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과 차선, 임시와 영구, 발전과 후퇴 - 신앙 비판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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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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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8 00:00
- 신앙 비판, 신앙 판단의 기본 원칙
하나님을 원형으로 삼고 비판하려면 사도 바울도 죄인의 괴수며 남을 비판하는 모든 이들은 꼭 같은 죄인이지 좀 나아 보이는 죄인은 없습니다. 바로 이 논리 때문에 죄인을 비판하지 말고 악인의 행동을 부추기자는 좌익 신앙이 오늘 교회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비판을 해서도 안 되며, 죄악을 그냥 둬서도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신앙의 '생명성', 신앙의 '자유성'
우리에게 주어 진 '생명'은 일반 동식물의 생명체와 달리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께 연결 되어 하나님 수족으로 영원히 살아 가야 할 특별한 생명입니다. 이런 유일한, 이런 특별한 생명을 가진 우리에게는 이 생명이 생명답게 되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쥐가 왼 쪽과 오른 쪽을 선택할 자유, 나무가 햇빛을 향해 자라 갈 자유, 불신자가 제 인생을 마음대로 살 자유는 우리가 말하는 '자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아 갈 선택에 대한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란 우리가 불완전자이니 '시행착오'를 근본으로 하고, 이 자유는 우리가 겨자씨처럼 작게 출발하여 자라 가는 성장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변형'과 '발전'을 근본으로 합니다. 바로 이런 면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요소들이며 이런 면이 없다면 우리를 가장하여 만든 인형이지 사람은 아닙니다.
정리한다면, 정상적인 교인은
- 발전이 있으니 현재와 비교하면 과거에 못 난 시절이 있어야 하고
- 불완전자니 앞으로도 언제든지 못 난 짓을 해 가면서 자라게 되고
- 하나님은 모든 교인을 각자 따로 인도하시니 어느 한 순간에 하나의 기준으로 비교하지 말고
각자를 어디에 쓰실지 또 지난 날과 오늘과 앞 날의 추세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과 대학 1학년과 대학 교수를 한 날 한 자리에서 같은 문제를 제출하고 그 점수에 의하여 평가를 한다면 그 점수 평가는 분명히 옳고 맞는 것이나 그 평가에는 대단히 중대한 실수나 헛점을 깔고 있습니다. 초교 1학년이 12년 뒤에 대학 1학년이 되었을 때 오늘의 이 시험을 쳤다면 어떻게 될지, 대학 교수가 과거 대학 1학년 시절에 이 시험을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식의 비교 평가는 없을 터인데 왜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비판과 평가가 흔한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타 교단들과 역사의 교회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의 단칼로 모든 것을 재단했으나, 공회 신앙은 바로 이런 면을 아주 익숙하고 철저하게 잘 이해하고 상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윗 글에서 오 간 내용들은 답변자로서 모두 다 이해하고, 대부분 내용에 대해 더욱 혹독하게 비판할 마음도 가지고 있으나 우리 모두는 한 개인들마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추세를 먼저 살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1. 최선인가 차선인가?
도둑과 강도와 살인범밖에 없는 교도소에서 책임자를 선정하려면 도둑이 나을 것입니다. 교도소 밖에 있는 착한 사람을 데리고 오면 우선 책임을 맡기는 것은 안심이 되나 몇 일 지나면 그 착한 사람이 도둑이나 강도나 살인범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교도소 감방 안에서 해결을 해야 하고, 그러니 살인자보다는 강도가 낫고 강도보다는 도둑이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여 반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교도소 감방의 반장을 두고 언론과 국회에서 그를 대통령 후보에 나선 사람만큼 뒷조사를 하고 비판을 한다면 그 반장의 과거 절도 혐의들이 드러 날 터인데 그 절도죄의 과거 때문에 그 반장이 반장 된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그 비판과 평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반장이 어느 곳에 반장인지를 잊고 있다고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총공회라는 울타리, 각 공회의 작은 울타리, 그 안에 개교회들의 면면을 살펴 봐야 할 시점입니다. 답변자 알기로 우리 모든 목회자는 부적격자들입니다. 누구보다도 공회의 목회자들을 아는 편입니다. 백태영 목사님이 제1번 부적격자입니다. 지금 임종을 앞 두고 계셔서 죄송하나 이 목사님은 적격자일까요? 그 휘하의 목회자들이 그 분의 부적격이 어느 정도인지 더 잘 알 것입니다. 답변자를 포함하여 그 어느 누구라도 청문회에 세워 두고 언론과 국회가 마음껏 뒷조사를 하듯 해 본다면 우리는 도둑이고 강도고 살인범들입니다. 이 글의 원래 질문과 이어 진 글에서 비판한 분들이 거론한 경우에 대해 답변자도 꼭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겁하며, 약삭 빠르며, 갈아 타는 재주에, 남은 것은 눈치뿐이고 잃은 것은 그 분들의 한창 때의 깨끗하고 충성스런 신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들이 그래도 답변자보다는 낫고, 그래도 그 분들이 우리 일반 공회 교인들보다는 낫다는, 바로 이 사실이 답변자를 슬프게 비통하게 처참하게 만듭니다. 답변자가 그 분들보다 조금 더 나았다면 도리깨로 실컷 두드려 놓았을 터인데 답변자보다는 조금 나으니 답변자로서는 입을 벌려 비판하기 망설여 집니다. 다른 분들이 답변자 대신에 욕을 한다면 그 마디마디 옳다며 찬성을 하는 동시에 답변자는 더 떨어야 합니다. 답변자에게 그런 비판이 온다면 더 큰 매로 올 터이니. 그리고 비판하는 분들 역시 답변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의 내심이 이렇다 해도 공회의 수준이 정상화 되고 발전이 되려면 비록 비판하는 분들이 답변자처럼 궁색하다 해도 호되게 비판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감춰 진 진실을 말해야 하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 질 것이고 우리의 자책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를 위해 뛰어 들었는가? 아닙니다.
정말 주를 위해 개척했는가? 그들의 훗날을 몇 년만 추적해 보면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정말 이 노선의 가치를 아는가?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밥그릇 때문에 모두 줄을 서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답변자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직장을 다니고 그 직장에서 단 물을 다 빨아 먹고 이제 남은 것을 가지고 목회를 나온 분들이 계신다면, 답변자의 경우는 그런 좋은 직장을 들어 갈 실력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답변자의 경력은 마치 그렇지 않은 듯하고 답변자의 실력도 그 분들도다 훨씬 나아 보이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그렇게 보이기는 하나 그 내막은 최근 답변자를 소송하신 분의 말씀처럼 또는 답변자를 자세히 아는 분들끼리는 상식이겠지만 답변자는 지금까지 걸어 온 걸음이 어느 날 출세하고 어느 날 뭐이나 있는 것처럼 보여 왔을 뿐이지 내막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일이 말하려면 이 자리가 비좁을 것이고 이런 현상들이 많아서 최근에 '남단에서'라는 곳에 살아 온 날의 실제 이야기를 다 적어 놓으려 했으나 시간이 없어 미루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이 글에서 비판을 받는 분들, 답변자는 그 분들과 비교할 때 신앙과 세상 이력과 실력이 훨씬 못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공회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수준이 이러하니, 평생 자기 직장에서 세상을 누리다가 세상 직장에서 더 이상 취할 것이 없게 되는 시점에 목회로 나온 분들을 향해 우리는 그들의 내막을 두고 비판을 해야 하는 동시에 그래도 그런 분들보다 나은 분들이 없고 우리는 그 분들보다 못하니 그 분들의 목회 출발을 지켜 봐야 하고 때로는 스카웃을 해야 하고 때로는 부럽다고 박수까지 쳐야 합니다.
1950년대에도 백 목사님은 이런 일을 많이 겪으며 어린 학생이면서 장래가 촉망 되던 서영호 목사님을 향해 목회자가 되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찌꺼러기들만 목사로 줄줄이 나오고 있으니 세상을 마음껏 가질 수 있는 네가 세상을 찌꺼러기로 삼고 발로 꽉 밟아 내버리고 주를 위해 걸레처럼 희생하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백 목사님이 세상에서 단물을 다 보고 쓴물도 겪어 본 이들을 줄줄이 목회로 끌어 온 것은 우리가 대화하는 이런 내용과 실상을 모르고 허상을 좇아 속아서 잘못 짚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공회 목회자는 최상급만 데려다 써야 합니다. 최상급이 없으면 비워 둘 것인가? 차선이라도 모셔야 합니다. 차선을 모실 때 우리가 최선인 줄 알면 속는 것이고 공회는 희망이 없게 됩니다. 최선을 알면서 최선이 없으니 차선을 모시고, 그 차선을 최선으로 길러 갈 소망을 가지며 한 편으로는 훗날에는 처음부터 최선을 주시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차선을 데려다 놓고 차선들이나 차차선들 때문에 공회가 어지러울수록 이 시대 우리를 지도할 최선을 우리 함께 소망하는 것입니다. 4백 년의 애굽생활이 깊어갈수록 출애굽의 소망이 더욱 간절해 지는 원리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이 좋고 세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 세상에 물이 들고 빠지고 즐기던 이들을 목회자로 모시는 상황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가차 없이 비판을 합시다. 다만 그 대상은 그들을 향해 하지 말고 우리를 향해 합시다. 그들보다 못한 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 끼 밥 먹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거치지 않고 일찍 목회자로 나온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 끼 밥을 확실히 챙겨 먹을 수 있도록 우리가 의사였거나 변호사였다면 우리가 목회를 나왔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 것을 버리고 목회로 출발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실패한 도둑들이요 그래도 세상을 즐기다가 나온 분들은 우리보다 낫고 성공한 절도들입니다.
2. 임시와 영구
생명체란 기계처럼 돌처럼 하나로 고정 되어 쇠락해 가는 일이 없습니다. 자라 감이 있고 배워 감이 있습니다. 실패한 도둑들인 우리보다 성공한 도둑들이 목회를 하면 좀 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도둑들이 오늘은 우리같은 도둑놈들이라 해도 그들은 이제 막 출발했으니 도둑이 회개하고 의인이 되어 목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한 도둑인 우리는 회개할 기회도 사실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도둑들은 언제든지 평생 세상에서 잘못 가졌던 것을 반납하면 그 동안 도둑질 한 것의 일부라도 의의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도둑인 우리는 내 놓을 것도 없으니 기회적인 면으로 봐도 그들만 못합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출발하는 도둑은 출발하는 시점에 지난 날을 돌아 보며 비록 늦었다 해도 진심으로 돌아 설 기회라도 잡을 수 있으나 오래 전에 목회를 출발한 우리는 이미 회개를 하려면 첫 순간이 좋은 기회인데 그 때를 잊어 버리고 습관적 반복적 무의미한 종교 직업인들이 되었으니 이런 부류들은 대개 회개할 기회도 사실 없습니다. 개전의 정이 없다고 표현을 합니다.
소위 임관 첫 순간에 돌격대에 앞 장을 선다면 그 것은 가능하나 중대장이 되고 연대장이 된 다음에 제일 앞에 서서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다는 것은 가망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늦게라도 출발선에 섰으니 이제 출발하는 분들께는 기대라도 해 봅니다. 정말 이 노선 위해 그들이 지난 날 세상에서 모았던 것 챙겼던 것을 다 바치고 새 출발의 자세로 오히려 묵은 우리를 이끌어 주도록.
임시가 있고 영구적인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떠하다 해도 내일은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영원 불변으로 고착 될 것이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며 뒤죽박죽 될 것입니다.
3. 발전과 후퇴
빵점이 60점을 맞으면 엄청 난 것이고, 100점 맞던 학생이 61점을 맞으면 재앙입니다. 현재 바로 앉혀 놓고 비교하면 어릴 때 목회를 나와서 평생 목사 한 사람이나 평생을 세상에 허우적거리며 즐기다가 이제 나온 분들이나 이 노선 강단에 설교를 시키면 하나는 60점이고 하나는 61점이지 답변자 평가에 62점 이상 나올 정도거나 59점 밑으로 나올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60점과 61점을 놓고 61점이 낫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지난 날의 추세를 보아 앞을 예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세상이 좋고 복음의 사명이 귀찮아서 평생을 세상에 숨어 즐기며 살던 사람은 이 노선 사명자의 자세로는 0점입니다. 사회 생활을 거치지 않고 바로 뛰어 던 답변자와 같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61점입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보니 그들은 60점이 되었고 답변자 같은 목회자들은 그들보다 확실히 낫다 할지라도 61점입니다. 발전의 추세, 답보의 추세, 백태영 목사님처럼 1960년대에 벌써 99점은 된다고 본 지도자가 59점 이하로 떨어 져 버린 현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평가를 할 때 어느 한 자리에서 무조건 단면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글을 적지 못했을 듯합니다. 백 목사님은 1989년 3월 18일에 부임한 현재 교회로 가라 하실 때 학자가 목회를 하여 교회와 교인을 현장에서 알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다 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런 글을 적을 수 있는 답변자가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논문이 아니라 내키는 대로 안내를 하는 상담자처럼 활동하지만 답변자는 백 목사님의 지도 때문에 논문으로 적는다면 살아서 펄펄 뛸 수 있는 생명을 가진 논문의 내용을 무한하다 할 만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실제 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세상에서 즐기다가 목회를 나오는 이들이 있으면 답변자는 테러를 할 만큼 증오하였을 것이고 답변자의 행동이 옳다고 확신할 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론은 맞습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자라 가는 '발전'이냐 그 반대냐는 것도 보고, 또 임시로 봐 주며 일단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붙들고 더 나은 뒤를 도모해야 한다고 합니다. 공회 교리로 이 부분을 '소망'이라 하며 이 소망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위에 있는 최종 단계입니다.
답변자와 우리 공회의 비참한 현실을 자탄하며
>> ㅁ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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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심이 남아 있다면 목회 접어야지요
: 목회가 단물빠진 껌보다 못하다면 말입니다
: 십자기 밑에서 살려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젊은 목회자가 얼마나 많은줄 아십니까?
: 공회는 세상에서 좋은 위치에서 대우 받다가 정년때에 정해진 교회 받아 조사님 소리 들어가며 교회에서 주는돈 받아가며 양성원 하는게 얼마나 편하게 신학 하는지 몰를것입니다
: 이퍼릇 처럼 목회하겠다고 해서 언제 할런지 기다렸드니 정년퇴직 앞두고 목회나선다고 해서 처음 거론 하신분의 입장과 동감이었습니다
: 앏팍한 인간의 수인지 하나님의 예정인지 모르겠으나 성도로서 동녁자로서 은혜되지 않은것은 사실입니다
: 젊어서 힘다하라는 말씀이 나름의 각자가 자기 처소에서 맏은바 충성하라라는 말씀인줄 아나 육체의 한계가 분명 있음으로 묘비에 목사라는 이름 석자라면 일찍이 십자가 올릴 생각 접어야 할줄압니다
: 공회도 은퇴목사님들이 늘고 있는 마당에 은퇴할 나이에 목회 나섰다는 소리는 별로 은혜롭지 못함이 사실이며 적어도50세 이전에 나섰다면 더욱이 경제에서 가장 왕성할때 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공회내 여기에 해당 하는 몇분을 관찰하고 있는 입장에서 분명 목회도 성공적으로 하고 계심을 보고 있습니다
: 세상에서 오갈대 없어 경제적으로 떠밀려 나오신분도 관찰중에 있으나 그분들 역시 세상에서나 목회에서나 그냥 저냥 별 은혜 안됨을 보게 되드군요
: 주여 죄짓지 않도록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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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성생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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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냥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면 좋겠으나 이름까지 말을 한다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들에게도 가정이 있고 자존심도 있을 터인데요. 'ㅁ' '공회인1'님과 생각은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공회는 대부분 그런 분들이 목회를 하고 있지 않나요? 세상에서 살다가 길이 없으면 갑자기 목회를 한다고 쫓아나옵니다. 교회가 먹여주고 살려줍니다. 공회가 뒷감당을 해줍니다. 오갈데 없으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됩니다. 길이 있으면 끝까지 그 길에서 단물을 빨고 있습니다. 길이 없어야 나옵니다. 서목사님처럼 앞날이 창창할 때 나오는 분들도 계시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공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이런 분들이 시류 따라 눈치보며 여기 섰다가 저기 섰다가 하는 바람에 공회가 아까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타교단은 미국에 갔다가 미국에 가서 설자리가 없게 되자 한국에 나와서는 미국선교사라며 활동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번 84년8월집회 처음부터 그런 소개가 있었습니다. 이장수라는 분만 실명으로 들었는데 한국에서 유명했다가 미국가서 그렇게 된 분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공회에는 없을까요? 시카고에서 얼마나 목회를 잘했을까요? 한국에 나와 있는 공회 목사님들도 미국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물어봐야 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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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 목사직은 세상을 붙들다가 세상에 소망도 희망도 가능성도 없을 때 노후를 위해 갈아타는 수단입니다. 공공기관에 계시던 분들은 연기금이 탄탄합니다. 목사나올 때 이런 연금을 마련해 놓고 나오는 분들은 배수진의 원리를 모릅니다. 이분들에게 그 연금을 연보로 조건없이 희사하라고 해야 합니다. 목회할 분이 세상에서 벌어놓은 자기 보물을 바쳐놓고 나서 교인들에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고 해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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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ㅁ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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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금 그런분들이 몇분 계신데 세상에서 돈벌이 실컷 다하고 퇴직싯점에서 주에일한다고 나온 김동? 조사님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 : : 목회는 본인이 가장 돈벌이 잘할때 나와야 한다고 보는대 공회는 그런 목사님을 별로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 : : 나이들어 더이상 활동 하기 힘들어지니 목사로 나선다는것은 얼마를 더살지 모르나 너무 앏팍한 눈속임이라 봅니다
: : : >> 공회인1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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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청년 때부터 목회를 나오실 줄로 생각했는데 평생 교사 생활을 하시고 이제 보니 목사님이 되셨다고 소식게시판에 직함이 소개되었습니다. 젊음과 자기 정력을 전부 세상에 쏟아붓고 이제 세상에서는 더이상 필요가 없게되어 옷을 벗게되는 시간에 여생을 총공회 목사로 활동한다면 공회목사는 여가선용이나 노인당 여가거리로 전락할 대상이 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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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목사를 안수하거나 목회자로 출발할 때 일정한 제한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NTM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되면 선교지로 보내지 않는다 합니다. 마땅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세상 경제파탄자가 복음을 들고 간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듯합니다. 선교후원을 한다해도 믿지 못할 일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집사도 자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자기 처자식을 순종케 해야 합니다. 남을 순종시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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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세상에 다 갖다내버리고 나머지기 찌끄러기를 공회에 목회자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저는 반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