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РчЕЖ ЙцЙ§ПЁ ДыЧб ЙнЗаРЛ ЕЮАэ ** ПЯЗс
| 설명 |
|---|
yilee
0
4
2010.05.09 00:00
서론
- 과정
2010년 5월의 부공3 집회에서 사회자는 11 회 집회 예배시간 중 월후, 월밤, 화새를 꼭 같은 설교로 재독을 진행했고, 수밤과 목새를 같은 설교로 재독을 진행했습니다. 일반 집회의 총 11 회 설교 중에서 2 개만으로 2-3회를 반복하여 총 5 회의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여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전체 의견과 11 개 설교를 다 들을 수 없어 반대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 양론
어린 교인들을 포함하여 거의 대부분 교인들은 평소 한 번씩만 듣고 지날 갈 때에 놓치기 쉽고 새기지 못했던 부분을 잘 파악하게 되었고 설교를 깊이 있게 듣게 되어 은혜스러웠다는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한 분은 11 회 집회 설교는 11 회를 재독하되 그 순서까지 그대로 다 들어야 한다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한 설교를 반복한 이유는 은혜라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받는 것이니 제대로 듣고 깨닫도록 한다는 입장이며,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분은 은혜란 성령이 주는 것이니 사회자가 어떤 설교에 은혜를 받게 하려고 반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은 원래 공회가 하지 않던 일로서 그런 조처는 사회자의 주관일 뿐이라는 입장입니다.
- 심의
공회는 무엇이든 말씀을 가지고 살펴서 옳은 것을 찾는 노선이며, 이 문제를 두고 사회자와 반론자 사이에 충분한 대화가 있었으나 의견 일치가 어려워 공회 전체 교인들을 상대로 더 옳은 것을 찾기 위해 반론자께 미리 말씀을 드린 후 ‘발언, 1668번-10.5.7.’에 반론자께서 제출하신 ‘제안서’를 공론화했습니다. 이미 이 홈의 ‘발언’ 게시판에서 찬반 의견이 제시 되고 있습니다. 일단 반론자께서 충분하게 의견을 주셨다고 생각이 되어 이제 몇 가지 설명을 드립니다.
본론
1. 문제의 성질
이 문제는 집회 재독의 방법론이자 실은 백 목사님 사후의 공회의 진로를 두고 거의 모든 면에서 나타 나는 흐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989년 백 목사님 사후 총공회에는 3 가지 큰 흐름이 있었습니다.
1안은 공회 노선을 고려하지 않고 가겠다는 서울공회 식의 노선 변경 흐름이었고
2안은 공회 노선과 일반 노선을 혼합한 대구공회나 부공2의 절충 식 흐름이었고
3안은 공회 노선이 옳기 때문에 그대로 지킨다는 부공1과 부공3의 흐름이 있었으니
이 번 문제는 제 3안의 흐름 내에서 공회 노선을 그대로 지키는 방법론을 두고 늘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그런 유형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20여 년의 논란에서 항상 나타 나는 현상은 한 쪽은 과거 모습을 외형까지 그대로 지키자는 것이고, 한 쪽은 외부 모습을 지키려다 노선의 내용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경우는 외부 모습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독 문제도 크게 본다면 그 논쟁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양론은 공통적으로, 이 노선은 이미 외부 어떤 노선과 비교해도 탁월하게 옳고 바르다는 결론은 확정을 지웠으나 어떻게 하는 것이 원래 노선을 잘 지켜 이 노선이 발전 되겠는가 라는 문제를 두고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보통 이런 논쟁이 일어 나면 무조건 덮어 두어 조용해야 좋다는 인식도 있으나 이 문제를 두고도 공회 노선은 덮을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내 놓고 토론하여 옳은 것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는 입장인데 재독의 방법론은 전형적으로 함께 살펴야 할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2. 한 설교의 반복이 필요한 이유
한 설교를 반복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이 노선 내에서는 교훈 문제를 두고 너무 확고하고 상식화가 되어 있고 이 면은 반론자께서도 ‘제안서’에서 인정을 하고 있으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나 최근에 신앙을 출발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을 한다면
- 지식의 중요성
이 노선은 하나님께서 성경과 양심과 자연이라는 3 가지를 통해 우리에게 알리시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으니 이를 배워 알아야 바로 살아 갈 수가 있다는 입장이 확고합니다. 그래서 이 노선은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신학 차원에서나 필요하다 할 만한 성경 연구나 교리를 일반 주일학생들에게도 그대로 가르치는 정도이며 교회와 개인의 노력 절반이 바로 깨닫는 데 있을 정도입니다.
- 행함의 중요성
배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지식은 자기를 정죄하는 율법이 되며 배운 대로 살면 자기 신앙의 건설이 된다는 것이 공회의 교훈 노선입니다. 이 면이 철저하기 때문에 여러 설교나 지식을 구경 삼아 듣고 지나 가는 것은 극히 삼가고 그 대신 배운 대로 살아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며 혹시 실수나 실패를 하게 되면 다음 현실에서 다시 실행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이 노력이 공회 노선의 나머지 절반 노력이라 할 정도입니다.
- 배우는 방법
이런 입장이 확고하므로 공회는 평소 각자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어디와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강하게 강조하지만 실제 강단에서 설교를 할 때는 성구 하나를 가지고 보통 한 주간 10여 회 설교를 이어 가는 정도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는 많이 알아야 하지만 그 속의 이치는 하나를 바로 깨달으면 진리는 하나이므로 모든 성경을 다 깨달을 수 있으나 한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 겉돌고 만다는 입장이 확고합니다. 이런 입장 때문에 공회의 교훈 노선은 지식을 접한 분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게 바로 깨달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느냐는 것이 늘 주력점입니다.
이치를 주로 다루는 수학으로 말하면 가르친 강사나 강의나 책을 얼마나 많이 접했느냐는 것보다 하나라도 바로 배워 실제 문제를 풀 때에 써 먹게 되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3. 집회 재독의 방법론
1) 재독은 11 회 순서도 다 지켜야 하는가?
▷ 반론 : 원래 순서까지 고수하라는 주장
백 목사님 집회는 11 회의 개별 설교가 설교 별로 따로 주는 은혜도 있으나 집회의 11 회 설교를 한 단위로 하여 전체를 통해 받아야 하는 은혜도 있으므로, 모든 집회의 재독은 그 집회의 11 회 순서를 원래 그대로 이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해명 : 한 설교를 반복하게 된 입장
- 11 회 설교와 백 목사님의 설교 단위
백 목사님 설교는 설교 하나의 내부를 살펴 보면 전체가 중단 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에 모두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는 평소에 한 주간 정도로 또는 집회 때는 11 회 설교로 확대 되면 큰 틀에서 하나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각 설교들은 내부적으로 그물망처럼 엮여 있습니다. 11 회를 그대로 재독해야 한다는 분의 실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 목사님의 설교는 그 집회 11 회를 단위로 끊어 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시작으로 부자청년과 옥토밭의 본문을 이어 가며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 번 84년 5월집회는 그 집회 11 회 설교는 작은 범위의 묶음일 뿐이고, 그 집회 설교 전체는 그 집회 이전 최소한 1983년으로부터 1985년까지를 최소 단위로 잡아야 하는 전체 묶음의 소단위일 뿐입니다. 불필요한 논쟁을 지양하면서도 공회인들께 노선 파악에 시야를 넓혀 드리기 위해 직접 설명하지 않고 먼저 개인적으로 파악해 보시기를 구하고 싶습니다.
집회 기간 중의 11 회 설교는 그 11 회가 하나의 단위인가? 집회만 참석하는 분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겠으나 백 목사님의 5천 개 전체 설교를 잘 살피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곳에서 제공하는 설교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그만 설교들 사이에 흐르는 전체 파악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셔서 안타깝습니다. 그 설교 분량이 너무 많아서 참고하고 싶은 내용 전체를 일괄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면도 있으나, 한 편으로 설교의 숲에 파 묻혀 전체를 보지 못하는 면도 있는데 집회 11 회가 설교 단위라고 생각하신 분의 경우에서도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 목사님 생전에 서부교인으로서 목사님의 설교를 개별 설교는 물론 주간 설교와 월별 설교와 연간 설교까지 그 흐름을 큰 범위에서 파악한 분이 계신다면 백 목사님의 설교를 단위로 묶는 문제를 두고는 이 설명을 쉽게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교인들도 설교록이 출간 되고 있었으므로 모른다 할 수가 없는데 만일 집회 말씀만 별도의 단위로 대한 분들이라면 이 번 반론자께서 지적하신 범위에 그칠 것 같습니다.
부공1에서는 89년 5월이나 8월 집회 설교를 계속해서 10 년 또는 20 년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집회를 집회단위 설교로만 분리하려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그러나 1989년의 집회 말씀들이 1987년 청량리교회 사모님이 집회 기간 중에 백 목사님께 직접 그 설교의 문제를 지적했던 사건을 아는 분들이라면 백 목사님의 설교 세계는 집회 11 회만 가지고 하나의 단위로 묶을 수도 있으나 그렇게 좁은 기간의 특수 내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왜 그 분 설교는 한 설교를 넘어 서는 전체 단위의 흐름을 봐야 하는가? 이 정도는 일반 상식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문제여서 여기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개별을 모르면 나무의 잔뿌리가 없어 영양 부족으로 말라 죽게 되고, 전체를 엮지 못하면 나무의 기둥 뿌리가 약한 상태이므로 변혁기가 닥치면 통째로 뽑혀 끝장이 납니다. 백 목사님 사후 20 년의 공회 혼동 역사는 우리 공회인들이 바로 이 두 번째를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습니다. 모르면 우연히 옳은 노선에 소속을 둘 수 있으나 그 노선에서 벗어 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바로 이런 면이 있어 이 홈에서는 '총공회 소개'라는 책자를 정리하면서 백 목사님의 설교를 개별 설교마다 별도로 심층 분석하는 동시에 연간 단위로까지 설교 단위 별 흐름을 소개하고 심지어 백 목사님의 평생 교훈까지 다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설교의 단위를 좁은 범위에서만 국한하지 않도록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바로 이 번 토론 건에 관련 되어 있습니다.
소결을 내자면, 백 목사님의 설교를 11 회로 국한을 시켜야 한다고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려면 그 집회에서 그 말씀이 나오게 된 앞 뒤로 그 분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집회 설교는 그 설교만으로 별도 단위를 묶은 다음에 그 11 회만의 철저한 재독에서 그치고 말 내용이 아닙니다. 그 집회 앞 뒤로 이어 지는 최소 몇 달 때로는 몇 년의 설교 단위를 다 이어서 들어야만 집회 설교가 비로소 집회설교답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만일 반론자 주장을 엄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면 집회의 재독을 위해서는 그 집회 앞의 관련 설교들을 각 교회에서 미리 재독하고 왔어야 하는 문제까지 생깁니다.
이런 논란은 이미 1990년 5월 집회를 앞두고 부산공회 내부의 핵심에서는 제안과 반론과 지적과 재반론이 이어 지면서 검토가 되었던 바입니다. 그리고 반론자의 주장은 당시의 부산공회 지도부의 주장이었고 지금은 부공1의 논리가 되었는데 문제는 부공1 스스로 당시 주장을 다 철회하여 지금은 그 집회가 당시 기준에서 본다면 완전 변질 된 파행 집회가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부공3 집회는 당시와 지금이 여전한 상황입니다. 한 논점을 두고 그 논점에 관련 된 자세하고 치밀한 면도 봐야 하나 동시에 큰 시야로 전체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를 두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2) 순서를 바꾸어 은혜를 구할 수 있는가?
▷ 반론 : 11 회의 원래 집회 설교 순서가 그대로 지켜 질 때 성령은 듣는 이들에게 각자 은혜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자가 이 순서를 변경하여 전체 11 회 설교 중에서 어느 한 설교를 강조하거나 어느 한 교훈의 흐름을 위해 다른 부분을 재독하지 않게 된다면 이는 말씀을 들을 때 받는 은혜를 성령에 의탁하지 않고 재독을 인도하는 사람이 자기 주관으로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므로 이 것은 은혜가 아니라 사회자의 주관일 뿐이라는 입장입니다.
◁ 해명 : 11 회를 그대로 진행하지 않으면 사회자의 개인 주관일 뿐이라는 반론의 주장을 조금 넓혀 보면, 현재 공회가 보관 중인 집회 설교 자료는 10 년 치의 20 개 집회 설교 자료들이 있는데 이 것도 순서대로 진행해야 하는가? 집회 자료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존재합니다. 백 목사님의 집회 내용에는 1975년처럼 적화통일을 앞 두고 회개의 말씀을 증거한 집회도 있고, 신유 은사로 한국교계는 물론 공회까지 영향을 받게 될 때 이를 막기 위해 증거한 집회도 있고, 사랑의 구별이 잘못 되어 이를 외친 집회도 있으며, 백 목사님 사후의 공회에게 노선을 가르치려고 교회론을 가르친 집회도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은 설교를 할 때 사람을 기르기 위해 설교를 했으므로 ‘목회’ 설교록이라는 이름을 그토록 강조했습니다. 사람을 기르는 말씀이 아닌 설교는 극단적으로 배척했고 반대했습니다. 그 분의 평생 집회는 그 집회를 준비하는 기간과 참석 교인들을 눈에 두고 어떤 말씀이 필요할지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백 목사님 설교는 시사성이 없는 경우가 없었으니 우리는 이 면을 그 말씀을 증거하게 된 현실 배경이라고 말합니다.
반론자의 주장대로 사회자는 무조건 11 회 설교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부공3 집회가 말씀으로 자기를 고치는 집회가 아니라 목회자나 신학생이 현실의 필요성을 배제하고 그냥 신학 과정으로 한 번 정도 배워 두어야 하는 평소 상식 차원의 설교학 공부였거나 성경공부였다면 맞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공3의 집회가, 모이는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2010년 5월의 집회 기간을 전제로 어떤 말씀이 가장 시급하겠는가? 어떤 말씀을 한 번 더 기억해야 할 것이며 어떤 진리를 붙들고 실행에 노력해야 할 것인가? 이 면을 두고 집회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구한 것이었으면, 부공3은 과거 10 년치 설교 중에서 언제 설교라도 그 목적에 가장 은혜롭다고 생각하는 집회 자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 대상은 5월 집회 자료일 수도 있고 8월 집회 자료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두 집회에 분산이 되어 있다면 그 내용을 기준으로 두 집회 자료를 모아서 한 집회 분량으로 재독할 수도 있는 것이고, 심지어 집회 자료에는 그런 내용이 없고 그 대신 평소 서부교회에서 설교한 자료 중에서 적당한 자료가 있다면 그 자료들을 집회 재독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집회 기간의 재독은 집회 자료 중에서 찾는 것이 좀 쉬웠고 적절한 면이 있었으며, 또한 5월과 8월도 굳이 교차할 정도의 필요가 강하게 느껴 진 적이 없었고, 지난 20여 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에 하나는 1970-1989년의 공회 집회 자료는 이후 세대를 살아 가야 할 우리들이 한 두 번쯤은 꼭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시대적 필요를 생각했으므로 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순서가 지켜 졌던 것입니다. 10 년치 집회 설교 전체 내용을 전반적으로 한 번 독파하는 것, 그 자체가 백 목사님 사후 세대를 살아 가는 공회인들에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부공3 사회자와 교역자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오면서 이제는 지난 10 년치 집회 설교뿐 아니라 5천 개 전체 설교 중에서라도 급변하는 오늘 이 현실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들을 어떤 식으로 찾아 내어 집회 기간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이 성령의 인도인지를 심각하게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20여 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과연 우리가 부공1처럼 스스로 미래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일시 충동과 과잉 충성적 발상으로 예수님 재림 때까지 우리는 1989년 설교만 재독한다는 식으로 밀어 붙일 일인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공3은 노선 분립 이전부터 미리 이런 점에서는 명쾌하게 그 나갈 앞 날을 확정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문제를 두고 처음부터 혼선이 별로 없었습니다.
집회의 재독 선택 문제는 원래 그 집회의 설교가 증거 될 때의 현실은 당시의 현실이며, 그 때 그 현실에서 그 말씀이 증거 되었다는 것을 아는 오늘 우리로서는 우리에게 닥쳐 진 우리 현실에서 과거 현실의 그 말씀이 어떤 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지를 살펴 채택하고 우리의 설교로 활용하게 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오늘 활용 되는 재독 설교는 연혁적으로는 과거 그 분의 당시 설교였으나 활용되는 순간 그 설교는 오늘 현실에서 오늘 우리의 설교가 되는 것이니 그 결정은 오늘 우리가 하는 것이고, 그 결정은 무조건 과거의 상황을 전부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현실은 과거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재독은 과거를 참고하여 오늘 우리 말씀으로 사용하되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 마치 자기 스스로의 설교를 할 때의 책임으로 살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그 자체가 기독교의 목회자라면 기본적으로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찾아서 해야 하며 이 것을 떠난다면 어느 교파의 강단이라도 정상적인 강단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4. 재독 설교와 관련한 근본 문제
- 어떤 종류의 설교도 설교자의 설교
이 모든 설명에 앞 서 사실 이 재독 설교의 본질은 바로 직전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재독 설교라는 그 표현 자체는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여서 그 외형 모습을 가지고 그렇게 표현했으나, 실은 재독 설교도 설교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설교입니다. 그렇다면 재독 설교는 과거 설교한 설교자의 설교인가? 절대로 그리 되어서는 안 되며 그렇지도 않습니다. 재독 설교는 과거 설교를 한다고 결정하는 순간, 바로 그 결정한 사람의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재독 설교를 예배 시간에 제공해 놓고 그 내용에 틀린 것이 있을 때 그 재독 설교를 채택한 사람이 ‘백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지 나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면 양심조차 없는 일입니다. 재독 설교든 자기 설교든 강단에 선 사람의 자기 설교입니다. 어느 주석을 참고했던, 어느 신학교에서 어느 강의에서 배운 것이든, 어느 목회자의 주석을 그대로 읽었던, 몇 가지 신학서와 주석들을 종합했고 그 사이에 자기 생각을 몇 줄을 더했든 상관이 없습니다. 강단 진행을 맡은 사람은 그 강단에서 증거 되는 모든 말씀 전부가 자신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부공3의 재독 집회 설교는 사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그 마음에 성령이 감동 시켜 주시기를, 부공3으로서는 아직까지는 그 집회에서 전할 말씀이 지난 역사에서 가장 훌륭하면서도 바로 우리 시대를 내다 보며 외친 백영희 설교집에서 오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성령의 감화에 붙들렸기 때문에 재독이라는 방법을 결정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 자료를 책으로 읽는 방법과 음성으로 들리게 하는 방법과 동영상으로 제공하는 방법과 그 중의 일부만 따로 떼어 제공하거나 그 설교들 중에서 어느 한 교훈 흐름을 따로 떼거나 아니면 어느 한 부분을 반복해서 제공하는 모든 방법론은 강단을 맡은 설교자의 설교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만일 집회 기간에 설교 재독의 방법론을 두고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질문을 한다면 이해를 할 수 있으나 왜 그런 설교를 하느냐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은 주관이며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 받게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회의 성령론과 설교론을 전혀 몰라서 크게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 표현이 가능하려면 각 교회 교인들은 자기 교회 설교자에게 그런 표현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3 회 시험할 때 구약 성경을 그대로 인용했는데 그렇게 인용하는 순간 그 마귀의 입에서 나온 그 성구는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는데 이용이 된 마귀의 말 중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유혹하는 그런 마귀 말까지 성경에는 다 기록 되어 있는데 그 마귀 말을 성경에 기록하는 순간 그 마귀 말은 성경에서 필요하여 인용하는 바 그 인용의 목적과 사용으로 인해 이후부터 그 마귀 말은 성경에 기록 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귀가 이런 유혹까지 하는 줄 알고 조심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설교와 교인의 기본 자세
자기 교회에 설교자를 결정하는 것은 교인이 결정합니다. 대신 설교자가 결정이 되고 나면 어느 예배 시간에 어느 설교를 할지를 두고는 목회자가 결정합니다. 앞의 경우를 이 번 집회 때 배운 바 기본교권이라 하고 뒤의 경우를 은사교권이라고 합니다.
교인은 목회자가 어떤 분이며 어느 정도의 신앙이며 어떤 말씀을 어떻게 전하는지를 봐서 설교자로 모시는 결정권을 마음대로 행사합니다. 이 행사를 두고 목회자는 죄 되지 않는 결정이라면 그 교회의 교인들이 결정한 것이므로 존중할 수 있어야 ‘교회자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대신 목회자로 결정 된 사람이 설교를 포함하여 목회를 할 때 교인들은 죄 되지 않는다면 순종하기로 약속하고 모셨습니다. 이런 것은 공회가 비록 생략은 하고 있으나 목회자의 서약에 포함 된 내용과 같은 내용이 교회의 입교 문답에 있습니다. 즉, 죄 되지 않으면 순종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부공3의 집회는 1990년부터 부공1 지도부와 아주 민감하면서도 중대한 논쟁을 거쳐 부공1과는 다른 부공3의 집회 노선을 결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중에 부공3 집회에 참석한 분들은 부공3의 집회 운영을 지켜 보다가 은혜롭지 못하거나 의문이 있거나 각종 제안이 있을 경우에는 ‘틀렸다’ 하고 나서기에 앞 서 먼저 연유 등을 면밀하게 확인하는 순서가 필요합니다. 왜 부공3은 그렇게 결정을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와 다르다 해서 불쑥 틀렸다고 단정부터 하고 시작할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부공3은 그 어떤 의견이든지 최대한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단에서 목회자가 먼저 교인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노력을 하려 해도 교인들의 의견조차 다르면 그 때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성령이 기뻐하시는가? 오래 믿은 분들이 내 말을 들어야 성령이 기뻐 한다고 먼저 외치고 나온다면 목회자가 그 말을 듣고 무조건 순종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서로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부공3은 바로 이런 면에서 교역자들이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교역자들의 결정을 무조건 성령의 감화가 맞다고 말하지 않고 목회자들의 제안이나 생각이라고 겸손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교인이 들었다면 그 교인 역시 나는 달리 생각을 해 봤다 하고 대화를 이어 나가야지 목회자 당신은 당신 생각이라고 했는데 나는 성령의 지시로 말한다는 식으로 표현을 해 버리면 이는 교인으로서는 넘어 가서 안 될 선을 넘나 드는 일입니다.
- 부공3의 역사
이 번 제안자께서 평소 종종 발언하시는 바와 같이 ‘내가 이런 형편을 겪었기 때문에 멸시 천대로 시작하는 백 목사님의 찬송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그러 하므로 그 찬송을 계속 반복하고 자주 부르는 이재순 목사님을 좋아한다는 말과, 그러 하므로 부공3도 그 찬송을 자주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발전하면 이런 주장도 설교를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과 같아 집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설교의 일반론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목회자의 특정 설교를 두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발언은 그를 아이처럼 기르는 사제 정도나 부자지간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면 극히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틀린 것은 설교 도중에라도 일어 서서 목회자에게 지적이나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럴 정도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에 해당 되는 내용이라면 일단 교인은 들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영안이 흐려 진 문제를 두고는 얼마든지 예배 시간 후에 따져 볼 기회가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이재순 목사님은 공회를 모릅니다. 이 노선을 모릅니다. 백 목사님 그대로 하는것이 없습니다. 이유는? 공회와 백 목사님과 이 노선과 이 교훈을 알지 못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기업가로서 한국의 기업 환경에 능하고 사회 처신에 달인이며 인품과 도덕과 포용과 상식에 특별한 전문가지만 이 노선 이 공회 이 복음의 내용을 아는 분은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중심이 좋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부공3은 그런 저런 사정을 다 거치며 형성 되어 왔습니다. 사람이 앞 서 이런 것을 만들겠다고 해서 창출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배운 이 노선을 제대로 지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환경에 밀려서 오늘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봤고 순종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부공3 내의 발언 중에서 노선에 관련 된 문제나 극단적으로 단정할 정도의 반론이 있을 때는 제기하는 분이 먼저 결론을 내고 이렇다 저렇다 라고 발언을 하시게 되면 다른 공회와 달리 그 발언자는 훗날 차분하게 살필 때 대량의 잘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