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정봉조 - 백목사님 초등학교 한 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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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1 00:00
정봉조목사님은 백목사님과 웅양초등학교 한 반에서 공부했던 친구
당시 잘 믿던 정봉조를 보며 믿지 않던 백영희의 관찰이 특별했던 관계
평생 초등학교 5학년 때 한반에 있으며 이겨보지 못했던 것과 그 신앙 연구를 언급
백목사님 전기 작업에 필요한 부분이 많아 자녀되는 분의 협조로 관련 자료 확인 중
앞으로 몇 가지 자료들이 추가 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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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봉조목사님
방문: 2004.9.9. 정훈택목사님 연구실, 총신대 신약과 교수
1.가족사항
①출생
▪주소: 경북 김천군 과곡면(현. 구성면) 하강동 851번지
▪연대: 1912.12.15.(*1913.1.21.) 외동아들로 출생
▪원적: 경북 성주
②가족
▪부모: 정덕화 이분이 - 자녀: 1녀 정봉순(1905), 2남 정봉조(1912)
▪부부: 정봉조 이성례
▪자녀: 9남 2녀, 자녀 중 9번째가 정훈택목사님(총신 신약학과)으로 대화와 자료 주 제공
③본인
▪온유와 겸손, 연구와 근면한 학자 체질의 인품
▪모나지 않는 처신과 무욕의 행정처리로 국내 최대교단 총무 10년 연임 후 은퇴로 사임
신학교 일을 오래 간여해도 외부 활동을 해야 하는 총장보다는 내부 업무에 주력하는
총무직 성격.
▪목회 일선에서 많은 지역의 많은 교회를 많은 어려움 속에서 직접 겪은 현장감으로
합동측의 일만교회 운동을 주창하여 현재까지 합동측의 30여년 지속되는 향방 설정
▪심방 권면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도하는 대신 스스로 바로 믿고 가는 생활을 통해
복음이 저절로 전해지는 신앙과 인품과 목회형이었기 때문에 일선목회자로서 성과는
미약. 사택 식구가 많으나 고난을 일상사로 받는 신앙이어서 목회 기간 내내 온 가족의
고생이 지극. 남이든 자녀까지도 책망하는 성격이 되지 못하고 혼자 갈 길을 가는 형
▪가정에서도 큰 범위를 정해놓고 나머지는 자녀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지도형
11명 자녀가 교회나 부모의 지원 없이 자기들 손으로 전부 대학까지 나오고 성공한 경우
목회를 위해 고난당한 종의 가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역사에 감사하는 가족 분위기
▪원래 한글에 조예가 깊어, 일본 때 독학한 정도로 해방 후 한글학회 최현배의 동참 권유
사모님이 적극 반대하여 신학을 하고 목회길을 향하게 함. 고려신학교 시절 박윤선목사님
주석 출간 초기 공관복음 내용을 철자 감수기록
④이동
▪1908년, 부친 정덕화. 고향인 김천에서 김천 초대교회 중 하나인 하강교회 개척하고 장로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하여 가산을 착실하게 모았으며 신앙출발하면서 족보를 소각
딸과 아들을 데리고 부부 둘이 신앙생활하며 오붓하게 살았던 행복한 시절
▪1920년경, 딸 정봉순 김천 황금동교회를 조금 다니다가, 경남 거창군 웅양면
웅양교회 설립자인 안덕보영수집 큰 아들 두업(1904)에게 시집
▪1922년, 3.25. 정봉조 가정이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1852번지로 이주.
양가가 다 같이 독실한 초대교회 신앙가정이었기 때문에 신앙집안끼리 결혼하기
위해 연결된 경우이며 서로 좋고 화목하여 양가가 웅양에서 함께 모여 살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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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교회는 1908년 개척되었다가 1925년까지 경북노회에 교회 이름이 나타나지만 1928년부터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26-1927년 사이 교회의 활동 중단으로 사료. 이는 정덕화 가정이 하강교회 개척의 첫 이름에 올려지고 교회의 구심으로 있었다가 1922년 거창웅양교회로 이주하게 된 것이 주 원인으로 사료됨. 하강교회는 1928년부터 노회에서 이름이 사라졌지만 1950년 6.25 수복 이후 옛 하강교회를 다니던 안권찰님 등이 7-8km 떨어진 1시간 도보거리의 김천 황금동교회(1905년 ? 설립)로 매주일 다시 출석하기 시작하고 주변 마을에서 10여명이 그 뒤를 따라 5년간 신앙생활을 지속. 장기간 거침없이 황금동교회까지 출석하는 옛 하강교인들의 예배당 마련을 지원하려고 황금동교회가 전적 지원하게 되고 하강에서 출석하던 교인들은 이전 예배당이 있던 윗마을에서 현 교인들의 주력이 아랫마을이므로 예배당 자리를 옮겨 하강 아랫마을에 하강교회가 다시 예배를 재개. 1954년.
현. 황금동교회와 하강교회는 통합측 소속이며 하강교회의 역사를 1954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전 하강교회는 1908-1926(7)년 경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설명. 옛 교회에 대한 기록은 현 하강교회 교인들이 마을 옛 노인들에게 들어서 최근 알게 된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처음 있었던 하강교회가 그 주력 교인들의 이주로 활동이 위축되고 노회에 교회로 유지될 최소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되자 노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노회 소속 교회들의 인식에서 사라졌을 뿐이고, 실제로는 첫 하강교회에서 전도받고 믿은 이들이 계속 그 마을에서 예배당을 유지하지는 못했으나 하강교회가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신앙의 생명은 몇몇 분들로 인하여 유지하고 있었으며 결국 6.25라는 특별한 환란이 외부에서 급격하게 가하지게 되자 일상생활 속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던 신앙의 생명력이 급작스럽게 다시 움이 돋아 하강교회 재활에 나서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일 것. 주변 10여명과 함께 그런 원거리를 열심히 다녔던 것은 그동안 하강교회의 신앙이 위축이 되었을 뿐이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고, 그 주변 10여명 교인들의 원거리 예배 출석에 제일 앞서 나선 이가 이전 하강교회 교인이며, 5년이라는 장기간 세월을 원거리로 다니며 고생한 것은 마을 안에 있었던 하강교회를 쉽게 생각하여 잠자게 했던 것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징계라고 볼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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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집안전체와 거창의 관계 - 정봉조목사님의 부친 정덕화 3형제 별로 정리한다면
▪정덕화 형님집
아들 정인대가 목수. 학교나 예배당 등을 건축하던 차 거창군 위천면의 교회 예배당
건축을 맡았다가 그대로 위천교회에서 영수로 있었고 후에는 북상면 북상교회 조사 시무
백목사님과 거창지방에서 같은 시절 목회
▪정덕화 본가족
딸과 아들만 있었고, 딸이 거창군 웅양면으로 시집을 갔고, 이후 온 가족이 웅양 이주
딸은 웅양교회 설립자 안덕보 큰 아들 안두업과 결혼. 아들이 한 사람이며 현재 황금동
교회 출석
아들은 웅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외지 공부 후 다시 거창시찰회지역 으로 회귀
거창 함양 등지에서 근무. 후일 거창지방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진주와 인근 지방 활동
*정덕화 동생집
제일 큰 집 아들 정인대조사님이 거창 위천교회를 거쳐 북상교회에 조사님으로 있으면서
막내 작은집 사촌 정만조를 위천교회 출신 신부에게 결혼을 성사. 늘 위천교회 중심으로
거창 지방 신앙의 소식과 기억이 가정에 유지
믿는 사람이 극히 적었던 초기 시절임을 생각하면 정봉조목사님 집안은 큰집과 작은집
사촌들까지 신앙으로 늘 연결되었다는 점은 부러워할 가족의 신앙사일 것.
2.목회와 교계 활동
①거창시절
▪1922년, 3.25. 거창군 웅양면으로 이주하여 웅양교회 소속
▪1922년, 4.21. 웅양공립보통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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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조 백영희 안소업
명치42년
명치43년
대정1년 10월 5일 1912년생
대정 9년 1920년
대정10년 1921년
대정11년 4월 1일 1922년 1학년 입학
대정12년 3월25일 1923년 1학년 수료
대정13년 3월19일 1924년 2학년 수료
대정14년 3월18일 1925년 3학년 수료
대정15년 3월15일 1926년 4학년 수료
소화 2년 3월19일 1927년 5학년 수료
소화 3년 3월20일 1928년 6학년 졸업
(1928.5.1.-1929.3.20. 고등소학과정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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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 - 교회를 다니는 학생으로서는 자형 안두업의 동생이었던 안소업과 정봉조가
유일. 이 두 사람과 백영희는 함께 공부. 그의 눈에 믿는 사람 2명이 항상 눈에
띄었고 그중에서도 정봉조의 뛰어남은 그가 믿는 신앙에서 나온 것인지를 항상
생각하며 지켜보게 됨. 훗날 백목사님 평생에 신앙출발 동기를 언급할 때마다
정봉조 이름의 예화 소개. 정봉조는 반에서 늘 우등
▪학습교인: 1928.4.11. 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자익목사님 주관으로 학습을 받게 됨
②숭실중학교
▪아들이 하나뿐이어서 불편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으므로, 중학교로 진학
▪1929.4.6. 마산 호신 중학교 입학
▪1930.5.8. 마산문창교회 이수현목사님에게 세례
▪1931.4.1. 평양숭실학교 3학년으로 전학
▪1932.5. 웅양교회로 회귀
▪1934.3.21.숭실학교 졸업
한글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 숭실학교에서 소설가 황순원과 훗날 국회의장이 되는
황성수 등과 친밀하게 지내며, 전도 강연 등 활발하게 신앙생활
③결혼과 목회 출발
▪1934.12.6. 진주교회(구. 봉래교회)에서 윤인구목사님 주례로 이성례(이봉은 하은혜 부부
의 女와 약혼은 12.6.)와 결혼
▪1935.1.6.-1936.3.18. 진주경남성경학원입학 및 1년 수료
▪1935.6.19.-1936.1.22. 낙동강 유역사방공사 거창사무국 가조구 시무(경리 및 회계)
▪1936.4.14. 진주 봉래동205번지 거주
▪1936.8.24. 진주교회로이명
▪1936.11.21. 함양군 서상면 대남교회 칠행정교회 상남교회, 운곡교회 4개처 조사님
▪1937.5.17.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1763번지
▪1937.9.8. 경남노회 전도사고시 합격
④일제말기 환란기
▪1938.3.31. 평양신학교 입학했으나, 1학기가 끝난 8.20.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1938.4.23. 서상구역 전도사 시무 사면
▪1938.5.2. 웅양교회로이명
▪1938.5.30. 포교계 관복개재
▪1940.6.18. 합천군 야로구역(구정, 구원, 매화, 가천) 전도사
▪1941.2.4. 하동군 북천구역(북천, 황천, 왕세) 전도사
▪1941.5.14. 하동군 북천면 옥천교회로 이명
▪1942.2.10. 전도사 사면, 삼천포읍 선구리 141로이상. 교회도 이명, 식료품상 경영
▪1944.5.16.-46.3.11. 조선무진주식회사 사원으로 진주지점 삼천포 출장소 근무
(국민은행의 전신, 현 상호신용금고법에 의한 금융업무 성격)
⑤고신측 목회시절
▪1946.8.16. 삼천포중학교 및 삼천포여자중학교 교사 (현. 중고교과정 통합)
▪1946.9.1. 삼천포여자중학교 교감
▪1949.12.24.-1950.7.29. 삼천포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6.25전쟁으로 학교생활중단
▪1951.5.9. 부산고려신학교 입학, 삼천포교회 전도사 시무하며 부산까지 배를 타고 통학
▪1954.6.17. 고려신학교 8회졸업 (백영희목사님과 동일)
▪1954.7.1. 부산신일교회(서대신제일교회 - 신평로교회로 계속) 전도사
▪1954.9.16. 경남노회 강도사인허
▪1955.10.25.하동군 진교교회
▪1955.11.2. 경남노회 목사안수
▪1958.10.9. 진주역전교회(현. 합동측 칠암교회) 목사
▪1960.7.14. 동 교회 위임식
*1960.12.13. 고신측과 합동측의 교단 통합
⑥합동측 신학과 교단의 일선업무
▪1961.3.25. 대전노회로 이명 충남 논산제일교회
목회지로서는 마지막이며 이후 교단과 신학관련 업무로 여생 계속
▪1961.9. 총신대 감사
▪1962.1.-1968. 논산성경학교 교장
▪1963.3.12. 충남노회 부회장
▪1963.3.20. 논산읍화지동 32번지로 전적
*1963.9. 합동측과 고신측의 재분열
분열할 이유 없는 분열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적극적으로 분열 반대
▪1963.9.23. 총신대 이사
▪1963.9.-1967 대전성서전문학교교장
▪1964.3.10. 충남노회장
▪1964.3.30. 대전지구 교역자회 회장
▪1968.3.12.-4.21. 대구주암산에서 40일 금식기도
▪1968.6.25. 대전신학교 교무처장 및 전임교수로 변증학 등을 주로 강의
대전 부사동 243번지로 이사
▪1970.5.8. 대전 선화동 339-123으로 이사
▪1971.12.8. -1981.10.1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측) 총무로 은퇴 때까지 10년 연임
총회 역사 최장 기록 (선출기준으로는 1971.9-1981.8.)
한번 맡은 자리에서는 한눈을 팔거나 다른 마음을 먹지 않기 때문에 국내
최대 분열과 정
▪1972.1.17. 서울 마포구 아현동 628-7로 이사
▪1972.7.28. 서울 성동구 행당동 305-1로 이사
▪1977.10.20. 자연보호협의회 중앙위원회 이사
▪1979.6.26. 서울 성동구 행당동 305-1로 전적
⑦은퇴 후 강해서 출간
▪1982.9.20. 은퇴 후, 계시록 강해설교 간행
▪1982.11.15.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간행
▪1982.11.25.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간행
▪1982.12.15. 아가서 간행
*1990년대 ‘생명의 말씀사’에서 정봉조목사님 강해설교집 10여권 출간
*총회 총무로 재직하던 10년간 ‘총회공과’ 집필
3.가족 이야기
①자녀들의 고난과 오늘
▪배고프던 시절의 사택
9남 2녀 11명의 자녀를 가진 목회자 가정이 교세가 극히 미약했던 한국교회 초기 고난사에서 갖는 고통은 오늘 기독교 전성기에서 목회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전설이 될 정도. 경제가 어려워도 어려운 경제를 보충하기 위해 곁길을 가지 않고 목회자로서 자기 갈 길만 충실했기 때문에 자녀들의 어려움은 가중. 하나님 은혜로 스스로 공부를 포기한 1명 외에는 전부 대학공부까지를 마쳤다는 것도 1950-1970년대 기준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불가할 일.
정봉조 자신이 독자였기 때문에 평양까지 숭실학교를 유학하고 해방후 교장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대로 있었으면 남부럽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고 또 초기 자녀들은 그런 좋은 시절을 기억하지만 1950년 이후 사모님의 강력한 권고로 목회를 나선 다음부터 전 가족이 모든 종류의 고생. 보리밥도 먹지 못하면 밀, 그것도 없으면 고구마나 호박죽을 계속해서 먹게 되는데 그때 입에 익었던 단 맛이 지금까지 막내 자녀들에게까지 남아 있어 오늘까지 간식조차도 단 것은 본능적으로 입에 전혀 넣지를 못하고 있는 정도
그렇게 먹지 못하고 자랐지만 입원한 사람 하나 없이 전부 튼튼하고 자생력을 가지고 생활하게 된 것은 전적 목회자의 고난을 보시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 가정 자녀들을 돌보심이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양육 된 경우라고 기억
▪목회 관련 4자녀
4남, 목회자 부부(부인이 목회자)
5녀, 부부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으며
9남, 총신대학원 신학교수 정훈택
11번째 막내도 목회자로서 전주에서 봉사기관 목회
어느 자녀든지 목회를 지원하게 되면 다른 모든 형제들이 과거 기억 때문에 장탄식으로 크게 근심하며 반대하지만, 고난을 겪어본 자녀들의 목회지원은 일반 목회지원자와는 근본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 역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
▪다른 자녀들의 경우
1남: 1934년생, 고신대학원 공부 도중 6.25로 중단, 그후 미국 LA에서 사업
2남: 1935년생, 서울대 의대를 나와 도미 유학 및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
3남: 부산대학교, 사업가
4남: 동국대학교, 목회자 부부
5녀: 1945년생, 미국에서 간호사, 목회 부부
6남: 1946년생, 한양대, 한일합섬 마산 간부로 퇴직 후 개인 사업, 서울에서 안수집사
7녀: 1948년생, 국민대, 남편이 장로로 LA에서 사업
8남: 1950년생, 개인사업, 미술에 조예
9남: 1952년생, 총신대 신학과, 대학원, 198001989년 네델란드에서 박사학위 총신대교수
10남: 1954년생, 조경사업, 유일하게 대학공부를 스스로 회피
11남: 1958년생, 총신대 졸업 후, 전주에서 봉사기관 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