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찬송생활 - 두번째 글을 중심으로 (답변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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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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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2 00:00
(참고 자료 소개)
공회의 찬송에 대한 기본 인식을 살펴볼 기회를 가져 보셨으면 합니다.
84년 5월 집회의 5번째와 6번째 시간 설교 초반에 '찬송' '기도' '말씀'에 대한
요약 비교가 있었습니다. 이 노선의 근본 신앙방향에 대한 안내입니다.
답변자도 찬송에 대하여 외부 교계의 정상급 활동가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찬송에 대하여 이렇게 깊고 중요하게 대하는 경우는 볼 수 없었습니다.
찬송에 대한 부정이나 경시가 아니라 진정한 찬송을 안내하는 내용입니다.
말씀에 대한 일방적 편식이 아니라 말씀 중심 신앙의 치명적 단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에 대한 참 신앙적 접근을 한번 면밀하게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1.찬송 생활의 두 시각
지적하신 대로
현 교계의 일반 분위기를 기준으로 '찬송'을 설명해야 한다면
공회는 찬송이 없다 할 정도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설교는 '귀'와 '중'이며, 찬송은 '경'과 '천'이라 보심이 맞고
말씀은 대학수준이라면 찬송은 유치원 수준이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의 평생은 '신앙생활'로 요약되어야 하고
신앙생활은 '예배생활'로 요약이 되어야 하며
예배생활이란 '찬송 기도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중에 어느 하나가 소홀하게 되면
영양 불균형 아이처럼 신체 기형인처럼 되는 것은 필연이므로
지적하신 분처럼 찬송의 일반 모습에서 이 노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 보셨다면
윗글로 마땅히 지적하는 것이 사랑이요 믿는 사람의 바른 자세이기도 합니다.
다만
공회 신앙노선은
몰라서 못 고치거나 또 고쳐야 할 것을 힘이 없어 늦어진다면 몰라도
마음 먹으면 바로 고칠 수 있는 이런 찬송 불균형 문제를 두고 이렇게 방치할 리는 없으니
찬송에 대하여 질문자께서 깨닫는 바와 전혀 다른 고려가 있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질문자의 윗글 지적이 있었으므로
이 노선이 안내하는 찬송 생활의 기본 자세를 이 글에서 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의견을 주신다면
아마 윗글 적은 분이 새롭게 생각할 부분도 있을 것 같고
이 노선의 입장을 다시 들어봐도 역시 한번 더 지적할 부분이 있을 것 같으며
다시 지적을 하실 때는 이 노선의 핵심 약점이 잘 드러날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전개 방향은
공회 찬송 생활의 원칙과 기본 방향을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읽어보고 이해가 된다면 그 다음 순서로는 과연 공회가 그렇게 실제 걸어가느냐는 면을 두고 다시 지적을 해야 할 것 같고, 만일 공회의 찬송 노선에 약점이나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일단 그 면을 두고 다시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찬송이란 무엇인가?
곡에 따라 음을 맞추고
거기다가 가사까지 더하게 될 때
인간이 느끼는 노래의 세계는 특이하여 평생 그 속에서만 살아도 행복을 느낄 정도인데
만일 이런 노래라는 세계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담게 되면 '찬송'이 되고
찬송이란 예배의 세 가지 요소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니
신앙생활을 형성하는 3개의 기둥 중 하나라는 차원이 됩니다.
찬송을 하는 방법은 질문자 설명처럼
각자에게 주신 자기 형편 자기 현실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박수일 수도 있고 어깨 춤일 수도 있으며 대단한 예술성을 가진 경우도 있을 것이니
세상 음악은 예술성으로 그 수준의 높낮이를 헤아리게 비교하게 되나
우리는 그 어떤 모습 형식 방법이라 해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분량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지적하신 분이나 이 노선의 찬송관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말하면 공회나 일반 교회의 찬송관이 같습니다.
3.공회의 찬송모습이 일반교회와 나뉘는 분기점
'사랑'으로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셨다. - 이것은 공회와 일반 교회가 같습니다.
사랑하라 하셨기 때문에 나는 형제를 사랑했다. - 바로 여기가 갈래길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아원에 봉사하러 갔다. - 왼쪽 길이라고 하고 싶은 일반 노선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일학생 전도하러 갔다. - 오른쪽이라고 하고 싶은 이 노선입니다.
갈래길에서
왼편으로 가면 기독교 사회운동으로 결말 짓게 됩니다. 현 교계입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순수한 기독교 신앙운동이 됩니다. 이 노선입니다.
'찬송'으로 예를 들면
찬송은 신앙의 3대 요소 중 하나다. - 이것은 공회와 일반 교회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찬송은 존중되어야 한다. - 일반 노선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 - 이것이 이 노선입니다.
찬송이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가 이런 문제가 달라서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 찬송을 해야 찬송이며
어떤 식으로 찬송을 해야 찬송 생활이 점점 발전하는 것인가
어떤 면이 잘못되면 찬송이 찬송의 모양만 남고 찬송의 알맹이는 빠져버리는가
일반 교회와 이 노선의 차이는
찬송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런 근본 자세 본질에 대한 연구와 분석 문제로 비롯됩니다.
4.예를 들면
일반교회가 그렇게 은혜롭게 부르는 복음성가를 공회는 철저히 배척하는 이유는
찬송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외부 것을 체질적으로 기피해서가 아니라
현재 일반교회의 복음성가가 과연 찬송의 본질과 근본 방향을 생각할 때
좋은 찬송인가, 신앙에 유익을 주는 찬송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자. 많이 읽자, 지식이 힘이다.....' - 이것이 세상 지성인들의 외침입니다.
'책에도 유익한 책이 있고 해로운 책이 있다' - 이것이 이 노선입니다.
찬송은 중요하다. 교인들이 좋아하는 찬송은 얼마든지 불러야 한다. - 이것이 일반 노선입니다.
찬송은 중요하다. 어떤 찬송을 어떻게 부르면 손해가 될 수 있다. - 이것이 공회노선입니다.
북한동포가 굶는다. 인도적 차원에서 일단 도와야 한다. - 이런 사상이 있고
북한동포가 굶는다. 그러나 도와줄 실력과 방법과 결과를 따져야 한다. - 이런 사상도 있습니다.
일반교회는 찬송시간도 많고 찬송 모임도 활발하고 새로운 곡들도 계속 배우고
공회는 예배 때 1-2곡 정도이고 별도 찬송 모임이 없고 새곡은 거의 배우지 않습니다.
이런 면을 두고
만일 밥상에서 밥과 국과 반찬이 필요하다고 비유를 한다면 질문자 지적이 맞습니다.
만일 조기 요리에 조기와 양념과 양파라는 3가지 재료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양념은 그 반찬에 없어서 안 될 3대 요소이겠지만
그 분량까지 3분의 1이 된다면 심각한 불균형으로 그 반찬은 먹기 어려울 것입니다.
찬송가를 가지고 찬송을 부르든 여러 방법으로 찬송하든 찬송의 방법론은 다시 논하고
일단 찬송이라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 그 찬송이 예배 시간에 시간과 순서에서 얼마를 차지하면 좋겠는가? 일반교회로 말하면 3분의 1까지 가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이 노선의 경험으로는 그 찬송이 문제가 아니고 그 찬송의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라 말씀과 찬송의 시간이나 순서상 분량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5.이 노선의 찬송가에 대한 근본 시각이
이 노선이 찬송을 대할 때
곡에 음을 붙이는 것은 단순히 찬송의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찬송의 가사의 뜻이 찬송 안에 담긴 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사의 뜻을 새기도록 그 뜻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회개하고 찬양하는 것이 찬송의 내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회가 극히 기피하는 곡들은
그 찬송이 가사의 뜻은 얕아지고 그 곡의 예술성이나 그 곡의 대중성이나 그 곡의 감성적 호응도는 높아지는 경우, 아주 어린 신앙이 잠깐 거쳐 자라나갈 때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단히 염려스럽게 상대하게 됩니다. 찬송이란 설교와 달라서 그 은혜의 깊이는 뒷문제이고 일단 입에 얼른 익혀지고 반복되어지며 한번 좋아진 곡들은 마치 간식에 입맛을 버린 아이들이 하루 3끼 영양식단을 멀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찬송의 은혜 깊이 문제가 나오게 되면 더 복잡해집니다.
어느 찬송이 과연 얼마나 은혜 있느냐는 것을 객관적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 사람이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은혜의 기준인가?
그 찬송을 좋아하는 사람의 숫자를 가지고 은혜 있는 찬송을 분류할 수 있겠는가?
찬송을 부를 때 교인들의 집중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선배 목회자가 그렇다고 하는 찬송가가 은혜 있는 찬송가의 기준이겠는가?
어른들이 좋아하면 좋은 찬송이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면 좋지 않은 찬송인가?
공회교회들이 좋아하는 200곡은 좋은 찬송이고 나머지는 은혜가 없는 찬송인가?
공회 교회가 좋아하는 찬송이 더 은혜가 있다고 치고
그렇다면 그 외 찬송은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단백 소고기국만 먹고 보리밥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별미도 있지 않는가?
보리밥만 가지는 독특한 영양기능은 전혀 무시되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 차분하게 생각해 볼 소지가 있습니다.
맞다 해도 무조건 맞다 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많은 면으로 폭넓은 사고를 해봐야하고
틀렸다고 단정이 된다 해도, 단정하는 것은 좀 늦어도 상관없으나 섣불리 단정했다가 만일 잘못 판정하게 된 것이 후에 드러난다면 그 책임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깊이 생각하고 따져서 그 어떤 면으로도 훗날 예상을 하지 못해서 실수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질문자께서 걱정하시는 부분 중에
당대 훌륭했던 종이 그 후시대 이어지는 역사까지 열어놓은 분도 있고
당대 훌륭했던 종이 자기 이후 이어지는 역사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이 노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이 노선의 이어지는 훗날을 감당해야 하는데
오직 이미 받아가진 것에 만족하여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난쟁이가 될 것이니 지금도 대도시 시내에 보면 30층 60층으로 올라가는 빌딩 사이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2층짜리 작은 건물 하나를 지키는 왜소한 재산가들이 있는데 이들은 변화되는 사업 환경을 전혀 외면하고 오직 수십 년 전에 물려받는 그 부동산 그 모습만 그대로 지켜온 결과입니다. 팔아먹고 불효한 자식과 비교하면 훌륭하지만 부모가 피땀흘려 2층을 마련해 준 60년대 건물을 그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조금만 노력하고 눈을 떴다면 옆 건물소유주들처럼 엄청난 건축물로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이런 자녀들은 너무 무능하다고 판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자의 우려와 탄식은 바로 이런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세 이 탄식에 대하여서는 한 치의 오해나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 노선을 앞서 개척해 놓은 분의 평생에 뒤 따르는 후배들을 향한 절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좋은 노선과 귀한 교훈을 물려 받았다는 것은
가장 유리한 위치를 받았다는 것이지 그 자체로 앞날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데
장남들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받아놓고도 차남들에게 그 자리를 다 내어준 이유는
더 나은 것을 받아놓고 그곳에 안주한 방심과 교만이 원인이며 이 원인 때문에 그들이 무능하게 되었으니 비록 뒤에 출발해도 뒤떨어졌다는 위기감과 불리하다는 무의식이 모든 차이를 다 넘어서게 했습니다.
이 점에서도 질문자는 이 노선의 가장 큰 고민과 노력해야 할 바를 바로 이해하셨습니다. 배워서 알아도 귀한 것이고 만일 배우지 않고도 그렇게 깨달았다면 성령이 한 성령이므로 성령으로 바로 붙들려 증거한 것입니다.
다만
이미 받은 것은 전부가 변해야 하는가?
이미 받은 것 중에서 변해야 하는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별할 것은 없는가?
이것이 문제인데
적어도 이 홈 관련 공회는
적어도 이 노선에 핵심을 바로 잡은 사람은 그 소속에 상관없이
이런 면으로 노력하려는 노력은 필사적입니다.
다만 판단이 느려 늦어질 수는 있고 실수할까 하여 현재 고심 중일 수는 있으나
안주나 방심이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면이 있다면 이미 이 노선에서는 죽은 목숨입니다. 붙어 있으나 죽은 가지이므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 노선에서 분리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답변 진행 중입니다. 내용 중 정리 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 어쨌든 해보기는 해보았는가?
총공회 전체와 모든 교회들의 내부에서 질문자 지적과 같은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대구공회가 가장 대표적인 그런 입장이고 그분들은 원하는 대로 다 해보았고
부산공회2는 중도적 입장이며
부산공회1과 3은 과거 입장입니다.
각 공회별로 교회별로 조금씩 배경과 편차 등의 차이는 있지만
질문자 지적한 입장의 반영을 두고 지난 20년간 이 노선에서는 실험 실제가 있었고
현재 대구공회는 처참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 주장의 배경과 동기는 좋아도 결과는 신앙의 황폐화를 가져온다 할 정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부공2는 양쪽 입장을 반반 섞은 편이고
현재 부공1과 3은 발전에 이르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손해는 없습니다.
- 찬송이 진정 찬송다운 찬송으로 진행되려면
- 일반적으로 말하면 앞에서 끄는 대로 따라오게 되는데
찬송에 대하여 어린 신앙들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면을 강조하며 이끌 것인가?
- 한번 입에 익으면 내가 찬송을 자유하는 것이 아니고 찬송이 나를 자유하니
은혜가 얕지만 어린 신앙들에게 크게 호응도 높은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경우
은혜가 깊지만 첫 신앙들에게 너무 심심하고 따분한 찬송을 익히게 되는 경우
- 개인적으로
현재 교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찬송위주의 교회들보다 20여 년 앞섰던 체험
오늘 교계의 교파별 교단별 교회별 전체 흐름의 결과적 증명
- 한국교회의 찬송 변천사와 신앙 변질사
초기 건전했고 사선을 통과한 신앙과 교회들의 찬송 생활의 공통점
후기 속화된 오늘의 신앙과 교회들의 찬송 생활의 공통점을 비교하면
찬송이라는 한 가지 사안으로 비교해도 마치 신앙 전반을 비교한 듯한 결과
- 이 노선의 차원 높은 찬송생활
백목사님의 찬송과 신앙시 그리고 찬송이나 반주에까지 탁월했던 세계
지금도 찬양대 찬송 한 곡에서 그 날 설교 전체 은혜를 담는 감동
천차만별의 개별 신앙들을 한 자리에서 함께 지도해야 할 때 교회의 방향과 결정
찬송은 기도와 설교와 함께 그 접근과 모양은 달라도 알고 보면 내용은 동일
겉보기는 발전 속도가 다른 것 같아도 하나가 앞서가고 하나가 뒤로 갈 수 없는 것
말씀은혜를 앞질러 가는 찬송의 기쁨과 기도의 효력이 있을 수 없고
찬송이 담은 찬양이 말씀을 담지 않고 실제 찬양이 될 수 없으니
무엇이 찬양이며 찬송인가? 소리인가, 내 주관의 감동인가
아니면 말씀에 붙들린 세계가 찬송과 기도로 나타나며 보완 지원 되는 것인가?
7. 색깔론
공회에서 들은 얘기로는 공회는 진리, 은혜, 말씀 중심이어서 그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좋은 제도와 신앙자세는 받아들여 수정을 할 수 있다고 말들 하십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저런 얘길 하다보면, ‘그건 백목사님 계실 때 안 그렇게했다’, ‘백목사님 이 이것 저것 다 시험하여 현재 제도가 확립됬으니 다른 거 다필요없다’ 식입니다.
바른 모습이면 받아들일수 있다는 노선의 기본 자세를 말씀하시면서도 그런 부분이 나오면
공회식이 아니다, 백목사님 목회식이 아니다 하여 색깔을 끼고 보십니다.
안에 계신 분들이야 당연히 그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더 필요성도 못 느끼지고 무슨 색깔론이냐 하시지만, 외부이동교인이나 외부에서보면 보이는 것들을 색깔론으로 보입니다.
8. 고기를 너무 잘 잡는 어부의 문제
우리 백목사님을 어부로 비유하면 천하에 제일 가는 말씀 어부이십니다.
워낙 고기를 잘 잡으셔서 그 방면에서 제일이지만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고작해서 그 동네 사람들이고 확대 되어봤자 고기잡는 사람들 속에서나 회자되는 얘기입니다. 여하튼 고기는 확실히 잘 잡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 자식들은 그분이 잡아 놓으신 고기만 잘 저장해 두었다가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부 자식들은 어촌에 살지만 고기 잡는 법은 잘 익히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고기 못잡는 어부자손들은 부친이 잡아 놓으신 고기만 먹고 삽니다. 고기를 말씀으로 보았을 때 공회측 교인의 약한 부분은 어느 고기가 좋은지 맛있는지는 알지만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백목사님 설교록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시야와 시각으로 보게만 됩니다. 우리에게는 다행이 성령이 계셔서 누구나 백목사님과 같은 좋은 훌륭한 어부가 될 수 있는데도 직접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잡아놓은 고기만 먹는 어부가 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 가 되돌아 봐야 할때입니다.
9, 더 많은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 지능이 부족하여 다 적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익이되고 또 생각이 나면 다시 더 올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다시 싶은 내용이 위에 것은 기존의 공회 교인들께선 전혀 필요성을 못 느끼실 수 도 있고, 당치 않는 소리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같은 이동교인의 입장에서는 참 고민입니다. 그리고 공회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공회에 대한 충언이라 생각 해 주십시오.
좋은쌀(말씀과 제도, 신앙의 순수성)을 두고 가자니 아쉽고, 목숨에 직결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먹고 싶은 외부과일과 야채도 있는데 어떻해야 할가요? 외부로 가서 쌀배달 시켜 먹을까요? 아님 남아서 계속 먹고싶은거 참고 있을까요?
그것들에 대한 해답이 필요한 시점의 공회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