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교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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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교회-3

비고 변종희의 증언 2. - 신비주의의 성격 / 변판원 순교사



(*증언을 해 주신 변종희집사님은 현재 합동교파에 소속된 교인이며 봉산교회 초기 교인이었습니다. 1994.10.19. 10:00-12:00 면담으로 정리된 내용이며 동석했던 다른 면담내용이 일부 추가되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김옥출 집사


6.25가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김옥출 집사가 난산이 되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급보가 되어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밤새 철야를 하며 찬송하고 기도를 하는데 김옥출 집사가 “나는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옷을 입혀 달라고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였다. 아이들은 운명 직전에 옆에 있던 이진철집사 집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김 집사는 둘러서 예배드리는 백계순집사님 부부, 그 시모 노집사님, 이 집사 부부, 둔터 강집사님 등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를 일일이 했다. 그 인사 가운데 백계순의 시모 노집사님이 “김집사 잘 다녀와!” 잘 다녀 오라는 말이 툭 틔어 나왔다. 모두 의아스러운 말이었으나 노인의 잘못 나온 인사로나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숨이 완전히 넘어 갔다. 물론 교회장례로 치르기 때문에 온 교인이 모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리가 죽은 김집사의 시가 “변”씨 마을이었기 때문에 50여호 되는 온 마을이 전부 집안이었다. 안 믿는 집안에서도 문상은 다 왔다. 교인들은 천국간 기쁨으로 동네 집안에서는 죽은 슬픔에 이틀이 지나갔다. 교인 남편중에 목수를 하는 이홍길이 있었다. 못사는 사람은 관이 없던 시절인데 교인집에 목수 남편이 있어 큰 통나무를 잘라다 놓고 톱으로 켜서 관을 만드는 중이다. 내일 출상을 위해서 모두들 분주했다. 그런데 이틀만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김옥출집사 장례로 교회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불신자들은 귀신에 홀렸는지 소름이 옴싹하는 기분으로 온 동네는 일시 술렁거렸다. 다시 살아난 김 집사가 입을 열었다. 숨이 끊어지는 찰나에 천사들이 와서 자기를 양쪽에서 붙들었다. (확인?) 그 다음 그네 타고 밀려 나가듯이 확 밀려 나갔다. 첫번에 가는데 흑암에 구렁이가 꽉 올라 왔다. 사탄아 왜 네가 나서느냐? 구렁이가 큰 입을 벌렸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천국 가는데 물러 가라고 고함을 지르니까 물러 가고 그 다음 보니 예수님이 통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띄고 머리를 길게 늘렸다. 지금은 영화나 보고 알지 당시는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던 때이고 이스라엘 풍습을 모를 때였다. 나중에 성경을 보고 그 모습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음성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말씀이 솜사탕 녹는 것 보다 더 달콤하고 수정같은 유리바다와 같았다. 아이가 사산되어 산모까지 죽게 되었던 일이었는데 네가 이 아이 때문에 염려 하느냐 금대야에 아이를 담아서 하나님께 바친다면서 김 올라 가듯이 올라가는 광경을 보여 주셨다. 또 면류관을 보여 주시는데 이 면류관은 이진철씨 집에 있던 수동댁이 있었는데 수동댁 면류관이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어보자 말씀하시기를 "수동댁은 시계도 없이 예배당 종을 치는데 그 시간이 틀림도 없고 그 정성이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면류관이 수동댁 면류관이라고 했다. 그 기간 중에 말씀을 여러가지로 보여 준 것을 그 아들에게 지금껏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 네가 갈 시간이 되어서 가야 한다면서 너는 다니면서 전하고 앞으로 6.25사변 일어날 것을 전할 터이니까 가서 전하라고 전쟁을 예고 해 주셨다. 그리고 남편은 욥의 신앙처럼 믿고 나가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니까 지금은 없이 살아도 나중에 창대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김집사는 안 가겠다고 어린양을 부렸다. 그러자 네가 이왕 왔으니 14만 4천의 수를 보라면서 믿고 온 사람들, 순교해서 온 사람들이 있다면서 보이는데 흰 옷 입은 수많은 무리가 눈앞에 확 닥치는데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도록 부신 장면이었다. 다 봤다고 하자 가라 해서 눈을 뜨니까 전부 옆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곧 6.25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 말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환란에 준비가 되었지만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불안스러운 일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자기들이 직접 보았고 거기에다 살아나와서 하는 말이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것이었으니. . . 당시가 공비들 때문에 나라가 소란스럽고 좌익들이 전쟁을 준비하여 온 전국을 어지럽게 할 때였기 때문에 이 발언은 곧 “좌익”측의 사회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공작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말은 경찰 사찰계에서 내사를 하게 되었고 좌익 프락치로 몰려서 경찰서에 잡혀갔다. 근 3일간을 취조를 받았다. 결국 동네와 교회에서 믿는 사람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신비적 신앙체험에서 된 일이라는 것이 판명이 되어 풀려 나왔다.


현집사, 훗날 한국의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잘못 나간 불


김옥출의 예언대로 6.25사변은 일어났고 전쟁 직후 53년도에 충청도 논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논산에 있는 4촌이 전시에 경찰서장으로 제직하다가 12식구가 인민군들에게 생매장을 당했다. 구덩이 안에서 딸, 사위 부부는 젖먹이를 사이에 놓고 둘이 어깨로 위를 막아 보았으나 흙더미에 생매장되는 데에는 살아날 일이 아니었다. 강경상고 다니는 아들 하나만 친구 집에 갔다가 화를 면하고 봉산교회 5촌 당숙 집에 와 있었다가 전후에 150마지기나 되는 논을 관리할 집안이 없어서 김옥출부부가 그리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논산 옆에 강경에서 현집사가 피난을 와 있었는데 현집사와 강경 제일 교회를 다니면서 그가 비단 장사를 했기 때문에 한 교회 교인으로서 피난 온 이야기, 믿음 이야기 하다가 김집사가 6.25사변 보낸 일, 죽었다가 살았다는 등 그런 일을 간증을 하니까, 현 집사는 나도 이렇게 믿음 없이 살아서는 안되겠다면서 용문산 나운몽장로가 집회를 계속하는 곳에 가서 있다가 한달 있다가 왔는데 은혜를 받아서 광채나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은혜 받고 오는 날 김집사 막내 영순이가 잘 놀다가 그만 넘어져 죽었는데 김집사는 이것이 기도의 은사를 받은 현집사 능력을 나타내라고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깨닫고 자기 아이 죽은 데에도 놀람도 초조도 없었다. 오히려 당신이 은혜받은 것을 첫 능력 행하게 하시라고 이 일이 있게 된 것이니까 얼른 기도하자고 현집사에게 부탁을 했다.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에 오히려 현집사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김집사는 이미 많은 체험을 했기 때문에 담대히 말하고 결국 현 집사가 기도를 시작하는데 기도에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시간이나 기도를 하고 났을까, 죽은 지 10분도 안되서 빳빳하게 되어 숨이 완전히 끊어졌던 아이였는데 그만 살아나 버렸다. 다시 김집사는 우리 바로 부흥 집회를 합시다 해서 바로 교회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중풍병자는 걸어라 하면서 궁둥이를 때리면 벌떡 걸어 버리는 등 많은 병자가 낫는 신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 때 교회 목사님이 오성진으로서 월남한 분이었다. 이것이 현집사의 신유 시작이 되어졌다. 그는 그 이후에도 철원으로 무대를 옮긴 다음 불이 꺼져 어려움을 겪을 때 또 김옥출 부부를 청해서 도움을 받는 등 김집사 신앙의 불이 이어져 하나의 대 신유 집단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김옥출 집사는 그 아들을 결혼시켜 놓고 논산의 논 150마지기에서 손을 떼고 철원으로 가서 현집사를 돕다가 현집사가 타처에 개척을 나가고 헤어졌다. 김집사 부부는 거기서 있다가 봉산 교회 이진철집사가 거창읍에 내려와서 거창교회를 다니다가 1959년 부산 서부교회 백목사님 제명건에 반대하여 거창교회에서 중앙교회로 개척한 개척교회로 다시 합류하여 원래의 신앙으로 돌아왔다.


변판원의 순교


교회의 신앙형편


교회 내에서 신앙의 불은 6.25 이전에 벌써 순교에 노래를 부를 때였고, 주일학생들까지도 예수 믿고 죽겠다고 전부 각오를 할 때였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준비를 했고 예수 부인해 봐야 둘째 죽음에서 목배임을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됨을 잘 배워 알던 차에, 6.25 환란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환란을 마지막 환란으로 늘 준비하던 것과 같았다.


끊어진 다리


순교 당하기 전 봉산삼거리에 있던 다리가 끊어졌었다. 그 나무다리는 X자로 밑에 받쳐 놓고 그 위를 사람과 소구루마도 건너 갈 수 있도록 나무로 걸쳐 놓았던 다리였다. 그런데 이 다리를 유엔군들 진격로를 차단한다며 인민군들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서 다리를 끊었다. 그러나 차량이나 소구루마 같은 장비만 건너지 못하도록 한 정도였다. 다리 밑 교각은 그대로 두고 윗부분만 양쪽으로 일부 끊어놓은 정도였다. 사람들은 뛰어 넘을 수가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재미삼아 건너뛰기를 하고 여학생들은 개울 아랫길로 돌아 지나다니는 형편이었다.


고제지서의 복구지시


눈이 내려 온 산동네를 온통 하얗게 뒤덮어 놓은 1950년 12월 20일 고제지서에서 지서장, 순경들이 면직원들과 함께 올라왔다. 유엔군 통과를 위하여 다리 복구 작업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침 동네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집집마다 소리쳐 봐도 인기척이 없었다. 겨울 나무를 하러 갔던지 어디 모여 길쌈을 하던지 일일이 찾을 수 없겠다 싶었는지 교회로 종을 치러 들어왔다. 예배 볼 때만 치는 종을 치니까 김종삼 아버지 김구야집사가 나왔다. “종을 왜 칩니까”“다리를 놓으려는데 사람들이 안보여서 부역 나오라고 종을 친 것이요”그러자 김집사님이 당돌하게 말했다. “교회 종을 쳐서 부르면 우리는 부역 못 나갑니다. 그냥 불러 나오라면 나가겠지만 성스러운 교회 종을 어떻게 부역하는 세상 일에 쓴답니까?”“뭐야, 너 뭐라고 말했어!! 너 뺄갱이 새끼 아냐!”“우리는 인민군들 점령 때도 예배보고 인민군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늘 죽인다는 숙청감들이었소”“이게 어디라고 달라들어!”옆에 있던 경찰들이 순간 손과 발이 올라갔다. 그래도 잘못했다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분이 얼마나 났던지 둘이서 김집사를 땅바닥에 엎어놓고 허리뼈 위에 목나무를 걸친 다음 양쪽에 두 경찰이 올라타고 짓눌려 버렸다. 죽지는 않지만 평생 허리병신을 만드는 경찰의 익숙한 고문 방법이었다.


사람이 없어 그날 할 일을 못하게 된 경찰은 할 수 없이 다음날 다리 부역에 나올 사람을 전달 해 놓고 그냥 내려갔다. 젊은 사람들은 대개 다 숨어 버렸고 일할 만한 사람이 제대로 없는 차에 23살 된 변판원도 부역에 이름이 통고가 되어졌다.


변판원은 이제 결혼한 지 겨우 1년 정도되었다. 가난한 집에서 뼈빠지게 일하다가 자기 살림을 따로 하기 위해서 한참 준비중이었다. 60리 되는 읍내 장에 갈 때마다 살림을 마련키 위해 솥단지 등을 한가지씩 사다 놓는 중이었다. 부지런한 변선생은 집에 일 다해 주고도 틈나는 대로 자기 살림 나갈 집을 짓기 위해 나무도 거의 준비가 되어졌다. 육적으로는 늦 결혼에 신혼 1년, 한참 좋을 대로 좋은 때였다. 신앙도 맞았고 성격도 더 없이 서로 좋았다. 이 순간 “순교”에 혹 장애가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이제 정이 깊어지는 새색씨였다.


12월 22일 동지 팥죽을 끓이는 날이었다. 아직도 밤에는 인민군 천하, 낮에는 아군의 순찰이 교차가 되는 중에 인민군에 반동으로 지목이 되거나 아군에게 빨치산 내통자가 되면 죽어야 되는 때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동짓날 팥죽은 집집마다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집에 일 좀 봐 놓고 변선생은 내일 읍에 장날 소구루마를 준비해야 하는데 바퀴에 손을 볼 일이 있었다. 그래서 삼거리 나가는 편에 소달구지까지 손을 보고 온다며 다리 보수 부역 겸해서 나서면서 작은 손 도끼와 옆집 이홍길 목수 집에서 빌린 큰 통나무 켜는 톱을 빌려 나갔다. 여느날 처럼 찬송을 불러가며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삼거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개울을 하나 건너 서낭당을 막 지나가고 있는데 10살 된 주일학생이자 집안 동생 되는 종희가 작은 키에 딸랑 딸랑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형님 어디 갑니까?”어, 여기 다리도 놓고 또 소구루마 손도 좀 보고 그랄라고 나간다” 바쁘게 나가고 있었다. 변선생님 가는 곳마다 주일학생들은 그냥 줄줄 따라 다녔다. 너무 너무 좋아서 얼굴만 봐도 좋았고 아이들을 귀하게 취급 않던 시절에 그렇게 열성있게 가르치며 그렇게 잘 해주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멀리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곤 했던 평소처럼 가는 형님 뒷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저쪽 산 쪽에 갑자기 인민군들이 눈 쌓인 흰 산위로 노랗게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저기 가는 형님 어짜꼬! 하는 순간 부를 수도 없이 벌써 한참 저쪽으로 갔다.


그날 인민군은 다른 때와 달리 너무 많았다. 점령 당시와 퇴각 당시만 해도 많은 인민군들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이 반격에 나서 주력부대들이 퇴각한 뒤에는 인민군들은 주로 낮을 피하여 밤으로 다녔고 낮에는 혹 몇 명이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날의 인민군은 보기 힘든 많은 숫자였다. 70여명이나 되었다. 북상 쪽에서 산을 타고 봉산, 웅양을 넘어 적하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인민군들이었다. 30여명은 산에서 내려오다가 용추마을에 들어가서 사람을 하나 붙들고 나오고 있었고 엄호하는 40여명은 산비탈 쪽에서 삼거리를 향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와룡에서 나오는 길과 용추에서 나오는 길이 학교 앞에서 만나게 되고 학교에서 100m만 내려오면 봉산 큰 길 3거리가 된다.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인민군들과도 만날 수 있는 위치였다. 소리치면 들을 수 있는 위치, 그러나 아직도 거리가 한참 멀리 있는데 산비탈 쪽에서 내려오는 인민군들이 손짓을 하며 고함을 질러 변선생을 불렀다. 개울이 하나 있고 거리도 아직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함을 질러 오라는 인민군들을 향해서 변선생은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점령시에는 내적으로 숙청 명단을 주시만 하던 인민군들이 퇴각시에는 조금이라도 수상쩍다 하면 마구 죽여버리던 때이다. 변선생은 세상 일반 조건으로는 공산주의에서 제일 좋아할 신분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일로는 숙청의 대상이었다. 일반 교회들과는 달리 계명, 봉산 교회들은 그 열심이나 순교를 준비하는 극렬 반동으로 이미 숙청대상에 올라 있던 차에 지방 조직을 통하여 교회에서 “공산정권은 짐승 정권이므로 협조 말 것과 생명바쳐 신앙을 지킬 것”을 증거하는 교회인 줄 잘 알고 있던 터이다.


다리를 보수하러 먼저 나왔던 사람들이 달려오는 변판원을 보았다. 또 산비탈에서 삼거리로 내려오던 인민군들, 또 용추마을에서도 내려오는 인민군들을 보았다. 사람들 마음에는 흰눈에 노랗게 산에서 내려오는 인민군들을 저 바보같은 게 아군으로 보고 저렇게 반갑게 달려가는가? 지난번에도 예수믿는다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놓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걸리는 데로 잡아가서 죽이는 때이라 모두들 마음이 두근거렸다. 오늘 다리 부역은 유엔군 진격을 위한 복구공사가 아닌가? “당신들 여기 뭐하고 있는거요?”“예, 전쟁에 다리가 끊어져서 고치는 중입니다.”한편 변판원을 불러 세운 인민군들은 “뭐하러 가는거야”“예, 인민군들이 끊어놓은 다리 고치러 갑니다.”“뭐, 우리가 끊어 놓은 다리를 복구하러 간다?”“예, 어제 지서에서 고쳐 놓으라 해서 나가는 길이오”“이 새끼, 뭐 이런 새끼가 있어, 이거 순 반동 이구만?” 사람을 붙들면 무조건 손, 어깨, 등을 살피면서 농태군인지 지주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인민군 습관이다. 손은 더덕같이 엉망이었다. 어깨, 등 할 것 없이 봐도 이렇게 고생하고 몸이 험하고 못 박힌 사람은 처음이라 할만큼 머슴 중에도 상머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 시키니까 했구만”하는데“어, 여기 책이 하나 있는데요” 몸을 살핀 다음 옷을 뒤지다가 조끼 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니는 성경이 있는 것을 찾았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도 잠깐 쉬면 성경을 꺼내들고 읽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손 때 묻은 성경이었다.“예수쟁이구만, 그래서 미군놈들 앞잡이 노릇하는 것 아냐? 야, 너 예수 진짜 믿는 거야?”“예,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안 믿는다면 살려 줄 테니까 앞으로는 믿지마!!”“나는 죽어도 예수는 안 믿을 수 없습니다.”“뭐라케, 이 새끼 안되겠구만 야 그거 끌고가”손에 쥐고 있던 큰 톱은 집어 던져 버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도끼는 뺐들어 쥐고 개울 건너 송지마을로 갔다. 이제 둘을 붙든 것이다. 송지마을에서도 19살 된 이임백이라는 사람을 숨어있던 방에서 붙들어 냈다.


용추에서 사촌 결혼식 때문에 옷을 잘입고 있던 사람이 그 마을에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다가 경찰이나 되는 사람이 숨어있다 싶어서 하나 붙들어 나왔고, 이제 삼거리 다리 고치러 나오는 사람 하나를 붙들고, 그 다음 내를 건너 송지마을에서 19살 되는 청년 하나를 붙들었다. 막내라고 곱게 길렀다가 반동의 새끼일 것이라고 또 붙들었던 것이다. 패전에 퇴각에 악이 바친 인민군들이 마을에서 한 둘씩은 본보기로 붙들어다가 죽이고 퇴각하는 중이었다. 변선생은 얼굴로 보나, 키로 보나 마을에 내놓고는 어디 하나라도 내놓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 안에서만 없어서 안 될 사람일 뿐 이었다.


두덤재 막 너머 예수 믿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 소원대로 풀어준다고 피나오는 구멍 구멍에다 성경을 뜯어다가 줘 막아 놓았다. 그 현장에서 이 일을 보고 살아나온 임백이는 살려 준다고 해도 오금이 움추려 다리가 안떨어져서 움직여 지지도 않도록 잔인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인민군 둘이서 하나는 목 있는 데 걸터앉고 하나는 다리에 걸터앉아 놓고 뒤로 눕혀 놓고 찔러 대다가 마지막은 목을 찔러 숨통을 끊어 놓았다. 살아온 사람 집에서 연락이 와서 교인들이 달려갔다. 가니까 성경이 온데 흩어져 있고 찔러 놓고 그 구멍마다 성경으로 쑤셔 넣고 그렇게 마지막에 끝을 내 버렸다. 변선생 집에서는 죽었다는 연락을 받아도 그 형제간도 아무도 안 갈려고 해서 변을문 부부, 강집사, 등 여러 교인들이 시체를 찾으러 갔다.


변선생 집에서는 객사한 사람이라고 시체를 집에 못들여 놓는다고 해서 교인들이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서 장사를 치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교회에다 눕혀 놓았는데 집에서 동네 위신도 있고 해서 가져가 집에 들여 놓겠다고 해서 교회 바로 앞 두 번째에 있던 자기들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방에는 들여 놓지 않고 헛간에다 갔다 놓았다. 온 교인들이 그 시신을 깨끗이 닦았다. 온 몸에 찔린 상처밖에 없었다. 피는 죽은 곳에서 완전히 다 빠져 버렸다.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옷을 입히느라고 몸을 만져 보는 사람마다 모두들 감탄을 했다. 이렇게 온 몸이 어린아이의 몸같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겠는가? 마지막 죽는 잔악한 죽음에서도 그 몸이 사망의 고통을 이겨 평안함을 가졌기 때문에 그 시신에 발악의 흔적이 없었다.


생전의 신앙


그때 그 마지막 모습도 그렇고 원래 그 변판원은 항상 웃는 사람이라. 예수 처음 믿을 때 그 엄마가 가난하고 남편이 일찍 죽어 겨우 바느질로 연명을 하는 정도였다. 바느질하고 옷 다리고 하는데 15살 먹는 아이로서 교회를 막 다니던 변판원은 어머니 윤디질 하는데 옷 잡아 주면서도 연신 찬송이 입에서 흘러나오다 좋아서 어깨가 으쓱거리다가 눈을 내리 감고 그만 은혜의 상념에 빠져 버리곤 했다. 원래 그 어머니 성격이 표독스러웠다.


시끄럽다고 해도 또 잘 잡고 있으라고 해도 찬송에 미쳐 제 정신이 아니라 그만 윤디로 앞에 앉아 있는 아들을 찔렀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돌렸다. 귀 바로 위 머리에 윤디 끝이 지져 들고 있었다. 그래도 마찬 가지였다. 또 한번을 그랬다. 양쪽 귀 위가 파이도록 윤디에 지져 졌지만 이것이 오히려 늘 기쁨이었다. 나는 인민군들에게 총을 맞아도 안 죽을 걸요? 양쪽에 구멍이 뚫였으니까요! 그 얼굴에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집안


끝까지 박해하다가 죽은 시신도 거부하다가 죽은 뒤에도 예수 믿어서 우리 아들 죽었다고 그 어머니는 교인들을 늘 구박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서 그 어머니는 장님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까지 아들을 통해 예수 믿는 구원의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주었으나 보지 못한 죄 값이 임한 것이다. 10여년 이상을 장님으로 살다가 결국 눈을 뜨지 못하고 죽었다. 또 형제, 집안이 완전히 망해 버리고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 일찍 죽고 어머니 성격 때문에 집 분위기는 늘 편치를 못했다. 그 큰 형도 항상 우울한 편이었고 또 말주변은 좋아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형들 밑에 엄한 엄마 밑에 변판원선생의 성장은 늘 우울하였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는 완전히 바뀌었다. 늘 기쁨으로 살았다. 마지막 그 모습도 기뻐 찬송하던 그 빛나는 얼굴이었고 그는 잠자리 외에는 찬송을 늘 부르는 사람이다. 휘바람도 불고 남들이 보면 예수에 미쳐 실성한 사람이었다. 칼을 맞으면서도 전도를 했다니까. 나를 죽이면 살인이 되는데 당신들도 예수 믿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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