하다.

以上 任命받은 두 사람을 爲하여 白永僖 牧師가 祈禱하다


1974年 1月 9日

猫島 敎會 강사 洪淳哲 牧師로


1974年 3月 5日

(1)묘창 교회 禮拜堂 場所를 適當한 곳으로 옮겨 짓도록 決定하다.




- 1973년 대구 덕수교회

송종섭 목사님이 대구 간호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군인 신분에 개척한 덕수교회. 송 목사님이 반 년 정도 군사 교육 과정 때문에 서울로 가게 되어 임시 목회로 부임. 일반적으로 장기 군 교육을 받게 되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는데 만일 다른 곳으로 발령 나면 덕수교회에 계속 목회하고 대구로 다시 발령이 나면 송 목사님의 빈 자리를 임시 맡기로 했는데 반 년 교육 후 특이하게 원대 복귀. 덕수교회 시절 전임 묘도교회 교인들의 묘창교회 개척을 지도.


- 1974년 울산 남산교회

대구 덕수교회를 떠나 울산 남산교회를 개척. 1974년 2월 24일에 부임하여 사택에서 예배 드리고 ‘교동교회’로 시작했다가 74년 8월에 학성동의 2층 전세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 현재 남산교회 터를 구입하고 32평 건물을 짓고 76년 1월에 ‘남산교회’로 개명하고 2월의 출석이 장년 43 명과 유년 110 명. 76년 7월에 서울로 이동


- 1976년 서울 상남교회


- 1980년 2월, 부산 교학실


- 1980년 11월, 마산 산창교회 부임


- 1988년 총공회 탈퇴


- 2010년 70세 은퇴

이름 설립 자립 개척 추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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